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50
850회.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겠어요
하남성.
사람은 쉽게 환경에 적응한다.
하루가 지나자 풍연초는 더 이상 연적하가 만들어 낸 구름에 놀라지 않았다.
그 대신 마치 마차를 타고 가듯 구름 아래 펼쳐지는 풍광을 즐겼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풍연초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적하야. 해가 질 것 같은데 저 아래 마을에서 쉬어 가는 게 어떻겠느냐?”
“그러는 게 좋겠죠?”
연적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디쯤 왔는지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볼 때도 됐다.
잠시 후 눈처럼 하얀 구름 한 덩어리가 마을 어귀에 스르륵 내려앉았다.
연적하와 풍연초는 느긋하게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객점을 찾아 주인에게 여기가 어디냐 물었더니 학산현이란다.
풍연초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옳거니! 학산현이면 개봉과 무한의 중간이니 제대로 왔구먼. 어디 보자 하루에 오백 리를 온 건가? 가만, 그럼 내일이면 무한에 도착하겠는데?”
노련한 객점 주인은 손님들의 헛소리를 지적하기보다 오히려 장단을 맞춰 주었다.
“호광성 무한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손님의 계산이 맞습니다. 그런데 저녁 식사는 무엇으로 올릴까요? 따로 원하시는 게 없으시다면 저희가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식사를 내드리겠습니다.”
연적하를 대신해 풍연초가 나섰다.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게 뭐요?”
“오늘 저녁은 만두와 우육면입니다.”
“괜찮네. 적하야,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너는 어떠냐? 따로 원하는 요리가 있으면 말하거라.”
“나도 괜찮아요.”
연적하가 동의하자 풍연초가 주인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주는 것으로 하리다.”
“술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술은 됐소.”
풍연초는 단번에 거절했다.
좋은 일로 가는 것도 아닌데 술을 마시며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 예.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내오겠습니다.”
술을 시키지 않아서 그런지 주인이 다소 맥 빠진 얼굴로 돌아갔다.
창문 밖이 어둑어둑해지자 객점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윽고 음식이 나왔다.
이철산의 일로 기분이 가라앉은 연적하와 풍연초는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다소 가라앉은 두 사람과 달리 식당의 다른 손님들은 활기가 넘쳤다.
겨울을 보내고 이제 막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계절의 분위기가 반영된 모습이다.
살다 보면 유난히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 있다.
객점 식당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 도적들 말이야. 사실은 녹림에서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가 몰라.”
“녹림이라고?”
“그렇잖은가. 녹림 외에 그런 도적이 있을 리가 없잖아. 녹림에서 욕심을 부리고, 있지도 않은 단체에 뒤집어씌우는 걸 수도 있지.”
“그런가? 하기야 녹림 외에 상단을 털어먹을 도적이 없기는 한데.”
그러자 누군가 반론을 펼쳤다.
“아닐 수도 있어. 남천 대협의 의제도 죽었다잖아. 그 도적들이 녹림이라면 오봉십걸을 건드렸겠어?”
“그건 또 그렇네?”
그러자 녹림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이 곧바로 반박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지. 싹 다 죽었다던데 녹림에서 그랬는지, 다른 도적들이 그랬는지 어떻게 알아? 싹 다 죽인 걸 보면 오히려 녹림이 의심된다니까. 목격자를 남겨 두지 않은 거잖아. 왜겠어?”
상인들로 보이는 남자들은 정체불명의 도적을 두고 ‘녹림이다’, ‘아니다’ 연신 실랑이를 벌였다.
풍연초가 슬쩍 연적하를 쳐다보았다.
“너는 저들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녹림에서 벌인 짓일 수도 있다고 보느냐?”
“녹림은 아니에요.”
“그런가. 도둑놈들 속은 알 수가 없어서…….”
풍연초가 반신반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녹림에는 워낙 쓰레기들이 많아 뒤로 그런 짓을 하고도 남았다.
“내가 그놈들을 몇 번 만나 봤잖아요. 녹림에는 그 정도 고수가 없어요.”
“녹림이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렇게 무위가 뛰어나더냐?”
“예. 어떤 놈들은 심 노인보다 강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유명교도 아닌 것 같고. 정말 이상한 놈들이었어요.”
“허! 대체 어떤 놈들이지?”
풍연초가 눈살을 찌푸렸다.
유명교는 아닌데 심통보다 강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해당되는 문파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
다음 날 저녁, 연적하와 풍연초는 마침내 무한에 도착했다.
개봉을 떠난 지 이틀 만에 천 리가 넘는 거리를 이동한 셈이다.
아직 초저녁이라 두 사람은 물어물어 천검문을 찾아갔다.
하소백이 사는 곳을 몰라 천검문 사람들에게 안내를 부탁하기 위함이다.
연적하와 풍연초의 방문에 천검문이 발칵 뒤집혔다.
오늘날 남천 연적하의 이름은 천하 십대고수와 같거나 그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런 인물을 만나게 되었으니 다들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이다.
풍연초가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천검문주 활인검 유진원과 그의 딸 유소운이 직접 길 안내를 자처하고 나섰다.
무한의 거리를 한 식경(약 30분)쯤 걸었을까?
유진원이 아담한 가옥을 가리켰다.
“대협, 저곳이 이철산 대사부의 집입니다.”
연적하가 착잡한 눈으로 이철산의 집을 보았다.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안채에서 흐릿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적하가 유진원을 향해 말했다.
“문주님. 고마워요. 여기서부터는 우리만 갈게요.”
“아, 예. 연 대협.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유진원은 연적하에게 꾸벅 인사를 올린 뒤 딸과 함께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사이 풍연초가 대문으로 다가가 손끝으로 슬쩍 밀었다.
끼이익-.
잠겨 있지 않은 대문이 마찰음과 함께 열렸다.
마당으로 들어간 풍연초가 가볍게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채연이 안에 있느냐?”
그의 말과 동시에 방문을 열고 한채연과 하소백이 마루로 나왔다.
“큰 오라버니! 연 오라버니!”
“오셨어요.”
반갑게 소리친 하소백과 달리 한채연의 음성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득 그녀들의 뒤로 보이는 물건을 본 연적하가 멈칫했다.
마루 한쪽에 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자신이 이철산의 시체를 가져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풍연초와 함께 마루 위로 올라간 연적하는 가장 먼저 이철산의 시체를 꺼냈다.
공간 창고 마하담에 들어 있던 이철산의 시체는 부패가 진행되지 않아 생생했다.
이철산을 본 한채연이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그녀는 이철산의 시체 앞에서 ‘끅끅’거리며 소리 죽여 울었다.
잠시 후 풍연초와 연적하를 향해 돌아선 한채연이 두 사람에게 대례를 올렸다.
“오라버니들 그이를 데려다줘서 감사해요.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게요.”
풍연초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은혜라니.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을 하면 섭하지. 적하가 나섰으니 철산이의 복수는 적하에게 맡기고, 너는 몸조리에 신경 쓰도록 해라.”
“……네.”
한채연은 군말하지 않았다.
연적하로 말하자면 한다면 하는 사람이고, 그가 하지 못하는 일은 누구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 풍연초의 말대로 자신은 출산까지 몸조리만 잘하면 될 일이다.
하소백이 궁금해 할 한채연을 대신해 물었다.
“연 오라버니. 철산 오라버니를 죽인 자들의 정체는 알아냈나요?”
“아니. 하지만 철산이를 저렇게 만든 놈은 죽였어. 나머지도 찾는대로 전부 죽여 버릴 거야.”
살기등등한 연적하의 말에 하소백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오봉산 시절에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
십두마병을 죽인 일로도 번민하던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그때 한채연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오라버니. 철산 오라버니를 죽인 놈이 죽었으면 됐어요.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겠어요.”
“됐다고?”
“네. 다른 사람까지 다 죽이면……. 아빠 없는 애들만 늘어나잖아요.”
“…….”
뜻밖의 말에 연적하는 눈만 끔뻑거렸다.
지금까지 적들의 남겨진 가족을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빠 없는 애들만 늘어난다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 있어서 그녀의 말에 쉽게 동의하기도 어려웠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하소백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라버니들,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
그러자 풍연초가 말했다.
“우리는 나가서 사 먹으면 되니 신경 쓰지 마라.”
하소백은 오라버니들에게 직접 차려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난 며칠간 되는 대로 먹었던 터라 집안에 요리 재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
다음 날.
한채연은 천검문의 도움 속에 그동안 미루었던 이철산의 장례를 치렀다.
초대하지도 않았건만 어떻게 알았는지 무한의 명사(名士)들이 대거 참석했다.
예정에 없던 성대한 장례식 후, 이철산은 천검문의 묘지에 묻혔다.
한채연의 집.
애잔한 눈으로 만삭의 한채연을 보던 연적하가 불쑥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계속 무한에 있을 생각이냐?”
그러자 한채연이 하소백을 힐끔 본 후에 답했다.
“네. 소백이와 함께 태평상방의 일을 하려고요. 철산 오라버니의 무덤도 이곳에 있고.”
그녀들은 태평상방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태평상방이라면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자신이 있어서다.
“그래. 도와줄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연락해. 어디에 있는 금방 달려와 줄 테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오라버니.”
가만히 듣고 있던 풍연초가 끼어들었다.
“적하가 금방 달려와 준다는 건 빈말이 아니다. 그는 하루에 오백 리 길을 갈 수 있거든.”
“하루에 오백 리를 간다고요?”
하소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적하와 풍연초를 번갈아 보았다.
풍연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적하와 내가 개봉을 떠난 게 정확히 사흘 전이다. 하루에 오백 리씩 움직인 셈이지.”
“정말요? 어떻게요?”
“운종술이라고 제천대성(손오공)처럼 구름을 부리더구나. 처음에는 나도 깜짝 놀라 오줌을 지릴 뻔했다.”
“구름을 부린다고요? 나도 얼핏 그런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정말이에요?”
하소백이 빤히 바라보자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보여 줄까?”
“네.”
“갈 때 보여 줄게. 큰형님. 갈 준비 됐어요?”
연적하의 물음에 풍연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방을 오래 비워 두면 방주를 볼 면목이 없으니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래. 가자.”
운종술을 보여 달라고 했던 하소백이 당황한 얼굴로 연적하에게 말했다.
“벌써 돌아가시게요?”
“어. 풍 형님과 나도 상방을 돕고 있던 중이거든. 오래 자리를 비워 둘 수가 없어.”
그제야 하소백은 아쉬운 얼굴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채연 언니가 아기를 낳으면 꼭 와서 축하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그래. 잘 지내. 채연이도 몸조리 잘하고. 아기 낳으면 꼭 보러 올게.”
갑작스러운 작별에 한채연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오라버니. 꼭 보러 와 주세요.”
한채연은 이왕이면 연적하가 아기의 이름까지 지어 주기를 바랐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순서상 그런 말은 큰 오라버니인 풍연초에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당에 내려선 연적하가 운종술을 펼치자 하얀 구름이 그의 발아래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그걸 본 한채연과 하소백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적하와 풍연초를 태운 구름이 하늘로 둥실 떠오르자 두 여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오라버니들! 다음에 또 봬요!”
“꼭 보러 와 주세요!”
연적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하소백이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언니. 이젠 나도 연 오라버니를 떠나보내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