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94)
97화. 천수법룡
“시치미 뗄 생각은 마시오!”
“제아무리 그대가 혜공 사숙조님의 손님이라 하나, 이것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오!”
무승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이벽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이벽은 인상을 찌푸렸다.
‘…살계라니?’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
그때, 무승들 가운데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얼굴은 퍽 눈에 익었다.
앞서 이벽을 산문까지 안내했던 무리에 함께 끼어있었던 젊은 무승이었다.
“아미타불, 빈도는 덕수라 하오.”
“…….”
“간밤에 경내에서 끔찍한 살생이 있었소.”
역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니군.
허나 말인즉슨… 누가 살해당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허나 만일 그랬다면 분위기는 이것보다는 조금 더 위협적이어야 할 테다.
이벽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죽기라도 했단 말이오?”
“그렇소. 우리의… 닭이 죽었소.”
“…두 발 달린 짐승 말이오?”
끄덕, 스스로를 덕수라 소개한 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벽은 일순 할 말이 없어졌다.
“우리가 경내에서 키우던 닭들이 있는데… 간밤에 한 마리가 잔해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소.”
덕수의 표정은 침통했다.
그러니까… 닭 한 마리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렇게 우르르 몰려왔다는 뜻인가.
서서히 상황을 이해했다.
“…산짐승의 소행이 아니오?”
“아니, 그 잔악무도한 흔적으로 보건대 그것은 분명 사람의 짓이었소. 무엇보다 발자국이 남아 있었지. 그리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자… 불을 피운 흔적이—”
크윽,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서 덕수가 시선을 떨구었다. 여기저기서 무승들이 침음성을 낸다.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오?”
이벽은 황당했다.
앞서 취풍신개는 또다시 소림 측에서 얼토당토않은 시비가 걸릴 경우 개방이 책임을 지겠노라 하였다.
하지만 거기까지 갈 것도 없다.
“말인즉슨 그걸 가지고 우릴 탓할 생각인가 본데, 그게 정확히 우리의 짓이란 증거라도 있소?”
“…….”
“삶아 먹었건 구워 먹었건 나는 모르는 일이오. 우리에게 얼토당토 않은 누명을 씌울 생각이라면—”
드르륵.
“끄윽.”
그때, 처소의 문이 다시 열렸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이노무 땡중 시키들은 아침부터 왜 우르르 몰려와있어?”
파진성이었다.
몰골은 퍽 엉망이었다.
얼굴은 부어있었고, 옷에는 기름 떼가 묻어있다. 입가에는 거뭇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으, 속 부대껴 죽겠네.”
“…….”
파진성이 배를 문질렀다.
몸에서 기름의 냄새가 났다.
이벽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게도 지난밤 처소 어디에서도 파진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파진성. 혹시 닭을 훔쳤나?”
“앙?”
파진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닭? 훔치진 않았고, 그냥 주워 먹었는데?”
“…….”
“돌아다니는 닭에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그냥 보이면 먹는 거지. 원, 저 땡중놈들은 순 풀떼기만 먹고 어떻게 사는지.”
“네, 네 이놈!!”
“어, 어찌, 어찌이이—!!”
무승들이 절규했다.
“…미안하게 되었군.”
이벽은 머쓱해졌다.
상황이 퍽 황당하기는 하지만, 이쪽이 잘못한 게 맞다면 화를 내기는 뭐하다.
“아니, 송구하오만 사과한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오. 경내에서 살생을 저질렀다는 건 본산의 계율을 업신여겼다는 뜻!”
“…….”
허나 덕수는 퍽 단호했다.
“헹! 거 잘난 가르침이군. 저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픽픽 죽어 나가고 있는데 고작 닭 하나 잡았다고 호들갑을 떠냐? 누가 절간 닭 아니랄까 봐 질기기만 하고 먹을 것도 없더만?”
“네… 네 이노오오옴!!”
파진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이벽은 얼른 파진성을 가로막으려 했다. 어찌 되었건 갈등을 굳이 키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야, 비켜.”
“…….”
일순 파진성과 시선이 부딪혔다.
짐짓 흐리멍덩해 보이는 몰골이지만, 눈은 오히려 맑았다. 그 순간 이벽은 직감했다.
‘…전부 계산된 행동인 건가.’
“비룡대주!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아니, 내가 처먹은 건데 왜 자꾸 우리 대주한테 대고 뭐라 그러는 거냐?”
터벅, 터벅.
이벽을 지나친 파진성이 마당을 가로질렀다. 무승들에게 다가가며 검을 잡는다.
“케케, 보아하니 너도 닭 한 마리 핑계로 우리 대주한테 시비 한번 털어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
움찔, 덕수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래도 강기까지 본 마당에 혼자 달려들면 처맞을 게 뻔하니 참 주렁주렁 많이도 달고 왔구만? 십팔나한? 니들이 머리만 밀었지 다구리치는 동네 잡배랑 다를 게 뭐냐? 케케케!”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여러 의미로 입버릇이 안 좋으시군. 혹 내게서 계도를 받길 원하시오?”
“뭐, 소화는 잘되겠네. 끌끌!”
파진성이 이벽을 돌아보았다.
“어이, 괜찮겠지? 앙?”
“…….”
일단 싸우고 보는 것은 하책이다.
허나 이벽은 짐짓 능청을 떠는 파진성의 눈빛에서 어떤 절박함을 느꼈다.
그만의 이유가 있음을 직감했다.
이벽은 잠자코 팔짱을 끼었다. 굳이 그래야겠다면 끼어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파진성이 씩 웃었다.
채앵!
“자, 그럼 땡중 한 번 잡아볼까?”
파진성이 검을 뽑았다.
덕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머지 무승들이 널찍하게 거리를 벌리며 장내를 동그랗게 빙 둘러쌌다.
그리고 잠깐의 긴장이 일었다.
타닷.
파진성이 발을 놀렸다.
덕수에게로 거리를 좁히며 좌수의 검이 벼락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해십이검이 펼쳐진다.
차차창!
후욱, 덕수의 어깨 위로 웅혼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두 발이 제자리에 못 박힌 채, 굳건한 두 팔이 정면을 막아선다.
흡사 금빛의 벽을 떠올리게 했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파진성의 검을 상대로 단 한 방울의 빈틈조차 새어 보내지 않는다.
“나한십팔권(羅漢十八拳)이네.”
그때, 송영영이 말했다.
이벽은 흠칫했다. 옆을 돌아보자 어느새 처소를 나선 그녀가 이벽의 옆에 서 있었다.
“못 이겨. 절대로.”
“…….”
“천수법룡(千手法龍) 덕수. 저거 오룡 중 하나야. 물론 나보단 훨씬 약하지만.”
송영영이 말했다.
…물론, 파진성에게 버거운 상대라는 건 기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파진성 역시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채챙, 채앵!
과연, 덕수는 파진성의 현란한 검로를 상대로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팔의 개수가 몇 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언미희처럼 권갑을 사용하는 것도 아닐진대, 놀랍게도 맨손만으로 칼날을 모조리 쳐내고 있다.
“갈!”
퍼어억!
급기야 기함과 함께 덕수가 두 장을 뻗었다. 배를 두들겨 맞은 파진성의 몸이 훅 뒤로 밀려났다.
치이익!
“큭, 이 새끼가!”
파진성의 발끝이 땅을 긁었다.
마찰을 통해 밀려나는 속도를 줄인다. 핏물이 올라오는 것을 애써 삼키며 파진성은 이를 악물었다.
흘끗, 이벽과 송영영을 향했다.
‘오룡이고 삼봉이고 나발이고 죄 다 하나같이—’
으득, 파진성의 이가 갈렸다.
패배하거나 얻어맞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자신은 성장했다.
분명히 성장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공손수가 떠나건 떠나지 않건, 이제는 혼자서 일 인분을 해야만 한다.
공손수와는 달리, 자신이 비룡대원으로서 보탤 수 있는 것은 이 검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짐덩이를 벗어날 수 없다고!’
타앗!
파진성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청해십이검(靑海十二劍), 파랑격쇄(派浪擊碎).
콰콰콰콰!
그리고 파진성의 검이 사선의 방향으로 쇄도하며 거대한 그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찍이 사패련의 비무에서 흑천방의 맹우강에게 도전했으나 처참하게 깨져버리고 만 그 초식이었다.
허나 초식의 형조차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던 그때와는 다르다. 후욱, 덕수의 두 팔과 부딪혔다.
파앙—!
파진성의 그물에 휩싸인 순간, 나한십팔권의 굳건한 벽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덕수의 소매가 조각조각 베어진 채 흩날린다.
덕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케… 케헤헤헤! 별거 아니구만! 어떠냐 이 달걀 대가리 자식아!”
파진성이 웃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일순 덕수의 온몸이 훅 부풀어 올랐다. 가사의 옷자락이 흩날리며 착시를 일으킨 것이다.
기운이 우수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파진성의 검이 코앞까지 파고드는 찰나, 덕수가 한 발 나서며 정권을 내질러졌다.
후욱, 퍼어어엉!
“케헥!”
흡사 가죽을 터뜨리는 듯한 소리.
그리고 파진성의 그물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도로 튕겨 날아갔다.
“…백보신권(百步神拳)이네. 아프겠다.”
“…….”
턱, 턱, 털썩!
“…끄으.”
송영영의 말마따나 저만치로 날아간 파진성은 세 번이나 땅을 튕겼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어떻게든 일어나려 애를 쓰는 듯했으나.
“커헉!”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제기랄. 제기라아아알!”
악을 내질렀다.
그리고 파진성은 축 늘어졌다.
이벽은 그 모습을 일견했다. 공정한 승부였지만… 물론 보기에 썩 좋지는 않다.
“아미타불.”
꾸벅, 덕수가 합장했다.
이벽의 시선이 덕수를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 * *
파진성이 쓰러졌다.
물론 그것으로 승부는 끝난 것이다. 이벽은 돌아서려 했다. 파진성을 방 안으로 옮겨야 한다.
“…….”
그러나… 덕수를 비롯한 젊은 무승들은 아직 포위를 풀 생각도, 물러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
“아직도 남은 용건이 있소?”
“…본산에서 허가 없이 살계를 어긴 이는 누가 되었건 참회동에 가둬야 하오. 그것이 계율이오.”
“…….”
이벽은 잠시 침묵했다.
“닭 한 마리 잡았다고?”
“무릇 살아있는 것에는 경중이 없소. 그럼 시주께서는 그 죽은 닭을 다시 살려낼 수 있소?”
계율.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인즉슨 파진성을 데려가겠다는 뜻이다. 아니, 그러나.
하는 말과는 달리, 이벽은 그들의 기척에서 무언가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내게 뭘 원하나?”
이벽의 어투가 달라졌다.
흠칫, 덕수의 표정이 흔들렸다. 허나 곧 평정을 되찾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주께서는 어제, 개방주 취풍신개 어르신과 함께 본산의 큰 어른이신 혜공 사숙조를 찾아뵈었다고 들었소.”
“…….”
“그때, 사숙조께서 시주께 무언가를 내어주지 않으셨소?”
‘그렇군.’
이벽은 이해했다.
“그 물건은… 본산에서도 이십 년에 하나를 겨우 얻을까 말까 하는 귀한 물건이오. 본래는 절대로 외부에 유출시키지 않지.”
“그래서 돌려달라 이거군.”
“아니, 사숙조께서 개인적으로 보관하시던 것을 내어드렸으니 그것은 우리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오. 허나… 계율을 어긴 이를 감싼다면 그 또한 계율을 어기는 셈이니 얘기가 다르겠지.”
“아니긴 뭐가 아니오? 그게 결국 내놓으란 말 아닌가? 스님께선 지금 내 일행을 빌미로 계율을 들먹이면서 협박을 하시는 게로군.”
“…….”
덕수는 침묵을 지켰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이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림의 초청을 받아 이곳에 왔다.
허나 막상 도착해보니 그것은 소림이 아니라 혜공선사 개인의 초청이었을 뿐이었다.
학승인 혜공은 배분만 높을 뿐 소림 내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은 없으며, 소림의 주축은 오히려 이벽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즉, ‘초대받지 않은 객’이다.
그런데 그러한 객이 문파의 귀한 재보를 가까운 것을 들고 나갈 생각을 하니 퍽 심사가 뒤틀렸을 테다.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
이벽은 웃었다.
“하, 하하하! 크하하하!”
“…….”
“거 우리 대원에게 퍽 고마워하셔야겠소. 안 그래도 벼르던 찰나에 아주 좋은 빌미가 생긴 노릇이니. 그렇지 않소?”
덕수의 표정이 작게 흔들렸다.
자기 자신의 말에 어폐가 있다는 것은 분명 덕수 역시 느끼고 있을 터이다.
허나… 개방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건 결국 윗선에서의 명이 있었기 때문일 터.
“만약에 내어주기 싫다면?”
“…정 그러하다면 우리로서는 원칙을 고수하는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시오.”
“재미있군.”
이벽은 송영영을 향했다.
짧은 순간 시선을 교환했다. 송영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진성을 업어 들고서 처소 안으로 향했다.
“그럼 어디 한 번 그 ‘원칙’이란 걸 견식해 보도록 하지. 파진성의 말마따나 나에게 정의로운 다구리 한 번 펼쳐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