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48
정도마신 47화
“사람 한번 드럽게 많네.”
사완악은 줄 뒤에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도맹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이는 바로 칠 일 후에 시작되는 비무 대회 때문이었다.
이번 대회의 정식 명칭은 정도무림 후대청년 비무 대회.
정도맹 역사상 두 번째 비무 대회였고, 사십 세 이하의 나이 제한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대회의 개최 이유는 차후 무림을 이끌어 갈 후기지수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인맥을 쌓을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앞으로 주기적으로 이 대회를 열어 각 문파의 무공 발전과 선의의 경쟁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우승과 상관없이,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다른 문파의 후기지수들과 친분을 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대회이기에 전국의 무림 문파와 세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사완악과 설린은 오랜 기다림 끝에 정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신분을 묻는 사십 대의 사내가 있었는데, 체격은 왜소하고 세모꼴의 얼굴형을 지니고 있었으며, 눈빛은 매서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설린 문주, 저 사람 마치 화난 오징어같이 생기지 않았어?”
설린은 갑자기 들려온 사완악의 속삭임에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하다가, 이내 눈을 흘기며 노려봤다.
“외모를 폄하하는 건 좋지 않아요.”
사완악은 어깨를 으쓱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 공자님은 정말 철없는 아이 같을 때가 있어.’
물론 설린은 사완악의 그런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단절된 채 산속에서 무공만을 익히며 자란 것을 알기에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악의가 없는 분이시지.’
사완악에게서 진정한 대협의 풍모를 느꼈던 설린은 부드럽게 말했다.
“사 공자님, 정도맹에는 무림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사소한 말 한마디로도 오해가 생길 때가 있으니 조금 주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뭘 어떻게 주의하라는 거지?”
“저랑 함께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혼자 누군가와 대화를 하신다면 꼭 필요한 말씀만 하시면 되겠죠?”
“나를 너무 사고뭉치로 보는 거 같은데?”
“풋. 아니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 아, 그리고 말투는 조금 더 예의 있게 하시는 게 좋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음.”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사이, 문 앞까지 당도했다.
그러자 사완악이 화난 오징어라고 표현했던 사내가 순간적으로 예리한 눈빛을 발하며 두 사람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봤다.
“관문당(管門堂)의 부당주(副堂主) 응효요. 어디서 왔소?”
설린은 깜짝 놀랐다.
간단하게 신원을 확인하는 문지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관문당이라면 정도맹의 소속 문파를 관리하고 감시하는 곳이다.
정도맹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서였고, 부당주라면 명문대파의 장로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한 인물이었다.
“어디서 왔소?”
그가 다시 한번 묻자, 설린이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하북성 안평의 정유문에서 왔습니다. 저는 정유문의 문주 설린이고, 여기는 문도인 사완악 공자님입니다.”
“하북성의 정유문?”
관문당 부당주 응효는 뜻밖이라는 듯 설린과 사완악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비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오?”
“예.”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정유문이 정도맹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처음이군.”
그의 말에 설린은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잃은 문파가 정도맹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응효는 그에 관해 별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비무는 문주께서 참가하시오? 아니면…….”
응효의 눈빛이 사완악에게로 향했다.
설린이 말했다.
“아, 비무는 제가 아니라 여기 계신…….”
이때 사완악의 음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둘 다 참가하겠소.”
“예에?”
설린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사완악은 응효에게 말했다.
“우리 앞에 들어갔던 문파도 두 사람이 참가하던데.”
응효가 끄덕였다.
“한 문파에서 두 명씩 참가할 수 있소.”
“그럼 그렇게 하겠소.”
“두 사람의 이름을 말하시오. 임시 통행증을 주겠소.”
사완악이 설린을 보며 눈짓을 했다.
설린은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얼떨결에 이름을 말했다.
“설린. 그리고 이쪽은 사완악 공자입니다.”
응효는 사완악이라는 이름에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들어 사완악을 잠시 응시했다.
사완악은 고개를 갸웃하며 응효를 마주 봤다.
응효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임시 통행증을 작성하여 주었다.
“들어가면 등급에 맞는 처소로 안내받을 것이오. 정식 통행증은 내일 열리는 연회에서 발급되니 꼭 참석하시오.”
“연회요?”
“비무 대회 전에 서로 통성명을 하고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연회요. 정도맹주께서 직접 개회사를 하시는 공식 연회이니 필수적으로 참석해야 하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시오.”
설린은 작게 목례한 뒤, 사완악과 함께 정도맹 내부로 들어갔다.
“다음!”
응효는 뒤에 기다리는 다음 순번의 대기자를 부른 후, 고개를 돌려 설린과 사완악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관문당의 부당주인 그는 얼마 전 서찰로 하나의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정유문의 사완악이라는 젊은 문도가 소림사의 어떤 고수와 힘을 합쳐 육사괴를 제압했고, 개방을 통해 남궁세가로 넘겼다는 것이었다.
망한 문파나 다름없는 정유문의 문도가 악명 높은 육사괴를 제압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라 그의 기억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무공을 익힌 흔적은 있지만 특별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군.’
조금 전, 응효는 기감을 끌어올려 사완악을 관찰했다.
만약 사완악이 소문처럼 대단한 후기지수라면 어떤 강렬한 기운이 느껴져야 했다. 하지만 사완악은 그저 평범한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형편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소림사의 고수와 운 좋게 동행한 것인가? 아니면 설마…….’
응효는 순간 사완악이 자신의 감각을 완전히 속일 만큼의 고수인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불과 약관 정도 나이의 청년.
구파일방 같은 명문대파의 제자 중에서도 천재라고 소리를 듣는 후배라면 모를까, 언제 현판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유문의 문도가 그럴 리는 없었다.
* * *
설린과 사완악은 하인을 따라 배정받은 숙소로 향했다.
“사 공자님, 진심이신가요?”
“응? 뭐가?”
“제 실력으로 비무 대회는 무리예요.”
사완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은 무리겠지.”
설린은 황당한 얼굴로 사완악을 바라봤다.
“아니, 우승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이라도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 돼. 이것도 수련의 일종이야. 검술이라는 건 백날 혼자 연습해 봐야 의미 없지. 꼬맹이랑은 서로 같은 검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비무라고 볼 수 없어. 이번 기회에 다른 문파의 무공과 직접 겨루어 보는 게 좋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그동안 열심히 정유검법을 익혔잖아. 처음보다 많이 늘었어.”
설린의 검술은 확실히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육사괴를 잡으러 갈 때와 돌아올 때, 정유문에 도착해서의 한 달, 그리고 이번 정도맹으로 오는 길에서도 그녀는 수련을 빼 먹지 않았던 것이다.
“늘긴 늘었죠. 하지만 이번 정도맹 비무 대회는 각 문파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들이 참가하는 거예요.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설린은 이어서 작게 속삭였다.
“명색이 문주인데 너무 형편없게 지면 쪽팔리잖아요!”
사완악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수련이 되겠군. 정유문의 체면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목숨 걸고 해야겠네. 하하!”
“지금 웃음이 나와요? 저는 진짜 진지하다고요!”
“그래, 진지하게 하라니까. 강호에서 갑자기 적을 만나도 아직은 준비가 안 됐으니까 다음에 싸우자고 할 건가? 위험에 빠진 사람을 보고도 지면 쪽팔리니까 나중에 구하러 갈 거야?”
“그, 그건 아니죠.”
“그렇지?”
설린은 울상이 되었지만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배정받은 숙소에 도착했다.
안내 하인이 말했다.
“이곳이 칠 등급 처소입니다. 이십삼번 방이시군요. 이쪽으로.”
하지만 방을 본 설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하인에게 물었다.
“방이 하나뿐인가요?”
“예. 칠 등급에는 하나의 방만 제공됩니다. 무슨 문제라도…… 아!”
하인은 설린과 사완악을 보더니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하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일각 후 다시 나타났다.
그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설린에게 말했다.
“저, 등급 원칙에 예외를 둘 수가 없어서…… 추가적으로 방을 드릴 수 없다고 합니다.”
“방법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예. 각 문파의 하인들이 묵는 숙소는 있습니다만…….”
설린은 난감했다.
무림인은 비교적 남녀유별에 자유롭다고 하지만, 같은 방에서 며칠간 지내는 것은 민망한 일이었다.
하물며 보는 눈도 많았고, 문파의 여문주와 남자 문원이라면 어떤 소문이 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이때 사완악이 물었다.
“등급은 무슨 뜻이지?”
설린이 말했다.
“정도맹에 소속된 문파들은 모두 등급이 있어요. 등급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정도맹에 파견하는 무인의 숫자와 일 년에 납부하는 가맹비(加盟費)에 따라 정해져요. 우리 정유문은 과거에는 높은 등급이었지만, 조금씩 사정이 안 좋아져서…… 지난 삼 년간은 가맹비를 내지 못했죠.”
“등급마다 정도맹의 대우가 달라지는 건가?”
“네. 높은 등급의 문파에는 평소에도 여러 가지 지원을 하게 되고, 사건이 일어나면 정도맹에서 나서서 일을 처리해 주기도 하죠. 이런 행사에서도 등급에 따라 다른 혜택을 받게 되고요.”
“칠 등급은 최하 등급이고?”
설린은 부끄러운 듯 작게 대답했다.
“……네.”
사완악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찌 보면 정도맹의 등급 체계는 매우 합당했다.
하나의 거대한 도시와도 같은 이런 대장원이 유지되려면, 막대한 인력과 돈이 필요할 테니까.
구파일방 같은 대문파들은 정도맹의 실질적 무력이 될 것이고, 표국이나 상단 등은 자금을 대가로 정도맹의 힘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내가 하인 숙소에서 지내도록 하지.”
설린이 놀라며 말했다.
“예?”
“문주님이 하인 숙소에서 잘 수는 없잖아?”
“그, 그래도…….”
“됐어. 그게 뭐 특별히 불편한 일도 아니고. 저기, 하인 숙소로 안내 좀 해 주쇼.”
“아, 예. 알겠습니다.”
설린이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해요…….”
“됐다니까. 오늘은 피곤하니 푹 쉬고, 내일 봐. 연회 시간에 맞춰 이곳으로 올게.”
사완악은 명랑하게 손을 흔들며 하인과 함께 사라졌다.
‘사 공자님…… 고마워요. 정말 알면 알수록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시네요.’
설린은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는 처소로 들어갔다.
* * *
그날 밤.
퍽!
그것은 매우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단단한 무언가가 쪼개지고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
뒤이어 ‘쿵!’ 하며 한 마리의 거대한 곰이 땅에 쓰러졌다.
곰의 머리는 단 일격에 터져 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한 사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이런 산을 야밤에 홀로 넘으려 하다니.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예, 예. 너무 급한 사정이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스님이 아니었다면 전 정말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아미타불. 다음부터는 가급적 이런 상황을 피하십시오. 제가 산 아래까지 함께 동행해 드리고 싶지만 저 역시 사정이 있군요.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을요.”
“그럼 가 보십시오.”
“예, 예!”
사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사내가 사라진 후.
소림사의 승려, 현종은 머리가 터져 나간 곰의 시체와 핏물이 흐르는 자신의 주먹을 보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미타불…….”
너무나 다급한 상황이었다.
사내와의 거리는 멀었고, 곰의 앞발은 이미 사내의 머리를 내려치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 백보신권이 아니고서는 그를 구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의도치 않게 두 번의 살생이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현종은 마음이 좋지 못했다.
불과 얼마 전에 호랑이를 죽였는데, 이번에는 곰이라니.
“강호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감돌고 있건만……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현종은 땅을 파서 곰의 시체를 묻어 준 후, 무덤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울적한 얼굴로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완악, 오늘따라 너와 마시던 술이 생각나는군.”
그는 무덤을 향해 한 번 더 불호를 외며 합장한 뒤, 어디론가 바람같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