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98
398회. 백 소저, 감당할 수 있겠어?
손가인의 질문에 백설연은 잠시 생각했다.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천외천의 고수를 두고 쉽게 ‘안다, 모른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로 자신은 그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
청불노의 기명제자이며 ‘여동빈’의 동문.
술법으로 풍운조화를 일으키고, 이기어검으로 수라마존을 물리친 사람.
진면목을 가리고 있는 저 얼굴만큼이나 모든 게 비밀에 싸인 남자.
나이에 맞지 않게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잘 드러내지 않는 기인.
그래서 감히 조금이라도 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몰라. 하지만 알고 싶기는 해. 그럴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백설연은 은연중에 그를 향한 자신의 호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손가인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는 같은 숙소를 사용하고, 술법도 함께 배우시잖아요. 그런데 그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봐요?”
손가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정적인 감정은 고스란히 백설연에게 전해졌다.
“무슨 소리야?”
“지금은 ‘하선고’를 여자 수련자들이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남자들이 썼다면서요?”
“응.”
백화궁의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혹시 연남천과 어울려 다녔다는 사내들의 험담을 듣고 그러는 것일까?
‘쯧쯧!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 같으니.’
만황주와 천상동은 다른 의미로 유명해진 사람들이다.
연남천이 ‘여동빈’으로 올라왔을 때 그들의 뒷담화로 시끌시끌했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신입 수련자를 상대로 또 그 짓을 하고 있나 보다.
“연남천과 같은 숙소를 썼던 사람들이…….”
“동생.”
백설연이 손가인의 말을 끊었다.
질투와 시기심으로 눈이 먼 사람들의 악의적인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네?”
백설연의 박력에 눌린 손가인이 눈치를 살폈다.
“연남천은 대붕(大鵬)이야. 동생이 만났던 남자들은 덤불숲에 살고 있는 들쥐고. 그들은 지면에 어른거리는 대붕의 그림자만 보고 멋대로 이러쿵저러쿵 말한 거야.”
“대붕이라고요?”
“동생도 ‘여동빈’으로 올라오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될 거야. 동향의 동생이라 해 주는 말이야. 연남천에 대해 알고 싶으면 ‘여동빈’으로 와.”
“그에 대해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아요.”
손가인은 행여나 백설연이 오해를 할까 봐 슬쩍 선을 그었다.
그런 얼굴의 사내를 알아서 어디에 쓰려고?
“훗! 백화궁에서 온 사매들도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의 추종자가 됐어.”
“추종자씩이나요? 이해할 수가 없네요. 백화궁 소저들이 뭐가 아쉽다고…….”
“동생도 빨리 ‘여동빈’으로 올라와. 그럼 천하가 얼마나 넓은지 알게 될 거야.”
“아, 네…….”
손가인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동빈’이라고 해 봐야 고작 오룡궁 팔선각 중에 하나일 뿐인데 ‘천하’라니.
강력한 백설연의 격려는 뜻하지 않게 손가인의 자격지심을 건드렸다.
‘아무리 그래도 천하는 아니지요.’
그녀는 흠모하던 백설연에게 실망했다.
‘여동빈’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살짝 광오한 느낌마저 들어서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백설연이 극찬한 연남천에게로 옮아 갔다.
손가인은 백설연과의 대화 이후 오히려 만황주, 천상동과 가까이 지냈다.
만황주와 천상동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하선고’ 최고의 미녀 손가인이 그들의 패거리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
운명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손가인은 입산한 뒤로 쉬지 않고 수련했지만 문답식에 번번이 떨어졌다.
만황주와 천상동도 사정은 비슷했다.
처지가 같다 보니 세 사람은 더욱 친해졌고, 연남천에 대한 질시도 깊어졌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
칠월이 되자 만황주와 천상동은 수련자 생활을 더 버티지 못하고 슬며시 떠났다.
손가인은 집안의 후원으로 팔선각에서 지내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인들이 사라진 이후 그녀는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렇게 된 데는 연남천의 영향도 컸다.
그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과 같은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술법 경지가 점차 수련자들에게 알려졌다.
마침내 여름이 될 무렵.
팔선각의 수련자들은 그를 오룡궁 최고의 술사라 불렀다.
연남천이 수련자들의 중심에 설수록 손가인은 자신의 자리를 잃었다.
수련자들이라고 모두가 각고의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무당파는 수련 기간 중에 금주(禁酒)를 권고하고 있다.
그래도 무당산 인근 마을에서 몰래 술을 구해다 마시는 수련자들이 있었다.
팔선각을 겉돌던 손가인은 이번에는 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는 방종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렇게 손가인은 ‘여동빈’에서 멀어져 갔다.
보다 못한 백설연이 따끔하게 야단쳤지만 통하지 않았다.
자격지심에 절은 손가인에게 백설연의 충고는 잔소리에 불과했다.
달빛 고운 어느 밤.
늦게까지 경전을 읽던 백설연의 입에서 문득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술에 취한 손가인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어젯밤 그녀에게 술을 먹이던 남자를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했다.
‘이철괴’의 수련자라고 했던가.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은 담백한 무당파 기풍과 맞지 않았다.
범죄자가 아니면 입산을 막지 않다 보니 가끔 그런 사람들이 섞이곤 한다.
입술을 물어뜯으며 고민하던 백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팔선각 외원(外院)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외원은 팔선각 일꾼들의 숙소에서 가까워 수련자들이 기피하는 장소였다.
외원에 다가가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대여섯 명의 수련자들이 숨어서 술판을 벌이는 모양이다.
그녀가 외원으로 들어서자 속삭임이 멎었다.
백설연을 알아본 것이다.
찔끔 놀란 수련자들의 시선이 슬며시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만취한 손가인의 어깨를 안고 있던 남자, 양사강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불청객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속가제자인 백설연을 보고도 별로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히죽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백설연은 단숨에 남자 앞으로 걸어갔다.
“그 아이는 내 의동생이에요. 취한 것 같으니 내가 데리고 가겠어요.”
“백 소저, 의동생이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 아니오? 손 매는 스스로 원해서 나와 함께 있는 거요. 우리와 함께 즐길 게 아니면 그냥 돌아가시오.”
말과 함께 양사강이 실실 웃으며 손가인의 앞섶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술에 취한 손가인은 저항하지 못하고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본 백설연이 차갑게 말했다.
“감히! 무당파에서 수련자가 음탕한 짓을 하다니!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알고 싶소? 못 본 척하고 그냥 가는 게 나을 텐데.”
“당장 고하거라!”
백설연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안광이 쏟아져나왔다.
그래도 양사강은 위축되는 기미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재밌다는 얼굴로 백설연을 빤히 올려다보기까지 했다.
“백 소저, 감당할 수 있겠어?”
어느새 양사강의 말이 짧아졌다.
상대가 강하게 나오자 백설연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상 생활에서 수련자는 속가제자의 눈치를 본다.
입문식을 통과한 순서대로 속가제자들의 서열이 정해지는 까닭이다.
하물며 지금은 사내가 죄를 범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다니?
하지만 그가 손가인에게 저지른 음탕한 짓을 보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네가 누구라도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말해라!”
“푸하핫! 이거 정말 재밌군.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난 뒤에도 그렇게 행동하면, 이뻐해 주지.”
“미친놈!”
“얼씨구, 욕까지? 그래, 여자가 그렇게 펄떡거리는 맛도 좀 있어야지. 손 매는 너무 쉬워서 손맛이 없다니까. 이것 봐, 가만히 있잖아.”
말과 함께 양사강은 손가인의 가슴을 떡 주무르듯 주물렀다.
“정녕 네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분기탱천한 백설연이 막 손을 쓰려고 할 때다.
양사강의 입이 열렸다.
“백설연, 십언 죽산현에 있는 동심문 문주 백승원의 장녀라지?”
백설연이 석상처럼 굳었다.
자신의 내력을 꿰고 있는 사내가 갑자기 두렵게 느껴졌다.
“너는 누구냐?”
“왜? 이제 슬슬 겁이 나? 그러기에 가라고 할 때 가지 그랬어.”
“누구냐고 물었다.”
“죽산현 현령이 누군지 알아?”
“…….”
사내의 말에 백설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득의양양한 얼굴로 현령을 입에 올리는 걸 보니 관인의 자제인 모양이다.
“이런 모르는 얼굴이네? 양호주야. 자기가 사는 고을의 현령 이름 정도는 알아 두라고.”
“…….”
백설연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저자가 설마 현령의 혈육일까?
긴장한 그녀를 보는 양사강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양사강이야. 술법을 배우기 위해 무당파에 온 죽산현 현령의 장자. 그게 바로 나야. 어때? 감당할 수 있겠어?”
절망에 빠진 백설연은 이를 악물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그 정도 뒷배를 두었으니 오룡궁도 무서워하지 않고 술판을 벌인 것이다.
‘어쩐다…….’
군소 방파인 동심문에 현령은 호천문 맹주보다 무서운 상대였다.
그렇다 해도 손가인을 저대로 둘 수는 없었다.
“무당파에서 이런 행동을 하면 양 대인의 명성에 누가 될 거예요.”
한풀 꺾인 백설연과 반대로 양사강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네가 감히 나를 훈계하려 드는 게냐?”
“훈계가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오늘 일은 덮어 둘 테니 손 동생을 내어 주세요.”
“그렇게 못 하겠다면?”
“그럼 무당파에 고할 거예요.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나요?”
백설연의 결기 어린 모습에 양사강은 이를 갈았다.
이 자리에서는 싸워 봐야 자신의 손해였다.
자신이 현령 아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얼굴을 빳빳하게 들고 대들다니?
“좋다. 데리고 가라. 오늘 네가 무당파의 권위를 앞세워 나를 핍박했으니, 다음에는 나도 권력으로 내 뜻을 관철시켜 주겠다. 기대하거라.”
“현령은 양 공자의 부친이지 양 공자가 아니에요.”
“흥! 개소리. 너도 동심문 문주의 딸이지만 동심문에서 대접을 받지 않느냐? 너도 그러니 억울하다 생각지 마라.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니까.”
“…….”
백설연은 대꾸하지 않고 그의 품에서 손가인을 떼어 내었다.
그리고 그녀를 부축해 외원을 빠져나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쓰러질 듯 비칠거리던 손가인의 걸음이 조금 반듯해졌다.
“정신이 좀 드니?”
“그냥 두고 가지 그랬어요?”
뒤늦게 백설연은 손가인이 지금까지 취한 척했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그래? 동생인데.”
“후후. 동생이라고요? 그 자식 말 못 들었어요? 우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고요.”
“꼭 피가 섞여야 동생은 아니지. 여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남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을 위해서 꾸민다잖아[女 爲知己者 死, 男 爲說己者 容].”
사마천의 사기(史記) 예양(豫讓) 편에 나오는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서 꾸민다[士 爲知己者 死, 女 爲說己者 容]’는 말을 바꿔서 한 것이다.
백설연의 농담에 손가인은 푸들푸들 웃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두고 지난 몇 달간 왜 죽도록 방황했는지 모르겠다.
“저도 양사강이 죽산현 현령 아들인 줄은 몰랐어요. 알았다면 그와 가까이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제 어떻게 해요? 괜히 저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