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40
1440회. 번개처럼 짧은 삶에는 다른 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
동이 트기 전에 여남의 집을 떠난 연적하는 구천현녀 사당으로 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황량한 겨울의 들판으로 나갔다.
길눈이 어두운 탓에 금방 방향을 잃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딱히 갈 곳이 없던 그에게 이 세상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해가 머리 위에 떠오를 때까지 걷던 그는 낡은 토지신묘 앞에서 멈춰 섰다.
관리를 전혀 안 한 듯 반쯤 떨어져 나간 나무 문짝 사이로 내부가 보였다.
늙은 거지 하나가 꺼져 가는 모닥불을 나뭇가지로 들쑤시고 있었다.
때마침 인기척을 느낀 거지가 고개를 돌리다 서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늙은 거지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반나절 만에 만난 사람이 반가웠던 연적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늙은 거지가 지나가듯 물었다.
“이 근방 사람인가?”
“아뇨.”
“들어왔으면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앉게. 이렇게 말하니 내 집 같지만, 실은 나도 지나던 중이었네.”
연적하는 늙은 거지의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았다.
“쯧쯧! 명색이 사내대장부가 대범하지 못하게……. 편하게 앉게. 안 잡아먹으니.”
“피차 모르는 처지에 남이야 쪼그려 앉든 눕든 신경 쓰지 맙시다. 그런데 불에 굴리고 있는 건 거지닭[叫花鷄]입니까?”
“바로 알아보는 걸 보니 제법이구먼. 맞네. 전에 먹어 본 적 있나?”
“두어 번 있는 것 같습니다.”
“에이, 두 번이면 두 번이지 두어 번은 뭔가? 학자연(學者然)하는 사람들은 항상 애매한 게 문제라니까. 똑 부러지는 맛이 없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해 그렇습니다. 노인장이야말로 소싯적에 글공부 좀 하셨나 봅니다?”
“맛만 좀 봤네.”
연적하의 눈이 자연스럽게 늙은 거지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삼 결의 매듭이 보였다.
삼 결이면 분타주쯤 되는 위치.
머리가 허연 노인의 나이를 생각하면 꽤나 낮은 위치였다.
“개방 분이신가 봅니다?”
“서생으로 보이는데 무림의 규칙도 알고, 이쪽은 아닌 것 같은데…….”
방현(房县) 분타주 구지걸식 관산월이 애매한 눈으로 서생을 보았다.
하고 다니는 행색은 분명 낙척서생인데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풀풀 난다.
이럴 경우 고귀한 가문 출신이거나 은거기인의 제자일 가능성이 높다.
사정을 캐 보기도 전에 서생이 먼저 말했다.
“떠돌다 보니 귀동냥을 좀 했습니다. 그런데 삼 결을 하기에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십니다?”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그렇게 됐네.”
“아니, 거지들도 줄을 세웁니까?”
“어허! 모르는 소리. 거지들은 사람 아닌 줄 아나? 둘만 모여도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있구만.”
“놀랍네요. 줄을 잘 서지 그러셨습니까?”
“분타주가 어때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그러는 그쪽은 왜 한참 좋을 때에 떠돌고 있나?”
“저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건 언제 먹을 겁니까?”
연적하는 슬쩍 말을 돌렸다.
노회한 관산월은 서생에게 말 못 할 사연이 있으려니 지레짐작하고 더 묻지 않았다.
“지금 꺼내면 딱 맞을 걸세.”
이윽고 관산월은 나뭇가지로 숯 더미 속에서 진흙 덩어리를 끄집어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달구어진 진흙이 식기를 기다렸다.
묘한 침묵이 토지신묘에 감돌았다.
그래도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뭇가지로 진흙 덩이를 툭툭 건드리던 관산월이 지나가듯 말했다.
“살아 보니 인생 별거 없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게 성공한 인생 아니겠나?”
“둘만 있어도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있다더니 노인장 이야기였군요.”
재빠른 서생의 반박에 관산월이 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신이 개방의 분타주라는 걸 알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다니!
확실히 이 남자는 평범하지 않다.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세. 나는 방현의 분타주인 구지걸식(九指乞食) 관산월이네.”
서생이 쳐다보자 관산월은 ―엄지가 없는― 한쪽 손바닥을 활짝 펴 보였다.
“손가락 아홉 개로 빌어먹는다고 해서 붙은 별호지. 이건 노름을 하다가 잘렸네. 문신 가문의 내가 개방에 투신하게 된 것도 그 빌어먹을 노름 때문이고.”
관산월은 처음 만난 서생을 어려워하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늙은이들에게도 툭툭 반말을 했는데, 이상하게 서생에게는 그게 잘 안 됐다.
“연남천이라 합니다.”
“남천이라…… 실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름이구만.”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진흙이 식자 관산월은 손가락으로 딱딱하게 굳은 진흙을 떼어 냈다.
진흙 속에서 나온 깃털을 본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거지닭 맞아요?”
“정확히는 거지꿩이네. 이곳에 닭이 어디 있겠나? 닭 대신 꿩이지.”
관산월이 고기 한 점을 찢어서 서생에게 건넸다.
연적하는 사양하지 않고 넙죽 받아먹었다.
“밍밍하네요. 간할 게 하나도 없었나 봅니다?”
“헐! 소금을 가지고 다닐 정도면 거지로 살겠나? 거지에게 얻어먹으면서도 입맛 타령하는 걸 보니 귀한 집 자손이었나 보군.”
“귀한 집 자손은 아니고 내가 좀 귀해요.”
기이한 대답에 관산월은 꿩고기를 먹다 말고 서생을 힐끔 보았다.
하지만 그 말에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사실 자신이 그에게 선뜻 말을 놓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귀하신 몸이 이런 곳까지 어쩐 일인가?”
“이런 곳이라뇨? 이곳이 어때서?”
“황량하고, 춥고, 먹을 것도 없는…… 유랑인도 찾지 않을 곳이잖나.”
“그러는 분타주님은 왜 궁상맞게 이런 곳에 있어요? 나는 지나는 길이니 그렇다 쳐도.”
“아, 지나는 길이라고 했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자책하던 관산월이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심신이 지쳐 이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네.”
“아, 줄을 잘못 서셨구나.”
“맞네. 내가 방현에서만 삼십 년을 보냈는데 갑자기 십언시로 가라고 하지 뭔가.”
“그런데 십언시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이 나이에 아무런 직책 없이 십언시로 가면…… 죽을 때까지 구걸이나 해야 할 게 아닌가.”
“아…….”
듣고 보니 관산월이 비통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뱀 대가리로 살던 사람이 용 꼬리로 살려니 괴로운 모양이다.
“그런데 조금 전에 ‘살아 보니 인생 별거 없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게 성공한 인생 아니냐?’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그쪽이 살맛 없는 얼굴로 있어서 해 본 얘기고. 먹고, 자고, 싸기만 하면 사람이 개, 돼지와 다를 게 뭐가 있나. 안 그런가?”
그에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남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노인장은 그렇게 못 사시겠다?”
“곡해하지 말게. 그건 단지 자네를 위로하기 위해서 해 준 말이었으니까.”
“내 얼굴이 위로가 필요해 보였습니까?”
“눈빛이 세상 다 산 사람 같았네. 이 세상에 미련이 없어 보였달까.”
연적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관산월을 보았다.
그저 세속에 찌든 거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법 보는 눈이 있었다.
저런 게 삶의 연륜이라는 걸까?
“노인장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
“너무 쉽게 대답하는 거 아닙니까?”
“자네도 나만큼 살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걸세.”
손자뻘인 관산월의 말에 연적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남녀 간의 사랑도 영원합니까?”
“그야 물론이지. 백년해로(百年偕老)라는 말도 있잖나.”
“백 년이 지나면요?”
“그때가 되면 백골만 남아 있을 텐데……. 영원하다고 인정해 줘야지.”
“늙지도 죽지도 않고 천년만년 산다면요? 그때도 사랑을 영원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냥 말꼬리를 잡는 것에 불과하네. 천년만년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신선들은 불로장생하지 않습니까.”
“신선은 사람이 아니잖나. 뭐든 적은 것이 귀한 법이네. 남들은 신선을 부러워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예컨대 사람의 수명이 짧다고 손해만 보는 건 아니라 이거지. 한 갑자(60년)밖에 못 사는 사람이니까, 오히려 영원을 누릴 수가 있다 이 말이야.”
“…….”
순간 연적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이 늙은 거지는 정말로 자신이 괴로워 하는 것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자네가 남녀 간의 사랑을 물었잖나. 그게 영원하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수명이 짧으니까.”
“맞네. 뜨겁게 사랑하다 죽으니 영원하다 말할 수밖에 없잖은가. 번개처럼 짧은 삶에는 다른 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그렇군요.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연적하는 이제야 딸이 수도를 포기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딸은 영원을 품기 위해 신선이 되는 걸 거부한 것이다.
인간의 짧은 수명에는 불로장생으로 얻지 못할 특별한 것이 있다.
영원한 사랑도 그중 하나다.
그토록 많은 생로병사를 봤으면서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그렇다고 신선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건 아닐세. 내가 신선이 아닌데 어떻게 알겠나? 혹시 모르지. 어딘가에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신선이 있을지도.”
“있을까요?”
“불가에서는 ‘찰나 속에 영원이 있고 영원 속에 찰나가 있다[刹那生滅]’고 하지 않던가. 영겁의 시간도 찰나처럼 여긴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물론 그만큼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하지만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 영원히 만날 수 없다면요?”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던 기나라 사람 같은 소리[杞憂]를 하는군. 자기만의 상상에 너무 몰입하지 말게. 뭐든 적당한 게 좋아.”
말을 마친 관산월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거늘, 하물며 하나 마나 한 말을 계속하니 질린 것이다.
“가게요?”
“해가 떠 있을 때 분타로 돌아가려 하네. 날 저물면 몸만 축나니까.”
“멀리 안 나갑니다.”
“흐흐. 넉살 좋은 사람이로군. 훗날 십언시에 오게 되면 나를 찾아오게. 그때는 제대로 된 거지닭으로 대접을 해 주겠네.”
관산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홀로 남은 연적하는 그 자리에서 해가 질 때까지 태상정일강림신주(太上正一降臨神呪)를 외웠다.
노을이 들판과 토지신묘를 붉게 물들였다.
연적하는 대자연이 만들어 낸 장관에 이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노을이 절정에 달할 즈음, 뒤쪽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적하는 천천히 돌아섰다.
마치 노을의 불이 토지신묘에 옮겨붙은 것 같았다.
고대하던 현상이지만 연적하는 짐짓 무덤덤한 표정으로 불길을 보았다.
남궁연이 등선했기 때문일까?
구천현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굳어 있던 심장이 고동쳤다.
이제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구천현녀와 재회할 걸 생각하니 갑자기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느낌이다.
그는 속으로 ‘남궁연은 구천현녀의 전생(轉生)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중얼거리며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잠시 후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는 데 성공한 연적하는 천천히 토지신묘로 들어갔다.
토지신묘 내부는 마치 산 정상인 것처럼 하얀 운무가 깔려 있었다.
휘몰아치는 운무 속에서 구천현녀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연적하, 너의 바람이 나에게 닿았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