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Psycho's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43)
43_백년대계(7)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침착히 말했다.
“조금 전 말한 그대로예요. 그저 폐하를 돕고 싶을 뿐입니다.”
웃기고 있네.
말 같은 말을 해야 들어주지.
내가 피식 웃자, 엘리자베스가 말을 덧붙였다.
“제가 쓸모 있지 않겠어요? 저는 서류에 적어낸 것 외에도 세 개 언어를 더할 수 있어요. 교수도 잘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외교 일도 도울 수 있다고요.”
“글쎄. 그게 그리 대단한지 모르겠는데. 네가 아니어도 다른 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
내가 부러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어쩐지 초조한 듯 해 보였다.
“폐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도 저는 알고 있어요.”
“내가 원하는 바?”
“먼 바다로 나가고자 하시잖아요?”
난 또 뭐라고.
그런 건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무역을 늘릴 것이고, 바다 너머의 수많은 나라를 점령하거나 우호 관계를 맺을 거에요. 그리하여 해양제국을 이루려 하시겠죠.”
이야기 자체는 대수롭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엘리자베스의 필사적인 태도가 더 신경 쓰였다.
‘조금 전 교육 이야기를 할 때는 무언가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냥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전부 하는 느낌이다.
마치 내가 이만큼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자신의 머리를 자랑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나는 찬찬히 엘리자베스를 쳐다보았다.
희고 고운 피부에 붉은 머리, 큰 키.
앳된 얼굴로 입술을 짓씹는 그 표정.
그걸 보자,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네가 올해로 몇 살이었더라?”
“···이제 스물입니다.”
“결혼 적령기로군. 아니, 조금 늦은 편인가.”
내가 중얼거리는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저 반응에,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너, 혼인을 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
나는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동요를 읽을 수 있었다.
정답인가.
보통 여자 왕족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혼인 동맹은 이 시대 외교에서 아주 유용한 패였으니까.
하지만 선대왕은 나나 엘리자베스를 그렇게 활용하지 못했다.
우리의 왕위 계승 순위가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었다.
자칫 다른 나라에 시집 보냈다가, 그들이 잉글랜드를 탐하는 상황을 피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에드워드 왕과는 사정이 조금 다르지.’
조금 전, 엘리자베스가 이야기한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바다로 나가게 되면, 혼인동맹의 대상은 끽해야 프랑스나 에스파냐 정도가 아니야. 먼바다의 여러 나라가 전부 고려 대상이 되겠지. 네가 두려워했던 건 그것이지?”
원양항해를 통한 무역 활성화는 내가 즉위 직후부터 밀고 있는 계획이다.
그걸 들은 엘리자베스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겠지.
어차피 바다 건너 먼 나라라면 왕위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무역 활성화를 위해, 혼인 동맹도 맺을 법하다고 생각한 것인가.
격이 떨어지는 결혼이라도, 자기처럼 쓸모없고 골칫거리인 왕족이라면 얼마든지 승낙할 것이라고 본 것이겠지.
“그래서 내게 네 능력을 보여주려 했구나?”
지금껏 아무 대답하지 않던 엘리자베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마치 항복 선언을 하듯 대답했다.
“맞아요. 제게 다른 이용가치가 있으면 폐하께서도 절 다른 나라에 넘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거든요.”
유쾌해지는 대답이었다.
대답의 내용보단, 그 판단 근거가 유쾌했다.
‘엘리자베스는 내가 그녀를 견제하리란 생각을 못한 거야.’
왕위 계승 서열이 높은 왕족이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낸다?
무척이나 위험한 선택 아닌가.
여차하면 그녀를 경계해 제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내게 스스럼없이 능력을 보였다.
왜? 내가 위협으로 느끼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긴, 냉정히 생각하면 그렇긴 하지.’
이미 격차가 벌어졌다.
내가 즉위하고 세운 업적이 얼마인가.
내 왕권은 탄탄하고, 명성은 그녀가 감히 넘볼 수 없다.
심지어 나는 엘리자베스보다 더한 위협인 제인 그레이까지 죽이지 않고 풀어주는 아량을 보였다.
엘리자베스 입장에는, 내가 그녀를 견제할 걱정을 하지 않을 법했다.
그보단 능력을 보이고 내게 붙어 살아남을 생각이 컸던 것이다.
나는 유쾌한 기분으로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했다.
“교수를 해보겠다는 제의는. 그건 진심이니?”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그냥 내게 능력을 보이고 대화할 기회를 얻을 겸 해본 소리에 불과한가 보다.
엘리자베스에겐 나름의 도박수 아니었을까.
“그래? 그러면 한 번 해보렴. 교수 자리.”
“예?”
“네가 똑똑하다는 건 알겠고, 혼인 동맹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널 정치에 참여시킬 생각은 없단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나는 군주이니, 혈육의 정 때문에 중요한 외교 정책을 망칠 생각은 없어. 그러니 네가 원하는 걸 얻으려면, 너는 네 능력을 내게 증명해야 할 거야. 그 교수 자리에서 말이야. 어때? 할 수 있겠니?”
엘리자베스는 각오가 되었다는 듯,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폐하.”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런데 케임브리지 교수가 되라는 것은 아니야. 물론 옥스퍼드도 아니고.”
“네? 그러면···.”
“새로 세울 학교의 교수가 되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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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엘리자베스를 한 번 써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대학 교수직을 맡길 수는 없다.
‘아직 아주 마음을 놓은 것은 아니거든.’
대학에서는 고위 성직자가 전부 배출된다.
그들을 가르치면서 연을 쌓아두면, 잠재적인 위험 세력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는 안 된다.
때마침 교육 개혁을 추진하던 참이었다.
엘리자베스에게 맡기기 딱 적당한 일이 있었다.
“나는 여학생만을 받는 여성 대학을 세울 것이야. 그곳에서 외국어를 비롯한 각종 교양 과목을 가르치도록 하지.”
여성 학교는 사실 이전에도 존재했다.
다만, 대학이라 이름 붙일 정도로 수준 높은 학교는 없었지만.
간단한 문법과 성경 정도를 가르치는 학교가 전부였다.
때문에 내 계획에 반발이 없지는 않았다.
“여성 교육은 귀족가 영애에게 가정교사를 붙이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평민까지 다닐 수 있는 학교라니요. 농부의 아낙네에게 대체 왜 공부가 필요하답니까?”
나는 그런 반발을 이렇게 일축했다.
“남자를 가르쳐봤자 한 명이 영리해질 뿐이지. 반면 여자에게 가르치면, 그 여자가 자신의 아이들을 전부 영리하게 길러낼 것 아닌가.”
이 시대 자녀 교육은 거의 여성의 몫.
후대의 교육수준을 높이려면 여성을 교육하는 게 나았다.
또한, 외국어를 비롯한 각종 교양 과목을 배운 여성은 이래저래 활용할 곳이 많았고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 논리로 의회를 완전히 설득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교육이 반란자를 양성하니 아랫것은 배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지는 것이 이 시대 영국 사회였다.
괜히 대학을 두 개로 제한하고 통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때, 의회의 반발에 제동을 건 소식이 하나 있었다.
“뭐라고? 여성학교의 교수가 누구라고?”
뒤늦게 새 학교의 교수가 엘리자베스라는 게 알려진 것이다.
의회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대체 폐하께선 왜 엘리자베스 공주를 교수로 앉히겠다는 거지?”
한참 뜻을 파악하기 위해 골몰한 의회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폐하께서 어린 시절의 원한을 갚으시려고 한다!”
의원들은 엘리자베스가 교수직에 자원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교수가 나쁜 직종은 아니지만, 엘리자베스는 왕족 아닌가.
그것도 왕위 계승 가능성까지 있는 상당히 귀한 여자 왕족.
그런 그녀가 신분 낮은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친다니.
말도 안 됐다. 이건 상당히 모욕적인 일 아닌가.
메리 여왕이 강제로 임명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연상이 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거, 역시 ‘그 사건’이랑 비슷하지?”
“그래. 틀림없어.”
메리가 계모 밑에서 구박을 당하던 시절의 일이다.
앤 불린은 메리에게 엘리자베스의 시녀 일을 할 것을 명했다.
시녀 자체야 괜찮은 직종이었지만, 적통 왕족인 메리의 신분을 고려했을 때, 이건 엄청난 모욕이었다.
그 날의 일을 속으로 담아두었다가, 지금 와서 복수하고자 하는 건 아닐까?
“어처구니없는 오해군.”
나는 그 소문을 듣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모욕당했던 이는 어린 메리지, 내가 아니지 않나.
당연히 복수할 마음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겐 꽤 그럴듯하게 들렸나 보다.
곧 소문이 곧 파다하게 퍼졌다.
“어떻게든 소문을 진압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이젠 데본 백작이 된 와이어트가 걱정스레 물었다.
여왕이 사적인 복수를 하려 한다니, 왕권이 실추될까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말렸다.
“내버려두게.”
이런 소문이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그간 쌓아올린 명성을 믿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쌓아올린 악명도.
“뭐? 폐하가 엘리자베스 공주를 모욕했다고? 그래서?”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학교 선생 정도야 시킬 수도 있지. 안 그래?”
“그래! 이 정도면 자비롭지! 그간 당한 게 얼만데!”
“이게 다, 우리 폐하께서 관대한 분이셔서 그래. 오죽하면 반역자 제인 그레이도 용서해주셨겠나!”
“암! 그렇고말고!”
여론은 내게 호의적이었다.
소문은 왕권을 실추시키긴커녕,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성 대학 설립을 반대하던 의원들이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으음··· 이거 잘못하면 폐하께 원한을 사겠는걸.”
“뭐, 공주와 지킬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내버려둘까?”
“그래. 그깟 대학 세워진다고 피해받을 것도 없잖아. 하지만 폐하를 노하게 하면··· 으으, 생각하기도 싫군.”
“망치! 망치가 내게 날라올 거야! 히익!”
의원들은 어쨌거나 나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당연히 교육제도 개혁에 반대할 권리도 있고, 탓할 일도 아니다.
내가 그 정도로 화내지 않는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왕의 개인적 복수를 앞장서서 막는다니.
이건 의원들에겐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들의 권익을 건드리는 것도 아닌데 굳이 여왕을 막아선다?
대체 왜? 관심도 없는 엘리자베스 공주 하나 지키자고?
아서라, 감히 패왕의 분노를 사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1554년 7월.
마침내 런던 교외에는 작은 대학교가 새로 생겼다.
여성 교육과, 공주에 대한 복수라는 명분을 덧씌워 본뜻을 숨긴.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200년 만에 생겨난 영국의 세 번째 대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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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대학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군.”
내가 피곤한 한숨을 내쉬자, 마주 앉아있던 노퍽 공작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하, 고생하셨습니다. 폐하의 노고 덕분에 이 잉글랜드가 하루하루 날로 좋게 변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죽겠지만 말이야. 어디 휴양이라도 가고 싶군.”
내가 투덜거리자, 노퍽 공작이 뜻밖의 권유를 해왔다.
“정 그러시면, 서리 주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서리 주?”
분명, 첫 순행을 해서 재판을 했던 그곳?
노퍽 공작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고.
“예. 아시다시피, 서리 주는 런던 근교에 있지 않습니까. 가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고, 풍광이 좋아 휴양차 오는 귀족들도 많습니다.”
흐음, 퍽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생각해보면 그곳 공장을 점검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 잠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노퍽 공작이 반가운 미소를 흘렸다.
생각해보면 그도 서리를 가지 못한 지 꽤 됐을 것이다.
노퍽 공작이 된 후로는 불가피하게 수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까.
“하하, 그립군요. 그곳은 여전할까요?”
“그렇겠지. 시골은 잘 변하지 않는 법 아닌가.”
그래, 내가 분명히 그런 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공작, 내가 보고 있는 게 자네 눈에도 보이는가?”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나는 망연히 내 눈앞의 클로버를 쳐다보았다.
양들이 사이좋게 풀을 뜯어 먹는 이 목가적인 풍경.
다 좋은데, 왜 이 풍경이 이 땅에 펼쳐져 있는 거지?
여기 분명 저번에는 밭이었잖아!
“아이고! 폐하!”
멀리서 나를 본 양치기가 달려오고 있다.
틀림없이 재판에서 봤던 그 얼굴이었다.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들려고 하는군.”
어이가 없다.
아니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꼭 모 TV 프로그램의 빌런을 보는 것 같다.
온갖 패악질을 하다가, 따끔한 참교육을 받고 정신을 차린 사장.
이번엔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짐을 한다.
하지만 몇 개월 뒤, 다시 찾아가 보면?
결국, 예전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또다시 남의 땅을 목장으로 갈아엎은 건가?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내가 화를 내자, 양치기가 억울하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이번엔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또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럼 내가 보고 있는 게 다 뭔데?”
“그냥 잠깐 땅을 교환하기로 한 것뿐입니다!”
“뭐? 땅을 교환해?”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엘리자베스와 혼인-
엘리자베스에게 처음으로 구혼한 남자는 토마스 시모어였습니다. 그는 헨리 8세의 마지막 부인, 캐서린 파의 재혼 상대였죠. 토마스 시모어는 캐서린 파가 데리고 온 엘리자베스도 양딸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엘리자베스와 성적인 관계를 맺은 것처럼 보입니다. ‘깃털로 몸을 간지럽히고, 입은 옷을 가위로 조각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결국, 토마스 시모어는 엘리자베스와의 한 침대에 있는 모습을 들켜 아내와 이혼하게 되고, 1549년 왕족과 결혼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됩니다.
엘리자베스가 토마스 시모어를 피해 새벽부터 일어나 옷을 꽁꽁 싸매 입고 하녀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는 증언. 토마스 시모어의 구혼을 적극적으로 거부했던 편지 기록 등으로 미루어보아, 엘리자베스와 토마스의 관계는 상당히 일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손 없이 처녀 여왕으로 남겠다 결심한 데에는 이러한 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