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124
〈 빌어먹을 환생 125화 〉 녹탑주
영창도 없던 디바인트리. 광장의 흙이 제네릭에게 모여 들고, 서로 단단히 결속된 뿌리가 되어 다리를 휘감기까지 고작 몇 초.
대마법사가 펼치는 마법은 빠르다. 제 수준보다 하위서클의 마법이라면, 그 발현 속도는 가히 신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법만 빠른 것이 아니다. 제네릭이 디바인트리를 펼쳤을 때. 유진은 곧장 환염식을 운용했다. 속도? 그건 유진도 자신이 있었다. 전생부터 지니고 있던 마나장악력은 그 세냐마저도 혀를 내둘렀던 재주다.
망토에 넣어두었던 양 손. 왼손은 아카샤를 쥐었고, 오른손은 단검 몇 자루를 쥐었다. 극한으로 운용된 환염식이 백색의 갈기를 만든다.
‘메르.’
유진은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망토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메르는 육성이 되지 못한 목소리에 반응했다.
굳이 머리를 망토 밖으로 뺄 필요는 없었다. 메르는 망토의 안에서, 유진이 보는 시야를 함께 보았다. 메르의 구성술식을 아카샤가 아닌 유진에게 새긴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세냐는 자신이 직접 만들고, 아꼈던 사역마가 유진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
아직 봉인에서 풀려나지 못한 자신을 대신해서.
‘연쇄 도약.’
아직 파악하지 못한 공간좌표를 메르가 대신 계산한다. 디바인트리의 뿌리가 제네릭을 들어 올렸을 때. 메르는 공간좌표의 계산을 끝냈다. 그렇게 계산 된 좌표는 곧장 유진의 머리에 새겨졌다.
망토에서 빼낸 오른손. 쥐었던 단검이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유진의 몸도 사라졌다.
빠직!
각자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제네릭의 마나와 충돌했다. 제네릭은 그에 시선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디바인트리를 운용했다. 땅에서 솟구친 뿌리가 허공의 한 점을 꿰뚫었다.
‘잔재주의 그릇이 얕아.’
단검을 먼저 블링크 시키는 것으로 공간을 현혹시키고, 그 뒤를 노리고 싶었던 모양이지. 제네릭은 코웃음을 치며 뿌리의 끝을 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뭐?’
제네릭은 분명히 저 위치에 유진이 블링크 할 것을 간파했다. 잘못 느꼈다고? 아니 그럴 리가.
‘도중에 블링크를 디스펠, 다시 블링크를?’
유진의 수준에서 쓸 만한 페이크가 아니다. 애당초 블링크 같은 도약마법은 편리한 만큼 위험부담이 크다. 직전에 디스펠하고 다시 좌표를 골라 도약한다니. 그건 잔뼈 굵은 전투마법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착각해주길 원했다.
‘전부 사용하라고 한 건 너잖아.’
직전에 블링크를 취소한 것은 맞다. 그로 인한 마나의 역류? 대수롭지 않았다. 역류한다면 바로잡으면 된다. 대마법사인 제네릭이 그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것은, 디스펠 된 마법이 티끌만큼도 흘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기가 흩날린다. 새하얀 불꽃에 푸른빛이 섞인다. 널따란 광장. 관중들이 내지르는 소음. 뒤흔들리는 마나. 오른손은 아카샤를 쥐고 있다. 유진은 디바인트리가 얼마나 수준높은 마법이며, 제네릭이 지배하는 마나가 얼마나 농밀한지를 이해했다.
‘은밀히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해. 접근한 순간 놈의 마나와 닿는다.’
거기서부터는 반응속도의 차이. 접근을 알아차렸다 해도, 걷어내는 것이 이쪽이 좁혀오는 것보다 빠를지.
푸확!
발로 차낸 지면이 터졌다. 그보다 조금 늦게, 제네릭의 몸을 휘감고 있던 뿌리가 움직였다. 그건 대지 전체가 덮쳐오는 것처럼 보였다.
‘닿는다.’
종이 한 장 차이라 해도 좋았다. 뿌리가 유진을 휘둘러 치기 전.
활짝 열린 망토에서 톱날처럼 삐죽삐죽한 검이 튀어나왔다. 포식검 아스펠. 마법을 베는 검. 유진은 몸을 팽이처럼 회전하며 아스펠을 휘둘렀다.
콰가각! 제네릭을 휘감고 있던 뿌리가 베어졌다. 제네릭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렇게 간단히 베어질 것이 아니다. 마나로 결속시킨 흙이다. 이 흙은 상위의 결계마법에 준할 만큼 단단하다.
‘마나가… 아니, 술식이 베였다.’
하지만 얕다. 베이기는 했지만, 깊이 베이지는 않았다. 베어진 술식 따위 다시 엮어 구성하면 된다. 제네릭은 입술을 달싹이며 영창을 이었다. 쓸 수 있는 마법에는 제한이 있다. 제네릭은 그를 경시하지 않았다. 애당초 위기랄 것도 없는 상황. 가볍게 놀랐을 뿐이다.
‘얕군.’
유진도 느꼈다. 역시. 아직은 저만한 마법을 보는 즉시 이해하고 중추를 베는 것은 무리인가. 유진은 미련없이 아카샤를 당겼다.
‘메르.’
유진이 원하는 마법이 최적의 형태로 펼쳐졌다. 화악! 유진의 몸이 뒤로 당겨졌다. 직전까지 날아왔던 뿌리가 아슬하게 유진을 스치고 지나갔다.
‘알아.’
공격은 뿌리뿐만이 아니다. 멜키스가 경고한 대로였다. 대지가 제네릭의 통제를 받는다고 해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은 무지한 패착이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마법사의 전투에선, 발을 묶거나 땅에 내리꽂는 마법의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했다.
통제된 마나가 ‘무게’가 되어 몸을 짓누른다. 그에 호응하듯 지면이 들썩거린다. 콰드득! 치솟은 뿌리가 이빨 가득 돋은 아가리가 되어 유진을 삼키려 했다.
힘으로 벗어날 수 있나?
‘굳이?’
마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힘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카샤의 드래곤하트가 붉은 빛을 발했다. 메르가 술식을 가속하고, 아카샤가 마법을 증폭했다.
‘블래스트.’
유진의 두눈이 머리 위를 보았다. 무게가 되어 짓누르던 마나, 그와 함께 하는 공기에 마법이 깃들었다.
‘서리밭.’
빙결의 전당에서 외워둔 6서클의 얼음마법이 뿌리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든다. 처음만 그랬다. 빠르게 번져나간 서리가 뿌리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환염식의 불꽃이 유진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이건 마법이랄 것도 없는 재주다. 검강을 몸에 두르는 것 뿐. 전사의 방어기술인 오러실드를 보다 전투적으로 바꾼, 하멜 식의…
[…유진님? 파멸신기가 뭐예요?]“닥쳐.”
유진은 얼굴을 콱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꽈앙! 찍어 누른 발이 얼어붙은 땅을 박살냈다.
하지만. 곧장 뿌리가 다시 연결된다. 제네릭은 찡그린 눈으로 유진을 보았다. 방금 유진이 쓴 마법은 죄다 6서클의 마법들. 그런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연계가 매끄럽다.
‘마법을 벤 검은 포식검 아스펠… 저건 라이언하트의 불꽃. 그래. 너무 허무히 끝내도 재미가 없지.’
제네릭의 의식이 활짝 열린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마법이 펼쳐졌다. 이어진 뿌리가 일제히 유진을 덮친다. 뿌리의 밑에도 땅은 있다. 흙알갱이 하나하나가 끈적하게 유진의 발바닥에 달라붙었다.
불꽃이 부풀었다. 콰르르! 폭발한 불꽃이 땅을 밀어냈다. 유진은 위를 확인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마나의 탄환이 유진을 노리고 있었다.
단순한 탄환이 아니다. 닿지 않아도 이해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배치 된 탄환이 서로 이어지며 감옥을 만든다.
‘블링크.’
‘열면 돼.’
메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마법사가 장악한 공간을 어떻게 연단 말인가?
곧 이해했다. 동시에 메르는 자신이 유진을 너무 얕잡아 보았음을 실감했다.
[너무 무식하잖아요?!]‘뭐 어때?’
뜨드득! 발바닥에 달라붙은 흙 알갱이들. 유진은 속박 통째로 발을 들어올렸다. 환염식이 마나를 증폭시켰고, 불꽃의 색이 보다 푸르게 변했다.
ㅡ꽈앙!
발이 땅을 찍는다. 5서클의 어스퀘이크. 하지만 그 위력은 도저히 5서클의 마법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밀어내는 마나의 크기와 정밀함에 제네릭의 뺨이 움찔 떨렸다. 허나 디바인트리의 통제를 받는 땅은 더 이상 부서지지 않는다.
다만, 어스퀘이크의 파장이 공간의 마나를 한 순간 흔들었다. 어지간한 마법사는 그 틈을 잡기는커녕 흔들림조차 느끼지 못하겠지만, 유진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틈에 재빨리 블링크의 술식을 끼워 넣었다.
그렇게 도약했다. 제네릭도 이 돌발적인 블링크의 좌표를 파악하는 것이 늦었다.
‘얼음송곳.’
휘몰아친 냉기가 길쭉한 송곳다발을 만들고, 일제히 쏘아졌다. 배후에서 쏘아진 공격. 제네릭은 혀를 차며 마법을 이끌었다. 콰드득! 들어낸 뿌리에 송곳들이 처박혔다.
얼음송곳과 함께 질주한 유진의 몸이 꺾였다. 그는 뿌리에 처박힌 얼음송곳을 두 발로 깊이 박아 넣었다. 곧, 뿌리 전체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뭐지?’
제네릭은 유진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법은 매끄럽다. 위력도 강해. 하지만 내게는 닿지 않아.’
차라리 아까처럼 아스펠을 휘두르거나, 체술을 쓰는 편이 더 위력적이지 않은가.
‘…마법을 고집… 이 애송이가…!’
마법사와 결투하는 것이니 마법을 고집하는 건가. 제네릭의 눈에 핏발이 섰다. 파직! 뿌리에 번지던 서리가 터져나갔다.
콰르르! 광장 전체가 꿈틀거렸다. 제네릭이 통제하는 흙이 전부 뿌리가 되어 뱀처럼 머리를 들었다. 동시에 온갖 종류의 마법이 허공을 수놓았다. 6서클의 제한을 넘지 않는 공격마법들. 그만한 마법을 동시에 발현했는데도 제네릭의 마나에는 한참 여유가 남았고, 저 마법들은 제네릭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았다.
뱀이, 뿌리가 춤을 추었다.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 난무. 유진은 비행과 도약과 질주를 섞으며 뿌리 사이를 누볐다.
마냥 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진이 발을 딛는 곳마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족적이 남았다.
‘염인(炎印).’
그 마법은 제네릭도 안다. 폭염의 전당에 보관 된 6서클의 화염마법. 발자국 하나하나에 불씨를 새겨 넣어, 일제히 공명시켜 광범위를 불태우는 마법. 염인은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남기느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발상이 일차원적이야.’
상대가 크니까 염인을 쓴다. 그런 발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뿌리’라서 ‘불’을? 설마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터. 디바인트리는 나무이되 나무가 아니다. 즉, 마른가지처럼 쉽게 불타지 않는단 말이다.
‘쥐새끼처럼 빠르구나. 언제까지 뛰어다닐 셈이지? 내가 널 잡지 못한다고 착각하고 있나?’
제네릭은 비웃음을 참았다. 공중에 배치한 마법으로 일정 높이 이상 도약하지 못하게 막았다. 휘둘러 치는 뿌리는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것 같으면서도 여러 방향으로 움직임을 유도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깊이 오는 순간, 빠져나갈 틈 없이 잡아낼 수 있다.
‘차라리 뭉개죽일까. 그럼 더 편하련만.’
진즉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제네릭도 그 정도의 분간은 할 줄 알았다.
‘아니면. 깊이 들어 와 아스펠로 길을 열 테냐. 이미 한 번 본 것에 또 당해줄 듯 싶나?’
전투는 결국 눈치싸움이다. 서로의 수를 얼마나 파악하고, 몇 수 앞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그 중요함은 제네릭도 알았다. 그는 자신이 유진의 수를 제대로 파악하고, 충분히 앞선 수를 보고 있다 믿었다.
‘놈은 아직 정령을 부르지 않았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위니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일. 거기에 아스펠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어쩌면 라이언하트의 다른 보물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다른 것들은 난폭하고 커다랗지. 마음처럼 쓸 수 없어. 그 좁은 틈에서 억지로 사용했다가는 제 공격에 휘말린다.’
제네릭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의 몸은 견고한 나무의 중심에 있다. 위그드라실. 아니, 디바인트리가 가진 큰 묘용은, 굳이 방어마법을 쓸 필요가 없는 방어력에 있다. 그렇다고 마냥 거대한 표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제네릭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든지 다른 뿌리로 이동해 나무가 될 수 있었다.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아쉽구나. 7서클로 제한했다면 널 보다 재미나게 농락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느꼈을 때.
유진이 ‘덫’에 들어왔다. 제네릭은 비죽 웃으며 디바인트리를 움직였다. 뿌리가 된 지면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유진을 덮쳤다. 또, 허공에 배치한 마법들이 포격이 되어 유진에게 쏟아졌다.
‘메르.’
그 순간에도 유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메르는 유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녀는 알아서 망토의 깊은 곳에 들어가고, 공간좌표를 계산했다.
흑암의 망토가 활짝 열린다.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뿌리가 망토에 삼켜졌고,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빠드득! 뿌리와 뿌리가 서로 충돌해 뒤틀린다.
머리 위에서 다양한 마법이 쏟아지고 있다. 얽히고 설킨 뿌리의 중심에서, 유진은 그것을 보았다. 그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 블링크는 못쓰고… 아스펠로 벨까? 아니면 파멸신기로 돌파할까.
어느 쪽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유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ㅡ찌잉. 아찔한 두통. 뇌에 불이 붙는 것 같다. 망토 안에서 메르가 경악하여 비명을 질렀다.
[지금?!]외치기는 했지만, 메르도 의식을 집중했다. 서로의 의식이 공명되었다.
메르는 이 결투에 책임감을 느낀다.
자신이 괜히 나서지 않았다면 사역마 따위라고 모욕 받지 않았을 터. 그러면 유진도 굳이 결투에 응하지 않았을 거다.
메르에게도 불만은 있다.
세냐님을 존중하지 않은 녹탑주의 콧대를 눌러, 아니, 으깨버리고 싶었다. 이곳에 없는 세냐님을 대신해 유진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유진에게 승리를 주고 싶었다.
환염식으로 증폭된 마나가 쭉 빠져나갔다. 부릅뜬 눈에서 피가 흘렀다. 유진은 핏발 선 눈으로 쏟아지는 마법을, 그 술식을, 마법이 존재하는 공간의 복잡한 좌표를 이해했다.
아크리온의 6층. 공간의 전당. 7서클 공간마법의 극치.
“전위반전(轉位反轉).”
유진이 존재한 공간이 도려내졌다. 그의 시야에 잡힌, 마법이 추락하고 있는 공간도 함께 도려내졌다. 그렇게 잘려진 공간이 서로 이어지고.
뒤집혔다.
콰르르릉!
디바인트리의 뿌리, 그 사이에서 마법들이 서로 뒤엉켜 폭주했다. 제네릭은 유진이 무슨 마법을 펼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를 거부했다. 분명히 영창을 들었다.
전위반전. 7서클, 그 중에서도 극악한 난이도를 가진 마법이다. 어떻게? 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아니, 트렘펠 위자도르가 한 말은 들었다. 7서클의 폭염마탄을 사용했다고…
“격… 격이 다른 마법이야!”
제네릭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고함을 질렀다. 연쇄적으로 터진 마법이 뿌리를 붕괴시키고 있다. 제네릭은 이를 악물고서 마법을 통제했다.
유진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서있었다. 전위반전으로 뒤집은 공간. 시야에 담는 전체를 뒤집고 싶었는데, 이 정도가 한계인가. 주변의 마법들이 어정쩡하게 멈춰있다. 유진은 그를 힐긋 보면서 아스펠을 뽑았다.
제네릭이 그를 알아차린 것은 조금 늦었다. 이해불가의 경악은 대마법사의 판단마저 늦게 한다. 급히 이끌어낸 마법이 유진을 덮치지만, 유진은 흐느적거리며 아스펠을 휘둘렀다.
힘이라곤 없어 보이는 칼부림. 그럼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예리하고 빨랐다. 선제한 마법들이 양단된다. 흩어진 마나가 아스펠에게 잡아먹힌다. 유진의 몸을 덮은 불꽃이 더욱 강맹해진다.
전투가 결국 눈치싸움이라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유진이 잘 알고 있다. 제 자신이 강자라 자신하는 놈은 오히려 상대하기 쉽다. 자부심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오만함과 승리에 대한 확신은, 이쪽이 어떻게 어울려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올가미로 엮어낼 수 있다.
아스펠? 한 번 보여줬다. 이후로는 쓰지 않았다. 그렇게 경계하게 만들었다. 제네릭은 자신이 6서클까지의 마법만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유진에겐 그런 제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6서클 마법만 사용했다. 장기인 체술보다 마법에 중점을 두었다.
제네릭은 그런 유진을 오만하다고 여겼다. 바로 보았다. 그렇게 여겨주길 바랐다. 결국 날뛰다가 덫에 잡혀서, 압도적인 기량차로 패배시키는 것이 제네릭이 그린 그림이었을 것이다.
유진은 다른 그림을 그렸다.
폭주에 출렁거리는 뿌리 표면에는 불타는 발자국들이 남아있다. 그 발자국이 유진이 원한대로 불타올랐다. 어지럽게 이어지는 붉은 선이 열기를 발했다. 이윽고, 불꽃이 터졌다.
꽈과광!
전위반전으로 뿌리 깊은 곳에서 터진 마법. 거기에 염인의 폭발까지 더해졌다. 나부끼는 열풍에 관중들이 비명과 감탄을 내질렀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카샤를 앞으로 뻗었다.
“괜찮아.”
유진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폭염마탄. 자그마한 불씨가 아카샤의 보석 앞에 생성되었다. 유진은 가볍게 불씨를 밀어냈다. 염인으로 터트렸던 불꽃의 열기가 폭염마탄에 달라붙었다. 천천히 나아가는 폭염마탄이 미친 듯이 그 크기를 부풀렸다.
“저, 저, 저 미친놈…!”
멍하니 결투를 지켜보던 멜키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급히 공중으로 튀어오른 멜키스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았다. ㅡ쿠르르릉! 관중들이 서있던 땅이 뒤흔들렸다.
대지의 정령왕이 강림했다. 의지로 전해진 명령이 대지의 정령왕을 움직였다. 콰드드득! 관중들의 앞에 거대한 땅의 장벽이 치솟았다.
‘부족한가?’
관중을 보호하기 위해 나선 것은 멜키스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와있던 것인지, 청탑주 히리두스 우즐렌과 흑탑주 발자크 루드베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둘은 서로 한 번 시선을 마주치곤, 멜키스가 만들어낸 땅의 장벽에 결계마법을 덧씌웠다.
“으득…!”
마나의 흐름이 격하다. 제네릭은 점점 크기를 키워가며 다가오는 폭염마탄을 노려보았다. 디스펠이 가능한가? 아니, 늦다. 저만큼 커진 마법. 터트린들 의미가 없다. 역으로 밀어내는 수밖에. 제네릭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직 움직이는 뿌리가 위로 치솟고, 추가적으로 마법을…
“템페스트.”
유진의 왼손이 망토에서 빠져나왔다. 그 손에 쥐어진 은청색의 아름다운 검과, 유진이 내뱉은 이름에 제네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와서 밀어.”
담담한 명령.
열풍이 미쳐 날뛰었다.
바람의 정령왕이 강림했다. 템페스트는 모두에게 과시하듯이 위엄찬 모습으로 유진과 함께 섰다. 유진은 뺨에 닿는 열풍에 눈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폼 잡지 말고 밀라고.”
[크흠…]템페스트는 무안함에 헛기침을 하며, 폭염마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으로 엮인 손가락이 거대한 불꽃에 닿았다.
그걸 본 순간.
제네릭은 디바인트리로 저항이 불가능하단 것을 절감했다.
불꽃과 폭풍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