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32)
136화. 화영지정 (3)
어둠이 깔린 산속.
이벽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얼마 전 무한에서 헤어졌던 송영영이 태연하게 서 있었다.
“그냥 살기를 따라왔어. 가는 길목마다 살기가 풀풀 풍기는데 모를 수가 없지.”
“…그렇군.”
“왜 치사하게 왜 먼저 가?”
호흡이 다소 거칠어져 있다.
부랴부랴 쫓아온 모양이었다.
“미안하군. 일이 그렇게 되었다.”
이벽은 내기를 가다듬었다.
적파심공이 저항을 일으켰으나 이내 만월무변심공으로 혈기를 덮고 휘어지게 했다.
“그리고 그 검은 뭐야?”
“…….”
이벽은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송영영이 일행에 합류한 이후로는 적파심공이나 도살지도를 펼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역겨워. 차라리 껍데기가 낫지, 그런 지저분한 검은 쓰지 마. 나중에라도 내 손으로 너를 베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 반가워요, 소저.”
그때 월향이 다가서며 말을 꺼냈다. 분위기를 보고서 부랴부랴 끼어든 모양이었다.
“무당의 태극무봉이시죠? 용케도 여기까지 찾아오셨네요. 다행히—.”
“…뭐야?”
송영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벽과 월향을 번갈아 보았다.
“이상한 여자다. 그 잠깐 사이에 진짜로 새 여자가 생겼네. 공손수의 말이 맞았어.”
“…헛소리는 그만하지. 하오문 수호대의 월향 소저다.”
“소저? 하지만 소저라기엔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데.”
“…….”
“아, 아하하…….”
월향이 난처하게 웃었다.
이벽 역시 말문이 막혔다.
불가에 비친 송영영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자세히 보니 조금은 심통이 난 듯했다.
“…송영영, 갔던 일은 잘됐나?”
이벽은 화제를 돌렸다.
비룡대의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남궁세가와의 일전에 앞서 도움을 얻고자 송영영은 무당으로 향했었다.
“아니, 잘 안 됐어.”
“그렇군.”
“우리 장문인이 쫌생이라서. 네가 직접 오던가 아니면 도움은 꿈도 꾸지 말래.”
그것은 예상했던 바였다.
이벽과 의혈맹의 지속적인 갈등 속에서 정도맹은 줄곧 뒷짐을 진 채 모르는 체를 하고 있었다.
그저 간을 보듯 송영영을 붙여주었을 뿐, 그 이상으로 도와줄 생각이 있었다면 진즉에 나섰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좌우간 혼자서라도 돌아와준 것은 고맙—”
“아니, 혼자는 아니야.”
송영영이 다시 말을 끊었다.
“어떻게든 붙들고 늘어지니까 딱 한 명 붙여줬어. 근데 좀 애매해서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잘 모르겠어.”
“…애매해서 미안하군.”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답했다. 탓, 나무 위에서 인영 하나가 사뿐히 뛰어내렸다.
“소저, 갑자기 말도 없이 혼자 뛰쳐나가면 어떡하오? 만에 하나 비룡대주가 아니라 적이었다면—”
“응, 미안, 아저씨.”
“…쯧.”
나타난 중년인이 이마를 부여잡으며 작게 혀를 찼다. 송영영을 대하는 게 쉽지 않은 듯했다.
중년인의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오랜만이군. 비룡대주.”
* * *
덜커덩, 덜커덩.
마차 안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월향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으나 아무도 반응하는 이가 없자 그마저도 이내 체념한 듯했다.
그리고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답답한 침묵만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
이벽의 시선이 맞은편 중년인을 향했다.
지난밤 송영영과 함께 나타난 사내의 정체는… 점창의 속가 출신이자 정검문주인 관일검 양호명이었다.
즉, 숭무관주 남궁천수와 함께 호남 사파무림을 치려 했던 두 주축 중 한쪽이며, 무적파에서는 이벽 일행과 직접 대치하기도 했었다.
“…내게 할 말이 있나?”
팔짱을 낀 채 잠을 청하는 듯하던 양호명이 문득 입을 열었다.
“딱히 없소만.”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영 탐탁잖군 그래.”
“우리가 한자리에 앉아 서로 정겨울 사이는 아니지 않소?”
“그도 그렇군.”
쿡, 송영영의 팔꿈치가 양호명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저씨, 우리 대주랑 인연이 있다며? 악연이라곤 말 안 했잖아.”
“악연도 인연이오, 소저.”
“…….”
다시 정적이 흘렀다.
하아, 양호명이 한숨을 쉬었다.
“비룡대주. 자넨 참 변화무쌍해.”
“그게 무슨 뜻이오?”
“뭐, 여러 가지 뜻으로 하는 말이네만. 무엇보다도 자넨 볼 때마다 전혀 다른 검을 쓰는 것 같단 말이지. 사문의 이름이 낙검문이라 했던가?”
“…….”
이벽이 미간이 흔들렸다.
눈앞의 양호명은 일찍이 이벽의 검에서 선우세가의 흔적을 찾아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선우세가의 검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는 중요치 않다. 다만… 여러 의미로 껄끄러운 상대임에는 틀림없다.
‘…성가신 자를 데려왔군.’
이벽의 눈이 송영영을 향했다.
휙, 송영영이 황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봐도 일부러 이벽의 시선을 피하는 모양새였다.
“남궁천수를 쓰러뜨려 사로잡고, 남궁세가주에게 직접 비무를 청했다고 들었네.”
그때 양호명이 말을 이었다.
“대단하군. 일전에는 자네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 놈을 탓했는데 눈이 멀었던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어.”
“양 문주, 무슨 속셈이요?”
이벽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속셈 같은 건 없네만.”
“…아니, 당신이 무슨 속셈이건 솔직히 아무래도 좋소. 웬만하면 군말 없이 떠나줬으면 하는군.”
“…….”
“일전의 보복을 원한다면 나중에 얼마건 상대해드릴 터이니 물러나 주시겠소? 지금은 내 사정이 퍽 복잡해서 방해받으면 참지 못할 것 같소.”
이벽은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남궁세가와 언미희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이 이상 일이 복잡해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양호명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자네를 도우러 왔네.”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이오?”
“믿건 말건 사실인 걸 어쩌겠나?”
양호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분명 자네 덕분에 우리 정검문은 호남 땅에서 적잖이 영향력을 잃었지. 덕분에 퍽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네. 허나.”
“…….”
“일찍이 무당의 정도맹주께서 자네를 도우셨다고 들었네. 또한 그 직전제자이신 송 소저께서 자네와 함께하고 있는 것만으로 맹주의 뜻은 명확하다 할 수 있겠지.”
양호명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벽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강호에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지. 남궁천수 따위와 비교되는 건 그리 유쾌하진 않네만, 좌우간 나는 그치와는 달리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네.”
“…….”
“무당과 정도맹주께서 자네의 내면 속 정도를 믿고서 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신다면야 우리 점창도, 나도 그 뜻을 거스를 이유가 없지.”
“…‘바른 길’이라.”
이벽이 답했다.
“그건 대체 어떤 길을 뜻하는 거요? 가령 멋대로 남의 땅에 짓밟고 들어와 원주인을 내쫓고 날로 삼키려 드는 짓거리를 말하는 것이오? 그게 당신들의 정도요?”
“핫,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무 그리 날카롭게 굴지 말게나. 좌우간에 지금 자네가 상대해야 할 적은 따로 있지 않은가?”
“…….”
양호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양호명의 말투는 퍽 거슬렸으나 딱히 거짓의 기색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벽은 마땅히 이을 말을 찾기 어려웠다.
분명한 것은 점창이 명명백백한 도가문파이자, 무당과 같은 정도맹의 일원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눈앞의 양호명이 사문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거짓을 말할 인물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득 기묘한 기분이 스쳤다.
숭무관주 남궁천수와 정검문주 양호명은 함께 손을 잡다시피 한 채 호남 사파무림을 핍박했다.
허나 남궁천수는 원수로 남아 이벽의 손에 쓰러졌고, 양호명은 이제 와 돕겠다는 말을 꺼내고 있다.
“…좌우간 쓸데없는 방해만큼은 참아주길 바라오. 어차피 때가 되면 알아서 달아나야 할 테지만.”
“핫, 내 걱정을 해주는 건가?”
양호명이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마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좌우간 이벽은 난처함을 느꼈다. 송영영이 데려온 인물이지만, 양호명에 대해서는 입장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그날 밤.
일행은 마차를 멈추고 다시 야영을 했다. 마부 사내가 불을 피웠고 일행은 식사를 나누었다.
훅, 후욱.
그리고 이벽은 지난 며칠간 줄곧 그래왔듯이 월향과 함께 도살지도의 수련에 나섰다.
성취는 없지 않았다.
월향의 연주하는 화영지정에는 폭주하는 적파심공의 내력을 억제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에 노출되기를 수없이 반복하자 이내 그 음색이 이벽의 머리 속에 ‘새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웅.
“…….”
급기야 이벽은 연주를 듣지 않고도 스스로 화영지정의 곡조를 떠올렸고, 꽃의 환영을 일으켰다.
그렇게 월향의 도움 없이도 폭주 상태에 접어든 적파심공을 가라앉히는 것에 성공했다.
예상치 못한 성취였다.
“대, 대단해요, 소협. 성공했네요! 이, 이렇게 며칠 만에 제 비전이 전수되다니!”
“고맙소. 소저 덕분이오.”
“그리고 마침내 저는 아무것도 줄 게 없어졌네요. 아하하…….”
허나.
이벽은 여전히 답답함을 느꼈다.
도살지도의 억제력을 얻었으되, 적파심공의 강기를 펼치지 못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방법이라면 잘 알고 있다.
단지… ‘선’을 넘어버리고 나면 그 순간 혈기에 잠식당해 최소한의 이성조차 남지 않게 되는 것이 문제였다.
백룡강과 남궁천수와의 일전을 돌이켜보면, 만들어진 강기가 일단 분출되고 나서야 어느 정도의 이성이 돌아왔었다.
“…….”
어쩌면… 살기의 본질은 통제되지 않는 것에 있듯, 적파심공의 강기는 멀쩡한 정신으로는 끝끝내 손에 넣을 수 없는 종류의 힘인지도 모른다.
“대주.”
밤은 깊어졌다.
월향이 잠에 들고 혼자 남은 이벽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찰나였다. 송영영이 다가왔다.
“송영영, 안 자고 뭐하나?”
“…상황은 알겠어. 남궁세가의 가주랑 싸우려면 일단은 그런 검에라도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
“…….”
“불안해?”
“…그럴 수도 있겠군.”
문득 이벽은 깨달았다.
비무를 약조한 날은 어느덧 사흘 후이며 일행은 안휘의 경계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적의 강함을 생각하건, 혹은 언미희를 생각하건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내가 수련 도와줄까?”
송영영이 다시 말했다.
“…뭘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뭐든 간에. 내력의 통제가 잘 안 되고 있는 거잖아? 그런 거라면 내가 상대해줄게.”
“……!”
일견 솔깃한 이야기였다.
줄곧 가상의 적을 상대로 도살지도를 휘둘러왔다.
허나 진짜 살아있는 누군가와 검을 나누는 것과 경험을 비할 수는 없다.
특히 송영영의 검이라면 그 자격은 차고 넘친다. 강기를 떠나 어쩌면 새로운 실마리가 잡힐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나 이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행을 상대로 도살지도를 휘두를 수는 없다.
“괜찮다.”
“걱정 마, 안 죽어.”
“…내가 안 괜찮다.”
이벽은 단호하게 돌아섰다.
공포는 허상이되, 갈피를 잃은 검이 소중한 이들을 해칠 수도 있다는 공포는 허상이 아니다.
퍽 오래된 생각이었다.
때문에 여태껏 단 한 번도 일행을 상대로 도살지도를 수행하지 않은 것이다. 허나.
“그것 괜찮은 생각이군.”
그때, 양호명이 끼어들었다.
* * *
“대강 알겠네. 살기가 짙어 통제가 어려운 검이므로 동료를 상대로는 휘두르지 못한다… 뭐 그런 거 아닌가?”
양호명이 다가왔다.
이벽과 송영영의 사이에 섰다.
“그렇다면야 나는 자네의 그 무엇도 아니니 괜찮지 않겠나?”
“…….”
이벽은 잠시 생각했다.
“그건 내 쪽의 사정이지, 당신의 사정은 아닌 것 같군. 이러는 이유가 뭐요?”
“말했잖나? 자넬 도우러 왔다고.”
양호명이 웃는 낯을 보였다.
“아무래도 신뢰를 얻지 못하는가 본데, 무인 간의 응어리는 이런 식으로 푸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또한.”
우드득, 우득.
양호명이 어깨를 풀었다.
“그 나이로 절정에 오른 천하제일 후기지수의 검이 대체 어떤 검인지, 개인적으로도 흥미로워서 말이지.”
혹하는 마음을 이벽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양호명 정도의 고수가 상대해준다면 오히려 부탁을 할 법한 입장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철컥, 이벽은 발검했다.
“그 도움은 기꺼이 받도록 하지. 자칫 다칠 수도 있소만… 원망치는 말아주시오.”
“그야 이를 말이겠나?”
철컥, 양호명이 발검했다. 이내 양호명의 기세가 무겁게 일어나며 주변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쳇.”
송영영이 작게 혀를 찼으나 이내 한켠으로 물러섰다.
스윽.
양호명이 자세를 낮추었다. 오른쪽 어깨를 한껏 당긴 채 칼끝을 이벽에게 겨누었다.
‘사일검법.’
이벽은 일섬룡 창성을 생각했다.
허나 제아무리 오룡삼봉이라 한들 후기지수와 절정고수를 비교할 수는 없다.
우우웅.
이벽은 다시 적파심공을 일으켰다. 마음 속에서 진득한 피 냄새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후욱!
살기가 피었다.
흠칫, 양호명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린 그 순간이었다. 탓, 이벽이 땅을 박찼다.
도살지도(屠殺之刀).
일 초식, 난(亂).
채앵!
한 번의 검이 틀어막혔다.
허나 일 검은 시작에 불과했다. 도살지도 일 초식은 튕겨나면 그 여파를 빌어 다시 상대에게로 향한다.
난도질을 멈추지 않는다.
챙, 채앵!
“하하, 으하핫! 이거 살이 떨리는구만! 실로 삿되기 짝이 없는 검이로다!”
슥.
그때,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양호명의 검끝이 찌르기로 들어왔다.
허나 당황할 이유는 없다. 일 초식의 연장선상에서 이벽은 맞부딪혀 쳐내려 했다.
그러나 검과 검이 부딪히는 순간, 양호명의 검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충돌 직전, 검끝이 ‘멈춰섰다’.
시간차를 이용해 충돌을 피하고 다시 전진한다. 훅, 이벽은 재빨리 몸을 빼냈다.
“하, 뭔가?”
양호명이 말했다.
“…….”
이벽은 소매에 뚫린 구멍을 확인했다.
“다쳐도 원망하지 말라더니 왜 자네가 먼저 물러서나? 그래가지고 수련이 되겠나?”
하핫, 양호명이 호탕하게 웃었다.
“흐핫! 이거 기대에 영 못 미치는군 그래. 나조차 어쩌지 못해서야 대체 남궁세가주를 어찌 상대하려고 그러나?! 크하하, 으하하하!”
“…저기 아저씨, 지금 혹시 옛날 일로 화풀이하는 거 아니지?”
“와하핫, 흠, 크흠! 그게 무슨 소리요, 소저? 내 한 몸 아끼지 않고서 수련을 돕고 있지 않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