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46)
252화. 엎드린 아미 (2)
개방은 천진의 본단을 버렸다.
그리고 신임 방주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은 소림이 자리한 하남 숭산 부근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유는 물론, 기존의 본단이 자리한 위치가 사실상 ‘의혈맹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산동의 황보세가와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이었다.
“…….”
허나 정진사태의 설명 속에서.
이벽은 ‘말로 꺼내지지 않은’ 다른 이유를 생각했다.
개방의 본단이 황보세가와 가까운 것은 딱히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제 와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은… 역시 취풍신개가 권왕에게 당한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잘 알겠소.”
어쨌거나.
이벽은 개방과의 접선을 위해선 소림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돌이켜보면 취풍신개와 처음 만났던 곳 역시 소림의 산문 바깥이었다.
“장문인께서는 포로들의 처분에 대해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이벽은 다음으로 할 말을 꺼냈다.
“…….”
그 순간, 정진사태의 미간이 흔들렸다. 이내 온화한 여승의 얼굴에 은은한 분노가 서렸다.
당가와 청성.
아미의 입장에선 양쪽 모두 무도한 침략자이므로, 장문인의 의사에 따라 응당한 처분을 가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허나.
이벽은 당려옥을 생각했다.
그녀를 생각하면 입장은 퍽 복잡해졌다. 다만 아미 측에서 어떠한 결정이 내려지건—,
“…그야 모두 풀어줘야겠지요.”
허나 그때였다.
정진사태의 입에서 이벽의 예상과는 전혀 의외의 답이 흘러나왔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말이오?”
“그렇소.”
정진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로 인해 이 미욱한 몸이 당연한 사실을 이제서야 겨우 깨달았소이다.”
다시 쓴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아미의 땅을 버릴 수 없다는 이 몸의 미련한 고집으로… 소협이 아니었다면 귀한 제자들의 목숨을 잃을 뻔했소.”
“…….”
“마음과 같아선 저들의 단전을 모조리 폐하고 산문 밖으로 내던지고 싶으나… 이제 와 저들의 목숨을 빌미로 무언가를 받아낸들 지킬 힘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소이까?”
심지어.
정진사태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잠깐의 침묵이 스친 뒤, 그녀가 다시 말을 꺼냈다.
“제자들이 몸을 추스르는 대로… 우리 역시 개방과 마찬가지로 이곳 아미산을 떠나 소림으로 향할 생각이오.”
“……!”
“자, 장문인 그게 무슨…!”
불쑥 정연화가 끼어들었다.
허나 정진사태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어떤 말도 잇지 못했다. 큭,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이내 이벽이 말했다.
다시 정진사태의 말이 이어졌다.
“그야 물론이오. 딱히 복잡할 것도 없는 일이지. 과거, 무림맹이 사분오열되고도 그 이름과 명분을 지키고자 했던 우리들은… 더 이상 저들과 ‘협상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기 때문이외다.”
* * *
이벽은 복호사의 경내에 처소를 안내받았다.
물론, 마음은 당장이라도 소림을 향해 떠나고 싶었으나 아미의 사정과 떠안은 책임을 생각해 이틀 정도는 묵어가기로 했다.
“은공! 식사하세요!”
매 끼니 때마다 정연화는 손수 밥상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넙죽넙죽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이래 봬도 절간인지라 은공께 대접해드릴 거라곤 순 풀떼기밖에… 혹 입에 안 맞으시면 제가 몰래 살계를 열어서라도—!”
“…괜찮소.”
이벽은 그녀가 좀 부담스러웠다.
그 행동거지에는 어딘지 모르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의 언미희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어찌 되었건 서둘러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이벽은 정연화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가라앉은 경내의 공기 속에서.
이벽은 대강의 마음을 정리했다.
해가 저무는 무렵, 이벽은 마루에 정좌하고 앉았다. 눈을 감은 채 지난 일전을 복기(復棋)했다.
청성제일검 공능자의 쾌검은.
이미 목천의 경지를 지나온 자신에게조차 퍽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과연 천하의 일절이라 할 만했다.
허나.
발검과 동시에 속도를 이끌어 내는 그 원리만큼은… 청강유엽검식의 쾌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전이 펼쳐지던 당시.
이벽의 검에서 ‘청성의 흔적’이 느껴진다고 말했던 공능자의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검치 선우명이 청강유엽공을 창시하는 과정에 있어 청성이 추구하는 무리가 섞여 들어갔음은 분명한 사실인 듯했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과거, 취풍신개에게서 얻었던 쾌보마냥 그저 보는 것만으로 따라 할 수 있는 수준의 무리는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였으나.
공능자가 펼친 최후의 일검에는 그야말로 청성의 정수이자 핵심에 해당하는 초상승의 무리가 녹아있을 것이었다.
“…….”
반면.
자신이 지닌 쾌보와 쾌검의 경우, 극한의 속도를 내자 서로 간에 부자연스러운 어긋남이 있음이 드러났다.
서로 다른 곳에서 비롯한 기예는.
제아무리 능숙하게 펼쳐낸들 결국은 두 개의 동작일 뿐, 근본적으로 하나의 동작으로 합쳐질 수는 없는 것이다.
잠시간 해결책을 궁리해보았으나, 그리 쉽게 풀릴 문제는 아닌 듯했다.
이내 이벽은 생각을 미뤄두었다.
자신의 검에 그러한 문제가 있음을 알아챈 것만으로도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다만.
‘…어려운 문제로군.’
좀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벽은 등천의 힘을 통해 공능자의 검로를 방해했고, 어렵지 않게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허나.
만일 그가 ‘같은 수준의 깨달음’에 이른 이였다면… 그때 이벽은 자신이 과연 그의 쾌검을 당해낼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었다.
더 나아가서는.
직, 쾌, 강, 곡, 변, 유.
청강유엽검식에 포함된 여섯 개의 무리 모두가 그 ‘뿌리’에 해당하는 도가의 절대고수를 상대하게 되었을 때 제힘을 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유검은.
검존의 태극을 당해낼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점창의 직검, 종남의 강검, 곤륜의 곡검, 화산의 변검 역시 당해낼 수 없을 것이었다.
“…….”
과거, 태극검존의 제자 송영영은.
이벽의 청강유엽검식을 들어 도가의 검들을 짜깁기했을 뿐인 ‘빈 껍데기’라고 하였다.
물론, 그 여섯 개의 묘리가 하나로 모여든 창공비검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쉬이 깨지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허나.
공능자와의 싸움에서, 이벽은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쾌의 묘리 외의 어떤 묘리도 꺼내지 못했다.
그 어떤 신공절학이라 한들.
펼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쉽지 않군.’
물론.
가장 좋은 것은, 그러한 절대고수들과 맞설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일 테다.
다만 무림의 은원이란.
그저 혈마의 뒤를 쫒고자 할 뿐인 자신을 또다시 어디로 몰고 갈지, 좀처럼 예측할 수 없었다.
“…….”
그즈음 이벽은 눈을 떴다.
문득 저만치에서 다가올지 말지를 머뭇거리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늦은 시간에 어떤 일이시오?”
이벽이 말했다.
흠칫, 기척이 몸을 떨었다. 이내 인영이 서서히 이벽에게로 다가왔다. 옅은 달빛에 여인의 흰 얼굴이 비추었다.
“…혹 수행에 방해가 된 건가요?”
“딱히 그렇지는 않소. 어차피 머리 싸매고 있는다고 해서 당장에 해결될 문제도 아닌 것 같고.”
“…그렇군요.”
그녀는 당려옥이었다.
이벽은 그녀에 한해 포박을 풀어주었고, 자유롭게 움직일 권한을 주었다.
당장의 입장을 떠나 옛일을 생각하면 서로 간에 그 정도의 신뢰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서서, 당려옥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이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컸네요, 소협. 예전에는 무공만 드럽게 센 애송이 같았는데… 이젠 정말로 어엿한 사내가 되었어요.”
“…하고 싶은 말이 뭐요?”
“글쎄요. 사실 궁금한 건 제법 많지만… 아마 대부분 대답을 안 해주실 것 같아서요.”
당려옥이 생긋 웃었다.
“…신변이라면 걱정 마시오. 어찌 되었건 소저나 당가의 무인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이벽이 말했다.
정진사태는 당가와 청성의 무인들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풀어주겠노라 했다.
허나 이벽은.
습격을 당하고도 협상은커녕 오히려 추가적인 핍박을 피해 아미산을 떠나고자 한다는 정진사태의 말에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
이후 이벽은 포로에 대한 처분을 넘겨받았다. 고로 이벽은 현재 당려옥의 처우에 대한 결정권을 지니고 있었다.
“당가 차원에서 두 번 다시 아미를 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돌려 보내드릴 수 있소.”
“…….”
당려옥은 말없이 웃었다.
물론, 당려옥에게 그런 대답을 멋대로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것쯤은 이벽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대답하실 수 없나 보군. 허나 그래도 괜찮소. 내가 직접 당가까지 모셔다 드릴 생각이니.”
당가와 청성.
각 문파에 당려옥과 공능자를 데려다준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의혈맹, 그리고 정도맹과 직접 ‘대화’를 한다.
해당 세력들은 어차피 소림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딱히 성가신 일도 아니었다.
“…소협은 역시 ‘협객’이시군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다시 당려옥이 말했다.
오 년 전, 비룡대를 습격한 그녀를 무사히 풀어주었을 때에도 당려옥은 같은 말을 했었다. 허나.
“딱히 그렇지는 않소.”
“아뇨, 제 말이 맞아요. 천하의 어느 광인이 불의를 보았다는 이유로 남궁세가나 사패련 같은 곳에 홀로 ‘들이받을’ 생각을 하겠어요?”
“…….”
“협객은 남들의 눈에는 광인과 별다를바 없거든요. 보통은 옳고 그름을 알아도 그렇게까지는 못 하죠. 힘이 모자라거나, 겁이 많거나, 혹은 잃을 것이 많거나…….”
이벽은 문득 당려옥의 어투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각을 느꼈다.
“…거듭 말하지만 나 역시 협객은 아니오. 애당초 그렇게 협의에 투철했다면 멋대로 무림을 떠나지도 않았겠지. 또한.”
좌우간 이벽은 답할 말을 찾았다.
“내 ‘사적인 이유’로 소저와 청성의 무인들을 그리 다르게 대우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
당려옥의 미간이 흔들렸다.
이벽은 공능자를 산공독으로 제압하고 포박하여 묶어둔 반면, 당려옥에게는 아무런 손을 대지 않았다.
허나.
기실 아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똑같은 침략자’인 것은 당가나 청성이나 매한가지이며, 고로 포로의 대우를 다르게 할 이유 또한 없다.
그저 그것은.
이벽의 ‘마음’일 뿐이었다.
그것은 정(正)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며, 오히려 사파의 마음가짐에 가깝다.
허나 이벽은 개의치 않았다.
과거와 달리, 스스로가 정에 속한다는 강박은 퍽 희미해졌고 그 덕에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사적인 관계라.”
당려옥이 희미하게 웃었다.
“뭐,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헌데 소협, 그렇다면 왜 다시 무림으로 나왔어요?”
퍽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어투였다. 허나 이벽은 그것이 그녀의 본론임을 이해했다.
“…할 일이 생겼소.”
그러나 물론.
그 이상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군요. 헌데… 그 할 일이란 게 혹시 사패련에 이어 이번에는 우리 의혈맹을 상대로 ‘들이받으려는’ 건 아니죠?”
“…….”
“그것만은 참아주세요. 제발요.”
당려옥이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명줄이 짧은 건 협객의 숙명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소협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요. 정말로요.”
그 말은 즉.
이벽이 어떤 경지를 이뤘건 간에.
의혈맹을 적대시한다면…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문득.
이벽은 오 년 전 당려옥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했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의혈맹주, 권왕 황보혁은 ‘천하제일인’이기에 당가로서는 그 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그리 새겨듣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허나.
그 사이 이벽은 황보혁을 만났고, 단 한 번이나마 부딪혀보기도 했으며, 그 압도적인 기세를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권왕 황보혁은.
정진사태의 말대로라면.
이미 같은 천하십대고수 중 최소 ‘두 명’ 이상을 쓰러뜨린 셈이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당대의 ‘천하제일인’일지도 모른다.
“…그렇군.”
이내 이벽은 답했다.
“너무 걱정은 마시오. 말했듯이 나도 달리해야 할 일이 있고, ‘우선’은 대화를 시도할 생각이니.”
“…….”
이유야 어쨌건, 이벽은 당려옥이 건네는 말들이 퍽 진심 어린 걱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느꼈다.
고로 날이 선 답을 건네지는 않았다.
“밤이 늦었소. 이만 쉬시오.”
“…네, 그래야겠네요. 아닌 밤중에 실례가 많았어요.”
하아, 그리고 당려옥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내 돌아서서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 역시 말 몇 마디로 이벽의 뜻을 바꿀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휙.
“…아, 그리고 어제는 구해줘서 고마워요. 사실 그 말이 제일 하고 싶었어요.”
몇 걸음 멀어지던 당려옥이 문득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젯밤, 공능자는 만천환을 쥔 당려옥의 손을 통째로 베려 했으나 이벽의 검에 의해 가로막혔다.
“…신경 쓰지 마시오.”
“아뇨. 소협이 아니었다면 자칫 외팔이가 되어서… 무인으로서의 삶은 물론 평생 시집도 가기 어려울 뻔했으니까요.”
“…….”
“뭐, 사실 별로 가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요. 선우세가의 예전 소가주가 살아있었다면 모를까?”
“…….”
오호홋, 당려옥이 웃었다.
그리고 마침내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