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55
455회. 상황과 성향의 차이
관도가 백화상방의 마차들로 꽉 막혀 있자 양일은 속도를 줄였다.
느지막이 강을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상단 사람들과 만나다니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공자님! 백화상방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분명히 연 공자는 기다렸다가 가자고 할 게다.
뒤에 백화상방을 달고 가면 쫓기는 심정이 되어 충분히 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보내고 천천히 가요!”
예상과 어긋나지 않는 답에 양일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양일은 마차를 해가 잘 드는 곳에 세운 뒤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천천히 가자고 했으니 제법 오래 쉴 모양이다.
낮에는 바람만 피하면 굳이 불을 피우지 않아도 좋았다.
그래도 혹시나 연 공자가 불을 원할지 모르니 확인은 필수다.
“공자님, 불을 피울까요?”
“아니요. 난 그냥 여기서 쉴게요. 혹시 아저씨가 추우면 피워요.”
“아, 예. 저도 햇볕이나 쬐렵니다.”
괜히 나무를 구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그럴 바에야 햇살 좋은 자리를 찾는 게 낫다.
양일은 마차 바퀴를 등지고 앉아 느긋하게 백화상방 사람들을 구경했다.
연적하는 착잡한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마차에 뚫린 작은 창문으로 보고 있으려니 와룡장의 창고가 떠오른다.
손바닥만 한 창으로 비쳐 드는 햇볕이 전부이던 그때가.
구천현녀경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죽었으리라.
큰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큰어머니는 뭘 하고 있을까?’
백가장에서 쫓겨난 뒤로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자식인 연무백조차 ‘어머니의 생사를 모른다’고 했다.
구천노도 심통은 백미주가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갔을 거라고 했지만, 글쎄다.
자신에게 사죄의 말도 없이 사라진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큰어머니는 자신을 원망하고 저주할 것이다.
네가 나의 삶을 망쳤다고.
그게 큰어머니다운 방식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어머니는 항상 자신의 아픔만 중요시했다.
남편을 빼앗겼다고.
그래서 엄마를 잃고 아빠에게도 외면당한 자신을 괴롭히고, 종국에는 죽이려 했다.
큰어머니를 만나면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당신이 받은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주었다고.
‘말해도 소용없겠지?’
아니, 오히려 더 지랄 지랄 날뛸지 모른다.
항상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사람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테니까.
‘젠장! 당신 때문에 좁고 어두컴컴한 마차가 더 마음 편한, 이 구질구질한 기분을 알아?’
“하아!”
연적하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악몽 같은 과거를 다 떨쳐 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듯 생생해지다니.
“연 공자.”
젊은 여자의 낭랑한 음성을 듣고서야 연적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대답이 늦자 상대가 다시 말했다.
“연 공자, 안에 있나요?”
자신을 쫓아낸 백선화였다.
문득 큰어머니가 떠올랐다.
큰어머니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능력 있고 배려심 많은 안주인이었다.
무능한 사람이었다면 연씨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뭉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배척당했다는 것 때문에 큰어머니를 떠올린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큰어머니를 닮아서 그랬을까?
‘재밌군.’
백선화는 어느 쪽일까?
그저 상황이 비슷한 걸까? 아니면 비슷한 성향의 사람인 걸까?
“네. 왜요?”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돌처럼 굳어 있던 가슴이 설렜다.
“좀 나와 봐요. 할 얘기가 있어요.”
나와 보란다.
사람들은 감당할 능력도 없으면서 왜 일을 크게 벌이는지 모르겠다.
연적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늘 속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햇살이 불편할 정도로 눈을 자극했다.
“아, 쉬고 있는데 내가 불렀나 봐요?”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설마 다시 합류하라는 건 아닐 테고.”
그의 실없는 소리에 백선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무슨 일인데요?”
“알다시피 연 공자와 우리 상방은 좀 껄끄러운 사이잖아요?”
“그런가요? 난 별 느낌 없는데.”
백선화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거야말로 백화상방에 대한 무시나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네, 연 공자는 돈이 많으니 그러시겠죠. 하지만 저희는 조금 달라서요. 불미스러운 일로 내보낸 연 공 자와 자꾸 마주치는 게 불편하거든요.”
“그래서요?”
“상방에 좋지 않은 일도 생기고 해서 주변 정리를 좀 하면서 가려고요.”
연적하가 백선화를 지그시 보았다.
좋지 않은 일이란 복면인들에게 습격당한 걸 말하는 것이리라.
“설마 나를 도적과 한패라고 의심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말한 그대로 깔끔하게 가고 싶어서 그래요. 연 공자도 우리와 자꾸 마주치는 게 사실은 불편하잖아요. 안 그래요?”
“안 불편하다니까요.”
“그래요, 그렇다고 치죠. 저희가 불편해요. 그럼 됐죠?”
“뭐가 돼요?”
“하아!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거예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저희가 불편하니까 앞으로 안 마주쳤으면 한다고요.”
“백 소저, 나도 합비까지 가야 하는데 어떻게 안 마주칠 수가 있죠?”
“연 공자가 먼저 출발하거나, 우리 상방과 거리를 두세요. 선택하세요. 단, 이후로 또 마주치면 의도적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백선화를 보았다.
먼저 가라는 말은 하나 마나 한 소리다.
새벽에 출행하는 백화상방을 피하려면 자신도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니까.
말이 선택이지 사실은 거리를 두고 따라오라는 거다.
하지만 그것도 별 의미가 없다.
지금도 시간을 두고 따라왔는데 백화상방이 꿈지럭거려서 만나지 않았나 말이다.
“백 소저,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회하를 건너고 나서 우리는 천천히 움직였다고요. 그래도 백화상방이 여기서 뭉그적거리는 바람에 만났잖아요?”
‘뭉그적거렸다’는 말에 백선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뭉그적거렸다고요? 당신은 감히 백화상방을 조롱하는 건가요?”
“조롱이 아니라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요? 회하에서 반 시진(1시간)이나 늦게 출발한 나와 만났으면 뭉그적거린 거죠. 아니에요?”
“연 공자, 당신. 정말 상종 못 할 사람이군요!”
“상종 못 하겠으면 그냥 가요. 나도 안하무인(眼下無人)처럼 구는 백 소저와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안하무인? 지금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게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해요! 당신이야말로 항상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사람이잖아요!”
“나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백 소저 당신은? 그럴 자격 있어요?”
순간 백선화가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자격? 무슨 자격? 고작 객점 주인이 그렇게 대단한 자리인가요? 그것도 공동 주인이라면서?”
“나는 객점이라도 있지. 백 소저는 뭐가 있는데요? 말 들어 보니 부친이 방주라서 서기가 됐다면서요. 백 소저에게서 아버지를 빼면 뭐가 있는데요? 원래 백 소저는 상방에서 잔심부름이나 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아닌가요?”
“너, 너…….”
분기탱천한 백선화는 손가락으로 연적하를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적하의 말은 계속됐다.
“나를 백 소저 눈치나 보는 호위로 착각하지 마요. 백화상방의 호위들이야 방주가 무서워서 찍소리 못 하겠지만, 나는 다르거든요? 그리고 누구더러 너래? 너야말로 내 주위에서 얼쩡거리지 마. 난 너처럼 집안 믿고 깝죽거리는 것들 보면 토할 것 같으니까.”
“야아아!”
분노한 백선화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찢어질 듯한 그 소리에 멀리 있던 상방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왜에에!”
연적하가 더 크게 맞받아쳤다.
이젠 누가 봐도 둘이 언성 높여 싸우는 모습이다.
느긋하게 바퀴에 기대앉아 구경하던 양일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방의 호위들도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중 하나가 험악한 얼굴로 연적하의 앞을 막아섰다.
다른 호위가 백선화에게 물었다.
“백 소저,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백선화는 파르르 떨기만 할 뿐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할 말도 없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막말을 했으니 혼내 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문 호위님, 좀 비켜 봐요.”
그녀의 요청에 연적하의 앞을 막고 있던 문엽성이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그사이 백선화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당신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 맞는 것도 아니에요. 당신 말대로 나를 서기에 임명한 건 방주인 아버지예요. 하지만 난 상방에서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지금은 누구도 아버지의 결정을 비난하지 않아요.”
숨도 쉬지 않고 쏟아 내던 백선화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그리고 호위들이 나를 존중하는 건, 내가 방주의 딸이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내가 호위들을 존중하니까 그들도 나를 존중해 주는 거예요. 이게 잘못된 건가요?”
연적하가 뚱한 얼굴로 답했다.
“백 소저는 좋은 부모 덕분에 인생이 잘 풀려서 좋겠어요. 누군 부모복이 없어서 개고생을 했는데. 난 백 소저의 부모복을 뭐라 하고 싶지 않아요. 그것도 능력이지.”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아버지를 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사실이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어린 나이에 서기가 됐겠어요? 백 소저가 ‘십전무후’ 같은 천하의 기재예요? 아니잖아요?”
“…….”
백선화는 반박하지 못하고 속만 끓였다.
자신의 머리가 좋다고들 하지만 ‘십전무후’와 비교할 수는 없어서다.
연적하의 말이 이어졌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어요. 내가 백화상방의 사람도 아닌데 왜 나에게 눈에 띄지 말라고 해요? 그런 게 안하무인인 거죠. 백화상방에서 하듯이 다른 사람에게 해서는 안 돼요. 나를 봐요. 객점 주인이지만 백 소저를 점소이 다루듯 하지 않잖아요.”
“다, 당신 정말. 지금 우리 백화상방을 당신의 객점에 비교하는 건가요? 착각하지 말아요! 당신은 손바닥만 한 객점의 주인이지 천하의 주인이 아니에요!”
“아하! 그러니까 백 소저는 백화상방을 믿고 그렇게 나댄 거군요?”
‘나댔다’는 말에 문엽성이 끼어들었다.
“연 공자, 입이 만 가지 화의 근원이라는 말을 모르오? 연 공자야말로 말조심하시오.”
“이거 봐 이거. 방주 딸이라고 여럿이 몰려와서 사람 하나를 핍박하네.”
울컥한 문엽성이 다시 뭐라 하려고 하자 백선화가 만류했다.
“문 호위님은 나서지 마세요. 이건 연 공자와 나의 문제니까요. 그리고 연 공자. 당신이 눈치 없는 사람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주의하세요. 백화상방이니 그냥 두지 다른 곳 같았으면 연 공자는 ‘불귀의 객(客)’이 되었을 거예요.”
불귀의 객, 즉 죽었을 거라는 소리다.
“푸훗! ‘불귀의 객’이래. 지금 겁주는 거 맞죠?”
“겁이 아니라, 하아. 연 공자를 위해서 사실을 말해 주는 거예요.”
“나를 위한다고요? 부모의 그늘 아래서 곱게 자란 티를 너무 내시네.”
그가 또 부모 이야기를 꺼내자 백선화는 발끈했다.
“정말 상종 못 할 사람이네요. 당신과 말을 섞은 내가 잘못이에요. 멋대로 하세요. 그러다 객사를 하건 말건 나와는 상관없으니까.”
말과 함께 그녀가 돌아섰다.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연적하가 소리쳤다.
“나를 위한다고 했어요? 흥분해서 멋대로 반말하다가, 지나쳤다 싶으니까 다시 존댓말을 하고! 신경에 거슬린다고 나를 쫓아낸 사람이, 다시 찾아와서 하는 말이 눈에 거슬리니까 안 보이게 다니라고? 당신이 천하의 중심이지? 다른 사람은 당신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고? 백화상방 무서워서 어디 살겠나!”
멈칫했던 백선화는 그대로 떠나갔다.
몰려왔던 호위들까지 사라지자 양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님,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꽉 밟아 버리지 그러십니까?”
“아저씨.”
“예?”
“콱 밟고 남은 닷새 동안 지루하게 지내라고요? 오늘만 살고 말 것도 아닌데 그럼 되나. 지금부터 상방 뒤나 잘 따라붙으세요.”
“헉! 합비까지 이렇게 가시게요?”
“왜요? 문제 있어요?”
“아, 아닙니다.”
양일이 백화상방 쪽을 힐끔 보았다.
백선화가 맥맥거릴 때는 짜증이 났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쌍하게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