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fe Returner RAW novel - Chapter 24
20 화
98년 5월.
실내가 무척 조용했다.
그래서 제이미가 연필 깎는 슥슥거 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그녀가 보고를 계속했다.
연필로 중요 부위를 체크해 가면서 상업 빌딩, 공장 부지,재개발 예정 택 지, 아파트,호텔,리조트 등의 온갖
이름들이 언급됐다.
재벌 기업들에서 부랴부랴 혈값에 내놓은 폭탄 바겐세일 품목들이 전일 인베스트먼트의 손아귀로 들어가 있 었다.
어 지간히도 긁어 모았다.
“당장의 수익은 임대료뿐이지만. 우 리는 확신하고 있어요. 이 나라는 IMF를 극복할 거고 여기의 물건들은 우리,아니 에단의 고객분들에게 천문 학적인 수익을 안겨 줄 거예요.”
그녀만큼이나 우리나라가 IMF를 극 복하길 바라는 사람이 또 없을 것이 다.
젊은 나이에 한 나라의 정재계를 움 직이는 실권을 거머쥐었다. 더욱이 대 후 그룹을 인수하고 나자, 대후 그룹 이 우리나라에 가졌던 위상과 그 힘을 실감하고 있는 거다.
힘을 쥔 이상 다시는 놓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하다못해 그녀는 나에게 몸을 던질 각오까지도 한 것 같았다.
은연중에 그런 느낌을 풀풀 풍겼다.
나를 만날 때의 옷차림이 점점 짧아 지고 파이고 있었다.
오늘도 늘씬한 다리가 허벅지 위까 지 드러나 있었다. 허리를 숙이지 않
아도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원피스였 다.
그녀가 반대편으로 다리를 꼬며 하 이힐 끝으로 내 허벅지를 툭 건드렸 다.
실수를 가장한 유혹.
그렇게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순 진한 척 눈을 말아 감았다.
어린 동양계 대리인 하나를 유혹하 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을 까.
비웃어 넘겼다.
“그룹 계좌가 많이 비었을 텐데, 아 닙니까?”
제이미는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던 모양이다.
“경쟁 업체들에선 우리가 물건을 양 보하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크게 다르죠. 에단의 말이 맞아요. 창고가 많이 비었어요. 앞으로는 하나하나 신 중을 기할 수밖에 없어요.”
“가장 탐나는 걸로 뭐가 있습니까?” “이 나라는 다시는 없을 대염가세일 이 진행 중이에요. 눈 감고 아무거나 골라도 거기에 황금이 쌓여 있죠. 그 러니 어떻게 최고를 뽑을 수 있겠어 요. 그래도 뽑아야 한다면.”
제이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와 시아 자동차 그리고 대현 자동차예요. 마음 같아선 세 개 그룹을 통째로 인수하고 싶지만요. 최소화한다면 거기까지예
요.”
“어디서자문을 받고 있죠?”
“동아시아 경제 연구소라고, 신뢰할 만한 곳이에요. 자문사를 인수할 예정 인데…… 문제가 있나요?”
천만에.
내가 고개를 저어 보이자 제이미가 말을 계속했다.
“자문사에서는 앞으로도 발전 가능 성이 큰 것을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
업부를 뽑았어요. 반대로 대현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는 오히려 피해를 입어 대현 전자를 위태롭게 할 거라는 관측 을 내놓았고요.”
“공부 많이 했겠군요. 할 만합니까?” “이 나라는 낙원이에요.”
이어서 그녀는 대후 자동차와 대현 자동차 그리고 시아 자동차까지 병합 하는 게 좋겠다는 안까지 내놓았다.
“그래서 세 개 그룹에 접촉해 보셨을 텐데. 결과는 어떻던가요?”
제이미의 두 눈에 가득 차 있는 욕심 덩어리들이 먼저 들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공을 꽤 들였었던 모양이지
만 실패한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원하는 부서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일성도 대현도 지배 지분 구 조를 참 많이도 파 놨더군요. 회계 자 문사들은 대현과 일성 이야기만 나오 면 고개를 젓고 시작하네요. 당연한 일이죠. 에단. 에단의 고객분들께서는 한국 시장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로 크신가요?”
그녀는 대후 그룹 건처럼 일성과 대 현도 흔들어 보자고 제안하는 중이었 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는데, 지금
은 미뤄 두는 게 맞습니 다.”
“이런 기회는 다신 오지 않아요. 에 단이라면 고객분들을 설득할 수 있지 않나요? 이 나라가 IMF를 극복하고 나면 두고두고 후회하실 거예요.”
“이미 250억 불이 들어가 있습니 다.”
“그만큼이 더 필요해요.”
250억 불이 뉘 집 개 이름인가.
“모르실 리가 없겠죠. 외국인 주식 보유 한도가 풀렸어요.”
“그래서 대현과 일성을 공략하겠다 마음먹은 겁니까? 제이미. 이 나라에
서는 대현과 일성 그리고 대후가 합쳐 지는 걸,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을 겁 니다. 그런 빌미가 보이면 우리에게 집중 포화가 쏟아질 겁니다. 이미 공 적 자금이 투입되고 있고요.”
“그래도 IMF예요. 에단.”
“맞습니다. 엿 같은 IMF죠. 그런데 다시 설명해야 합니까?”
“삼대 재벌이 합쳐지는 건 IMF 보다 더 심각한 겁니다. 이 나라 정부의 입 장에서 뿐만 아니라 이 나라 국민들에 게도 말이죠. 거기다 외국계 회사 아 래서 병합이 된다? 말 다한 거 아닙니
까?”
“혼란스럽네요. 에단은 고객분들의 대변자가 아니 었나요?”
“제 말은,새 내각과 지금의 관계를 유지해야 된다는 겁니다.”
제이미는 우리의 로비 아래 대후 그 룹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겠지만,그건 틀린 생각이다.
내가 한 것이라곤 현 정권에서 전 정 권 말로 시간을 앞당긴 것 밖에 없었 다. 그때 이미 무너질 조건들이 짜 맞 춰져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재벌은 스스로 무너지 지 않는 이상,선제공격을 가하기 어
려운 구조다.
비단 찐의 전쟁으로만 그치는 게 아 니기 때문이다.
“우리 이사들과 같은 말씀을 하시네 요. 에단까지 그러시다면 제가 틀린 거겠죠.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동산 매입 건은 제이미에게 기대 했던 대로입니다. 좋습니다.”
“다만 아쉬울 뿐이에요. 먹을 게 너 무 많이 쌓여 있는데, 배가 불러서 먹 지를 못하니까요.”
“9월쯤이면 소화시킬 수 있을 겁니 다.,,
그 순간 제이미의 얼굴에 화색이 돌
았다.
“추가 지원이 예정되어 있나요?”
“설득해야죠.”
거봐,그럴 수 있잖아!
지금 제이미의 표정은 딱 그랬다.
“사실 욕심도 조바심도 들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이 나라가 IMF를 극복 할 거라는 확신이 있다면 말이죠. 저 도 그렇게 공감합니다. 고객분들께는 이 점을 들어 설득할 생각입니다.” 지금에야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이 달 러에 집약되어 있지만,IMF를 벗어나 고 나면 상황이 바뀐다.
그때부터 우리나라의 권력은 달러에
서 재벌 그룹들에게로 넘어간다.
“조금 전에야 현실적인 이유로 반려 했지만,가장 맛있게 익을 부위는 아 무래도 이 나라 재벌 그룹들일 수밖에 없죠.”
제이미가 고개를 강하게 끄덕거렸 다.
“하지만 서두르지 맙시다. 이 나라의 금융 위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그들은 더 구워져야 할 필요가 있어요. 현재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10억 불 조금 넘어요.”
제이미가 요약된 서류를 찾아서 내 밀었다.
250억 달러 중 100억 달러는 대후 그룹을 인수하는 데 쓰였고,나머지 140억 달러는 부동산들을 매입하는 데 투입됐다.
“대후 그룹의 구조조정이 미뤄지고 있는 건, 정부와 얘기된 사항입니까?” “4월 말까지 홀딩시키는 조건이었어 요. 대신 이 나라에서는 에단 고객분 들의 250억 달러를……
제이미는 말끝을 흐렸다.
차마 우리나라 정부에서 250억 달러 의 설거지를 담당했다는 말을,어떻게 표현해야 적법한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을 것이다.
“설거지 수수료치고는 많지도 적지 도 않군요. 적당합니다. 그 정도는 양 보해 줘야 뒤탈이 없죠.”
“에단!”
그녀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러며 황급히 눈동자를 굴려 보지 만,그녀의 시선에 잡힌 것이라곤 그 림들과 운동 기구들뿐이다.
이만한 시기가 따로 없었다.
야당과 여당이 바뀌는 과정에서,직 전의 야당도 여당도 모두 설거지에 책 임이 있었다.
“약점이 잡힌 건 우리가 아니라 이 나라정부입니다.”
“그…… 렇겠군요.”
“제 고객분들의 돈은 케이맨 제도와 네덜란드 등을 거쳐서 들어왔습니 다.,,
숨길 일도 아닌 일.
제이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전일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 는 다섯 개 회사 주소지가 케이맨 제 도와 네덜란드 등에 퍼져 있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제이미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 다.
갑자기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다.
나를 유혹 하려했던 여우같은 미소 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나를 힐끔 쳐다보는 눈빛에 진 한 경계심이 서렸다.
의외로 이런 쪽으론 둔한 면이 있는 여자였다.
이제야 깨달은 건가?
본인이 무엇에 발을 담갔는지?
“제이미는 지금처럼 실적만 신경 쓰 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 일이죠.”
오히려 그 말이 나와 존재하지도 않 는 나의 고객들을 더 두려워하게 만든 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 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웃었으나 그 웃음은 부자연 스러 웠다.
그때 그녀의 시선은 실내 구석으로 향해 있었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쫓 아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그녀가 오기 전에 휘둘렀던 검이 비스듬히 세 워져 있었다.
검날은 번쩍거리는 것 없이, 진검 특 유의 스산함만이 존재했다.
역시 동양(東洋)이라면서 즐거워할 땐 언제고.
이제는 저 물건이 무섭게 보이는 모 양이다.
문제가 터졌을 때, 저 물건에 목이
베이는 상상을 하고 있을까. 어둠을 틈타 들어온 큰 그림자가 자신을 내려 다보고 있는 배경까지 추가하면서 ?
그래도 이것 한 가지만큼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와서 발을 빼기엔 너무 깊숙이 들어왔다는 사실 말이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그런 마음이 추호만큼도 없을 거다.
어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갑자기 왜. 지금이라도 휘둘러 보고 싶어졌습니까?”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제이미의 시선도 빠르게 내 얼굴로 돌 아왔다.
“아녜요. 어, 어디까지 얘기했죠?”
“기 업 분야는 추가 지원이 있는 9월 경부터 주력합시다. 그리고.”
“네.”
“특수 매입 물건 말입니다. 다 잘 진 행됐는데,두 건이 보류 중이네요. 누 누이 말해 왔듯이 특수 매입 물건이 최우선입니다.”
“알고 있어요. 계속 접촉 중이니 좋 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그럼 오늘은 이만 끝내죠. 들어야 할 건 다 들은 것 같습니다.”
그녀가 막 문을 열고 나갈 때 였다. 그녀가 문고리를 움켜쥔 채로 갑자
기 멈춰 버렸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 이 흐른 다음에,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불렀나요?”
부르긴 무슨.
“밤이 많이 늦었습니다. 조심히 들어 가세요. 그리고.”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들어가세
요.”
제이미가 가고 나서 조나단에게 연
락했다. 그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 화를 받았다.
〈썬. 출간일이 잡혔어.〉
〈물론. 뭔 일터졌어?〉
< 아무 일도. 어떻게 보관하고 있어?〉
< 잃어버릴 일은 없겠네. 세 시간 전에 메일 보낸 게 있어.〉
< 잠깐만.〉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까지 확인할 시간이 지난 다음.
조용했던 수화기 너머로 조나단의 놀란 음성이 흑 들어왔다.
〈 아무 일도 없다면서 !〉
< 하긴. 두 분 상속인은 역시 네 부모님 이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