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312
314. 잔불(4)
세상은 자신의 생각대로만 돌아가 지 않는다.
그 사실을 시리스 아젠트하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원수 에게 달려들었지만 상처 하나 입히 지 못했다.
이것이 시리스가 맞이한 첫 번째 실패. 단순한 바람만으로,하고 싶다 는 감정만으로 칼을 뽑았다가는 십 중팔구 낙마한다.
‘제대로 된 계획이 있어야 해.’
니플헤임의 마스터,로키가 그러 했던 것처럼.
최종 목표 및 실현 가능성,그 수 단을 철저히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정원에서의 회동 뒤,13층 멤버들은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
1파티는 오랫동안 합을 맞추지 않 았다.
예전의 감을 회복하고,새로운 멤
버가 파티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했다.
유르넷이 정보를 찾고 계획서를 작성할 동안,시리스는 훈련장과 업 무실 등을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시리스는 옷차림을 정돈한 뒤 전 술소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전술소에서 기본적인 계획 및 전술 지침을 결정할 예정이었다.
마스터를 구하기 위한 밑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철컥.
시리스는 레바테인의 칼집을 움켜
쥐었다.
검은 양이 음각되어 있는 전술소 의 대문이 눈앞에 있었다.
비공개 모임인 만큼 1파티 멤버를 제외한 다른 간부들은 초청하지 않 았다.
“왔나. 늦었군.”
안으로 들어서자 원탁의 오른편, 앉아 있던 리디기온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이미 전술소 내에는 1파티의 멤버 들이 집결해 있었다. 유르넷과 리디 기온,니하쿠에 뮤덴의 뒤를 이어갈 아론까지.
“다들 모였구나.”
시리스가 중앙으로 걸어갔다.
전술소는 로키가 임무 시작 전 공 략을 정할 때 사용하고는 했었다.
일종의 브리핑 룸이나 마찬가지. 넓은 방 가운데에는 작전 개요를 설 명하기 위한 원탁이 놓여 있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유르넷이 시리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리스는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상 석에 앉았다.
“일주일간, 서로 유의미한 시간을 보냈겠지.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으마.”
“당연하다.”
“옙!”
“준비는…… 끝났습니다.”
뒤이어 시리스의 눈길이 유르넷에 게 닿았다.
유르넷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 니 입을 열었다.
“먼저,우리의 목표를 명확하게 합 시다. 이 부분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형님을 구하는 것 아닙니까.”
“형님이라. 우리에게는 마스터겠지요. 어찌 됐든 맞아요. 이번 작전의 궁 극적인 목표는…… 마스터를 구하는
것입니다.”
유르넷은 말을 이었다.
“일단 1차 목표는 마스터의 기억을 되찾는 것입니다.”
유르넷이 오른손을 내젓자 원탁 위에 홀로그램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 안에는 털망토를 두른 남자 가 현대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1서버의 CCTV에 찍힌 로키의 사 진이었다.
“마스터는 과도한 합성의 부작용 으로 인격 손상 및 기억 상실을 겪 은 상태입니다. 증상이 진행된 이 시점에서는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할
테죠. 경계 내에서 아무 자의식도 없이 파편들과 싸우고 있을 겁니다.”
“자의식이 없다?”
리디기온이 오른손으로 원탁을 톡 톡 두드렸다.
“이건 지구의 용어입니다만,마스 터는 현재 _프로그램’과 비슷합니다. 짜여진 설정대로만 움직이는 기계에 가깝죠. 근처에 있는 적들을 무차별 적으로 제거 및 흡수. 자거나 먹지 도 않으며 사고도 못할 겁니다.”
“생각 없는 기계임까.”
“예. 그게 마스터의 현 상황입니다. 아마 우리와 마주친다면,적으로 판
단하고 공격해올 가능성이 큽니다.” 유르넷은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
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금방 가라앉아, 그녀는 평소의 냉정을 되찾았다.
“작전의 요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마스터에게 어떻게 가는지. 두 번째,마스터의 인간성을 어떻게 되찾는지. 세 번째,마스터가 짊어진 짐을 어떻게 없애는지. 여러분들도 알고 있겠지만,하나같이 쉽지 않습 니다.”
“둘째와 셋째는 몰라도 마스터한테 가는 건 쉽지 않슴까? 거 뭐시냐,
경계 안에 꽁꽁 숨어 있다고 해도 꼬마 오빠,아니,후배님의 창술이 있다면 파바박! 해서 뚫어버릴 수 있지 않슴까?”
“가는 길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유르넷이 니하쿠에게 머리를 내저 었다.
뒤이어 원탁 위에 마력의 파동이 일어나면서, 소형 미니어처 형태의 홀로그램이 만들어졌다.
높이 뻗은 빌딩과 각종 건물들.
‘……여기는?
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에 알파 제로와 만났을 때 본
적이 있었다.
1서버의 중심이자 뫼비우스 본사가 자리 잡은 도시, 에덴.
환영 마법으로 도시의 풍경을 모 방한 것이다.
“1 서버가 어떻다는 거지? 무슨 문 제라도 있나?”
“상당한 문제가 있지요.”
유르넷이 한 번 더 손을 움직였다. 안개가 미니어처 도시를 휘감더니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멸망한 도시.’
깨끗한 원형이었던 도시는 반절이
뚝 사라졌다.
직선형의 빌딩과 도로는 녹슬고 무너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며, 거리 곳곳에서는 검붉은 안개 비스 무리한 것들이 꿈틀거리며 부유하고 있었다.
“어라.”
“본사가 망하고 경계가 개편된 직후, 거주민이 사라진 에덴에서는 큰 변 화가 있었습니다.”
유르넷이 지휘봉으로 도로 한중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정체불명의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도시 지하,속칭 ‘페어리 랜드’에 있던 뫼비우스의 실험체들이 일제히 지상으로 튀어나와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죠.”
“실험체는 또 뭐임까?”
“회사에서 연구하던 것들이지요. 영웅과 몬스터의 합성 생명체. 7성 영웅의 클론. 갇혀 있던 각 세계의 전설종.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군요. 이들은 평범한 몬스터보다 훨씬 흉 폭하고 강력합니다. 확인된 개체만 최소 천 마리 이상. 숨겨진 것들까 지 포함하면 두세 배는 될 겁니다.”
“놈들이 폭주한 이유는……
“오염 구름이야.”
시리스가 답했다.
원탁에 떠오른 도시 모형은 거짓 이지만,실재에 가까운 환영이었다.
거리를 휘감고 있는 저 구름의 정 체를 시리스는 알고 있었다. 임무에 서 몇 번 마주했었으니까. 고난이도 임무를 수행할 때 직접 돌파한 적도 있었다.
“구름이 생성된 이유는,근처에 세 워진 장벽의 영향이겠죠.”
유르넷의 지휘봉이 도시 중앙을 가리켰다.
지휘봉 끝에는 거대한 칠흑의 벽이
세워져 있었다.
마스터가 경계와 뫼비우스를 가로 막기 위해 펼쳐놓은 결계였다.
“장벽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경계 내부의 시공간은 제가 계산할 수 없 을 정도로 뒤틀려 있었습니다. 그 여파가 가까이 있던 1서버에 미친 것입니다.”
“1서버의 공간 자체가 오염되었다 이 말이군.”
“그렇습니다.”
“귀찮게 됐는데.”
리디기온이 불쾌한 듯이 혀를 찼다.
시리스도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깨달았다.
“대규모 침투는 불가능하겠네.”
“오염에 저항력을 가진 극소수의 영웅들만이 들어갈 수 있겠지요.”
함대나 지원군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또한 뫼비우스의 실험체가 폭주했 다면,저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입 하는 이방인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암케나가 필요한 첫 번째 이유.’
마스터의 간섭력을 사용한다면 일 시적으로 구름을 중화시킬 수 있다.
“이번 계획은 소수 정예로 진행됩 니다. 작전에는 고속 돌파 및 자체 방어가 가능한 특수 비공함,슬레이 프나르가 차출될 예정입니다.”
“소수 정예라고 한다면…… 몇 명 입니까.”
“우리뿐이야. 다른 영웅들은 오염에 내성이 없어.”
아론의 질문에 시리스가 답했다.
“5 명이군요.”
“왜,자신 없슴까? 후배님,꼬마 오빠는 이 정도로 축 처지지 않았슴다!”
“아닙니다,단지.”
아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니하쿠는 아론이 파티에 합류한 뒤, 그를 ‘후배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끼리 1서버를 돌 파해서,형님이 계신 곳에 도착하면 됩니까.”
“미리 말하지만,마스터의 차원 장 벽을 물리력이나 마력으로 뚫는 것 은 불가능. 길을 열기 위해서는 당 신의 업 속성이 필수불가결입니다.”
“….”
“다음으로 가지요.”
유르넷은 화제를 돌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두 번째 난관입니다. 마스터의 인
간성을 어떻게 되찾을 것이냐.” 인간성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뛰어넘는 것에 대한 대가.’
강한 힘에는 그에 알맞은 리스크가 따라온다.
로키는 강대한 권능을 가진 반동 으로 기억과 자아를 모조리 잃고 말 았다.
‘마스터를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말이 안 통 한다면 소용이 없다.
무엇보다,현 상태의 마스터는 시 체와 다르지 않다.
시리스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진 것이다.
“이게 가장 중요하겠군. 경계 안으로 들어가서 마스터와 만났다고 치자. 어떤 수로 마스터를 되돌린다는 거냐?”
리디기온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르넷이 심호흡을 천천히 한 뒤 입을 열었다.
“마스터를……
“마스터를?”
“한 번 죽여야 합니다.”
“죽인다고.”
리디기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유르넷은 로브 자락을 펄럭이더니,
넓적한 소매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 냈다.
“이 단검의 이름은 미스텔. 제가 손수 제작한 마도 백신입니다.”
“……”
“마스터는 기억을 잊은 것이지,잃은 게 아닙니다. 데이터를 과도하게 받 아들인 나머지,인격 보호를 위해 안전장치가 걸린 것이지요. 이 단검 을 마스터의 데이터 핵인 심장에 꽂 는다면,잠겨진 마스터의 인격을 일 시적이나마 불러을 수 있습니다.”
“일시적이나마?”
“오래는 못 갑니다. 그 안에 끝을
내야겠죠.”
유르넷이 시리스를 응시했다.
“마스터와 한번 더 계약하는 거다.”
시리스가 말했다.
“너희도 알겠지만,마스터와 영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우리가 이 곳에 소환된 것도,대기실이 만들어진 것도,우리가 임무를 수행하며 강해 질 수 있었던 것도,마스터가 이 게 임을 했기 때문이다.”
창조주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마스터가 게임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시리스는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다.
마스터와 영웅은 픽 미 업이란 게
임이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로키가 뫼비우스에 떨어졌을 때,
13층 멤버들이 본능적으로 알아챘 던 것처럼.
그렇다면.
“더 깊게 연결하는 거야.”
“마스터가 감당하고 있는 대가를, 우리 다섯 명이서 다 같이 분담하는 거다.”
세 명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해하기 힘들겠지.’
시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표
현한 까닭이었다.
‘무한의 잔.’
로키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 체질.
합성을 무한히 이어나갈 수 있는 그 속성을 자신의 영웅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신격조차 뛰어넘은 지금의 마스터 라면 가능했다.
“작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나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마스터와 함께 뼈를 묻을 거야.”
”뼈를 묻는다고…… 했슴까?”
“마스터 곁에서 싸움을 이어나간다. 그분이 승리를 거머쥘 때까지.”
“그건……
“나도 이 조건은 가혹하다고 생각 해. 전쟁은 언제 끝날지도 몰라. 수 천 년,수만 년,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게 마스터를 구할 유일한 방법이다.”
마스터의 곁에 있어 주는 것.
결코 잊지 않도록,그의 존재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것.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어느 누구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끝내 자신을 놓아버리고 말겠지.
하지만 두 명이 된다면. 세 명,네 명, 다섯 명이 된다면.
그 공포는 반절 이하가 될 것이다. “비논리적인 방법이군.”
리디기온이 냉소를 머금었다.
시리스는 반박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유대감을 통해 인격을 유지할 수
있다고?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계속 그렇게 버틸 수는 없어.”
“마스터와 함께하게 된다면,우리 의 시간은 썩어 넘치게 되겠죠.”
유르넷의 눈이 가라앉았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자신을 잃기 전까지…… 제가 찾아내겠습니다. 저의 전부를 걸어 서라도.”
“너희를 믿고,확실하지 않은 일에 몸을 던지라는 뜻이냐?”
“그렇다.”
시리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철컥. 리디기온이 태도 자루를 원
탁에 올려놓았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지.”
“마스터랑 다 같이 싸우는 것임까.
재미있을 것 같슴다.”
모두의 시선이 한 명에게 향했다.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청년.
아론 나이델크의 입이 열렸다. “주제를 벗어나서 죄송합니다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아론이 눈을 떴다.
“아까 형님을 한 번 죽여야 한다고
하셨는데,형님은 지금…… “어마어마하게 강하다는 말인가?” 시리스가 말을 받았다.
“강한 정도가 아닐 겁니다. 형님은
이미 뫼비우스에 있던 신격을 모조리 흡수했습니다. 지금은 어떤 경지에 이르렸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 다. 저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만, 승산을 파악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
합니다.”
“확실히,신입의 말은 틀리지 않아.”
리디기온이 끄덕였다.
“마스터는 신격의 경지를 뛰어넘 었다. 우리 전부가 뭉쳐도 승산이 있을지 모르겠군.”
“경계 내부의 오염도는 상상을 초 월합니다. 안에서 버틸 수 있는 건 파마의 각인을 지닌 시리스밖에 없 겠지요. 우리의 역할은 시리스가 가 는 길을 뚫는 것입니다.”
“혼자 마스터를 상대한다는 건가?”
모두의 시선이 시리스에게 집중됐다.
시리스는 눈을 감았다.그녀도 현재
로키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수십 명의 신격을 깡그리 흡수했
으며, 파편과 몬스터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빨아들였다.
지금쯤 그의 힘은 한계를 아득하게 초월했을 것이다.
‘이래서 시젤이 불가능하다고 했었지.’
시리스는 눈을 떴다.
“다른 계획은 없나,유르넷. 보다 확률이 높은……
“작전은 변경하지 않아. 마스터를 구할 방법은 이것뿐. 내가 혼자 돌 입해서 마스터를 상대한다.”
“••••••무모하군.”
리디기온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무모한가.’
자아를 잃은 그는 시리스를 알아 보지 못한다.
마주치는 즉시 죽이려 달려들겠지. 그런 마스터를 상대로 제압한 뒤
심장에 칼을 꽂아야 한다. 터무니없을 정도의 난이도.
니플헤임을 떠나기 전이었다면.
로키가 이곳에 떨어지기 전의 그
녀였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고만 있던 게 아니야.
그녀는 뫼비우스 곳곳을 방랑하며, 마침내 니플헤임에서 전해져오던 신 화를 온전히 계승할 수 있었다.
“자신이 없다면.”
화륵!
시리스의 금발이 선홍빛으로 변하 며 타올랐다.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