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222
221화
-생사결(1)
크라쉬의 선택은 비등비등한 윗길도, 자신의 진영이 밀리는 아랫길도 아니었다.
애초에 강자생존의 논리로 살아가는 그가 자신의 부하라고 도와주는 일 따윈 없었다.
그가 가운뎃길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빨리 가서 건방진 인간 놈 목을 친다.”
이미 자신의 진영이 점령한 가운뎃길을 빠르게 통과해 적 진영을 점령하려는 셈이었다.
나머지 윗길, 아랫길의 부하들이 죽든 말든 그에겐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부하라는 것들은 또 키우면 그만이었다.
그런 크라쉬의 생각을 잘 아는 쇼구즈였기에 딱히 그를 말리지 않았다.
‘윗길 아랫길 정리하는 게 후환이 없을 텐데. 뭐, 그렇다고 우리 주인님이 질 일은 없으니까.’
쇼구즈는 절대 크라쉬가 질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많은 던전 도우미 경험 중에서도 크라쉬는 특별한 보스였다.
던전이 생성되는 행성의 거주민이 아니라 외부에서 침입한 존재이면서도 던전 보스를 차지한 자.
크라쉬의 행성에 게이트가 열린 후로 대부분의 던전은 일종의 감옥이자 처형장으로 쓰였다.
각 종족의 지도자들은 던전 브레이크를 막을 겸 구제 불가능한 죄인들을 던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결국엔 던전의 몬스터들에게 비참하게 죽어 나갔다.
크라쉬도 처음에는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거인족의 왕에게 도전한 반역자였으니.
‘하지만 들어오자마자 던전을 점령해 버렸지.’
쇼구즈는 그 과정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추후에 던전수에 남아 있는 로그를 살펴보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크, 고블린, 오우거, 트롤, 스퀴라스.
이들은 크라쉬의 던전이 생성되었던 행성의 원 거주민으로 우주에서도 전투 종족으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엄청난 번식력과 마르지 않는 투쟁심으로 평화로운 다른 종족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자들.
크라쉬는 단신으로 그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지배해 버렸다.
다른 거인족들은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고, 그 놀라운 업적으로 인해 크라쉬는 던전의 보스가 되었다.
그리고 총관은 그를 마음에 들어 해 쇼구즈를 던전 도우미로 파견 보냈던 것이었다.
‘그런 주인님이니 절대 질 일이 없지. 하물며 저런 인간 보스한테 지겠어?’
아무리 전설의 S급 도우미였던 티타니아가 붙어 있다지만, 그것도 봉인 이전의 일이었다.
이번에 재회했을 때 보니 봉인을 조금 더 푼 것이 보였지만, 그래도 예전의 능력을 되찾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쇼구즈가 그 뛰어난 머리로 수백 번, 수천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지만, 크라쉬가 지는 결과는 그중에 없었다.
‘뭐, 1,400만 번 중에는 한 번 정도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크라쉬는 단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것을 끝장낼 괴물이니까.
“얼른 가죠!”
쇼구즈가 크라쉬의 어깨 위에서 몸을 꾸물렁댔다.
“들떠 보인다.”
“에이, 들켰어요?”
곧 처참히 도륙 날 인간들의 모습이 기대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흥분되는 건 이번 결투의 전리품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주인님이 티타니아 선배를 데리고 왔으면 좋겠거든요.”
결투에서 이기면 크라쉬가 티타니아를 데리고 오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정식 도우미는 쇼구즈의 차지였으니, 그 전설의 도우미 티타니아는 쇼구즈의 부하가 될 터였다.
그러니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있나.
“주인님이 처음에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선배를 데려온다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럴 리가.”
크라쉬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전투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그에게 쇼구즈 같은 책사형 도우미는 필수적인 존재였다.
그가 티타니아를 요구한 건 단순히 쇼구즈가 티타니아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내 도우미는 누구보다 강해야 한다. 내가 강한 것처럼.”
강함. 오직 그것만이 크라쉬에게 용납되는 가치였다.
그랬기에 크라쉬와 쇼구즈가 가운뎃길 전장에 도착했을 때, 둘 다 충격에 잠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지?!”
서로를 물어뜯은 스퀴라스들의 사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살아남은 스퀴라스들은 모두 스퀴라스닉 비스트를 공격 중이었다.
“아까까진 안 이랬는데?”
비록 우르자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긴 했지만, 덕분에 [피의 격노]에 휩싸인 스퀴라스들이 나진과 민아를 덮치고 있었다.
그녀들은 인간치고는 잘 싸웠지만, [피의 격노]로 폭주한 스퀴라스 무리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온 건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쇼구즈는 꿈틀대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흥, 됐다. 어차피 인간들은 죽었어.”
크라쉬가 콧방귀를 뀌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서도 나진과 민아의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분명 폭주한 스퀴라스 무리에게 갈가리 찢겨 시체조차 남지 않았으리라.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다 죽어도 상관없다.”
꾸직.
크라쉬의 발이 죽은 스퀴라스의 시체를 마치 케이크 조각처럼 짓뭉갰다.
던전의 주력인 오크노이드 종족 중에서도 스퀴라스는 최하급이었다.
오크노이드는 가장 뛰어난 혈통인 오우거나 트롤, 평범한 오크, 하등한 고블린으로 구분된다.
고블린만도 못한 체격과 열등한 유전자를 타고난 것이 스퀴라스들이었다.
얼마나 열등하냐면 스스로는 유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은 스퀴라스닉 비스트, 즉 거대 거미의 등에 난 구멍에서 살다가 전투 때만 튀어나와 싸웠다.
그리고 싸운 직후에는 모두 죽어 버리는 게 그들의 운명이었다.
그러니 크라쉬 입장에선 전혀 아까운 목숨이 아니었다.
“하지만 절망공은 아니다.”
스퀴라스닉 비스트 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많은 스퀴라스를 품는 절망공은 버리기 아까운 전력이었다.
자신이 품어 키운 스퀴라스들에게 공격받는 절망공을 구하기 위해 크라쉬가 대검을 휘두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주인님, 조심해요!”
쇼구즈의 경고와 함께 크라쉬에게로 반이 동강 난 스퀴라스의 사체가 날아왔다.
콰직!
크라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검의 옆면으로 안타를 날리듯 스퀴라스의 사체를 으깨서 치워 버렸다.
“뭐 하는 짓이냐.”
스퀴라스가 날아온 것 따위는 크라쉬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걸 던진 존재가 바로 절망공이였다는 점이었다.
딸깍- 딸깍-.
방금 내던진 스퀴라스의 허리를 갈랐던 집게 턱과 8개의 거미발에는 온통 스퀴라스의 피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4개의 겹눈이 흉악한 빛을 번들거리며 크라쉬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보스를 보는 게 아니라 사냥감을 보는 눈이었다.
“[피의 격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은데요?”
쇼구즈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피의 격노]는 말 그대로 대상자의 피를 끓어오르게 해 이성을 잃게 만드는 주술이었다.그리고 [피의 격노]에 걸린 자의 피를 뒤집어쓰면 그 효과가 중첩되는 특징이 있었다.
“지금의 절망공은 완전히 맛이 갔어요.”
[피의 격노]에 휩싸인 스퀴라스들끼리 서로 죽이는 이곳은 마치 고독과도 같았다.서로를 죽여대어 효과가 중첩된 스퀴라스들은 어느샌가 절망공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죽인 절망공에게 중첩된 [피의 격노]의 효과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제는 그 효과를 오롯이 크라쉬를 향해 쏟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아, 정말! 그 멍청한 변태 샤먼 놈이 일을 이렇게 벌여놔서!”
쇼구즈가 몸을 꿈틀대며 분을 터뜨렸다.
쇼구즈는 크라쉬와 맞먹는 거대한 덩치와 흉악한 외모인데도 이상한 말투를 써대는 우르자가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뛰어난 능력 때문에 크라쉬의 심복으로 대우하고 있었는데, 그 능력이 이런 화를 불러일으키다니.
“짜증이 나는군.”
크라쉬도 자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절망공을 보며 목에서 낮게 끓는 소리를 내었다.
[피의 격노]를 건 주술사가 이미 죽은 이상 절망공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아까운 전력을 잃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크라쉬가 짜증을 내는 건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감히……!”
누구보다 강한 자신에게 감히 적의를 드러내다니.
고작해야 집게 턱을 딸깍거리는 거미 주제에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 모습이 크라쉬의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크샤앗!”
선공을 해온 것은 절망공이었다.
절망공은 괴성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나 꽁무니에서 질긴 거미줄을 쏘아내었다.
“하찮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크라쉬가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거미줄 뭉치를 간단하게 대검으로 쳐내었다.
절망공은 그 모습을 보며 저열한 비웃음을 흘렸다.
분명 검에 거미줄이 엉켜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리라.
“크싯?!”
하지만 그것은 절망공의 착각이었다.
크라쉬의 막강한 힘이 들어간 스윙에 대검의 무게까지 합쳐지자, 질기디질긴 절망공의 거미줄은 마치 모래처럼 흩어져 버렸다.
“너 따위와 놀아줄 시간은 없다.”
크라쉬는 단숨에 뛰어들어 절망공의 왼쪽 다리 4개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으드득!
대검이 휘둘러지자 스퀴라스들의 손톱 발톱은 물론이고 이빨도 박히지 않던 다리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
잘리고 부러져 나간 다리에서 누런 체액이 솟구치자 절망공은 그제야 반쯤 나갔던 이성이 돌아온 듯했다.
쿵! 쿵!
이미 다리의 반을 잃어 균형을 잃은 절망공은 바닥에 몸을 구르며 머리를 땅에다 박기 시작했다.
분명 살려달라는 의미의 몸부림이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봐줄 거예요?”
쇼구즈의 질문에 크라쉬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내게 대든 놈. 왜 살려주지?”
으드득!
남은 오른쪽의 다리도 모두 잘려 나갔다.
두려움에 떠는 겹눈 4개가 사방팔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약한 게 네 죄다.”
크라쉬의 손이 절망공의 얼굴을 덮었다. 그것만으로도 겹눈 4개가 모두 터져 나갔다.
“죽어라.”
콰드득.
가볍게 힘을 주어 누르자 절망공의 머리가 그대로 으깨져 버렸다.
민아와 나진을 괴롭히던 스퀴라스닉 비스트의 최후치곤 너무 허망했다.
“어휴, 시간 낭비만 했네. 얼른 가죠!”
쇼구즈가 어깨 위에서 방방 뛰며 크라쉬를 재촉했다.
크라쉬도 손에 묻은 거미의 체액을 대충 핥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 둘이 살아 숨 쉬는 것이라곤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가운뎃길을 떠났을 때, 조용히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민아와 나진의 보스가 그의 종에게 작전을 시작할 때라고 지시합니다.]* * *
[리코스의 보스가 그의 종에게 더는 참을 필요가 없다고 지시합니다.]리코스는 이현의 메시지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견디기 힘들었는데, 잘 됐군.”
“무슨 헛소리냐아악!”
[격노의 숨결]의 효력이 떨어져 이성을 되찾은 골그림이 리코스의 중얼거림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고함을 질러댔다.역겨운 입 냄새와 침방울에 리코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언데드인 몸임에도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역한 냄새였다.
“이제 너랑 이렇게 노닥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
골그림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순간, 리코스는 억제하던 힘을 모두 풀었다.
“크아아악! 네놈 속였구나아악!”
지금껏 적당한 힘으로 골그림을 상대하던 리코스가 전력을 다해 힘을 쏟았다.
전투 방패를 앞세워 밀어붙이는 리코스의 힘에 골그림은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밀려났다.
“비, 비겁한 놈!”
“나는 보스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리코스는 분노에 얼굴을 부들부들 떠는 골그림을 보며 피식 웃고는 경고했다.
“뒤를 조심하는 게 좋아.”
“뭐?!”
골그림의 뒤에는 윗길의 가장자리이자 협곡의 절벽이 있었다.
리코스는 그대로 골그림을 절벽과 방패 사이에 끼고 밀어붙였다.
“크아아아악!”
방패에 붙은 가시가 검은 무쇠 갑옷을 무참히 뚫고 골그림의 심장과 명치, 그리고 복부를 헤집었다.
“내, 내 갑옷이익!!”
검은 무쇠 갑옷이 아무리 단단하다 하더라도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방패를 이길 순 없었다.
“잘 가라.”
리코스가 다른 한 손의 방패를 세워서 그대로 골그림의 머리를 짓뭉갰다.
그렇게 윗길을 이현 진영이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