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99
#998화
진위경도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암천과의 대규모 일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곤륜파가 위치한 청해(靑海)였다.
적들이 중원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너트려야 할 교두보이자, 정파 무림으로서는 목숨 걸고 지켜 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나는 어떤 방식으로 청해성까지 가느냐는 혁무진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뛰어야지. 존나게.”
“그건 당연히 알죠. 그런데 제가 여쭙고 싶은 건…….”
“존나게 뛰는 건 좋은데 언제까지 뛰냐, 그거겠지.”
“크으, 역시 조장님. 정확하십니다.”
“계속.”
“……예?”
“계속이라고. 쭉.”
“잠깐, 이대로 쭉 청해성까지요?”
나는 힘차게 내달리는 말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며 되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로서는 수로(水路)를 이용하는 게 나아 보이는데요. 우선은 조장님 말씀대로 육로로 이동하되, 섬서에서 장강의 지류를 타고 청해성까지 직행하는 겁니다. 그편이 반나절 정도는 더 빠르고 힘도 훨씬 덜 들걸요?”
언뜻 듣기에는 제법 타당한 의견이었다.
비록 반나절에 불과하지만 시간도 단축되는 데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체력까지 비축할 수 있으니까.
심지어 역사와 전통이 있는 장강의 전국구 깡패, 장강수로맹조차 무림맹의 일원이니 운이 좋다면 쾌조선을 강탈…… 아니 빌려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대국의 군선(軍船)이라도.
그러나 나는 단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육로가 더 나아.”
“왜요, 혹시 배 멀미 있으세요?”
“…….”
“있어도 좀 참고 가시죠. 제가 등 두드려 드릴게요.”
이 새끼는 초절정 고수가 죠스로 보이나.
심지어 나는 이제 막 초입에 접어든 초절정 고수도 아니다.
이제는 등봉조극의 경지에 환골탈태까지 완성한, 그야말로 초인 중의 초인.
배가 아니라 월미도 디스코 팡팡을 타고 이동해도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느낄 마당에 배멀미라니.
순간 할 말을 잃은 내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혁무진을 바라보던 그때, 녀석의 뒤통수를 향해 한 줄기 맹렬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쐐액, 빡!
“억!”
듣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지는 타격음.
숙련된 솜씨로 혁무진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적천강이 작게 혀를 찼다.
그는 말안장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좌우에 끝없이 늘어선 나뭇가지를 밟으며 이동하던 중이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 무슨 말이 그리도 많으냐. 상관이 까라면 깔 것이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면 눈에 쌍심지를 켰겠지만, 그 누군가가 바로 화왕 적천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마 뭐라 말도 못 하고, 아픈 뒤통수만 만지작거리던 혁무진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저는 그냥 더 좋은 의견을 제시한 것뿐인데 왜 이러시는지.”
“더 좋은 의견?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아닙……니까?”
“제법 그럴듯한 의견이었던 건 인정해 주마. 하지만 네놈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혁무진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적천강의 나직한 목소리가 바람 사이로 울려 퍼졌다.
“암천. 그 간악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진정 청해성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
“아직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막 너머로 진군하고 있다는 암천의 대군이 어디로 향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중원으로 향하는 길은 비단 청해성뿐이 아니니까.”
정확히 지금의 상황을 꿰뚫고 있는 적천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맞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셋, 혹은 그 이상이다.
당장 청해와 감숙, 마지막으로 변방을 넘어 새외(塞外)로 분류되는 서장까지.
청해성은 전략적 요충지이기에 주 표적이 될 확률이 높은 것일 뿐, 침공 가능성은 감숙과 서장 역시 충분하다.
더군다나…….
‘놈들에게는 워프 게이트, 아니 이동진(移動陳)이 있지.’
그리고 이동진의 존재는 적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쥐여 주는 동시에, 아군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치명적인 비수다.
당장 확인된 바로만 일천에 달하는 머릿수를 이동진으로 중원 어딘가로 보내 버릴 수 있으니 오죽하겠나.
물론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관진식에 한해서만큼은 천하제일로 불리는 제갈세가에는 마봉진(魔封陳)이라는 진법이 존재했고, 마봉진은 그 명칭에 담긴 뜻 그대로 마력을 억제하고 봉인하는 효력을 지녔으니까.
동정호에서 ‘균열’이 발생했을 당시, 더 큰 피해 없이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이유도 가주인 제갈풍을 필두로 한 제갈세가의 식솔들이 마봉진으로 균열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균열을 막을 정도라면 이동진의 무력화도 충분히 가능할 테고, 직접 봤던 만큼 마봉진의 효력은 확실해. 문제는 시간과 인력이지.’
천하는 실로 광활하다.
그리고 암천이 천하라는 드넓은 모래사장 어딘가에 몇 개나 되는 이동진을 만들어 두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동진의 해결법을 찾은 지 반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산서성 인근의 여러 문파가 잠시나마 지원군을 보내는 것을 망설였던 것이 바로 그 반증이다.
만약 단 한 개의 이동진만 남아 있더라도, 그것은 곧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안심한 채 모래사장을 걷던 누군가의 발바닥을 깊숙이 파고들 테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육로로 이동해야 해.’
오랜 세월 동안 외침(外侵)이 있었을 때마다 격전지가 되었던 청해성인 만큼, 무림맹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을 마련해두었을 터.
고작 반나절, 혹은 하루의 시간 차이로 무너질 만큼 그 방비는 허술하지 않을 것이다.
‘서장도 충분히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돼. 만약 서장의 포달랍궁이 암천과 손을 잡았다 하더라도, 사천에 머무르고 있는 전력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서천마군이 직접 노렸던 사천당문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청성과 아미는 아직 건재한 상황.
그리고 거기에 더해, 현재 사천에는 생각지도 못한 손님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남만야수궁(南蠻野獸宮).’
비록 갈 길이 멀어 바삐 떠났지만, 그들에 대한 소식은 틈틈이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유례없는 대이주를 감행한 열대의 전사들이 마침내 밀림을 떠났고, 무림맹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사천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이미 서쪽 전선(前線)은 어느 정도의 대비책을 세워 놨을 거야. 단 한 곳만 빼고.”
비단 혁무진 한 사람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상념을 끝마치고 불현듯 입을 연 나는, 나란히 말을 몰아 내달리는 화룡각 대원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바라보다 나직이 덧붙였다.
“감숙(甘肅).”
“……!”
“……!”
“만약 암천이 모두의 예상을 비틀어 감숙을 노린다면, 그곳이야말로 이번 전쟁의 최대 격전지다.”
그리고 이는 결코 과장된 생각이 아니다.
암천은 늘 허를 찌르는 행보를 보여 왔다.
비록 나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피똥을 지려 가며 노력한 덕분에 놈들이 벌인 흉계는 번번이 가로막혔지만, 그렇다고 무림맹이 이 전쟁에서 승기(勝氣)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암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지.’
처음부터 외양간을 노리는 방화범을 잡았다면 아군의 승리다.
하지만 외양간은 매번 불에 탔고, 수많은 이들이 가축처럼 도살당해야 했다.
가는 곳마다 활활 타오르는 외양간에 물을 뿌렸던 나로서는, 이 모든 것이 전부 지긋지긋하면서도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막아야 한다. 반드시.’
다시 한번 불이 붙기 전에, 또 다른 큰 희생이 있기 전에.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듯이, 감숙의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청해로 건너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굳이 조금 더 빠르고 편한 수로를 버리고 육로를 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이 선택이, 저 녀석에게도 훨씬 위안이 될 테고.’
나는 힐끗 고개를 돌려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태원진가를 나선 지 한나절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 한마디 없이 묵묵하게 말고삐만 쥐고 있는 그, 사마표를.
물론 평소에도 과묵한 편인 녀석이지만, 근래 들어서는 그 정도가 조금씩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당장 암천의 대군이 신강의 사막을 가로지른다면, 가문이 위태로워질 상황이니까.’
구파일방의 일익인 공동파와 함께 감숙성을 양분하는 또 하나의 패자, 흑룡마문(黑龍魔門).
바로 그 흑룡마문의 소문주인 사마표로서는 당연히 심경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와 적천강이 한 말을 듣고 난 직후인 만큼 더더욱.
그러나 구태여 위로하지는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위로도 사치다. 눈을 마주치자 말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사마표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말고삐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럇!”
두두두두!
지구력 하나만큼은 한혈마조차 따라갈 수 없다는 초원마(草原馬)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내달렸다.
밤낮이 또 한 번 교차하고, 달과 해가 서로를 스쳐 지날 때까지.
그렇게 사흘이라는 시간이 바람처럼 흘렀을 때, 산서성을 벗어난 우리는 섬서와 감숙의 경계선에 다다를 수 있었다.
* * *
“그만. 현 위치에서 반 시진 휴식한다.”
환갑쯤 되었을까.
불쑥 입을 열어 모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호리호리한 키에 가늘게 찢어진 눈매가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물론 노인의 뒤를 따라가던 수백여 명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당장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 노인이 살아온 세월은 그보다도 훨씬 길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고강한 무위라는 것을.
까마득한 연배와 드높은 무위.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닌 노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이 자리에 단 한 명뿐이었다.
“난데없이 휴식이라니. 대관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사형.”
깨끗한 도포(道袍)를 걸친 반백의 도사가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음에도,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 늙은이의 몸이 불편하여 더는 움직이지 못하겠네. 하여 반 시진 정도만 쉬어 가려 하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대사형!”
“목소리 낮추게, 장문 사제. 대사형께 이 무슨 무례인가.”
불쑥 끼어든 누군가의 음성.
질책이 담긴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반백의 도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형까지 왜 그러시는 겁니까. 본산(本山)을 떠난 지 벌써 이틀이 지났는데, 아직도 감숙에 닿지 못했다는 걸 아시는 분들께서…….”
“그만.”
이 사형이라 불린 그, 풍성한 백염(白髥)으로 신선처럼 보이는 노도사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어쩌겠나. 육신이 쇠한 탓에 이동에 한계가 있는 것을. 나와 대사형은 오히려 장문 사제에게 섭섭하군.”
“그게 무슨.”
“한동안 요양에만 몰두하던 두 사형이 이제야 겨우 거동을 할 수 있게 되었거늘, 어찌 그리 재촉하는가?”
반백의 도사는 뭐라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별다른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 설령 마음속의 말을 소리 내어 뱉었다 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 인적 드문 숲속에서 거센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으니까.
두두두두!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뚫고 튀어나온 여러 필의 초원마가, 숲길 한가운데에 멈춰 있던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고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들 사이에 우뚝 솟아올라 있던 깃발을 보고 멈췄다는 것이 옳았다.
대(大) 종남파(終南派).
숨을 헐떡이는 초원마의 말안장 위, 일필휘지로 수놓아진 글자를 읽은 선두의 청년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거 오타 난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