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79
79화
찌는 듯 무더운 말복 날처럼 볕이 좋았다. 산영이 아는 놀이는 별로 없지만 제기차기라면 자신이 있었다. 심심할 적마다 마을에서 참새가 구해다 준 낡은 제기 하나를 가지고 진 빠지게 놀았었다. 근래 희사와의 사이가 서먹서먹한 데다가 대화 나눌 건더기도 없는 참이라, 우중충한 나날에 활기를 더하고자 제안한 것이었다.
희사에게 가르쳐 주며 앙금을 풀고, 속 깊은 얘기도 나누면서 어찌어찌 이 어색한 간극을 풀어보려고 한 것이다. 실지 산영은 앉아서 학문을 닦는 것보다 몸으로 익히는 게 나은 쪽이었다. 하나 부푼 기대는 김 날아간 숭늉처럼 식어 빠졌다. 제기 솜씨를 보일 기회는 좀처럼 따내기 어려웠다.
“아이구.”
제기는 어떻게 차는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희사와 걷고 있을 즈음. 우연처럼 담소 중인 형님들을 마주한 것이었다. 마주치자마자 얼결 인사를 마치고 떠났으면 그만인 것을. 내심 당황한 산영의 입방정이 문제였다.
‘혹 제기 좀 차보셨는지요.’
‘제기?’
어리벙벙한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이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이참에 저쪽하고 친분도 쌓고 사이좋게 지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는가. 이렇듯 산영의 간솔한 계획에 포획된 삼형제가 모이게 됐으니, 먼젓번 말문을 튼 큰 형님을 주축으로 제기를 차보게 되었다.
하나 문제는 산영의 실력보다 삼형제의 실력이 월등히 좋다는 것이었다. 번번이 꼴찌를 도맡은 산영은 점차 참여하기보다 뒤로 밀려난 구경꾼 신세였다. 애들 놀이처럼 쉬운 난도에 삼형제는 따분한 얼굴이었다.
산영이 열 개를 하면 삼형제는 백 개, 이백 개를 해냈다. 큰 형님은 건성건성 제기를 차다가 산영에게 묻곤 했다.
‘혹 이게 끝입니까?’
무식하게 차기만 하는 게 이 놀이의 끝이냐고 묻는데 산영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였다. 제기차기를 하자고 다 같이 나와 노는데 재미난 건 산영뿐이니. 자존심에 먹칠을 당한 산영은 새 놀이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땅의 놀이도 한번 해보았으니 이번에는 하늘에서 노는 놀이도 한번 해보자는 얘기였다.
삼형제가 온순하게 응할 때부터 망할 조짐이 보였다. 나누어 준 긴 막대기를 잡은 다음, 외양간에서 푹 쉬던 흑둥이를 불러와 올라타라고 하더니만, 요리조리 머리통만 한 돌을 굴려 반원 구멍에 넣는 놀이였다. 한데 그 구멍은 땅이 아닌 하늘에 나 있으며, 어린 흑둥이는 산영을 태우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닌데…….”
형제들이 손을 뻗자마자 쏜살같이 날아온 영물은 새 형상을 하고 있었다. 영물의 생김새는 각각 달랐는데 첫째의 것은 올망졸망하니 머리털에 난 붉은 깃이 고혹적이고, 둘째의 새는 날카로운 눈매에 난 초록 깃이 싱그러웠고, 우아한 푸른 강물 색의 영물은 낭군인 희사의 것이었다.
까만 흑둥이 위에 올라탄 산영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삼형제를 올려다보았다. 저 까만색 돌을 쳐내서 구멍 안에 넣어야 한다는데 위로 어찌 흑둥이를 올린단 말인가.
“저기.”
파드닥거리는 새의 날갯짓 소리에 산영의 목소리가 묻혔다. 집채만 한 영물들이 만들어낸 그림자에 볕도 가려질 지경이었다. 산영은 날지 못하는 흑둥이를 바라보다가 여기 껴서는 안 될 판임을 실감했다.
단순히 언짢은 기분을 풀고 싶었을 뿐인데. 준비한 소박한 제기가 구석에 처박힌 것을 보곤 뒤숭숭해졌다. 가슴 한구석이 풀어 헤쳐져 버려진 기분이었다.
“산영아.”
푸르른 날개를 가진 영물이 조심스레 산영의 옆으로 내려왔다. 날개를 한 번 휘저을 때마다 부는 바람에 산영의 머리칼이 휘휘 날렸다. 영물에서 내린 희사는 흑둥이만 만지작거리는 산영에게 다가왔다.
“그것. 날지 못해?”
아내의 영물에게 그것이라니. 산영은 흑둥이의 머리털을 정성스럽게 쓰다듬었다. 산영은 상한 기분을 숨기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예. 아직 저를 태우고까지는 아니 됩니다.”
“하면 내 것을 타.”
“예?”
희사는 영물의 목에 걸린 목줄을 산영의 앞까지 끌고 왔다. 산영은 그러면 희사 님은 저 위를 날아다니시면서 막대기를 휘두르시는 건가 고민했다.
“희사 님은요.”
“다른 것을 타면 돼.”
산영과 희사가 밑에서 아옹대자 저 하늘 위에 떠 있던 두 명의 형님도 차차 땅으로 내려왔다. 치마폭이 너풀거릴 만큼 거센 바람이 불었다. 차례대로 영물의 노란 새 발이 땅에 닿았다. 어느새 산영의 주위는 간이 졸이는 영물 천지였다.
“또 무슨 일인데.”
간만에 몸 좀 풀겠다며 방정인 이가 저 둘째였다. 둘째와 소 닭 보듯 하던 산영이지만 혼례 후에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산영은 삼형제가 어찌 자신을 끼워줄지 논의하는 바구니 틈에서 슬쩍 빠져나오려 했다.
“저는 신참이니 하시는 것을 먼저 보여주시지요.”
대체 막대기로 돌을 쳐서 구멍에 넣는 놀이가 무슨 재미가 있을까. 하나 산영이 뒤로 빠지자 희사 또한 미련 없이 발을 뺐다.
“너희 둘이 해.”
희사는 맨 처음부터 둘만 나가고 싶다는 분위기를 폴폴 풍겼으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보따리 접고 들어갈 심보였다. 눈치가 비상한 둘째는 간만에 몸 풀 기회를 뺏기게 생겼으니 오죽 심술보를 부풀렸을까.
“얼씨구. 지 아내 안 끼니까 빠지는 게야?”
“그래요. 제수씨. 저희에게 땅의 놀이를 가르쳐 주셨으니, 저희도 가르쳐 드려야지요.”
사람의 머릿수는 넷이었으나 각자 생각하는 바는 너무도 달랐다. 산영은 화해의 도구로 쓸 참이었고, 희사는 아내 곁에 찹쌀처럼 붙어 있을 요량이었고, 둘째는 근질근질한 몸을 풀 놀이였으며, 첫째는 가족 간 화목을 지향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흑둥이의 끈만 붙잡던 산영은 포기가 빨랐다. 이대로 방에 들어가면 나온 보람도 없거니와 눈치 판 것처럼 내뺄 수는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산영은 낭군의 영물을 빌리기로 하고, 옆이 빈 희사는 까만 깃을 가진 영물 한 마리를 더 불러왔다.
하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 세상살이였다. 동시에 네 마리의 새가 하늘로 떠오르니 이상스레 긴장된다.
구름 사이에 난 구멍은 멀고 멀었다. 막대기를 휘두르는 연습은 쓸데없었다. 현란하게 움직이면 아래로 곤두박질하기 딱 좋았다. 해도 해도 소심한 동작만 나올 수밖에.
집중한 산영이 목표인 구멍만 보는 동안, 바람을 누르며 다가온 까만 영물이 산영의 옆자리를 채웠다.
“그만할까.”
물론 걱정에 사무쳐서 하는 말이겠지만, 여기까지 올라와 놓고도 의욕 없는 그의 눈빛은 사기를 떨어트렸다. 기왕 시작한 것 재미나게 하면 부스럼이 날까. 희사를 즐거이 해주기는커녕 곤란하고 곤하게만 만든 모양이다. 산영은 억지로 웃으며 막대기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가 꼭 이기겠습니다.”
말하면서도 다리를 달달 떠니 삼형제의 신뢰는 바닥으로 내려간 눈치였다. 산영은 말의 서두를 돌리기 위해 호탕한 척하며 물었다.
“세 분이서는 자주 이러고 노셨나 봅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며 놀이로 나아가려 했으나 떨리는 입술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안색을 엿본 희사는 영물의 고삐를 쥐고서 산영에게 바짝 붙었다.
“이렇게 한편. 너희 둘이 한편. 그렇게 하는 게 나을 듯싶은데.”
이 놀이는 개개인이 승부를 내며 점수를 따는 놀이였다. 희사의 말에 동감하듯 고삐를 잡는 두 형제를 보며 허탈할 뿐이다. 오기가 생긴 산영은 막대기를 꼭 쥐었다.
“근데 저는 도움이 별반 안 될 듯하여.”
“하면 익숙해질 때까지 희사가 제수씨와 한편을 하면 되겠네.”
“그러든가. 한데 내기는 무엇으로 해?”
산영의 머릿속은 길치의 초행길처럼 복잡하였다. 영물 위에 중심 잡고 앉은 것도 퍽 곤란한 참인데 내기라니. 만약 저 때문에 지면 사죄할 길이 없었다.
“본, 본식은 나중에 하고 우선은 연습부터 하지요.”
승부에서 이기고 싶다는 산영의 의지를 본 삼형제는 저도 몰래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리 희사가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이 놀이에 도가 튼 두 사내를 감당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하도 제기를 가지고 노는 게 심심해 보여 고안한 방법이었는데, 진심이 된 산영을 놀리고픈 두 형제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대강 놀아주면 안 되겠구나.
돌을 넣을 수 있는 구멍 하나를 두고 양옆으로 두 편이 갈라섰다. 돌은 두 편 중앙에 놓여 있고, 어서 날아가 선수 친 쪽이 선점하는 방식이었다. 한데 머릿속으로 전략을 짜는 두 형제와 달리 이쪽의 신랑 신부는 막대기 쓰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이렇게.”
“이렇게요?”
희사는 바람을 불러 막대기 주위에 두르고 내두른다. 땀까지 흘려가며 배운 산영은 호기롭게 바람을 불렀지만, 천년만년 해온 형제처럼 오래 묶어둘 수는 없었다.
이 놀이를 위해 만들어진 돌은 무식하게 친다고 움직이지 않았다. 하기야 아무 장치 없이 하늘에 뜬 것부터 알아봤지만, 막대기에 바람을 둘러써서 움직여야 하는 고난도의 놀이인 것이다.
“지면 어쩌지요.”
희사는 군소리하며 불안해하는 산영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외골수처럼 학문을 파던 아내가 오랜만에 종알종알대는 모습이 어여쁜 것이다. 불긋해진 산영이 이럴 때가 아니라며 희사를 밀어낸 순간이었다. 바람의 방향을 바꾼 반대편서 목소리가 날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