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246
〈 빌어먹을 환생 247화 〉 용감한 모론
시험을 받겠다며 레헤인야르로 떠난 유진이 꼬박 하루가 지난 뒤에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 돌아왔다.
부상의 치료는 완벽했다. 이그니션의 반동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몸을 가누지 못해 모론과 아니스의 부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꼴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었고, 유진의 그런 모습은 요새의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었다.
현시대에 용사라 인정받은 유진 라이언하트. 그를 만난 수많은 강자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유진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그는 아직 21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어린 나이에 이룩해낸 강함은 시대의 첨단에 선 강자들과 견주기에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300년 전의 대영웅에는 미치지 못했다.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었다. 수백 년 동안 은둔하였다 해도, 모론 루하르는 용감한 모론이었다.
“아무리 너라도 모론 님한테는 어린애 취급을 받나 보지?”
침대 신세를 지게 된 유진에게 여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시안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은근히, 아니 대놓고 약을 올려댔다.
“뭐 어쩔 수 없잖아. 모론 님은 우리 시조님과 함께 싸우셨던 대영웅이고, 너는 뭐…… 대단한 천재인 것은 맞지만, 그 시대에 싸워본 것은 아니잖아?”
싸웠어, 개자식아. 유진은 목젖까지 치솟은 대답을 간신히 삼켜냈다.
“모론 님은 수많은 전장에 선두에 서시고 승리를 거두어 오셨잖아. 그러니까 너무 분해하지는 마. 네가 아무리 잘났어도 모론 님이 보기에는 친구의 까마득한 후손이니까,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야.”
“안 닥칠래?”
“형제에 대한 걱정이 사무치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냐. 그런데 너도 참 대단하다. 그 뭐냐……. 이그니션? 이었나? 또 그 기술을 써서 몸살이 나버린 거잖아. 안 봐도 뻔하지, 어떻게든 모론 님을 쓰러트리려고 고집을 부린 거지? 자존심이 상해서 말이야. 안 그래?”
“꺼져!”
“아니 진짜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마음고생하지 말고, 누워서 푹 쉬고 있…….”
유진은 더 이상 듣지 않고, 침대 옆의 과일 바구니의 사과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시안에게 던져 버릴 생각이었는데, 그 순간에 손아귀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사과가 으깨져서 주스가 되어버렸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객기를 부려보는 것도 꽤 멋지다고 생각해.”
시안은 즉시 말을 바꾸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찾아온 것은 시엘이었다. 그녀는 방금 목욕을 끝낸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유진의 가까이에 앉았다.
“그거 알아? 이곳의 온천은 피로를 풀고 근육의 회복을 돕는대. 네 그 무식한 기술이 심한 근육통과 가까운 것이라면, 온천에 들어가 있으면 회복이 더 빠르지 않을까?”
“몸 가누기도 힘든데 뭔 놈의 온천욕이야.”
“내가 도와줄까?”
“너 미쳤니?”
“설마 설마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지? 가족탕이라는 것도 있잖아. 뭐 발가벗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치료와 회복이 목적인 건데. 나는 아무 상관 없어, 네가 부탁한다면 말이야.”
히죽 웃으며 말했지만, 시엘은 유진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받아들인다면? 굉장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시엘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유진을 흘겨보았다.
“……물론 농담이야. 너도 알지?”
“내가 미쳤다고 그 말을 진담이라고 생각했겠니?”
살짝 떠보려고 물었는데, 곧바로 돌아온 대답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상처가 없어서 감이 잘 안 잡히네. 대체 모론 님한테 얼마나 얻어맞은 거야?”
“별로 안 맞았어.”
“진짜?”
“너도 알잖아. 내가 지금 여기 쓰러져 있는 것은 모론…… 님에게 맞아서가 아니라, 내 기술의 반동 때문이야.”
1년 전. 이오드가 흑사자 성에 날뛰었을 때. 놈의 몸을 숙주로 삼았던 마왕의 잔재와 싸울 때에 이그니션을 썼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며칠 동안 침대 신세를 졌었기에, 시엘도 유진이 쓰러진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네가 그 기술을 썼다면, 쓸 수밖에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거잖아.”
“……별로? 궁지 아니었는데? 그냥 내가 쓰고 싶어서 쓴 건데?”
시엘은 말없이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어 괜스레 딴 곳을 보았다.
“……그래도 뭐, 너만 그런 일을 겪는 건 아니니까.”
“그건 무슨 말이야?”
“만약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대련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찾아오라고, 모론 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거든. 오늘만 해도 아버지랑 카르멘 님, 그리고 다른 흑사자 성의 대장님들이 모론 님께 도전하겠다고 했어.”
솔직히 자존심이 상한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모론에게 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유진이 그렇게 납득하는 것과ㅡ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아주 아주 다른 문제 아닌가? 너 모론 님에게 졌다며? 이 말. 유진은 유진이며 하멜이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저런 말을 들어버리면 어쩔 수 없이 발끈해 버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동이 다 끝난 뒤에 돌아오는 건데.’
후회하기에는 늦었다. 바라건대, 모론이 후배랍시고 손대중을 하지 않고 흠씬 두들겨 패주었으면 좋겠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차이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과연 모론 님은 모론 님이셨습니다.”
“그렇지?”
“예. 전력을 다해 덤볐지만, 모론 님에게 상처 하나 입힐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카르멘 경의 실력에는 모론 님도 감탄하셨습니다. 하지만 카르멘 경의 필살 콤비네이션은 모론 님을 몇 걸음 물러서게 했을 뿐, 모론 님에게 상처를 입히진 못하였습니다. 가주님의 검도 마찬가지였지요.”
유진은 멋대로 실룩거리려는 입꼬리를 붙들었다.
제노스 라이언하트. 흑사자 기사단 1번대 대장이자, 베르무트를 통해 전승된 하멜식의 계승자이며,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는 진실을 아는 자.
그는 팔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서 유진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나마 붕대로 끝난 것도 신성마법 덕분이지, 원래는 팔다리가 아작이 났었단다.
“하지만 그 모론도 나보다는 약했다.”
“과연 하멜 님이십니다.”
“지금이야 내 전성에 간신히 근접해 있으니 패배하는 것이 당연…… 아, 오해하지는 말고. 300년 전에 서로가 전성기였을 때는 내가 모론보다 강했지만, 모론은 나와 달리 죽지 않고 수행을 해왔잖아. 그러니 지금 나보다 모론이 강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제 몸으로 모론 님의 범접할 수 없는 강함을 느꼈습니다.”
제노스는 진심으로 하멜을 존경하고 있다.
“모론 님은 강함뿐만 아니라 인품조차도 대영웅에 걸맞으셨습니다. 그분은 팔다리가 부러져 쓰러진 저를 직접 일으켜주시면서…….”
“내 강함과 인품은 대영웅에 걸맞지 않다는 거냐?”
“예?”
“정말 모론이 대영웅에 걸맞은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면 네 팔다리를 부러트리지도 않지 않았을까?”
“예…… 듣고 보니 그렇군요.”
“오히려 널 내 전승자로 인정하면서, 내가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하멜식을 보완해서 알려주고 네 적염식을 하멜식에 맞게 개량해 준 나야말로 대영웅다운 인품의 소유자 아닌가?”
“역시 하멜 님이야말로 대영웅이십니다.”
존경하기에 유진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진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전대 원로원주 도이네스가 사망한 후, 라이언하트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여전히 백염식은 본가만의 것이며, 방계는 적염식을 익히고 있다. 그것은 이 거대한 라이언하트의 균형을 유지하는 근간이니 섣불리 바뀔 수가 없다. 아무리 유진이 막 나간다 해도 방계인 제노스에게 백염식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러니 백염식 말고 다른 여러 가지를 전수해 주었다. 제노스의 가문에 전해져오던 하멜식과 적염식을 융화시켰고, 적염식에서 미흡하던 부분을 보완했다. 그만한 은혜를 내려 주었으니 제노스가 하멜을 더더욱 존경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네 팔다리를 부러트린 모론이 네게 무슨 말을 해주었지?”
“제 투기와 검술을 비롯한 전투법에서 하멜 님을 느꼈다고 하시더군요.”
제노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멜을 존경하는 그에게 있어서 모론의 저런 말은 최고의 칭찬이자 평가였다.
하지만 유진은 미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제노스의 실력이 꽤 뛰어나다는 것은 유진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이런저런 가산점을 줘서 생각해 봐도 제노스에게 하멜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한 생각을 입 밖에 내뱉으면 안 된다는 눈치는 있었기에, 유진은 내색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 * *
닷새가 지나고 나서야 몸이 멀쩡해졌다.
혹시라도 아멜리아 머윈이나 헤모리아 같은 것들이 몸이 약해진 틈을 노리고 습격하지 않을까 경계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둘은 유진이 평생 만나 본 또라이들 중에서도 꽤나 상위의 존재들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베르무트의 후손들은 강하더군.”
요새의 탑. 모론은 불어닥치는 바람을 받으면서 입을 열었다.
“베르무트의 후손치고는 약한 거지.”
그 곁에서 망토를 싸맨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라이언하트가 약한 것은 아니다. 대륙 최고의 무가를 자칭해도 충분할 만큼 강하다.
최고배분의 원로인 카르멘은 유진이 보기에는 대륙 제일을 자부해도 되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삼공을 제외한 헬무드의 고위마족과도 단독으로 싸움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본래 고위마족은 인간이 단독으로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가주인 길레이드. 막냇동생인 기온. 둘째인 기온은 진즉부터 검을 놓았기에,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카르멘 다음 배분의 고수는 저 둘을 꼽아야 한다. 냉정히 말하자면 둘의 실력은 카르멘보다 몇 수는 처진다. 하지만, 카르멘과 마찬가지로 성장의 여지는 충분했다.
“내가 기억하는 전성기의 베르무트는 그 셋보다 훨씬 어렸어. 그런데도 말도 안 되게 강했지.”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300년 전부터 마왕을 제외한 마족들 중에서 최강이라 꼽히던 놈들이다. 그 시대에서 저 두 마족과 단독으로 대적이 가능했던 존재는 베르무트뿐이었다.
“베르무트의 후손이라고 해서 무조건 베르무트와 똑같이 강할 필요는 없는 거다. 하멜. 내 후손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덩치 큰 것은 비슷하던데.”
“하지만 힘은 차이가 크다. 아만은 내 피를 짙게 이은 후손이라 생각한다만, 아만의 힘은 네가 알던 내 힘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모론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아만에게는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 내 피를 이은, 아니, 이 시대에 살아가는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베르무트의 라이언하트. 그들은 베르무트와 같은 잿빛 머리와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유일하게 엷어지지 않은 성질이다. 수십 대가 내려오고 피가 섞였는데, 이 잿빛 머리와 눈동자는 그대로 유전되고 있다. 방계의 끝자락에서도 베르무트의 상징과도 같던 금색 눈동자와 잿빛 머리는 태어난다.
……마치 강렬한 의지가 피에 녹아든 것 같다. 제아무리 섞이고 섞여도, 이 피는 라이언하트의, 베르무트의 피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만 같다.
베르무트의 피가 특별해서? 아니면, 베르무트가 제 피가 특별하게 만들었나?
무엇을 위해?
‘…….’
하멜의 환생. 추측뿐이지만, 유진은 조금 섬뜩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너도 있지 않나, 하멜.”
커다란 주먹이 유진에게 다가왔다.
주먹과 주먹을 부딪치는 인사. 모론은 이것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저번에는 아니스의 부축을 받고 있었지만, 지금 유진은 멀쩡하게 두 발로 서 있다. 그래서 당당히 어깨를 펼치고서 모론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너는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라이언하트의 일원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결국 베르무트의 후손은 베르무트만큼 강하다는 것 아닌가?”
그 말에 유진은 미묘한 기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베르무트의 의도대로 놈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은 불편하다. 하지만 모론이 말한, ‘베르무트만큼 강하다는 것’이 유진의 뺨을 씰룩거리게 만들었다.
저 말은 결국, 모론이 생각하기에 하멜은 베르무트만큼 강했다는 것 아닌가?
“베르무트 님만큼 강해질지도 모른다, 겠지요.”
난간에 앉아서 벌컥벌컥 술을 마시던 아니스가 말했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유진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입술을 삐죽 내민 뚱한 표정. 어쩔 수 없었다.
성녀란 것이 공인되어 버리고, 날개를 퍼덕대며 계시를 받았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 때문에 아니스는 유라스의 성직자들에게 선망 어린 시선을 받게 되어, 기적의 교범을 보이고 예배를 집전하는 등 번잡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아니스가 아닌 크리스티나가 집전했다. 아니스는 의식의 귀퉁이에서 몇 마디 조언을 건네거나 대체 언제 끝나는 것이냐며 투덜대는 역할만 맡았다.
그럴지라도 낮이 워낙 바빠서 유진이나 모론과 어울리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아니스가 심통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바빴던 것은 모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며칠 사이에 요새에 있는 기사들 대부분과 대결을 마쳤고, 기사단의 훈련 상대 역할까지 소화해냈다. 가끔 누르가 나타나면, 재빠르게 레헤인야르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틀 뒤에 나이트마치가 끝난다.
“전 아무렇지 않습니다.”
아니스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모론이 조금 걱정이 됩니다. 지금이야 저희가 이렇게 함께 있고, 모론 당신도 후손이나 다른 기사들과 교류를 나누었지만…… 결국 당신은 레헤인야르로 돌아갈 것 아닙니까.”
“그럴 거다. 이곳에 지내면서 오가는 것은 번잡하고, 오래되면 날 무뎌지게 만들 거다.”
“당신이 또 미쳐 날뛸 것을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가?
아니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색하고 싶지는 않다. 가슴 깊이 넣어둔 감정이 멋대로 의식된 것뿐이다. 아니스는 상실(喪失)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모론은 아니스 이상으로 상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홀로 살아남은 것은 모론뿐이니 말이다.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하나.”
모론이 웃으며 물었다. 아니스는, 그 말을 쉽사리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리저리 말을 돌렸지만, 아니스의 본심은 모론의 말대로였다.
그녀는 이 만남이 마지막인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다음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아까부터 괜히 짜증이 나고, 마시는 술에 별맛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ㅡ 이별이 아쉽고 두려워서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걸 받아들여 버린 순간, 앞으로도 계속 그 감정을 확실히 의식하게 될 것만 같아 두렵고 싫었다.
“그것에 대한 약속은 이미 나누었지 않나.”
“……약속?”
“내가 이상해지면, 하멜이 날 패러 오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
“하멜, 아니스, 너희 둘이 나에게 부탁했다. 조금만 더, 이곳을 지키고 있어달라고. 나는 그 부탁을 평생 잊지 않는다. 너희가 베르무트와, 세냐를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 나는 변하지 않고, 이곳을 지키고 있을 거다.”
“이 등신. 뭐가 부탁입니까? 저는 멋대로 지껄인 하멜과 작당하여 적당히 맞장구를 쳤을 뿐입니다.”
아니스는 마시던 술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언제나 강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아니스 슬리우드’는 성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든 약자를 수호하고 치유하는 존재였기에, 정작 자신의 약함은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고, 모론과, 세냐와, 하멜과 만나면서. 성녀는 아니스라는 한 명의 인간이 되었다. 약함을 드러내도 될 동료들을 얻었다. 그렇다 한들 항상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웃음으로 표정을 감추고, 비꼬고, 놀리고.
아주 가끔, 눈물이 조금 날 것만 같을 때에는 솔직히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던 100년보다는 훨씬 짧게 끝날 겁니다.”
많이 울지는 않았다. 눈물 한 줄기만이 또르륵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그 눈물은 유진과 모론을 기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며칠 전에 아니스가 자신의 소멸에 대해 말했던 일이 유진의 기억 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 그때는 당연히 너도 같이 있을 거야, 아니스.”
유진은 펄쩍 뛰어 아니스의 옆에 내려섰다.
“아니스가 없다면 나는 대망치의 협곡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모론도 굵은 양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품 안에 안겨서 마음껏 울라는 뜻이었지만, 아니스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유진과 모론이 갑자기 왜 호들갑을 떠는 것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나. 저 두 등신은 갑자기 왜 저러는 것입니까?’
[시스터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크리스티나는 흐뭇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