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444
〈 빌어먹을 환생 445화 〉 잔류
잔류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꿈을 꾸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을 꿀 수가 없다.
그녀에게 있어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아주 약간의 노력이나 수고를 더한다면 이룰 수 있다.
가끔, 꿈을 즐기고 싶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누아르는 자신의 잠 속에서 꿈을 꾸지 않는다. 솔직히 누아르에게는 제 잠에서 꿈을 꾸는 것보다, 다른 이의 꿈을 만들어 즐기는 게 훨씬 쉽고 편했다.
몽마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지만 정작 자신의 꿈은 꿀 수가 없다.
자각하지 못한, 이게 꿈이라는 것을 꿈속에서 알아차리지 못한, 진정한 의미의 꿈.
직접 꿈을 꿔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꿈은 바란다고 해서 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쉽다고 생각한 적이 있던가? 잘 모르겠다. 그런 종류의 감상은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낯설었다.
“흐음…….”
지금도 그렇다.
수십 명은 누워서 뒹굴 수 있을 것만 같은 넓은 침대. 누아르는 그 한복판에 앉아 눈을 깜빡거렸다.
“흐으음…….”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해서 잠까지 자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녀 정도의 격을 지닌 마족이라면 수면 따위는 진즉에 극복해 냈지만, 그래도 누아르는 하루에 일정 시간은 꼭 잠을 잤다. 잘 필요가 없다지만 자지 않을 필요마저 느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막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배배 꼬면서 생각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확신은 없다만, 왠지…… 꿈을 꾼 것만 같다. 꿈을 꾸었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다. 자각하지 못한 꿈. 잠에서 깨어난 순간에 기억이 증발해 버려서, 희미한 감정만이 잔류하는…….
“뭘까…….”
누아르는 괜히 이불을 끌어다가 몸에 돌돌 말면서 중얼거렸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뒹굴다가 눈을 감았다. 평범하게 꿈을 꾸는 자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
꿈의 미련. 이미 잠에서 깨어나도,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기분. 도중에 끝나 버린 꿈의 다음을 잇고 싶다는 갈망. 지금 누아르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잠들기 위한 노력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바란 순간에 즉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불을 돌돌 말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지 수십 분. 누아르의 두 눈이 반짝 뜨였다.
“안 되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도중에는 아예 잠 속에서 의식을 깨워 직접 꿈을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아까와 같은 기분은 느낄 수가 없었다.
애당초 꿈의 ‘다음’을 바라서 잠든 것인데,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어렴풋한 감정만이 잔류하고 있을 뿐.
“뭘까…….”
누아르는 다시 한번 중얼거리면서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한층 더 부스스해진 머리를 양손으로 헤집으며 침대를 뒹굴었다. 점점 더 희미해지는 감정들을 생각해 본다.
꿈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잔류한 감정은…… 슬픔? 그리움? 미련? 그런 종류의 아련하고 애틋한.
“계절 타나?”
내가? 누아르는 헛웃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울 앞에 앉아 엉망인 머리를 정리하고, 자는 중에 없애 둔 뿔을 다시 만들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감정을 떨쳐 내려는데…… 잘 되지 않았다. 금세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감정은 어느새 가슴 밑바닥에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어떤 꿈을 꾸었더라? 거울을 빤히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떠오르질 않는다. 누아르는 괜히 얼굴을 어루만지고, 관자놀이를 두드리고, 기껏 정리했던 머리를 벅벅 긁다가 머리채를 가볍게 잡아 뜯었다.
그러다가.
목걸이를 보았다. 왼손 약지에 끼운 반지도 의식했다. 알몸으로 잠드는 순간에도 목걸이와 반지는 벗지 않았다. 잠잘 때뿐만 아니라, 이 한 달 동안 누아르는 단 한 번도 목걸이와 반지를 벗은 적이 없었다.
“……흐응.”
그날 밤부터 새벽을 지나 여명까지의 기억. 감정. 추억. 그리고 증거. 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에 끼운 반지는 선명한 색채로 빛을 발하고 있다. 누아르는 약지의 반지를 보다가, 목걸이에 엮은 다른 반지를 들어 올렸다.
‘누아르 제벨라’.
안쪽에 새겨넣은 이름. 누아르는 달콤한 두근거림을 느끼며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언젠가, 죽어가는 하멜의 손가락에 끼울 반지. 하멜의 약지에 맞춘 반지는, 누아르의 엄지손가락에 끼워도 넉넉했다.
‘커다란 손.’
누아르는 하멜의, 유진의 손가락을 떠올렸다. 길고 굵은 손가락. 마주 잡으면 내 손을 완전히 감싸버리겠지.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보고 싶어졌어.”
화아악! 허공에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났다.
어드벤처 스퀘어의 워터파크. 파라솔 아래에 앉은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화면으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뚱한 표정. 나오고 싶지 않은데, 꼬마들에게 억지로 끌려 나온 것이리라.
“슬슬 떠나려나?”
유진이 제벨라 파크에 온 지도 한 달이 되었다.
나하마의 정세도 변했다. 대놓고 알리지는 않고 있지만, 누아르는 나하마가 임전태세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명한 것은 술탄이겠지만, 그 배후에는 아멜리아 머윈이 있다. 라비스타에 대가리를 처박고 숨어 있던 아멜리아가 드디어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날의 여명 이후로, 누아르는 유진을 찾아가지 않았다.
떠오르는 여명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너무나도 짙어서. 다른 감정으로 덮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너무 가볍게 자주 찾아가면 추억조차 가벼워질 것 같아서.
누아르의 공중저택인 제벨라 페이스는 이미 워터파크 쪽으로 비행을 시작했다.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거울을 돌아보았다. 도착할 때까지 할 일은ㅡ 수영복을 고르는 것. 어떤 수영복이 좋을까? 즐거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 * *
쏴아아.
쏴아아아.
파도풀이라고 불리는 수영장은 이름 그대로 파도가 친다. 바다처럼 넓고, 파도가 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바다인 것은 아니다.
유진이 보기에, 저 수영장은 바다에 존재하는 나쁜 점은 모조리 배제하고 좋은 점만을 극대화한 악마적인 놀이시설이었다.
쉼 없이 치는 파도. 높았다가, 낮았다가, 그것뿐이지만 ‘고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튜브나 고무보트 같은 장난감과 어우러지는 것만으로 아이들을 미치게 만든다.
“꺄아아아!”
“히야아악!”
보라. 고무보트에 탄 라이미르아와 메르가 신나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저런 종류의 놀이를 겪어본 적 없는 크리스티나도 둘 사이에 껴서 열심히 비명을 참고 있는데, 재미있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 참 노골적이었다.
‘어쩌면 아니스일지도 모르지.’
꼬마들을 보호한답시고 아까부터 같이 노는 것을 보면, 아니스도 이 수영장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뭘 굳이 참는 걸까? 눈치 볼 필요도 없는데. 유진은 썬베드 옆에 둔 술병을 따며 생각했다. 이곳은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멋대로 빌린 프라이빗 풀. 이 커다란 수영장에 있는 것은 유진 일행뿐이다.
“그래서. 발자크는 일단 내버려 두기로 한 거냐?”
[응.]곁을 맴도는 바람이 세냐의 목소리를 실어다 날랐다.
본래 세냐와의 대화는 메르를 통해서 나눴지만, 멜키스가 아롯에 돌아가고서부터는 무조건 메르를 통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멜키스가 소환해 둔 바람의 정령이 세냐의 곁에 머무르며 통신기 역할을 대신해 주었기에, 지금처럼 메르가 열심히 노는 중에도 세냐와 대화가 가능했다.
[흑마법사라는 점을 빼면 꽤 마음에 들어.]“하는 짓이 굉장히 수상하잖아.”
“얼씨구. 정작 너는 그런 것 없잖아.”
[나도 남들이 보면 수상하고 신비롭고 막 그럴걸?]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유진은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세냐가 발자크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점. 그것은 유진에게 크게 의외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발자크의 ‘비원’을 듣는다면, 아마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유진도 세냐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발자크의 비원. ‘전설’이 되고 싶다. 대단한 마법사가 되고 싶다. 그러면서도 인간으로 남고 싶다. 마왕이나 다른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그 비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비원을 들었기 때문에. 유진에게 발자크에 대한 경계는 허물어졌다. 이후로도 수상하다 생각하고, 거리를 둔 것은, 발자크가 결국은 흑마법사라서. 타협할 수 없는, 무조건 싸우게 될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라서다.
[유폐의 마왕은 네가 바벨에 오르기 전까지는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는거잖아. 놈이 설마 자기랑 계약한 흑마법사를 써서 수작을 부릴 것 같지도 않고.]“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지.”
저런 종류의 의문에서 귀결되는 것은, 유폐의 마왕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그럴 생각이 없을지라도, 발자크가 그런 생각을 품었는지는 별개 문제야.”
[흐흥, 내 걱정을 해주는 거구나? 그건 말이야, 유진, 네가 요즘 날 안 봐서 그래. 나 요즘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세냐가 새로운 시그니처의 개발에 몰두하는 것은 유진도 알고 있다. 정확한 진척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진행된 모양이었다.
“어, 너 잘난 건 알겠는데.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는 거야.”
“시그니처에 대해 제대로 묻지도 않았다며? 너무 안일한 것 아냐?”
[마법사로서 존중해 주는 거야.]“존중은 무슨.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수상쩍지 않냐? 뭔 놈의 시그니처가 마족을 잡아먹어? 그러다가 나중에 너도 잡아먹으려 굴면 어떡해?”
[유진, 너 말이야. 나랑 아니스, 크리스티나가 만약에, 만약에 하면서 너 걱정할 때 어떻게 굴었어?]돌아온 질문에 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유진이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자 세냐가 쯧쯧 혀를 찼다.
[이 비겁한 새끼. 입 닥치고 있는 것 좀 봐. 자기가 당할 때는 정색하고서 알아서 한다고 그러더니.]“걱정해 줘도 지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분명히, 세냐가 예전에 저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유진은 세냐와 똑같이, 아니! 조금 비슷하게 행동해 버리는 자신에게 소름이 끼쳤다. 내가 저 싸가지 없는 푼수 새침데기랑 닮았다고? 말도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나하마에까지 데려가는 것은 좀 그런데.”
[방해 안 하고 자기 알아서 싸우겠다는데 뭐 어때?]“언제부터 흑마법사 말을 그렇게 다 믿어줬냐?”
[흑마법사를 믿는 게 아니라,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마법사를 믿는 거야. 그리고 나도 솔직히 궁금해서 그래. 대체 마족을 잡아먹는 것과 자기 비원을 이루는 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가 인간 편에 서서 전쟁에 활약하고, 마족과 싸우면 대단한 일이기는 하네.”
[음……? 그건가? 그걸 노리는 건가?]되는대로 뱉은 말인데 세냐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유진도 다시 생각해 보고서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유진이 알기로는 여태까지 마족과 대놓고 반목한 흑마법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널 죽이는 것이 목적일지도 몰라.”
[흐흥,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바로 전설이 될 수 있겠지. 성공한다면 말이야.]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티끌만치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내가 쟤보다는 덜 오만하지.’
거짓말로라도 겸손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유진도 자기가 어느 정도 오만한 구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오만함이 60 정도라면, 세냐는 100이라고 생각했다.
“박쥐 쪽은?”
[연락은 없어. 그쪽도 이전처럼 정보를 넘길 수 없겠지.]머윈이 왔다.
박쥐가 보낸 정보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전까지는 마족들과 나하마 심부의 동태를 속속들이 보고했는데. 아멜리아 머윈이 나하마에 와버렸으니 첩자 짓을 할 수가 없게 된 모양이다.
“어쩌면 들켜서 죽은 걸 수도 있지.”
[그건 아닌 것 같아. 나에 대한 감시는 여전하거든.]박쥐의 정체까지는 모르지만, 놈이 아멜리아 머윈에게 강한 원한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정보를 넘기는 것으로 요구한 대가가, 언젠가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아멜리아 머윈을 죽여달라는 것였으니.
[기다려 보면 연락이 오겠지. 아니면…… 흠, 더 이상 감시를 내버려 둘 필요도 없나? 머윈을 끌어내기 위해서 내버려 두고 있던 거잖아.]“그렇긴 한데. 일단은 둬 봐.”
“준비는 하고 있어.”
제벨라 파크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준비는 이 도시에 오기 전부터 하고 있었다.
“떠나는 것은 이번 주 안에…….”
유진은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높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제벨라 페이스가 보였다.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서 내뱉었다.
“저년이 또.”
[저년? 년? 어떤 년이야!]세냐가 윽박을 질렀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벨라 페이스의 입이 열렸다.
비키니를 입은 누아르 제벨라가 멋들어진 자세로 풀을 향해 다이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