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82)
85화. 제갈성 (1)
타닷.
이벽은 사당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곧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당을 둘러싼 숲은 고요하다. 그 풍경에는 언뜻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푸드덕.
저만치에서 새가 날았다.
“…….”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귀에 들리는 소리 사이로 어긋난 마차의 바퀴처럼 미묘한 시간의 차이가 느껴졌다.
이벽은 현기증을 느꼈다.
거리감이 마비되기 시작한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때와 다르다.
훅, 선천의 힘이 청강유엽공을 일으켰다. 내력이 혈로 안을 흐르며 몸의 이상을 가다듬는다.
이벽의 손이 검을 향했다.
“나와라.”
“…이런. 놀랍군요.”
이벽이 말했다.
그 순간 정면의 나무 사이로 인영 하나가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낙검신룡 이벽 소협이시죠? 과연, 천하제일 후기지수니 하는 말들이 마냥 허명은 아니었나 보군요.”
상대는 약관 무렵의 청년이었다.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으나 정갈한 차림새며 호리호리한 맵시는 오히려 문사에 가깝게 느껴졌다.
아니, 그것보다도.
“처음 뵙는군요. 저는 제갈가의 제갈성이라 합니다. 미욱하나마 본가의 소가주를 맡고 있지요.”
“…….”
청년이 가볍게 목례했다.
그리고… 이벽은 그 유한 생김새의 어딘가에서 제갈소미와 닮은 흔적을 찾아내었다.
이름을 듣지 못했다면 아마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인식하고 나자 그 사실은 퍽 명백하게 다가왔다.
“편히 주무시는 사이 본가로 모실 생각이었는데 설마 눈치를 채실 줄은… 안타깝게 됐네요.”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없었다.
저벅저벅.
제갈성이 사당이 자리한 공터의 외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흡사 산책이라도 하듯 가벼운 걸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가급적 피를 보고 싶지는 않은데… 이미 제 손아귀에 들어오셨으니, 순순히 포박당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럴 수는 없을 것 같군.”
“아하하, 그건 그렇겠죠? 그렇다 한들 보통은 양의진에 사로잡히면 어지러워서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터인데… 놀랍군요. 놀라워요.”
제갈성이 걸음을 멈추었다.
하아, 성가신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밖에 없겠군요.”
“…….”
이벽은 과거를 떠올렸다.
제갈소미의 진에 빠졌던 때.
이벽은 눈이 아닌 귀를 믿었다.
끝끝내 비무에는 지고 말았으나, 날아들던 비도를 쳐내는 것에는 성공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제갈성과의 몇 마디 대화 속에서 이벽은 지금의 감각이 그때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어긋남의 정도를 가늠한다.
그에 맞추어 움직이면 그만이다.
“나야말로 경고하겠소.”
이벽이 말했다.
“…‘경고’ 말입니까?”
“그렇소. 지금 당장 진을 풀고 물러선다면 피를 볼 일 없이 보내드리도록 하지.”
이벽은 이 상황이 난처했다.
제갈가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다.
앞서 제갈세가를 떠올리던 제갈소미를 떠올렸다. 표정에 담긴 감정을 모두 읽을 수는 없었으나… 그것은 회한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제갈소미는 낙검문의 제자가 되면서도 제갈가의 성씨를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아하하! 과연!”
제갈성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렇군요. 말인즉슨 진법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이, 저 정도 무인은 언제든 재껴 버릴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
약간의 오해가 생겼군.
그러나 굳이 정정하지는 않는다.
“…이것 참.”
긁적긁적, 제갈성이 머리를 긁었다.
“난처하군요. 싸움을 좋아하는 성미는 아니라…, 퍽 솔깃하기는 한데, 저로서도 처한 입장이란 게 있으니 물론 그럴 수는 없지요.”
“…의혈맹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죠, 뭐. 좋건 싫건 한 배에 올라탄 입장이니, 물고기 밥이 되지 않으려면 노 젓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건 싫건’이라.
제갈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개인적인 이유로는, 그러한 ‘경고’까지 듣고서도 그냥 물러서기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도 있겠군요. 소협께 약간의 ‘가르침’을 주고 싶어졌어요.”
“…….”
“좋아요, 이렇게 하지요.”
짝, 제갈성이 다시 손뼉을 쳤다.
이벽을 향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세 번, 소협께서 제 공격을 세 번만 받아내시면 제 패배를 인정하고 순순히 물러나도록 하지요. 어떻습니까?”
“좋소.”
“아하하, 시원시원해서 좋군요.”
제갈성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슥
다음 순간, 제갈성이 팔을 뻗었다. 소매 안쪽에서 비도가 뱀처럼 스륵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제 일 초, 가겠습니다.”
“…얼마든지 오시오.”
* * *
우우웅.
비도가 허공을 유영했다.
나아가듯 물러서고, 물러서듯 나아간다. 흡사 물살에 휩쓸린 꽃을 보는 것 같았다.
뻔히 보이고 있음에도 궤적을 읽을 수 없다. 오히려 보는 것만으로 균형감각을 흐트러뜨린다.
‘역시… 그때와 같다.’
제갈소미는 소이비도라고 했다.
다만 그때와는 달리 제갈성의 비도에는 내력이 담겨있다. 살아 움직이듯 계속해서 방향을 바꾼다면, 섣불리 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터이다.
스윽.
고로 이벽은 눈을 감았다.
귀에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발검제이식(拔劍第二式).
쾌검(快劍).
스윽, 채앵!
이벽의 검이 뽑아졌다.
타앙, 쾌속함이 허공을 베었다.
다음 순간 튕겨나간 비도가 팽그르르 회전하며 땅에 틀어박혔다.
“…허어?”
일순 제갈성이 당황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황급히 떨어진 비도를 회수했다.
“이제 두 초식이 남았군.”
“…거듭 놀랍군요. 대체 어떻게?”
“질문의 의미를 잘 모르겠소만. 날아오는 게 뻔히 보이는 이상 가만히 맞아줄 이유는 없지.”
“…….”
제갈성의 표정이 굳었다.
타앗,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표홀하게 날아오른 신형이 저만치의 나뭇가지에 착지했다. 이벽은 굳이 추격하려 하지 않았다.
“…이거 실례했군요. 부끄러운 잔재주로 소협의 손을 어지럽힌 무례를 용서하시길.”
제갈성의 미간이 흔들렸다.
‘…진법에는 문제가 없다. 헌데 소이비도를 이리도 쉽게 쳐내다니?’
처음에는 그저 알량한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마냥 그러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벽의 태연한 얼굴을 본 순간, 제갈성은 내심 욱하는 기분이 치솟았다.
진법 따위에 자신이 패배할 리 없다는 저 무인 특유의 오만함은 물론 처음 겪어보는 것은 아니다.
허나 다른 세가의 무인들과는 달리, 저자는 명실상부한 적이다. 고로 마음껏 본때를 보여줄 수 있다.
‘다행히도 준비는 충분하다.’
애초부터 팽가의 추적을 빠져나오는 것에 성공한다면 이곳으로 오리란 것을 진즉부터 예상했다.
고로 아낌없이 공을 들였다.
사실은 절정고수인 철면개를 붙들어두는 것까지 상정하여 설치해 둔 진법이다. 하지만.
제갈성이 다시 웃음을 보였다.
“제 이 초, 진심으로 가지요.”
“…….”
제갈성은 마음을 먹었다.
툭, 잔가지 하나를 부러뜨렸다.
파아앗!
일순 이벽은 눈을 의심했다.
그 순간, 사방을 둘러싼 앙상한 나무 사이로 새하얀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말 그대로, ‘피어나고 있다’.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봉오리가 자라나고, 봉오리가 꽃을 틔운다.
그것은 마치 계절을 뛰어넘어 봄을 끌어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의심해야 할 것은 눈뿐만이 아니다. 급기야는 꽃의 향기마저 맡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환영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본가의 공부가? 소협께서 보기에는 하찮은 잡기에 불과하겠지만 꽤 운치 있지 않습니까?”
“…….”
이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느새 제갈성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리는 듯했다.
‘멀고 가까움을 가늠할 수 없다.’
말인즉슨, 눈과 귀와 코가 모두 환영에 사로잡혔다는 뜻이다.
청각에 의존하여 맞춰두었던 감각이 다시 어그러진다.
후두둑.
그때, 한 움큼의 꽃이 쏟아졌다.
바람에 흩날리며 허공을 수놓는다. 그것은 말마따나 퍽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위험하다.
이벽은 직감했다.
타닷.
꽃이 스치는 순간, 이벽은 연엽보를 밟았다. 미끄러지듯 꽃 무리를 피했다.
서걱
아니, 피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옷자락 끝이 잘려 나갔다.
“…대단하시군요. 진심입니다. 이 진법 속에서 그 정도로 움직일 수 있는 후기지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
“허나 꽃이 떨어졌을 뿐, 제 검이 땅에 떨어진 것은 아니니 초식은 끝난 게 아니지요.”
후두둑.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이벽을 향해 떨어졌다.
물론, 꽃잎은 환영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벽을 노리는 것은 그 안에 감추어진 비도이다.
희미한 기감을 통해 이벽은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다해도 달리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타다닷.
이벽은 계속해서 보법을 밟았다.
꽃잎은 이벽의 뒤를 따라 계속해서 피어나고 흩날린다.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핫하하, 화우 속에서의 춤사위라! 퍽 풍류를 아시는 분이군요. 이거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제갈성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목소리의 위치는 여전히 가늠할 수 없다. 마치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동시에 말을 거는 듯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아마도 저는 소협의 십초지적도 못 되겠지요. 그런 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건 퍽 좋은 기분은 아니지요?”
“…….”
“허나 진법이란 게 원래 그렇습니다. 본래부터가 학자가 무인을 제압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이니, 이 땅에 들어온 시점에서 소협의 패배는 정해져 있던 셈이지요.”
‘…그렇군.’
제갈성의 목소리에선 은연 중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리고 이벽은 안일했음을 인정했다.
앞서 제갈소미와의 일전에 빗대어 상대의 공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우를 저질렀다.
“…….”
그리고 이벽은 고민했다.
어쨌거나 감탄은 나중 문제이며, 현재는 그것을 파훼해야 하는 입장이다.
진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렇다면… 물론 그 안에 감추어진 비도를 어떻게든 해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환각에 젖은 상태에서 믿을 수 있는 감각은 오직 어렴풋한 기감 뿐이다.
비도의 정확한 위치는 가늠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도해볼 만한 것은.
“…….”
이벽은 암영각 서촌장 천소진과의 일전을 떠올렸다. 그 마지막 초식과… 어쩌면 다르지 않다.
탓, 보법을 멈추었다.
자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호오, 춤은 그만두시는 건가요?”
후우욱.
기다렸다는 듯 꽃의 폭풍이 이벽을 감쌌다. 그리고 그 속으로 비도가 섞여들었다.
환영 속에 숨어 이벽을 노린다.
제갈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창천옥룡을 무너뜨린 낙검신룡을 다시 자신의 손으로 쓰러뜨린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퍽 통쾌한 일이 아닐 수—
번쩍, 후욱!
그때, 이벽이 눈을 떴다.
정면의 꽃잎들을 바라보았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만월(滿月).
이벽의 검이 원을 그었다.
“…뭐라고?!”
우수수.
그 순간, 꽃잎들이 일제히 원 안으로 빨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오직 단 한 장.
단 한 장의 꽃잎만이 빳빳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이벽은 ‘그 부자연스러움’을 놓치지 않았다.
채앵!
청명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분명히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비도가 쳐내어진 순간, 제갈성의 내력이 흔들렸다.
울렁.
일순 진법 전체가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 풍경이 이지러지며 제갈성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이, 이런……!”
제갈성이 당혹성을 삼켰다.
탓, 슈우욱.
허나 미처 도망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순간, 새처럼 살아 든 이벽의 검이 이미 자신의 목에 닿아있었다.
“…….”
또르륵.
제갈성의 동공이 흔들렸다.
‘죽는 건가? 이리도 허망하게?’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칼이 치워졌다.
“좋은 가르침이었소. 한 수 배웠군. 그러니 이제 그만 물러나 줄 수 없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