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12
612회. ‘밤하늘’에서 ‘일’과 ‘십’을 나누라고?
백무영 진인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소격각은 좁으니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등선대 아래로 가도록 하지.”
“등선대요?”
처음 들어 보는 지명에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우산의 오대 봉우리를 다 외웠는데 등선대는 금시초문이었다.
“용화봉 옆에 있는 봉우리가 등선대네.”
“거기까지 가자고요?”
“뭐 급한 일도 없는데 쉬엄쉬엄 가는 거지. 왜 너무 먼가?”
백무영 진인이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워영의 유무를 보는 거면 소격각 앞마당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핑곗김에 ‘검의 화신’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것도 가능하면 수백 개 전부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등선대 아래의 아무도 찾지 않는 계곡이 적당했다.
물론 큰 소리가 나면 소란이야 일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모른 척 자리를 뜨면 그만이다.
수백 개나 되는 ‘검의 화신’은 보는 것만으로도 큰 깨달음이 된다.
고작 ‘원영 삼 성’의 진인에게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었다.
“뭐, 그러죠.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허허, 잘 생각했네. 급하게 서두를 것 없네. 서둘러 마시다가는 물도 체한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자네가 체하거나 할 일은 없겠지만.”
기분이 좋아진 백무영 진인은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내 영기가 좀 과한 것 같던데.”
연적하는 자연스럽게 영기를 입에 올렸다.
내단과 원신이 합일했음을 알고 난 뒤로 영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아서다.
백무영 진인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답했다.
“내 그걸 감안해서 등선대로 가자고 한 거라네. 등선대는 외진 곳이라 아무래도 상관이 없거든.”
“아, 그러시구나.”
연적하는 백무영 진인의 태도 변화가 조금 의아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인정받아 소격각을 떠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그러나 백무영 진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무영 진인과 연적하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병휴와 황인보, 벽초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백무영 진인이 애써 담담한 얼굴로 방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황인보가 꾸벅 인사를 하며 답했다.
“연 사제가 승급 심사를 받는다고 해서요. 저희도 수련에 도움이 될까 하여 참관을 하고자 합니다.”
백무영 진인은 차마 안 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칠각의 승급 심사가 모두 공개적으로 치러진 까닭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모두 등선대까지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백무영 진인은 자신의 욕심을 비우기로 했다.
“연 방사, 승급 심사는 원영의 유무만 확인하면 되네. ‘천산검영’을 일 성으로 펼치면 굳이 등선대까지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가능하겠는가?”
“그래도 된다면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제가 손해를 보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죠?”
“손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경지가 낮게 책정될 수도 있느냐 이 말이죠.”
연적하는 힘을 뺌으로 행여나 등급 책정에 손해를 볼까 염려했다.
“허허,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로군. 등급이 뭐라고 딱 정해 주는 건 아니네. 노사나 진인의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만 확인한다고 생각하면 될 걸세.”
“그럼 나머지는?”
“‘원영 일 성’에서 ‘십 성’까지 모두가 진인일 뿐이지. 진인이 자기 등급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던가?”
말과 함께 백무영 진인이 제 이마를 툭 쳐 보였다.
그제야 연적하는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경지를 전부 보여 주지 않아도 된다니 조금 안심이다.
진인도 성취에 따라 대우가 다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일 성 정도의 원영이면 된다는 거죠?”
“그렇네. 딱 ‘검의 화신’까지만 보여 주면 되네.”
백무영 진인은 무심코 자신이 그의 경지를 알고 있음을 내비쳤다.
하지만 둔한 연적하는 다행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
“자아, 그럼 보여 주게.”
말과 함께 백무영 진인이 뒤쪽으로 물러났다.
병휴와 황인보, 벽초도 그를 따라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백무영 진인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거리를 벌리자 황인보가 한마디 했다.
“각주님, 너무 뒤로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게요. 이래서는 원영의 기운이 느껴질지 모르겠네요.”
상대적으로 무위가 떨어지는 병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멀어서는 연적하가 일으킨 원영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백무영 진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적하를 뚫어져라 보기만 했다.
한편 호들갑을 떠는 황인보나 병휴와 달리 벽초의 낯빛은 무거웠다.
그는 사실 연적하의 승급 심사를 모르고 있었다.
오늘도 지나던 길에 황인보에게 듣지 않았다면 여기 있지도 않았을 게다.
처음에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소격각에서 연적하의 무위가 뛰어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원영(元嬰)이라는 것은 내공과 전혀 다르다.
아니 혹자는 ‘내공이 뛰어날수록 원영을 만들기 어렵다’고도 했다.
내공의 원천인 내단(內丹)을 녹이지 않으면 원신(元神)과 합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종문의 제자치고 구주에서 유명하지 않았던 무인이 없다.
그렇게 선별된 무인이 최소한 십 년간 수련해야 원영을 만들 수 있다.
종문의 역사가 그게 보편적인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며칠 만에 해냈다고?
‘나도 이십오 년 동안 갈피를 잡지 못한 일을?’
의심하면서 따라온 것은 그 말도 안 되는 일의 끝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것 보라고.
연적하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건 안 되는 거라고.
그도 결국은 우리와 같다고.
그런데 담담한 연적하의 얼굴을 보니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연적하가-일전에 소격각에서 주운 뒤로 들고 다니던-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일 성의 힘으로 펼치라니 생각이 더 복잡해진다.
지금까지 무공을 펼치면서 일 성이니 이 성이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약간’, ‘조금 세게’라거나, ‘이게 죽을라고?’, ‘죽었어!’ 정도의 마음가짐이 있었을 뿐이다.
‘일 성은 아주 약하게 정도겠지?’
전체의 힘을 ‘십’이라고 할 때 ‘하나’의 힘이니 그럴 게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려웠다.
예컨대 자신의 단전은 ‘밤하늘’과 같았다.
‘밤하늘’에서 ‘일’과 ‘십’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결국 연적하는 백무영 진인이 요구한 ‘일 성’을 ‘최대한 약하게’로 타협했다.
그의 검이 천산검영의 검로(劍路)를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그에 호응하듯 일어난 구천기가 검신을 암청색으로 짙게 물들였다.
우우웅-.
낡은 검이 묵직한 검명(劍鳴)을 흘렸다.
노사의 자리를 원한다면 이쯤에서 멈춰도 충분하다.
그러나 연적하가 바라는 것은 진인, 무조건 ‘검의 화신’을 보여 줘야만 한다.
연적하는 조금 더 힘을 실었다.
고오오-.
검신에서 마치 유령처럼 또 하나의 검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순간 백무영 진인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했다.
사물에도 유령이 있다면 저렇게 보일 게다.
암청색으로 빛나는 반투명한 검은 말로만 듣던 ‘검의 화신’이었다.
진검강과 ‘검의 화신’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검의 화신’이 더 윗길이다.
‘진검강’이 그저 ‘원영의 강기’라면 ‘검의 화신’은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니까.
그런데 그 ‘검의 화신’이 순식간에 십여 개로 늘어났다?
고오오오-.
연적하의 주위로 열 개나 되는 ‘검의 화신’이 둥실 떠올랐다.
깜짝 놀란 백무영 진인이 좌우를 살폈다.
‘진검강’이든 ‘검의 화신’이든 몸 밖으로 나온 이상 그저 소멸되는 법이 없어서다.
하나라면 모를까?
열 개나 되는 ‘검의 화신’이 떨어지면 주변은 초토화가 되고 만다.
머쓱한 얼굴로 검의 화신을 보던 연적하가 백무영 진인에게 말했다.
“이것들 좀 처리하고 올게요.”
이윽고 연적하는 어검비행으로 소격각을 떠났다.
열 개의 ‘검의 화신’들이 새끼 오리들처럼 줄지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연적하가 사라진 소격각에 침묵이 감돌았다.
백무영 진인은 물론 병휴, 황인보, 벽초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만에 병휴가 백무영 진인에게 물었다.
“저어, 각주님. 우리가 본 게 진검강 맞습니까? 진검강이 저렇게 검과 똑같이 생겼나요? 저는 원영의 강기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저건 진검강이 아니라 ‘천산검영’에서 말하는 ‘검의 화신’이다. 진검강보다 더 대단한 경지이지.”
“‘검의 화신’요? 그런 게 있었습니까? 왜 저는 한 번도 못 들어 봤을까요?”
그러자 황인보가 설명했다.
“그건 사제가 아직 ‘천산검영’을 배우지 않아서 그러는 게다. 내가 연 사제에게 ‘천산검영’을 어제 가르쳐 줬는데 하루 만에 ‘검의 화신’을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예에? 어제요? 아니 그게 가능합니까? 하루 만에?”
황인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사람이 자신일 게다.
원영의 기운을 검신에 담기만 해도 기함할 일인데 ‘검의 화신’이라니!
한편 굳은 얼굴로 서 있던 벽초는 슬며시 자리를 떠났다.
축하는 둘째치고 연적하의 얼굴을 편하게 대할 자신이 없어서다.
잠시 후 어검비행의 수법으로 돌아온 연적하가 백무영 진인 앞에 떨어져 내렸다.
병휴와 황인보가 연적하에게 달려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뒤쪽에서 그들을 보는 백무영 진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어검비행의 수법 하나만 보아도 연적하가 자신보다 위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열기가 수그러들 즈음 백무영 진인이 다가갔다.
“연 방사, 아니 이젠 진인이라고 해야겠지? 원영의 대성을 축하하네. 자네가 원영지경에 올랐음을 보증해 줄 테니 지금 나와 함께 대라각으로 가세.”
“대라각요?”
“주역봉 노조님에게 소요종에 새로운 진인이 탄생했음을 알려야 하니까. 자네도 새 거처를 얻으려면 주 노조님과 상의해야 할 텐데? 뭐 소격각에 계속 있을 거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새 거처를 얻어야죠.”
“어디 생각해 둔 곳은 있는가?”
백무영 진인은 연적하가 다른 육각 중에 하나를 선택하리라 생각했다.
스승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그랬기 때문이다.
“없어요.”
“나라면 초월전으로 보내 달라고 하겠네.”
“왜요?”
“초월전에서 혼석과 영석을 관리하지 않나. 그곳에 있으면 눈먼 혼석과 영석이 떨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오! 괜찮은 생각인데요?”
혼석과 영석은 종문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다.
그러니 초월전의 일원이 되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물론 한산월 제군이 받아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시시덕거리며 산 위로 오르던 두 사람 앞에 대라각이 나타났다.
대라각에 도착하자 백무영 진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근엄한 신색으로 뚜벅뚜벅 앞서 걸었다.
***
천주봉.
대라각.
백무영 진인을 보는 주역봉 노조의 눈빛은 좋지 않았다.
그는 백무영 진인이 무조건 연적하를 떠넘길 각오로 왔다고 오해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음성이 돌처럼 딱딱한 게 자칫 말 잘못 꺼냈다가는 봉변을 당할 분위기다.
백무영 진인은 단번에 주역봉 노조가 왜 그러는지 알아차렸다.
“주 노조님, 오늘 제가 찾아온 것은 연적하의 승급을 추천하기 위해서입니다.”
“흥! 승그읍?”
주역봉 노조가 가소롭다는 듯 말을 길게 뽑아 올렸다.
연적하가 입문한 지 아직 이레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승급이라니?
‘이놈 봐라. 연적하를 원하는 곳이 없으니 노사로 올려 소격각에서 내보내시겠다?’
단단히 오해한 주역봉 노조가 고리눈으로 백무영 진인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