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34)
342화. 집결 (3)
타앗.
이벽과 비룡대, 그리고 산동의 초입에서 한 자리에 모여든 무인들은 마침내 길을 나섰다.
타아앙. 타앗.
일제히 경신공을 펼쳤다.
이내 수십여 개의 인영이 흡사 한 떼의 제비무리처럼 지면과 허공을 오가며 쾌속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그 머릿수는 백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적은 숫자에 불과했으나, 동시에 그 한 명 한 명이 모두 절정 이상 고수로 이뤄진 가공할 전력이기도 했다.
물론 경신공 정도로.
힘겨워할 이는 아무도 없다.
“고마워요, 소협.”
제남으로 나아가는 한편.
월향이 이벽에게 말을 꺼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오?”
“조금 전에요. 가엾은 아이들, 그리고 양민들에게… 소협께서는 ‘희망’을 주셨잖아요?”
“…….”
악적들로부터 구해낸 양민들을 떠나오기에 앞서, 이벽은 그들에게 ‘겨울이 오기 전까지 모든 것을 다시 되돌려 놓겠노라’ 약조했다.
그리고 이름을 묻는 소년에게.
‘낙검신룡 이벽’이라 답해주었다.
또한 그것은 그와 같은 별호가 이벽에게 붙여진 이래, 처음으로 자신의 입을 통해 내세운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벽에게 있어 퍽 어색한 이름이었으나, 어찌 되었건 제법 알려진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낙검신룡 이벽.
과거 정사무림을 뒤흔들어놓았던 천하제일 후기지수의 이름이자, 의혈맹의 ‘공적’으로 선언되기도 했던 이름이기도 했다.
또한.
근래에는 소림과 개방의 편에 서서 남궁세가의 침공을 막아내고 남궁세가주 남궁천승을 쓰러뜨린 것으로 다시금 호사가들을 뒤흔들었다.
물론 양민들에게 있어.
낙검신룡이건 의혈맹이건, 무림의 이야기 따윈 자신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그저 별천지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의혈맹은 마교가 되었고, 황보세가는 절망의 불길이 되어 들을 태우듯 양민들의 삶의 터전을 부수었다.
별천지의 이야기는.
냉혹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몇 번이고 의혈맹과 대척점을 이룬 것으로 알려진 젊은 기재 낙검신룡이란 이름은.
한 줄기 ‘희망’이 된 것이다.
“똑같이 어려운 시간을 맞이하더라도… 보다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죠.”
“…….”
“소협께서는 스스로 ‘영웅’이 됨으로써… 지금 이 순간, 가장 낮은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내어주신 거예요. 그렇죠?”
월향이 미소를 보였다.
새삼스럽게도 그녀는 하오문주였으며, 또한 이벽은 그에 버금가는 하오문 수호대주였다.
허나 이벽은 할 말이 궁색했다.
그만큼이나 깊이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딱히 사실과 다른 것 또한 아니었다.
“핫, 훌륭하군.”
다시 그때, 또 하나의 인영이 이벽에게로 다가오며 말을 붙여왔다. 정검문주 양호명이었다.
“자네, 생각보다는 영악한 구석이 있구만?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당해버리고 말았어.”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그야 그렇지 않나? 조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양민들에게 자네의 별호를 박아넣는다면… 황보세가의 몰락 이후 산동의 민심은 결국 우리 정도맹이 아닌 자네를 향하게 될 테니 말일세.”
“…….”
이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핫, 농담일세. 정색하지 말게나. 자네가 그렇게까지 깊은 계산을 했을 거라 생각지는 않네.”
이내 양호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그에게 악의가 없음은 이벽 또한 알고 있었다. 민심이건 무엇이건, 결국은 황보세가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다만… 계산 없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점이 더더욱 자네의 무서운 점이지만 말일세.”
양호명이 퍽 진지한 얼굴을 했다.
“내 일전에도 말했지만, 자네는 역시 ‘난세의 영웅’일세. 또한 바로 지금 그 누구보다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지. 무림을 위해서도, 무림 밖을 위해서도 말일세.”
“…….”
거듭 이벽은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산동에 접어들기 전에도 양호명은 이미 이벽에게 그와 같은 이야기를 꺼냈었다.
그리고 이벽은.
다시금 같은 위화감을 느꼈다.
고작해야 검 한 자루를 다룰 뿐인 자신을 중심으로 너무 많은 것들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와, 이게 누구예요?!”
그때였다.
돌연 월향이 반색했다.
“어쩜, 가가! 정말 무정하세요. 오 년씩이나 연락 한번 없이… 그동안 이 정인이 한 번도 보고 싶지 않으셨나요? 네?”
흠칫.
양호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벽 일행과 함께 남궁세가의 본단을 쳤을 무렵,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정인 운운하며 월향을 들고 튀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역시 소녀와 같은 천박한 사파의 계집은 처음부터 정도를 추구하는 가가를 모실 자격이 없었던 건가요?”
“…커험! 에이씨.”
훅, 양호명이 고개를 돌렸다.
허둥지둥 이벽에게서 멀어져 버렸다. 이벽은 소리 내어 웃음을 흘리는 월향을 바라보았다.
“호홋! 실례했어요, 소협. 제가 사실… 양 대협과는 정사를 초월하여 마음을 나눈 사이거든요.”
“…….”
한순간 이벽은.
그녀의 짓궂은 표정에서 수호대의 월향이 아닌 천향루주 지소약의 그림자를 엿보았다.
물론,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이벽이 떠올린 것은 화영지정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던 어린 날의 그녀와 도가의 무복을 입은 스승 이진천의 모습이었다.
“응? 왜 그래요? 소협?”
“…아무것도 아니오.”
천향루에서 재회했을 당시, 그녀가 이벽에게 해주었던 이야기에는 분명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허나 그것은.
아마도 최후의 일전을 앞둔 지금 굳이 끄집어내야 할 문제는 아닐 터였다.
이벽은 고개를 돌렸다.
타아앙.
이후 한나절에 걸쳐 무인들은 제남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날이 저물 무렵, 늘 그렇듯 인적이 드물고 추적이 어려운 산자락에서 멈춰 섰다.
모여든 이들은 모두 정예무인들이었으나, 이벽은 그중에서도 다시 각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만을 불러 모았다.
비룡대 일행을 비롯해.
개방의 철면개와 소림의 공암, 하오문의 월향, 당가의 당명오와 암영각의 천소진, 해남의 파한철이 한 자리에 모였다.
우웅, 사락사락.
이벽은 등천의 영역을 일으켰다.
나뭇잎이 어둠 속으로 퍼져나가며 공간을 점거했다. 흠칫, 모여든 이들의 표정이 작게 흔들렸다.
비록 이 자리에는 혁대웅 외 등천의 힘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절대고수는 없었으나.
물론, 주변의 기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경지가 낮은 이 또한 없었다.
“…소리를 차단하셨군요?”
월향이 말했다.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할 얘기가 있소.”
“…….”
“우선은… 새삼스러운 이야기이오만, 이렇듯 적의 본거지까지 목숨을 걸고 모여주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겠소.”
그리고 이벽은.
정도맹과의 동맹을 둘러싼 자초지종의 설명을 시작하여, 이내 본론에 해당하는 만류일원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사라락.
이벽의 나뭇잎에 의해 격리된 공간 안에서 더없이 진중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렇군요.”
이내 다시 월향이 답했다.
그리 놀라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기실 전장에 나서기에 앞서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음은 능히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비무회를 통해 시간을 끌고.
‘정도맹은 진법의 안을, 자신들은 진법의 밖을 맡는다’는 역할의 배분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진법이 천하에 존재하다니… 솔직히 쉬이 믿겨지는 이야기는 아니구려.”
철면개가 팔짱을 꼈다.
“물론, 충분히 이해하오.”
이벽이 답했다.
도가무공을 제외한 내력의 운용을 막아버리는 만류일원진의 존재는… 선뜻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기실 말하는 이가 절대지경에 이른 이벽이 아니었다면 한낱 헛소리로 치부되었을 터였다. 허나.
이벽뿐 아니라 혁대웅을 비롯한 비룡대원들까지 거들고 나서자 이내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없게 되었다.
“물론 맹신은 할 수 없겠소만. 내 생각에는 정도맹의 계획에 어깃장을 놓을 이유는 없을 것 같군.”
“…잘 알겠소. 뭐, 소협께서 직접 겪어본 데다 그리 판단하셨다면야 물론 따라야지 별수 있겠나?”
이내 다시 철면개가 답했다.
“고맙소, 걸개.”
“하핫, 고맙기는 무슨. ‘무림맹주’의 판단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가 대체 누굴 믿고 따르겠소?”
“…….”
철면개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쨌건 당장은 반가운 소식이네. 잘만 풀리면 죽는 사람 거의 없이 돌아갈 수 있겠는데?”
이내 천소진이 말을 받았다.
그렇게 대화는 일단락되었고, 각 세력의 우두머리들은 저마다 계획을 머릿속으로 정립했다.
다시 새벽 무렵.
일행은 이동에 박차를 가했으며 그 이상 여타의 적들과 부딪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튿날 오전.
무인들은 마침내 저만치에 모습을 드러낸 제남의 성벽을 마주했다.
또한.
그 성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보란 듯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한 무리의 무인들과 마주쳤다.
“안 늦게 왔구만. 허헛!”
노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정도맹주, 태극검존 태허진인.
또한 그 뒤로 자리한 이들은 물론 서천무존 정룡과 송영영, 청성제일검 공능자를 비롯해 정도맹을 대표하는 고수들이었다.
“검존, 상황은 어떻소?”
“그야 나도 잘 모르네. 이제부터 함께 저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나?”
“…우문이었군.”
핫, 노인과 청년 사이로 미소가 오고 갔다. 진법의 주체인 환야는 이미 제남의 성내에 몸을 숨기고 있노라 하였다.
“그럼 어디, 현세에 재림한 천마의 잘난 얼굴을 보러 가볼까 하는데… 준비는 됐나?”
“물론이오.”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
이내 이벽과 검존을 선두로 한 두 세력은 나란히 길을 따라 제남으로 나아갔다.
당당히 정문으로 향했다.
당당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황보혁으로부터 보내진 초대장을 받고 비무회에 참가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이기 때문이었다.
“퍽 든든하구먼.”
다시, 검존이 말했다.
“무슨 말씀이시오?”
“그야 오 년 전만 해도 그냥 새끼 미꾸라지에 불과했는데 말이지. 어느덧 어엿한 용이 되어… 감히 내 옆을 나란히 걷고 있으니 말일세.”
“…….”
“또한 괘씸하기도 하네. 이 검존이 키워주겠다고 먼저 손을 뻗었는데도 기어코 달아나서 제멋대로 커버렸으니,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 아닌가? 허헛!”
오 년 전.
어느 의방에서 이벽과 비룡대 일행을 구해주었던 검존은 이벽에게 무당의 제자가 되라는 제안을 해왔으나.
이벽은 물론 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명심하게.”
“무얼 말이오?”
“자네의 조부이신 검치 선배… 그분께서는 누가 뭐래도 무당의 제자셨네. 나도 애송이 적 먼발치에서나마 뵌 적이 있지.”
“…참으로 ‘먼발치의 관계’로구려.”
“그래도 우리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허헛, 검존이 수염을 쓸었다.
말마따나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기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뒤를 따르는 이들 앞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최소한.
마교라는 공공의 적을 앞둔 이 시점에서, 두 세력은 서로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저벅.
그렇게, 정사무림은 나아갔다.
이내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중이 있는 것 같소.”
그리고 잠시 후.
이벽은 보란 듯이 제남의 성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한 개의 인영을 발견했다.
인영은 구척 장신의 사내였다.
또한 그 얼굴은 이벽이 기억하고 있는 권왕 황보혁을 놀랄 만큼 닮았으나.
그 얼굴에 감돌고 있는 것은 예의 권태로움이 아닌 퍽 호방한 미소였다.
“어서 오십시오, 동도 여러분!”
일행이 다가서자.
인영이 포권과 함께 소리쳤다.
“천하무림 각지에서… 본가의 초대에 응해주신 동도 여러분께 본가를 대표하여 감사드리겠습니다!”
우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성문과 일 장가량의 거리를 두고서 일행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저는! 미욱하나마 본가의 소가주를 맡고 있는 황보준이라 합니다!”
“…허헛, ‘동도’라?”
저벅.
검존이 한 걸음 나아갔다.
“황보 소협. 오랜만일세. 허헛!”
“검존 선배를 뵙습니다!”
사내, 황보준이 다시금 포권했다.
그는 권왕 황보혁의 장남으로, 황보세가의 소가주이자 과거 오룡삼봉의 일인으로서 질풍권룡(疾風拳龍)이란 별호로 불리던 사내이기도 했다.
“이거 몰라보게 컸구만, 그래?”
“하핫, 소림에서 뵈었던 것이 십오 년쯤 전이니… 핏덩이가 조금은 제 몫을 할 수 있게 된 셈이지요!”
황보준이 능청스레 웃었다.
검존의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헌데 말일세.”
우우웅.
그리고 다음 순간.
검존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등천의 영역이 일어나며, 물과 같은 기세가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터… 우리 강호무림이 도를 저버린 마교의 악적들 따위와 ‘동도’가 되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군 그래.”
검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모든 이들의 귀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