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91
591회. 내가 낯을 좀 가려서 그래
벽초가 읽던 책을 덮고 자신의 앞에 있는 빈자리를 가리켰다.
“앉아라.”
“예.”
벽초의 맞은편에 걸터앉은 연적하는 조심조심 호흡을 조절했다.
“갓 입문한 신입을 천주봉에 보낼 줄은 몰랐는데……. 혹시 입문하자마자 사고라도 쳤느냐?”
“아뇨?”
“흐음! 그래? 별일이군.”
벽초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턱수염을 잡아 뜯었다.
대라각에서는 영기의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소격각으로 보냈다.
천주봉은 소격각에서조차 포기한 사람들의 일터였다.
그런 곳에 아직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신입을 보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천주봉의 일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천주봉이면 불우산의 주봉이 아니냐. 높은 것도 있지만 뒷간의 개수도 다른 곳보다 많아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봉황정(鳳凰亭)의 여자들은 소요종에서 가장 까탈스럽다. 그래서 오륙 년차 후배들을 보내 달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쯧!”
“헉! 여자들이 사용하는 뒷간도 우리가 청소해야 해요?”
“똥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느니라.”
“그건 좀 면이 안 서는데…….”
“체면을 세우고 싶으면 얼른 ‘연허’에 올라가 그 띠를 풀어 버려라. 그 전에는 답이 없다. 한번 소격각에 배치되면 ‘연하’에 오르기 전까지 벗어날 수 없으니까.”
“‘연허’에 오르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나요?”
“‘연허’의 노사(老師)가 되면 최소한 선택의 자유는 생긴다. 그들은 영지 선초나 선단이 필요할 때만 ‘제행각’에 나가서 일을 하니까.”
“제행각요?”
“속세의 사람들을 돕는 곳이지. 물론 그 대가로 공물을 받고.”
“아하!”
“제행각의 일은 비교적 쉽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이 쉬운 만큼 보수도 영지 선초나 돈으로 주지.”
“어려운 일도 있나요?”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요종에서 어렵다고 할 정도의 일이 뭔지 궁금했다.
“어려운 일은 ‘무상각’에서 관리를 한다. 영물이나 신수와 관계되거나, 아주 희귀한 영지 선초를 채취하는 일은 노사들이 할 수 없으니까. 그런 일은 대부분 종사나 제군들의 의뢰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보수도 눈이 돌아갈 만큼 대단하지.”
“보수가 뭔데요?”
“혼석이나 영석.”
“그게 눈이 돌아갈 만큼 대단한 거예요?”
그러자 벽초가 황당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종문의 제자에게 혼석이나 영석은 목숨을 걸 정도로 귀한 보물이었다.
“너 혼석과 영석이 뭔지는 아느냐?”
“대충은 알아요. 수련에 도움이 되는 돌 같은 거잖아요.”
“미친. 혼석과 영석을 돌이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누가 돌이래요? 돌 같은 거라고 했지.”
“그 소리가 그 소리지. 영물과 신수의 머리에는 천지간의 영기가 응집된 보석이 있다. 영물에게서 나오는 것이 혼석, 신수에게서 나오는 것이 영석이다.”
“아! 영기.”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주에서는 영기와 관계된 것은 죄다 보물 취급이니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영지 선초나 선단, 내단 등의 도움을 받는 건 진인(원영의 경지)까지만이다. 노조(독요의 경지)에게 그런 건 강물에 물 한 바가지 붓는 것처럼 미미하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혼석이나 영석이 필요하지.”
“그럼 노조들도 일을 하겠네요?”
“아까 말했듯이 그들은 따로 ‘무상각’에서 일을 받는다.”
“결국 우리 같은 방사(方士, 연단의 경지)들만 십 년 동안 무보수로 일을 하는 거네요?”
“보수는커녕 일해 주고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지.”
“와아! 뭔가 부조리한 느낌이 팍팍 드는데요?”
“뭐, 생각을 달리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소요종의 기본 공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물론, 먹여 주고 입혀 주기까지 하지 않느냐.”
“벽 사형은 참 긍정적이신 것 같습니다?”
“소격각에서 이십오 년을 지내다 보면 긍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아, 예.”
연적하는 건성으로 장단을 맞췄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저렇게 되기 전에 빨리 소격각을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참, 너도 ‘천애불문비(天涯不文碑)’에 대해서는 들었겠지?”
“예, 하루 한차례 그곳에 가서 명상해야 한다고 하던데, 맞나요?”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천애곡부터 가자. 그런 뒤에 천주봉을 한 바퀴 돌면 되겠다.”
***
불우산.
천애곡.
사시 정(오전 10시).
두 남자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앞에 나타났다.
소격각을 떠난 벽초와 연적하다.
천애곡은 암석으로 된 곳이라 풀이나 나무보다 바위가 더 많았다.
자연히 몇 안 되는 나무 그늘마다 오색의 띠를 맨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에는 띠를 매지 않은 노인들도 적지 않았다.
풍기는 분위기가 노사(老師, 연허)나 진인(眞人, 원영)으로 보였다.
벽초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쪽 구석의 외진 곳으로 연적하를 이끌었다.
나무나 풀이 없는 데다 바닥도 울퉁불퉁해 앉아 있기 불편한 자리였다.
자연히 주변에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뚱한 얼굴로 바닥을 살피는 연적하에게 벽초가 말했다.
“사제도 알겠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한다. 뭐, 나라도 누가 옆에서 구린내를 풀풀 풍기면 짜증이 날 테지만. 여기서도 잘 보이니까 앞으로는 이 자리를 이용하도록 해라.”
“…….”
연적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벽초의 말대로 절벽이 워낙 커서 어디에서나 잘 보이기는 했다.
그렇다 해도 스스로 척박한 자리에 처박히다니.
뒷간 청소야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 차별이 배움의 터인 천애곡까지 연장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 자, 이리 와 앉아라.”
벽초는 연적하의 얼굴을 못 본 척 하고 그를 잡아끌었다.
자신도 이십오 년 전에는 저랬기에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하지만 자존심도 부릴 사람이 부리는 거다.
괜히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얻어터지는 것보다 이런 곳이 백배 나았다.
연적하가 옆에 털썩 주저앉자 벽초는 절벽을 가리켰다.
“저기 절벽 중앙에 새겨져 있는 구불구불한 글자들 보이느냐? 저게 그 유명한 ‘천애불문비’다. 저기 숨겨져 있는 공법을 터득하면 원영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구주의 종문마다 저런 게 하나씩 있다니 참 신기하지 않으냐?”
“저게 글자예요? 그냥 구름을 그려 놓은 거 같은데?”
연적하는 벽초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글자가 아닌데 왜 글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불문비(不文碑)’라고 부르는 줄 알았는데 무슨 글자란 말인가?
“하하!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저게 구름 문양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쯤 지켜보니 구불구불한 게 글자로 변하더구나. 이건 백번 설명해 줘도 모른다. 직접 경험해 봐야지.”
“그걸 알아보는 데 한 달이나 걸려요?”
말을 하고 나서 연적하는 ‘아차!’ 싶었다.
이십오 년이나 소격각을 벗어나지 못한 그에게 못할 질문 같아서다.
하지만 벽초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함께 입문한 동기들 중에 내가 가장 빨랐다. 다른 사람들은 두 달, 석 달 걸려 알아냈으니까. 나는 근처에서 있을 테니 한 시진(2시간) 후에 보도록 하자.”
“예…….”
벽초는 바닥이 더 험한 곳으로 이동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짠했다.
‘그렇게 빨리 알아낸 분이 왜 이십오 년 동안이나 원영을 만들지 못했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연적하는 절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남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자유를 얻으려면 ‘천애불문비’에 숨겨져 있는 공법을 터득해야 했다.
한 시진은 금방 지나갔다.
연적하는 발소리를 듣고 반개한 눈을 떴다.
이윽고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니 벽초가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왔다.
“뭐가 좀 보이더냐?”
“오래 쳐다보니까 뭔가 가물거리는 느낌은 들더라고요. 입문 동기들 중에 가장 빨랐다는 벽 사형도 한 달이나 걸렸다면서요.”
“아무 의미 없다. 지금의 나를 보면 모르겠느냐?”
어쩐지 자조적인 그의 얼굴을 본 연적하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다른 종문에도 ‘천애불문비’가 있나요?”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야 절벽에 있어서 이름을 아예 ‘천애곡’으로 지었다지만, 큰 바위를 깎아 새긴 곳도 있다고 들었다.”
“아! 천애곡에 있어서 ‘천애불문비’라고 부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봐요?”
“기원이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다른 종문에도 ‘천애불문비’가 있는 걸 보면 내 말이 맞을 게다.”
“천애불문비에 적힌 내용도 같을까요?”
“그건 모른다. 어쩌면 종사들은 알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는 ‘천애불문비’를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니까.”
“그런데 ‘천애불문비’는 누가 만든 거예요? 누가 만들었으니까 절벽에 저런 게 있는 거잖아요?”
“혹자는 이 세계를 만든 창조신이 남긴 거라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창조신을 따르던 종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나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한다.”
“창조신을 따르던 종요?”
골똘히 생각하느라 연적하의 눈매가 좁아졌다.
어디서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너는 지금까지 창세 신화를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제가 가정교육을 받지 못해서요.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거든요.”
벽초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창세 신화에 의하면, 창조신이 상천(上天)의 하늘에서 하계에 내려와 구주(九州)를 만드셨다. 그리고 구주를 다니며 아홉 명의 종을 거두었지. 훗날 창조신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가시기 직전 아홉 종들에게 ‘하늘로 오르는 문[天門]’을 맡기셨다. 종문의 뿌리는 바로 그 창조신이 거든 아홉 종들이라 할 수 있다. 자아, 여기서 생각해 보자. 저 절벽에 ‘천애불문비’를 새긴 게 창조신 같으냐? 아니면 창조신을 따르던 아홉 종들 같으냐?”
“아홉 종요.”
“그렇지! 너도 꽉 막힌 사람은 아니구나. 구주의 아홉 종문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는 그 때문이다. 같은 창조신을 모셨지만 보는 관점이 조금씩 달랐던 거지.”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런 거라면 ‘천애불문비’는 비슷하면서도 다를 것 같았다. 종사들이 모여서 연구를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사형. 그 아홉 종들은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다니?”
“‘하늘로 오르는 문’을 맡았다면서요? 그럼 그들은 구주에 남았다는 거잖아요?”
“그 뒤에 알아서 상천 세계로 가셨겠지. 그 답은 종사님만 알고 계실 게다.”
“가셨겠죠?”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러니 종사가 되려고 이 난리들이 아니냐. 그게 아니라면 뭐가 좋다고 평생 산에 틀어박혀 수도를 하겠느냐?”
벽초의 말 속에는 득도를 하지 못한 자의 울분이 담겨 있었다.
연적하는 참담한 그의 심정을 이해해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넘어갔다.
***
점심시간이라 천애곡을 나온 두 사람은 일단 불우산 초입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벽초는 공터가 아닌 식당 뒤쪽의 후미지고 음습한 곳으로 연적하를 데리고 갔다.
“벽 사형, 왜 공터로 안 가시고요?”
“내가 낯을 좀 가려서 그러니 이해해라.”
“…….”
소격각의 터줏대감이 낯을 가린다고?
연적하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러려니 했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그걸 캐물을 정도로 친분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후미진 곳에서 대충 식사를 마치고 천주봉을 올라갔다.
벽초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청소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종사의 거처인 소요정(逍遙亭), 삼전(三殿)의 하나인 무궁전(無窮殿), 천애곡 인근의 세심정(洗心亭)을 거쳐 마침내 봉황정(鳳凰亭)에 이르렀다.
두 사람이 지는 해를 받으며 봉황정으로 다가갈 때다.
뒤쪽에서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벽초 방사! 당신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내가 청소 깨끗이 하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