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28
928회.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텅 빈 회의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검왕 남궁벽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남궁연과 연적하가 맺어졌을 때만 해도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일기당천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연적하였다.
남맹의 상징이던 그가 남맹의 성장에 가장 큰 걸림돌로 변할 줄이야.
무림세가와 다섯 개 문파 앞에서 큰소리쳤지만, 연적하를 만나는 것도 문제였다.
의절 아닌 의절을 한 상태에서 석경장의 이익에 반하는 걸 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딸인 남궁연이나 연적하 어느 누구도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특히나 딸은 이미 모든 걸 손바닥 보듯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대체 무슨 돈으로 열 개나 되는 알짜배기 사업장을 인수했을까?’
석경장의 형편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마침 총사가 회의실로 돌아왔다.
“맹주님?”
“무슨 일이오?”
“정말 석경장에 방문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지 않소.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리다. 그보다 나는 석경장에서 열 개의 사업장을 인수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소. 석경장의 수입원이라고 해 봐야 남연객점 하나뿐인데……. 무슨 돈으로 열 개나 되는 사업장을 인수했는지 아시오?”
“금의위에서 준 것 같습니다.”
“금의위?”
“그렇지 않아도 처음 말이 나올 때 전 주인들을 은밀하게 만나 보았습니다. 석경장이 아니라 금의위에 팔았다고 하더군요.”
“허! 금의위에서 석경장에 준 것이었군.”
남궁벽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분은 나쁘지만 금의위에서 구입해 석경장에 넘겼다면 말이 된다.
돈이 넘쳐 나는 황실에서 연적하에게 뇌물을 바친 셈이다.
“남천 대협이 공짜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걸 노리고 그런 것 같습니다.”
남궁벽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고금제일의 무가(武家)라 할 수 있는 석경장이 황실의 후원을 받다니?
다른 사람 같았으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퍼부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남궁벽의 귓가로 모용문의 음성이 들려왔다.
“남천 대협이 양보를 할까요?”
모용문은 남궁벽이 가도 별수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남맹과 호천맹은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남천이 남맹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지 않은가?
“부딪쳐 봐야 하지 않겠소.”
그 말을 끝으로 남궁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사의 반신반의하는 얼굴을 보고 있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천추각을 나선 남궁벽은 석경장으로 향했다.
그가 석경장에 도착한 것은 해거름 무렵이었다.
석양에 붉게 물든 석경장 앞에서 남궁벽은 한참을 망설였다.
연적하야 남의 자식이니 그렇다 치자.
딸인 남궁연까지 남궁세가를 떠난 뒤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남궁벽은 지독한 허무를 느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검왕으로 불리는 남궁벽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의절하다시피 한 딸의 집을 먼저 찾아가 부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궁벽은 이를 악물고 석경장의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터덜터덜 발소리가 나더니 사십 대 장한이 문을 빼꼼히 열었다.
“누구십니까?”
사내의 무덤덤한 시선에 남궁벽은 입맛이 썼다.
기가 막혔지만, 생각해 보니 석경장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궁벽이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소삼이 급히 문을 열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어서 오십쇼. 안으로 기별을 넣겠습니다.”
부리나케 안채로 달려갔던 소삼이 홀로 돌아왔다.
예상보다 차가운 반응에 남궁벽은 속이 쓰라렸지만 인과응보라 생각했다.
자신도 딸과 사위가 남궁세가를 떠날 때 내다보지 않은 까닭이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문지기를 따라 안채로 향하는 남궁벽의 마음은 무거웠다.
의절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사람은 없지만, 사실상 의절한 상태라는 게 실감 났다.
객청.
소삼은 남궁벽을 안채에 딸린 객청으로 안내했다.
이윽고 연적하가 다과상을 든 찬모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장인어른,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연이는?”
“지안이를 재우고 있습니다.”
“아.”
그제야 남궁벽은 섭섭한 마음이 조금 가셨다.
아이를 재우느라 옴짝달싹 못 한다 생각하니 안쓰럽기까지 했다.
자존심 드높은 장인과 말주변 없는 사위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찻물이 미지근해질 즈음, 남궁벽이 운을 뗐다.
“소식은 들었다. 사업장을 여러 개 손에 넣었다고.”
“예, 금의위에서 주는데 사양하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받았습니다.”
“황실에서 주는 것은 공짜가 없는데……. 그렇게 받아도 괜찮겠느냐?”
남궁벽은 한껏 돌려서 말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너 황실의 개가 될 셈이냐!’며 나무랐을 것이다.
그런 쪽으로 무딘 연적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유명교주와 천외이선을 내쫓아 달라고 주는 거잖아요. 괜찮아요.”
“아무튼지 간에 황실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게다.”
“…….”
연적하는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멋모르고 그를 존경하던 십 대 시절이라면 모를까?
그의 눈에 비친 지금의 남궁벽은 속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남궁벽은 그런 연적하의 태도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 보면 사람의 관계라는 게 참 덧없다.
친자식처럼 여기던 그가 이제는 남만도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너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다.”
정신적으로 피로해진 남궁벽은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적하가 의아한 눈으로 남궁벽을 보았다.
남궁세가를 떠난 뒤로 왕래가 끊겼는데 용건이 있어서 온 모양이다.
“뭔데요?”
“네가 가진 열 개의 사업장은, 너도 알겠지만, 우리 남맹 산하의 방파에서 관리하던 곳들이다.”
“설마 관리를 맡겨 달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그럴 리가 있느냐. 네가 주인이라는 게 알려졌으니 분탕질 칠 사람도 없을 게다. 그보다는 네가 그 전에 관리하던 방파에 한 말 때문이다.”
“제가 뭐라고 했대요?”
“전월보다 매출이 떨어지면 차액을 배상하라 했다고 들었다. 맞느냐?”
“아, 그건 이전에 관리하던 사람들이 뒤에서 장난을 칠까 봐 그랬던 거예요. 관리권을 빼앗기면 뒤에서 아주 난리를 치잖아요.”
“남맹에서 그들이 뒤에서 다른 짓을 하지 못하게 해 주마. 그 대신 너도 차액을 배상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사라는 게 잘될 때가 있고, 안될 때가 있지 않으냐. 그것조차 그들에게 물어주라는 것은 지나치다 할 수 있다. 관리권을 잃은 다섯 개 방파는 네가 그들에게 ‘족쇄를 채우려 한다’ 오해하고 있다.”
“아, 남맹에서 책임져 준다면 그렇게 할게요. 만약 그들이 수작을 부려 매출이 떨어진 게 드러나면 남맹에서 배상해 주실 거죠?”
“어떻게 배상하면 되느냐?”
“말만 하면 의미 없으니까, 배상금으로 한 개 사업장당 은자 만 냥을 받을게요.”
“은자 만 냥?”
남궁벽이 황당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한 개 사업장의 배상금으로 은자 만 냥이라니?
그 정도 돈이면 손해의 차액이 아니라 일 년 수익금보다 많았다.
“그냥 상징적인 금액이에요. 남맹에서 관리 감독만 제대로 해도 그럴 일은 없잖아요.”
“그렇기는 하다만…….”
남궁벽은 말끝을 흐렸다.
맞다.
남맹 산하의 방파들이 허튼짓을 하지 않도록 감시하면 그럴 일은 없다.
그런데 장인이 맹주인 남맹에 만 냥의 배상금이라니…….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 같은 소리였다.
“그래도 장인어른이 맹주님이시니까 계약서까지는 쓰지 않을게요. 돈 받아 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알겠다. 그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자꾸나.”
남궁벽은 서둘러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어차피 남맹에서 관리 감독만 꼼꼼하게 하면 별탈 없이 지나갈 문제였다.
이야기가 정리될 즈음, 남궁연이 객청으로 나왔다.
“오셨어요? 아버지. 지안이를 재우고 오느라 늦었어요.”
“그래 이야기 들었다. 지안이가 지금 몇 살이지?”
“두 살요.”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남궁벽은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딸을 데리고 와룡장에 갔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그 딸이 자라 아이 엄마가 되다니.
괜히 싱숭생숭해진 남궁벽은 서둘러 자신의 방문 이유를 설명했다.
“……남맹에서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그리고 다섯 개 방파로 인해 매출이 떨어지면, 남맹에서 사업장당 만 냥을 배상해 주기로 했다.”
남궁벽의 이야기가 끝나자 묵묵히 듣고 있던 남궁연이 입을 열었다.
“저는 아버지가 지안이를 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찾아오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남맹에 속한 방파의 이익을 위해 오셨다니 기분이 좀 그렇네요.”
“…….”
남궁벽은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이 석경장에 온 것은 남맹의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섭섭한 마음에 한마디 했다.
“내 기분은 좋을 것 같으냐? 남궁세가에 발을 끊은 것은 너희들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지안이를 단 한 번도 나에게 데리고 온 적이 없다.”
“우리가 그러는 이유를 아시잖아요.”
“너희를 제외하고 누구도 남궁세가가 협의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울컥한 남궁벽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남궁연이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석경장은 남궁세가가 아니에요. 큰소리는 남궁세가에서 치세요.”
무심한 남궁연의 얼굴을 본 남궁벽은 뒤늦게 ‘아차!’ 싶어 노기를 가라앉혔다.
어릴 때부터 딸은 화가 날수록 감정을 버렸다.
지금의 저 모습이야말로 폭발 직전.
만에 하나 그녀가 남맹에 화풀이를 하면 남맹은 손쓸 틈 없이 무너지고 말 터였다.
“음, 미안하다. 본의 아니게 언성이 높아졌구나. 나와 남맹을 나쁘게만 보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적하야.”
“예?”
“최근 금의위에서 유명교주와 천외이선에 대한 말을 들은 게 있느냐?”
“없는데요?”
“그래? 이상하구나.”
“왜요?”
“최근 유명교주와 천외이선이 이상한 술법을 연마한다는 정보가 있다. 금의위에서 너에게 전해 주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모른다니 이상해서. 나중에 금의위를 만나게 되거든 슬쩍 확인해 보거라.”
“예.”
“그건 그렇고 유명교주와 천외이선을 언제까지 방치해 둘 생각이냐?”
“호천맹과 남맹이 싸우지 않을 때까지요.”
“남맹과 호천맹은 어느 한쪽이 무릎 꿇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게다.”
“…….”
연적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날카로움도 조금씩 무디어지기 마련.
이제는 그도 남맹과 호천맹의 밥그릇 싸움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변명은 여전히 못마땅했지만 말이다.
잠시 후 남궁벽이 돌아갔다.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남맹의 맹주인 그를 배웅하는 사람은 연적하와 남궁연뿐이었다.
달빛을 받으며 안채로 걸어가던 연적하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관리권을 빼앗긴 방파들이 어지간히 귀찮게 했나 봐요. 그 자존심 강한 장인어른이 먼저 여기까지 찾아오신 걸 보면.”
“벽검문과 육도문은 세력이 큰 문파들이라 그냥 넘기기 어려웠을 거야.”
“가만, 벽검문은 어디서 들어 본이름인데…….”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며칠 전 미주각에서도 그랬지만, 왠지 생판 남 같지 않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