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44
1044회. 눈으로 보는 게 빠를 거예요
이동하는 내내 루퍼스 중대원들은 연신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설원에서 뭘 하나 싶은 얼굴들이다.
그런 중대원들을 본 파비안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중대장님, 저런 신참들을 데리고 괜찮겠습니까?”
“너도 석 달 전에는 저랬잖아. 누가 들으면 히르헤라에서 몇 년 구른 줄 알겠다?”
“히르헤라에서 살아남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 장하다.”
엘리오는 뻔뻔한 파비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딜 가도 닮은 사람이 있다. 심통의 젊은 시절이 딱 저랬을 것 같다.
기나긴 숲길이 끝나 가자 엘리오는 슬쩍 중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그때부터 균열이 눈에 들어온다.
‘중대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자신이야 빙벽이 뭔지 몰랐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이 세계 사람들도 그럴까?
잠시 후 루퍼스 중대는 얼음 숲을 통과했다.
“저, 저건 뭐지?”
“빙벽이 왜 저래?”
“저길 봐! 빙벽에 구멍이 났다!”
“저게 무슨 일이야! 창조신의 권능이 깨졌다고?”
“말도 안 돼!”
“아아! 마나 프트라스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균열만 봐도 충격일 텐데 공교롭게 균열에서 거대 스밀로돈(검치 호랑이 영역의 우두머리)이 튀어나왔다.
곧이어 균열 앞에 포진하고 있던 골리앗 중대(푸토코아 영지군)와 거대 스밀로돈의 싸움이 시작됐다.
조금 전까지 소란을 떨던 루퍼스 중대원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마수와 인간의 싸움에 집중했다.
펑! 펑! 펑―!
마력탄 터지는 소리와 거대 스밀로돈의 포효, 그리고 인간의 고함 소리가 뒤섞였다.
선두의 알파 중대는 골리앗 중대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는지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몸길이가 5미터에 달하는 거대 스밀로돈과 상대적으로 외소한 인간의 싸움은 결국 인간의 승리로 끝났다.
거대 스밀로돈이 쓰러지자 알파 중대는 지체없이 전진해 골리앗 중대와 임무를 교대했다.
골리앗 중대는 거대 스밀로돈을 해체해 필요한 것을 적출한 뒤, 균열 앞에서 물러났다.
루퍼스 중대는 알파 중대로부터 이백 보쯤 뒤쪽 후방에 자리를 잡았다.
루퍼스 중대가 한창 진지를 구축할 때 ―알파 중대와 교대한― 골리앗 중대가 루퍼스 중대 앞을 지나갔다.
영지에서 갓 올라온 루퍼스 중대원들은 마수의 피로 얼룩진 골리앗 중대원들을 경외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상자를 부축하거나 어깨에 멘 골리앗 중대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골리앗 중대 선두에서 피곤한 얼굴로 걸어가던 중대장 롤프 프릿츠 남작이 멈칫하더니 이내 루퍼스 중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엘리오의 앞에 멈춰 선 롤프 프릿츠 남작이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남작님, 늦었지만 봉작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얼굴은 전혀 아닌데.”
“아, 아닙니다. 그저 조금 피곤해서 그럴 뿐입니다.”
“상황은 어때? 심해? 아니면 덜해?”
“점점 마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또 마족이 나타나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코르보 마법 병단이 철수한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나도 말단 귀족이라고.”
“아, 남작님이라면 아실까 싶어서…….”
롤프 프릿츠 남작은 엘리오 앞에서 확실히 자세를 낮췄다.
푸토코아 백작가를 상대로 싸움을 걸어올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베일럼 왕국군이 지원을 온다잖아. 그들이 도착하면 그때 떠난다고 들었어.”
엘리오가 선심 쓰듯 고급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제야 롤프 프릿츠 남작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도 저희 다음이 알파 중대라서 다행입니다. 최소한 교대하는 날만큼은 안전하니까요. 그런데 루퍼스 중대 문양을 화이트 울프로 정하신 겁니까? 북부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롤프 프릿츠 남작의 아부성 발언에 엘리오는 손을 털었다.
그만 가라는 뜻이다.
롤프 프릿츠 남작은 엘리오에게 정중하게 묵례를 해 보인 후 골리앗 중대의 후미에 따라붙었다.
그가 멀어지자 파비안이 말했다.
“꼬리를 너무 흔드는 거 아닙니까?”
“꼬리라니. 사람의 진심을 너무 폄하하지 마라.”
“에이, 누가 봐도 꼬리인데요 뭐. 중대 깃발을 남작님이 만든 것도 아닌데, 북부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라니. 풉!”
“잔소리 말고 알파 중대에 가서 비상 신호나 정해 달라고 해. 아무 때나 우리가 끼어들면 안 되니까.”
“예!”
파비안이 전방의 알파 중대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갔다.
그사이 배치를 끝낸 루퍼스 중대 소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기사들 중에 가장 연장자인 1소대장 도넌 소위가 멀리 떨어져 있는 중대장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다들 봤나? 골리앗 중대장이 우리 중대장에게 굽실거리는 거?”
베르나르도 영지에서 히르헤라로 오는 동안 친해진 탓에 도넌은 후배 기사들에게 말을 놓았다.
이들 중에 막내인 2소대장 주디 소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요. 가다 말고 돌아와서 인사까지 하네요? 우리 중대장님 배경이 없다고 들었는데 무슨 상황일까요?”
그녀의 말에 기사들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수인 레이 소위가 주디에게 말했다.
“주디 경이 참모와 아카데미 동기라면서, 그에게 슬쩍 물어보는 건 어때?”
“오! 그것 괜찮네. 주디 경이 힘 좀 써 봐.”
“그래, 둘이 친한 것 같더만.”
“알았어요.”
동료 기사들의 권유에 주디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동료 기사들이 등을 떠밀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알파 중대로 갔던 파비안은 30분도 안 돼서 돌아왔다.
“중대장님, 알파 중대장님이 영지군 규정에 따른 위기 신호용 마력탄을 쏘아 올리시겠답니다.”
“규정이 있어?”
“예. 위기시에 낮에는 붉은색 연무 마력탄, 밤에는 붉은색 조명탄을 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만 도와 달라는 거지?”
“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야겠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알파 중대 쪽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아카데미에서 그런 훈련도 받았어?”
“예, 마력탄 신호는 전술의 기본에 해당됩니다.”
“알았어. 경험이 있다니까 잘 봐.”
“맡겨 주십쇼. 제가 잘 살필 테니 중대장님은 신경 쓰지 마십쇼.”
“나 사람 잘 믿는다.”
이윽고 엘리오는 나무 의자에 길게 몸을 뉘였다.
‘좋구나!’
역시 사람은 지위를 높이고 볼 일이다.
균열 앞에서 이렇게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자신이 중대장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던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으면 잠자고 싶은 게 사람이라던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엘리오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엘리오가 눈을 감자 파비안은 조심조심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루퍼스 중대는 지원부대다.
그런 만큼 사방을 경계하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다.
루퍼스 중대원들은 골리앗 중대와 마수의 싸움을 보고 잔뜩 긴장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균열 주위는 한산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로 고요했다.
연신 하품을 해 대고 있는 파비안에게 주디가 다가갔다.
“파비안.”
“아, 예. 오셨어요?”
“아침에는 엄청나더니 지금은 조용하네?”
“그놈이 이 근방에 있는 스밀로돈의 우두머리라 그럴 거예요. 우두머리가 죽으면 새 우두머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잘 안 움직이거든요.”
“그랬구나. 참, 우리 중대장님은 어떤 분이야?”
“대단한 분이죠.”
“알아듣기 쉽게 설명 해봐.”
“균열 감시에 투입되면 사흘 동안 여길 지켜야 하거든요. 눈으로 보는 게 빠를 거예요.”
“쳇! 가르쳐 주기 싫다는 거네?”
“믿기 어려울 게 뻔하니까요.”
“그 정도야?”
“지금 주디 경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이에요.”
“에이! 그건 아니다.”
“거봐요. 그래서 내가 말해 주지 않는 거예요. 뭘 상상하든 우리 중대장님은 그 이상이니까.”
“그래 봐야 남작이잖아.”
“오십 년 이내에 봉토를 받은 유일한 남작님이시랍니다.”
“오! 봉토를 받았다고?”
“우리 중대장님은 슬래시 랜드의 영주님이세요.”
“와우! 그럼 세습 남작이라는 소리잖아? 대단하다.”
주디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쟁 영웅이라면 모를까?
평화 시기의 남작은 최하층 귀족에 불과하다.
하지만 봉토를 받는다는 것은 다르다.
영주는 한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왜요? 막 관심이 생기세요?”
“응. 우리 중대장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냐?”
“스물일곱요.”
“어? 나랑 동갑이네? 잘됐다. 결혼은?”
“야인 부족들은 결혼을 일찍 하잖아요. 부인이 있으시대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사별하신 것 같아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맞을 거예요.”
“사별? 죽었다고?”
파비안은 엘리오와 푸토코아 백작가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때 에스카토스 공작님이 중재하지 않았으면 푸토코아 백작가는 박살 났을 거예요. 균열 감시 임무만 아니었으면 푸토코아 후계자도 팔 하나쯤은 잘렸을걸요?”
“잠깐! 그러니까, 우리 중대장님이 소드 익스퍼트시라고?”
“그게 아니면 국왕 전하가 영지까지 내려 줬겠어요? 지금 제국에서도 모셔 가려고 난리인데.”
“아아! 그래서 뒷배가 필요 없다고 했구나? 하기야 소드 익스퍼트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지.”
파비안은 피식 웃었다.
중대장의 경지가 그 이상일 수도 있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어때요? 아직도 중대장님에게 관심이 가요?”
파비안의 말에 주디는 입술을 삐죽였다.
자신의 처지에 슬래시 랜드의 영주이자, 소드 익스퍼트인 중대장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벽인 까닭이다.
“아쉽다. 소드 익스퍼트만 아니면 어떻게 해 볼까 했는데.”
“풉! 코르보 마법 병단에 애슐리 넬슨 남작이라고, ‘까마귀가 물어 간 보석’으로 불리는 여기사가 있거든요? 미모가 어찌나 뛰어난지 주둔지 기사들이 그 여기사 주변을 빙빙 맴돌아요.”
“그런데?”
“그 애슐리 넬슨 남작이 우리 중대장님을 따라다니는데 쳐다도 안 봐요.”
“에이, 설마.”
“우리 중대장님은 자기 부인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답니다.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니까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헛물 들이켜지 말라고? 아니면 부인이 없으니 용기 내서 잘해 보라고? 어느 쪽이야?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주디가 다그치자 파비안이 검지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엘리오의 자리를 힐끔거렸다.
“쉿! 소리가 너무 커요. 우리 중대장님 귀가 얼마나 밝은지 알아요? 삼백 미터 밖에서 토끼가 눈 파헤치는 소리도 들으시는 분이에요.”
“쳇! 그건 좀 아니다. 검술이 뛰어나다고 귀까지 밝아지는 줄 알아?”
“아, 진짜. 내가 타메이온에 들어갔을 때 봤다니까요.”
“뭐? 네가 타메이온에 들어가? 빙벽을 넘어갔다는 거야?”
“아, 그것도 모르시겠구나. 우리 중대장님과 내가 사흘간 타메이온을 정찰하고 돌아온 일이 있어요. 그 뒤로 주둔지에서는 우리를 ‘균열의 기사’라고 불러요.”
“진짜?”
“예.”
“진짜? 진짜?”
“나중에 주둔지로 가면 아무나 잡고 물어봐요. 진짜인지 아닌지. 여하튼 그때 삼백 미터 밖에서 눈 파고 있던 토끼를 찾아내시더라니까요. 눈 긁어 내는 소리가 너무 거슬려서 잠이 안 오신다나.”
“뻥 아니고?”
“그날 토끼 고기 먹었어요.”
“와…….”
주디의 입이 쩍 벌어졌다.
삼백 미터 밖에서 토끼가 눈 파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그때다.
저 멀리 균열에서 화이트 울프 십여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뒤이어 ‘쿵! 쿵! 쿵!’ 하는 묵직한 진동음과 함께 아이스 오우거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이트 울프 떼를 쫓던 아이스 오우거들이 균열을 넘어온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