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21
-121-
주술?
레아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언급이었다.
오늘 국무회의장에서 오베르데 변경백이 보였던 이상한 언행이 설마 이것 때문이었나.
“저어……. 레아 님. 굳이 저런 걸 보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너무 잔인하지 않느냐며, 정서에 좋지 않은 광경이라고 하반이 열심히 속닥였다.
그러나 레아는 이미 변경백의 말에 한껏 집중하는 중이었다.
“아, 아무리, 그런 걸 보여주셨다고 해도 덜컥 믿기가 어려워서……. 집시가, 그, 제가 아는 용한 집시가 있어서…….”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변경백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듯했다.
레아는 그의 뺨을 한 대만 때려서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과격한 발상에 스스로 깜짝 놀라서 반성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변경백이 입을 뚝 다물었다.
조용한 골목길에 낮은 목소리가 깔렸다.
“그만 나오지 그래.”
잘 숨어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샤칸은 다 알고 있었다. 레아는 하반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안 되냐는 눈빛을 보냈으나, 하반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하는 수 없이 둘이서 주춤주춤 쿠르칸들 앞으로 다가갔다. 잎담배를 물고 무표정하게 서있던 이샤칸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하반은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좋은 밤입니다, 이샤칸 님.”
이샤칸의 시선이 레아에게 향했다. 레아는 푹 눌러쓰고 있던 로브 모자를 걷으며 마찬가지로 어색하게 인사했다.
“쿠르칸의 왕을 뵙습니다.”
“…….”
이샤칸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하반을 보았다. 하반이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보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재빠르게 눈 가려드렸습니다. 소, 소리까지는 못 막았지만…….”
그사이 쿠르칸들은 슬쩍 시체를 가리며 섰다.
게닌이 신체의 일부로 추측되는 핏덩이를 발로 밀어서 슬며시 뒤로 보내는 것이 보였다.
레아는 못 본 척 시선을 다른 쪽으로 보냈다.
이샤칸이 한숨을 내쉬며 피우고 있던 잎담배를 핏물 속에 떨어트렸다.
그리곤 게닌이 옆에서 건넨 손수건으로 피 묻은 손을 닦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그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결혼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타국 사절단들을 위한 행사도 있으니 왕궁 내에서 한두 번은 마주칠 것이라는 생각까진 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조우하리라곤, 정말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손을 닦아낸 이샤칸이 레아를 보았다. 맞닿는 시선에 레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천천히 레아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가까이 오지는 않고,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다섯 발자국 정도 되는 짧은 간격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레아에게는 끝도 없이 멀게 느껴지는 거리였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 정적이 이어지는데, 바닥에서 꿈틀대던 변경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허억, 왕녀님!”
은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오베르데 변경백이 허겁지겁 달려와 레아의 발치에 매달렸다. 간신히 구명줄을 만난 그는 매달려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살려주십시오! 저 미친 야만족 놈들이……!”
옆에 서있던 하반이 눈매를 팍 구겼다.
“아오, 눈치 없게 진짜…….”
그가 변경백을 발로 퍽 걷어찼다. 하지만 오베르데 변경백은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울면서 레아의 다리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했다. 죽어라 매달리는 탓에 레아가 휘청거리자, 이샤칸이 말했다.
“적당히 하지.”
그러자 변경백은 거짓말처럼 스르륵 레아를 놓았다. 하반이 변경백을 번쩍 들어다 구석으로 옮겼다.
레아와 이샤칸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다섯 발자국의 거리를 둔 채로, 이샤칸이 입을 열었다.
“피 냄새가 날 것 같아서.”
“……괜찮아요.”
그러고 또 침묵이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진 것 같았다. 레아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샤칸은 레아를 물끄러미 보다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일찍 들어갔으면 좋겠어. 밤바람이 쌀쌀하니.”
그대로 사라지려고 하는 모습에 레아는 얼른 소리쳤다.
“잠깐만요, 이샤칸 님!”
“이샤칸.”
고쳐 부르라는 말에 레아는 다시 이름을 불렀다.
“이샤칸…….”
그가 팔짱을 끼고 레아를 보았다. 평소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이 아닌, 다소 차갑고 딱딱한 눈이었다. 물론 종전의 살기 넘치던 눈빛과 비교하자면 거의 봄바람 수준이지만, 레아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이샤칸과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시종일관 여유롭고 느긋하던 남자가 숨김없이 분노를 드러내었던 모습. 과수원을 집어삼키던 불길보다도 더 뜨겁게 타올랐던 분노는 여전히 금빛 눈동자 밑에 웅크려있었다.
이대로 영영 그의 화가 풀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덜컥 겁이 나서 뭐라도 말해보려 애쓰던 레아는 간신히 적당한 화제를 찾아냈다.
“집시가 제게 묘약을 줬어요.”
“하반에게 건네주면 무엇인지 확인해보도록 하지.”
그러고 할 말이 없어서 대화가 뚝 끊어졌다. 다급히 머릿속을 뒤적이다 생각난 것을 외쳤다.
“대, 대추야자!”
왜 하필 이런 걸 떠올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레아는 속으로 후회하면서도 일단 말했다.
“……거의 다 먹었어요.”
“새로 보내줘야겠군.”
여전히 대화는 단절이었다. 이샤칸은 마찬가지로 하반을 통해 보내주겠다는 말만 하고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에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이게 아닌데.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데…….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데…….
하지만 무슨 염치로 그를 붙잡겠는가. 먼저 떠난 것은 레아였다. 그냥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허나 어리석은 미련은 쉬이 떨쳐지질 않아서, 레아는 조그맣게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는 조용한 밤골목에서도 희미했다. 당연히 무시하고 지나가리라고 생각했지만, 이샤칸은 뒤돌아보았다. 레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가 짤막히 물었다.
“그리고?”
“그, 그리고…….”
응시하는 눈빛이 고요했다. 계속 머뭇대고 있으면 그냥 휙 하고 가버릴 것 같은 눈이었다.
겨우 주어진 기회였다. 묘약이나 대추야자 따위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풀어줄 만한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백지가 된 기분이었다. 온갖 잡소리를 다 떠올렸으나, 결국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맥 빠질 정도로 짧고 간단했다.
“보고 싶었어요…….”
힘없이 중얼거린 레아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기껏 고민 끝에 내놓은 소리가 어쩜 이리 멋없는지, 말주변이 참 없구나 싶었다.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샤칸은 비웃지 않았다. 여전히 말이 없지만, 아까보다 한껏 누그러진 눈이었다. 용기를 얻은 레아는 서둘러 그가 묻지도 않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기억은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도 조금 떠오르는 게 있어서 나와 본 것인데…….”
말하다 말고 하반을 흘긋 보았다. 그가 저쪽에서 방방거리며 팔을 휘두른 탓이었다. 이샤칸이 보지 못하는 뒤편에서, 하반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도와달라고 하세요!
레아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이샤칸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해결해보려 했다. 그런데 우선 하반의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혼자는 조금 버거워서……. 이샤칸 님, 아니, 이샤칸 당신 없이는…….”
흘긋 곁눈질하니, 하반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서 게닌도 소리 없이 박수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이샤칸이 고개를 까닥였다.
“말해봐.”
마침 혼자 궁금해서 쌓아 놓은 것들도 많았다. 기왕 기회가 생긴 김에 가장 의문이었던 것부터 질문해보았다.
“왕궁 내부에 주술을 하는 집시가 있나요?”
“대비.”
잠시 말문이 막혔다. 레아는 멍하게 되물었다.
“대비 전하께서요……?”
세르디나가 집시라니……. 날벼락 같은 소리이나, 여태 어지럽게 산재해있던 추측들을 단 하나로 꿰뚫어주는 말이었다. 세르디나가 집시라 하면 모든 사실관계가 딱 맞아떨어졌다.
허면 신분을 숨기고 들어온 것인가. 선왕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비로 맞아들인 것일까.
레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복잡하게 얽히는 생각을 정리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결정지었다.
“……웨들턴 백작을 만나야겠어요.”
웨들턴 백작은 세르디나의 부친이었다. 그는 정계와 거리가 멀지만, 세르디나의 지원 덕분에 막대한 재산을 쌓아올렸다.
웨들턴 백작이라면 세르디나가 집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친부이니 주술도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를 설득해 세르디나가 집시임을 밝힌다면, 왕궁 사람들에게 현 상황의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으리라.
판도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레아의 설명에 이샤칸이 툭 하고 말했다.
“어찌 설득하려고.”
“우선 왕녀궁으로 불러서 대화를…….”
“그리 미적지근한 방법으로 털어놓을 리가 있나.”
당연히 웨들턴 백작을 협박할 건수를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레아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했든, 이샤칸을 따라가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이샤칸은 오베르데 변경백을 턱짓하며 말했다.
“마침 적당히 본보기로 보여줄 것도 있군.”
그러자 뒤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쿠르칸들이 갑자기 후다닥 이샤칸 곁으로 모여들었다.
“아기……! 아기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침실에 대가리만 놔두는 그거 안 됩니다.”
“지금 이 꼴 보여드린 것만으로도 절망이라구요!”
아기? 대가리만 놔두는 건 뭐지? 생선머리 같은 걸 잘라서 놔두는 건가?
레아가 의아해하는 동안, 이샤칸은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 말 한마디 없이 눈매만 찌푸렸을 뿐인데, 쿠르칸들은 대번에 쪼글쪼글해져서 변명했다.
“아뇨……. 뭐, 근래 화가 많으시니까……. 혹시나 싶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들을 뒤로하고, 이샤칸은 레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지금 웨들턴 백작가로 가도록 하지.”
“지금이요?”
물론 협박하려면 밤중에 찾아가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놀란 레아를 내려다보며 이샤칸이 물었다.
“싫어?”
“……아니요.”
레아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여태껏 무표정하던 이샤칸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레아를 훌쩍 안아들었다.
“잘 생각했어. 계속 내게 맞춰주는 것이 좋을 거야, 레아.”
이샤칸이 다소 심술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비뚤어졌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