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00
연록흔 – 100화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가륜이 각림에서 온 차림 그대로 문을 나서는데, 꽃그늘 휘늘어진 모퉁이를 돌아오는 인영이 있었다. 금목서 향기에 묻어 온 것, 그의 아내였다. 표를 가슴께에서 부여잡고 다소 느릿하게 걷는 양이 그녀답지 않았다. 어찌 보면 하느작거리는 것도 같고, 어찌 보면 절둑대는 것 같기도 했다.
“폐하, 저기 황후께옵서 오십니다.”
이공공이 나직이 사뢰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그 말 귀에 담기지 않아, 가륜은 록흔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둘 사이가 좁아지는 만큼 뒤에 선 이들은 간이 졸았다. 휘황한 어등 아래, 두 그림자가 가깝게 붙어 섰다.
“진광원인가, 인녕전인가?”
“……!”
록흔은 몹시 놀라 어깨에 두른 것을 놓쳤다. 지금 예 계실 분이 아니니 신기루인 것만 같았다. 그녀는 흐린 눈으로 고개만 저었다. 그 귓전에서 타니가 드맑게 달랑댔다.
“곤하신 황후 생각에 벗도 활도 재미롭지 않았는데.”
“언제…….”
푸른 입술 새, 약간 쉰 듯한 음이 샜다.
“야천이라도 즐기셨나 보군. 그래, 달이 밝던가, 별이 맑던가?”
“폐하, 일찍 오실 줄 미처 모르옵고, 필사를 하느라…….”
“황후께선 붓이 아니라 검으로 글을 쓰시던가?”
“검이라니, 저는…… 여태껏 글을 쓰다 머리가 아파서 잠시 거닐다 오는…….”
변명이라는 게 궁색했다. 록흔이 무거운 머리를 어찌 쳐드는데 몸이 가분히 들렸다. 가륜이 감싸 안은 듯, 제 몸이 차가워 그런지 여느 때보다 그 품이 따뜻하게 닿았다.
“너!”
품에 안은 것이 얼음장처럼 찼다. 가륜은 단음절로 뱉다, 침전 안으로 날파랍게 걸음을 옮겼다. 신상궁이 서둘러 침상 위의 야금을 걷고, 하신이 기실을 보내 태의감을 불러 오게 했다. 여해들이 내관들이 홍인전에 깃든 것은 모두 바삐 움직이는데, 록흔은 먼 데 소리만 같았다.
“폐하…….”
가륜은 록흔을 침상에 내려두고 대수삼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얼굴보다 손이 더 찼다. 그리고 손목보다 팔의 오금이 더 서느랬다. 그는 이를 사리물고 옷섶을 헤쳐 풀었다.
“피치 못할 일이라, 폐하…….”
록흔이 입술을 달싹대는데, 가륜은 아연해졌다. 한겨울도 아니건만, 그녀가 뱉는 입김만 하얗게 바랬다. 저 혼자 몹시 추운 곳에 있는 듯, 낮게 몰아쉬는 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만 벌하시…… 쿨럭!”
록흔이 가슴을 움켜쥐나 싶더니, 밭은기침을 심하게 했다. 그녀가 어깨를 크게 들썩여 된 숨을 터뜨린 끝에 토한 것, 가륜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얼음이었다, 투명하고 단단한. 그는 그녀의 가슴께를 더듬었다. 눈 위에 두었던들 이리 차갑지는 않으려니 온몸이 서느랬다.
“폐하, 태의감이 들었사옵니다.”
“황후를, 어서 살피라.”
태의감이 서둘러 맥을 짚었다. 동사한 시체라도 만진 듯, 손에 닿는 감촉이 몹시 찼다. 조금 더 늦었으면 황후께선 정말 그리되셨을 터, 그는 눈귀를 바짝 좁혔다.
“폐하, 황후께옵서 한증이 도지신 것 같습니다. 한사가 극악하여 온몸의 혈이 막히셨으니, 내려간 체온부터 올려 드려야 합니다. 아무래도 청심의 냉독이 발호한 듯 하와…….”
무상피 사건 이후로 태의감 또한 청심에 대해서 따로 알아보고 있었다. 지엄한 황명이 아니래도 의원 본연의 알고자 하는 욕구로써 황후께서 지니신 환후에 매달리던 차, 그는 그동안 나름으로 밝혀낸 처방을 함께 든 태의령에게 차분하나 빠르게 일렀다.
“지금 침술을 행하면 외려 해롭사옵니다. 폐하, 서느런 체온부터 잡아야…….”
태의감이 말을 채 마치지 못했는데 가륜이 고갯짓으로 나가라 했다. 의대를 벗으시는 걸 보니 뜻하신 바 알겠기에 그는 두 손 맞잡고 물러섰다.
“신상궁, 포단을 더 가져오라.”
“예, 그리하겠나이다.”
신상궁은 황후께서 저리되신 게 꼭 제 불찰인 것만 같았다. 어디 가시는지 캐묻기라도 할 것을, 따라 모시련다 거듭 청할 것을, 단언에 자르신대도 물러서질 말 것을……. 파랗게 바랜 얼굴로 하얗게 언 숨 내쉬시는 걸 뵙자니, 그녀는 눈앞이 아득하고 가슴이 선득했다.
“록흔.”
“예…….”
록흔은 아직 의식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무엇이 그리 피치 못했기에.”
겹겹이 입은 옷조차 선득선득했다. 가륜은 입술을 어그러뜨리며 록흔의 대수삼을 벗겼다. 그리고 안에 든 것도, 그 밑에 든 것도 하나씩 치웠다. 푸르스름한 가슴이 그예 드러나매, 검남빛 눈이 얄풋이 찢겼다.
록흔이 차가울수록, 가륜은 뜨거워졌다. 아내가 잃은 것을 채워 주느라, 그는 한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룻밤 새 그녀가 한혈(피와 땀)에 시달리고 한열(오한과 발열)에 보대끼는 것을 그는 고스란히 함께 겪었다. 같이 앓는 동안 분노의 방향이 틀어졌다. 부접이나 호분위 부중랑장이나 록흔에게 쏟아 붓던 것이 결국은 그 자신에게 떨어져, 화는 갈앉기는커녕 더 크게 일어 버렸다.
“하아…….”
앓는 소리조차 잔약했다. 가륜은 록흔을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노스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혈에 몹시 시달리셨습니다. 물이 얼어 마실 수 없고, 닿는 것마다 상한(추위로 인하여 생기는 병)을 입어…….]혜덕이 하던 말이 가시인 양 박혔다.
[폐하, 항시 잘 살피시어…….]“젠장!”
가륜이 험하게 뱉는 소리, 알아들었을 리도 없는데 록흔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자신에게 화나는 만큼 그는 아내가 안쓰러웠다. 그는 바들바들 떠는 몸을 억세게 보듬었다.
“폐하, 탕약이옵니다.”
“들라.”
태의감과 신상궁이 함께 들었다.
“폐하, 자리옷을 갈아 드려야…….”
“탕약부터 들게 하고, 내가 하련다.”
가륜은 록흔을 일으켜 안았다. 가슴에 기댄 게 힘이 하 없어 보여, 그는 그 목이라도 꺾일까 조심스레 받쳤다. 신상궁이 약을 떠 넣으니 푸릇한 입술 새로 반은 들어가고 반은 흘렀다. 눈이라도 떠야 화를 내든가 으르든가 할 텐데, 그로서는 속이 바짝 탔다.
다악.
태의감이 맥을 짚더니 고개를 갸울었다. 가는 눈시울 새, 여러 빛이 빠르게 스쳤다.
“어떤가?”
“아룁니다. 작야보다 한사가 사위신 듯합니다.”
“공이 애쓴 덕이다.”
“신이 한 일이란 많지 않사옵니다. 이 모든 게 폐하께옵서…….”
가륜이 무겁게 보아, 태의감은 하던 말을 그치고 머리만 조아렸다. 근심이 전이됐는지 그 역시 가슴이 묵직했다.
“한 시진 뒤에 다시 올리겠나이다.”
“음.”
태의감이 먼저 나갔다. 신상궁 역시 물러가다 약하게 돋은 소리에 잠시 멈췄다.
“……하.”
분명 황후셨다. 신상궁은 반가운 마음에 눈물을 왈칵 쏟으며 돌아섰다. 눈시울이 바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맑진 눈동자가 조금 뵀다. 흐린 빛도 얼마간 가신 듯했다. 의식이 돌아왔으니 저것이 일단은 호조였다. 그녀는 눈께를 훔치며 뒷걸음을 쳤다.
“폐하, 제가…….”
록흔이 속삭이는 소리에 가륜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 새로 돋던 부연 기가 이제는 가셔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담뿍 쥐고, 깊게 들여다보았다.
“내가 보이나?”
“예, 제가…….”
“됐다. 지금은 하지 마라.”
록흔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륜은 번히 알았다. 저 때문에 걱정 끼쳤으니 죄송하다 할 터. 그는 서느런 어깨에 입술을 묻고 서늘히 식은 몸을 바짝 조여 안았다.
“직위 해제든 강등이든, 공을 세웠다 해도 너 상한만큼 치를 터.”
“저로 인한 것이니, 저를…….”
“그래, 네게도 화낼 것이 많다.”
“부접들은, 고하준은…….”
“록흔, 우선 낫고 보자. 다른 건 다음에, 그다음에.”
가륜이 탁하게 하는 말에 록흔은 입을 다물었다. 제가 보기에도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듯, 지금도 온몸이 서늘했다. 한없이 갈앉고 가라지면, 저를 당겨 이끌던 품……. 그녀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걱정 보탠 것이 미안해, 푸르스름한 눈귀가 서느렇게 젖었다.
***
저 위의 태양은 늘 그렇듯 지글지글 끓을 것이나, 아침녘에 부는 바람은 이제 쌀쌀했다. 동장군이 다가오는 만큼 볕은 짧아지고 또 낮아졌다. 하늘이 맑고 서느러니 그야말로 추천(가을 하늘), 천창으로 들이친 햇발이 물둘레인 양 동그란 무늬를 남겼다. 결 곧은 빛줄기 새로 먼지들이 점점이 날아 살폿 내려앉았다. 해가 그린 그림은 붉은 양탄자 위에서 시시각각 달라졌다.
“…….”
빛이 동그랗게 떨어진 곳, 바로 그 곁에 황룡의 황후가 잠들어 있었다. 치마폭에 색실들이 알록달록 얽히고 쪽가위도 하나 올라앉은 참, 수틀은 그 곁에서 반드르르했다.
스륵.
신상궁도 그예 바늘을 놓았다. 황후께서 하도 고와 하염없이 바라보던 차, 한쪽으로 꺾인 고개도 유려히 흐른 턱선도 섬려하기 그지없었다. 접때 일 있은 후로 황상께서 여인다운 일만 하라 엄포를 놓으신 터라 요즈음 황후께서는 침선을 배우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보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비단실 하나가 엉켜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몰래 엷게 웃어 버렸다. 황후께선 솜씨가 썩 없으신 건 아닌데 바느질하는 건 별로 좋아하시질 않았다.
다악.
수틀이 한쪽으로 치워졌다. 치맛자락 아래로 비단신의 코가 살폿 드러났다.
“폐하, 편히 누우셔요.”
신상궁이 다가가 사뢨으나 답이 없었다. 숨도 새지 않는 듯, 황후께서는 너무 고요히 주무셨다. 좋게 말하면 그린 듯, 나쁘게 말하면 죽은 듯. 고요함의 극치였다.
“폐하…….”
툭.
신상궁은 거듭 부르며 황후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일순, 바늘 쥔 보얀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황후께서 호되게 앓으신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신상궁은 겁이 덜컥 났다. 그녀가 숨소리를 들으려 고개를 숙였으나, 귓전에 닿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이를 어쩌면 좋아? 폐하, 폐하!”
혼자 울상을 짓고 발만 동동 구르는데 어깨 너머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신상궁이 흠칫 놀라 돌아서니, 황상께서 바로 목전에 계셨다. 경황 중에 예 갖출 생각은 못하고 그녀는 두 손만 맞잡았다.
“웬 소란인가?”
걱정이 담긴 듯 검남빛 눈이 몹시 짙었다.
“황후 폐하께서 대답이 없으셔서…… 깊이 잠드셨다 하기엔 걱정이 되와…….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가 하와서…….”
신상궁이 두서없이 하는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륜은 록흔을 들어 안았다. 그가 침상 쪽으로 한 걸음 옮기자 색실 감은 실패가 또록 구르고, 가위가 밑으로 뚝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아내의 이마에 뺨을 대 보았다. 서늘하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그저 다사했다.
“황후께선 괜찮으시니 신상궁, 나가 있으라.”
“예, 폐하.”
편히 눕혀 주려 들어 안은 것인데 가륜은 막상 록흔을 내려놓지 않았다. 미동 없이 눈 감은 아내가 애잔하고 또 애틋하여 깊게 들여 볼 뿐. 그는 그 상태 그대로 방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이대로 검은 꺾어.] [폐하, 하오나…….] [옷을 짓고, 수를 놓아라.] [다음에는 미리 말씀드릴 테니…….] [안 돼, 불허한다.] [그러면 부접들을, 제 수하들을…….] [무슨 말을 바라나, 네 힘줄이라도 긋겠다 협위하랴?] [폐하, 어찌…….] [네가 안온하다면, 뭐든 못할까?]가륜은 잘 알았다. 흠은 제 안에 있었다. 그러나 나름의 공명함이 이 앞에서만은 가하지 않았다. 록흔이 사윌지언정 그녀를 잃는 것은 할 수 없기에, 알면서도 부러 눌렀다. 이 사리물고 고운 날개 살천스레 꺾어 이곳에 잡아맸다. 이처럼 매양 곁에 두고도 그는 아내가 고팠다. 나라 안팎의 일이란 끝이 없어 일일만기라도 부족한 판, 광세전에서 무세전에서 보내는 시간이 자꾸 늘었다.
“이리하려, 아내로 맞겠다 했던가?”
아무리 늦은 밤인들, 봄 같은 아내는 항시 같은 곳에 있었다. 홍인전 드밝은 창에서 가륜은 마음의 위안을 얻고는 했다.
“록흔…….”
부접과 고하준이 고한 바, 전대미문의 매춘 사건은 그 해결의 공이 황후인 록흔에게 있었다. 그러나 가륜은 차마 치하하지 못했다. 또다시 이리 상하면 혈육 같은 저들의 목을 치겠노라 대노했을 뿐. 안채운이 엮인 이유 알고는 서조모에게도 역정을 냈다. 무엇보다 아내가 중하니, 공명정대함은 알 바 아니었다.
“많이 곤한가?”
양 뺨이 해쓱하고 팔에 감기는 몸피가 몹시 가분했다. 여위고 사윈 모습이 가슴을 찔러 가륜은 눈을 일그러뜨렸다.
“…….”
록흔답지 않게 깊은 잠이었다. 가륜은 그녀를 더 높게 가깝게 끌어안았다. 일순, 도홍빛 입술 끝이 조금 들렸다. 꿈이 편치 않은 듯 아미 또한 일그러졌다.
“아이처럼 낮에도 꿈을 꾸는군.”
꿈을 엿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륜은 록흔 위로 고개를 수그렸다. 뺨이 닿고 숨결이 닿아 아내다운 향이 그에게로 스며들었다. 어느덧 호흡이 섭슬려 그는 자신에게는 없는 보드라움을 한껏 빨아들였다. 그러자 깊은 잠 끝에서 떠오르는 듯, 그녀가 연한 입술을 하르르 떨었다.
“록흔.”
가륜은 다시 한 번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맞닿은 입술 위, 그녀가 잗다랗게 움직였다. ‘폐하’라고 속삭인 듯해 그는 그녀의 얼굴이 잘 뵈도록 고쳐 안았다.
“까라졌군.”
록흔이 반개한 눈으로 가륜을 보았다. 잠이 덜 바래 약간은 흐린, 그러나 미소는 우련 고왔다.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곤해 보이세요.”
록흔이 손을 내밀어 가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사내답게 각진 턱에 닿은 손가락이 보드랍고 또 보얬다.
“숨소리 없이 시들어 놓곤, 내 걱정이군.”
“제가 그랬어요?”
“신상궁이 파랗게 질렸었다. 너 잘못된 줄 알고.”
“그러면…….”
폐하께서도 걱정하셨겠네요. 록흔이 눈으로 말해 가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부러 깨웠다만, 조금 더 잘까?”
“아니요, 폐하 오셨는데요. 저 내려 주세요. 무거운데…….”
“무겁긴, 살 좀 찌우려 해도 말도 안 듣고. 텅 빈 대롱처럼 공허하다.”
완연히 깬 듯, 록흔이 맑진 눈으로 웃었다.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조정에 일이 몹시 많다 들었는데.”
“잠시 틈을 내서 왔다. 과제는 잘 하고 있나?”
앉았던 의자에 록흔은 이제는 가륜과 함께였다. 실은 그의 무릎 위, 다사한 숨결이 그녀의 뺨으로 바로 스몄다.
“보자, 어찌 황후께선 솜씨가…….”
가륜이 말끝을 사리며 실긋 웃었다. 조그만 교도며 알록달록한 자투리 천이며, 곱다란 골무며, 보드레한 견사하며……. 반짇고리에 소담하게 들어앉은 것은 록흔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같은 바늘이래도 암기로써나 다뤄 봤을 터. 그는 수틀을 가깝게 당겨 보았다. 수틀에 걸린 하얀 비단 위, 꼴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으나 분명 황룡이었다. 비늘 가닥가닥 살아, 눈은 붉어……. 그는 자세히 살피다 입귀를 틀었다. 적안은 색실이 아니라 피로써 채워진 것, 그는 대수삼 아래 가려진 아내의 손을 그러잡았다.
“바늘겨레(바늘집)가 없었나 보군.”
왼손 검지 끝, 보얗고 동근 그곳에 혈점이 제법 많았다. 한 번 찔리고 거듭 찔린 듯 어떤 것은 좀 더 컸다.
“신상궁한테 배우는데도 잘 늘지는 않고……. 곧잘 이리돼 버려서요.”
“아프겠다.”
“아뇨. 폐…….”
록흔은 숨을 가만 물었다. 쇳독을 빼내련다 하시겠지만, 외려 찔린 곳이 더 홧홧했다. 가륜이 자긋자긋 물어 매끄럽게 빨기에 그녀는 입술을 붉게 감물었다.
“할 만한가?”
가륜이 손끝에서 묻기에 록흔은 고개만 저었다. 움푹 팬 뺨에 미소가 그득 괬다.
“울며 겨자 먹기로군.”
록흔은 한숨을 연하게 내쉬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 부정하지 못했다. 그 빛 알아챘는지 가륜이 빛접게 웃었다. 그 미소가 그녀에게 그대로 닿았다. 뼈가 잔약하게 도드라진 손등에도, 핏줄이 가느다랗게 뵈는 손목에도, 그는 느릿하게 입술을 댔다.
“전보다 말랑하다.”
검을 놓고, 비바람 모르고 살며, 보드라운 비단이나 만지고, 매끄러운 종잇장이나 넘기고……. 그러하니 손이 거칠 수가 없었다. 록흔은 눈썹 아래로 불만스런 마음은 감춰 버렸다.
“동렬은, 네 권째던가?”
“예, 선 편이 거의 끝나가요.”
“이제 불씨면, 갈 길이 멀잖나.”
록흔이 고개만 끄덕끄덕하는데, 가륜이 그녀의 뒷머리를 잡았다. 땋고 틀고 풀어 내린, 그야말로 섬려하게 고운 머리채였다.
“무겁지?”
산호를 깎아, 녹옥을 도셔, 취옥을 늘어뜨려……. 록흔은 가륜이 치레로 꽂은 것들을 언급하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또 한 번 끄덕하고 고갯짓을 했다.
“예전에 드나나나 고집 센 이가 하나 있었는데 말이다, 내 안해처럼 이리 빳빳했던 것 같다. 아니 그런가?”
뒤통수가 뻣뻣하다 했던가? 록흔은 양 볼이 확 붉어져 얼굴을 반긋하게 들었다. 가륜이 짙은 눈으로 보아, 홍조는 더욱 짙어졌다.
“네가 안쓰럽긴 하다. 하지만, 두 번은 못할 짓이잖나.”
“폐하…….”
“검파 쥐고 너른 들 누비면, 그랬으면 좋겠지?”
“그날은 가여운 이 살피느라, 폐하께 그예 근심만 보태…….”
“이리 사위고 말랐으니, 뉘 탓인가?”
“아뇨. 폐하, 저는 다만.”
록흔이 급하게 베어 문 말, 가륜이 어서 하라 눈으로 좨쳤다. 그러나 그녀는 하지 않았다. 입술 자그시 물어 목 아래로 삼켜 버렸다.
“다만?”
부접두로서 호분중랑장으로서 뵙던 것과 그 아내로서 겪는 것은 또 달랐다. 황룡의 극존은 태어남으로 인해 절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록흔은 가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위에 연삽하게 속삭였다. 애틋함에 곱다운 눈귀가 살폿 일그러졌다.
사락.
보랏빛 깁이 얇게 구겨졌다. 가륜이 그러안는 대로, 록흔은 그 품에 잠겼다.
“자주 해 주면 좋잖나.”
“어린애 같아서, 어찌…….”
“내겐 힘이 되는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투정도 하고.”
“칭얼대면 그게…….”
“내게 속박이 된다?”
“예.”
“다른 이 살피느라 네 몸 갉아 내지만 않으면, 무엇을 하든 곱다. 록흔, 넌 내게 그래.”
가륜은 록흔의 눈언저리를 천천히 쓸었다. 저를 담은 눈이 고와, 오래도록 보았다.
“오늘부터는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
“이리 보드랍게 지내는데, 그쯤은 저도 하고 싶어요.”
“바스라질 것 같다. 조금 전에도 아마 기진했지 싶은데.”
“아니에요, 폐하. 제가 미련하게 깊이 자느라…….”
록흔이 밝게 말해도 가륜에게는 그 눈에 어린 그늘이 뵀다. 국정도 힘든데 저는 걱정거리 보태지 않으련다 할 터. 그는 그녀의 손목을 훔켜잡았다.
“너, 나한테 숨기는 게 있을 텐데.”
가륜이 칼빛으로 보아, 록흔은 부러 환하게 웃었다. 하얗게 잡힌 볼우물이 연삽하여 곱다웠다.
“그런 것 없어요.”
“정녕?”
“예.”
가륜이 여전히 갈앉은 눈이라, 록흔은 상그레 웃었다.
“제가 아무래도 가을을 타나 봐요.”
“황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영부영 넘어가 주지. 어쨌든, 금소(금야)부터는 일찍 침수 들도록.”
“예, 그럴게요.”
록흔이 겉으로만 대답하는데, 무언가 보드란 것이 손가락에 휘감겼다. 바로 살피니 반지, 그러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주톳빛으로 빛나는 것은 금속이라 하기에 무르고 하르르했다.
“만혁이 보낸 성혼 선물이다.”
“그때, 이미 받았는걸요.”
“신부가 너인 줄 몰랐다 쓴 입맛 다시더니, 그예 다시 보냈군.”
이대로가 좋았다. 록흔이 깊게 알아 득 될 것은 없었다. 만혁이 이른 대로 하나씩 나눠 가져 지니면 될 터. 작금, 가륜의 왼손 약지에도 저것과 같으나 더 굵다란 것이 감겨 있었다. 붉은 흙빛을 띠는 반고체는 상합이라 불리는 바위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멀리 떨어진 둘을 하나로 묶는다 했다.
“네 것과 한 짝이지.”
록흔은 가륜의 손가락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제 것은 무르나, 남편의 것은 단단했다.
“폐하, 그저 장식인가요? 아니면…….”
“우리 둘, 금과 슬(둘 다 거문고를 의미함)이라 보낸 것일 터.”
가륜은 부러 흔연스레 말했다. 저것으로 인해 록흔이 한증을 던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 그는 그녀의 옷섶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저를 향한 두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았다.
“바늘에 찔리더니, 실에는 묶일 텐가?”
“……?”
가륜이 목덜미를 쓸기에 록흔은 눈을 살폿 내렸다. 초두록빛 색실 하나가 그의 손가락에 반드레하게 걸린 참, 끝은 어디로 숨었는지 뵈지 않았다.
“제가 이런 재주는 없다고 말씀 드렸…….”
실 찾는다 핑계로 가륜이 대수삼을 걷어 내고, 반비 끈을 풀었다. 금세라도 동근 가슴이 보얗게 뵐 듯, 록흔은 도홍으로 익어 고개를 모로 틀었다. 그가 바로 쫓아, 버긋 열린 입술이 그에게 섭슬렸다.
“록흔, 다시…….”
가륜이 숨이 섞인 채로 묻기에 록흔은 고개를 가만 숙였다. 그립고 그립노라, 계신 자리 무겁고 번다함을 아노니, 매양은 품지 못해도, 그립고 그리워서……. 그녀는 연한 입술로 되뇄다. 그는 그 속삭임을 심장으로 들었다.
***
미랑 은소현, 황룡국에서 가장 아름답다 소문이 자자했던 미희. 이제 그런 여인은 없었다. 황제의 사랑은커녕 그 존재 유무조차도 알리지 못하는 후궁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쨍!
수면처럼 맑던 것이 여러 조각으로 갈렸다. 거울 안, 비참하게 일그러진 은소현이 수십이었다.
‘내 황상의 곁을 잃고, 황자를 잃었거늘.’
소현이 이를 가매, 면경 안의 여인들도 같은 얼굴을 했다.
‘쳐 죽여도 시원찮은 계집. 처음 본 순간에 그리 눈에 거슬리더니…….’
거울 속, 붉은 입술이 표독스레 사려졌다.
‘잃은 만큼 갚아 주마.’
소현은 그랬다. 연록흔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가슴에 천불이 솟았다. 치가 떨리고 심장이 날뛰어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저주에 저주로, 앗고 또 앗아, 갈아 마실진저!’
아비가 사가에서 보낸 의원은 이게 바로 화병이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기운이 치미니, 입은 옷을 훌훌 벗고픈 지경. 도시 살 수가 없었다. 소현이 작금도 부글부글 끓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데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월한이 검은 깁 채로 스며 들어왔다.
“소식은?”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더디 걸리는구나.”
“그 계집이 여간내기는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저도 인간이니 그예 서서히 말라 죽을 겁니다.”
“틀림없겠지?”
“그 도사가 효험을 장담했으니 믿어 보세요. 증거가 남는 방자를 하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낫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긴 하다.”
“예, 이제 곧입니다.”
“그놈의 새끼는 잘 잡아 두었지?”
“그건 도사에게 맡겨 두었습니다.”
“월한, 실수 없도록 해라.”
“예, 마마.”
소현은 느긋하게 배를 쓸었다. 큰아이를 청자단지에 넣을 적에 그녀는 가슴에 벼린 것이 많았다. 공멸할지언정 자멸하지는 않을 터. 그래서 밥도 한 그릇씩 딱딱 먹어 치웠다. 작은아이는 어찌하든 건강히 낳아야 했다.
“마마, 불편하신 곳은 없으시지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마음 굳게 드시고, 보체 보존하셔야 합니다.”
월한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혀를 자그시 물었다. 나머지 하나도 없애고프나, 모화가 아는 이상 더는 무리였다. 소현이 혹시라도 알아채지 않을까 해서 지금도 조마대고 불안했다.
“그만 나가봐라. 보는 눈이 많잖으냐.”
“예. 마마께선 마음 편히 계십시오.”
“그래, 항시 수고해라.”
월한이 나선 후, 소현은 깨진 거울을 바라보았다. 뉘가 뭐라 하든 안에 담긴 것은 여전히 곱고 여전히 아리따웠다. 도톰히 붉은 입술에서 비릿한 미소가 터졌다.
‘죽어 버려!’
은경에 비친 것은 여귀였다.
‘말라서, 배배틀려서…….’
아름다운 이라 더 앙칼지고 잔독했다.
이경(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 사이)이 훨씬 넘은 밤, 짐승 하나가 홍인전으로 스멀스멀 기어왔다. 문신이 할긋 보니 터럭은 검고 생김이나 몸피는 곰과 같았다. 긴 코에 범을 닮은 발에 소꼬리, 그녀는 놈이 무언지 한눈에 알아봤다.
차앙!
창날 번뜩이매, 보랏빛 철엽이 맵차게 흔들렸다.
“물러가라!”
표표히 고운 눈에 서기가 서렸다.
“신성한 곳이다. 뉘라 감히 들어가랴!”
문신은 비록 자갑을 둘렀으나, 천녀인 양 고왔다.
“어허, 이것이!”
둘 다 범접치 못할 기를 품었음에도 짐승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무소의 눈처럼 곁에 붙은 것을 뒤룩뒤룩 돌릴 뿐, 놈은 물러서지 않았다.
“우우어엉!”
뭉툭한 주둥이 새로 괴이한 소리가 꿰졌다. 그러나 문신에게는 이해가 가한 모양, 섬려한 입술이 대번에 틀어졌다.
“당찮다! 여기에 네놈 먹이 따윈 없다!”
“치도곤을 낼 터!”
두 문신이 일갈하매, 짐승이 가랑거리며 울었다.
“이상하군. 저것이 어찌 예까지 왔을꼬?”
“별나긴 하다.”
홍인전 정문, 문신들은 오랜 세월 이곳에서 뿌리박혀 지냈다. 주인 없던 날들도 마찬가지며 천후의 변화에도 상관없었다. 황룡의 황후가 무사토록 지키는 것이 그들의 소임, 사람에게는 뵈지 않았다. 작금도 궁녀 하나가 그 곁을 무심히 스쳤다.
챵!
“물러서라!”
쿠에엑!
짐승이 끈적끈적한 것을 힘껏 뿜었다. 그러자 요 며칠 계속 그랬듯 문신들은 맥을 못 추고 스러졌다. 고운 얼굴 가리어져, 깊은 꿈에 빠졌으니…… 새론 날에 이 밤의 기억은 또 없을 터였다.
“우오오!”
짐승은 맥(?)이라 불렸다. 놈은 연한 고기인 양 무쇠를 씹고, 인간의 악몽일랑 걸탐스레 먹어 치웠다. 그러나 악수(흉악한 짐승)는 아니니 예서 뵈는 놈은 예외로 쳐야 옳았다.
스스스스…….
침전에는 불이 훤했다. 시중드는 이가 잠시 나간 터라 황후 홀로 있었다. 창으로 들이친 바람에 읽다 떨군 책이 치마폭에서 팔락댔다. 종잇장 상량하게 스치매, 보얀 뺨에 드리워진 머리칼도 몇 가닥 날렸다. 황제를 기다리다 잠이 든 듯, 고개 꺾고 누운 모습이 애잔히 아름다웠다.
‘폐하, 용서하옵소서.’
맥이 매일 밤 속으로만 사뢰는 말이었다. 아름답고 강하신 분이라 송괴한 마음이 더 컸다. 속눈썹 그늘은 짙어, 잔약하게 꺾인 손목은 가늘어, 황후는 푹신한 등받이에 편히 기댄 참. 꿈길이 편치 않으니 저리 기진한 것이다. 제가 한 짓이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죽음 같은 심면, 곧 깨뜨려질 터였다. 맥은 투덕투덕한 앞발을 황후에게로 뻗었다. 그리고 반드레한 정수리에 예서제서 긁어모은 악몽들을 내리쏟았다.
“으…….”
아미가 휘어졌다. 고운 입술이 비틀렸다.
“그런…….”
맥은 황후의 눈으로 꿈을 보았다. 제가 품었던 것이나 그악스레 잔독했다.
화락화락!
타닥탁!
탁!
온몸이 뜨거웠다. 바닥이 지글지글 타는 듯해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머리칼은 오그라들고, 피는 그예 졸았다. 록흔은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제 것이 아닌 남의 것. 그러나 되려 현실보다 생생했다.
“도와주세요!”
꿈이란 으레 그래서 손도 발도 입도 납덩이만치 무거웠다. 들리지도 않고 떼어지지도 않고 벌어지지도 않으니, 여인이 저리 울부짖어도 도울 수가 없었다. 하냥 같이 괴로워할 뿐, 록흔은 입술만 섧게 물었다. 무쇠라도 끓을 듯 그녀를 감싼 세계는 용광로와 같았다.
“으애애앵!”
“아가아, 아가!”
불 너머에서 갓난애가 울었다. 화룽화룽 어린 불꽃 뒤에서 애어미는 피울음을 토했다. 서로 찾아 부르니 단장이 바로 저러할 터. 록흔은 눈시울을 좁혔다.
“…….”
구경꾼은 수두룩한데 아무도 돕지 않았다. 멀뚱히 서서 손가락질 하니 그야말로 불구경이었다. 아이의 아비 또한 장승, 데꾼한 눈으로 제 일이 아닌 듯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아기, 우리 아기를!”
애아비의 눈이 번들거렸다. 절반은 광기, 절반은 눈물.
“제발, 누가…….”
애어미가 빌어도 그 뉘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불에 타 죽는 걸 바라는 듯, 저러한 일이 당연하다는 듯. 얼음장 같은 눈으로 여인을 보고 화마가 감싼 집을 보았다.
“가군, 제발! 무엇이라도 다 할 테니…….”
참혹하게도 여인은 앉은뱅이였다. 다리가 성했으면 진즉에 뛰어 들었을 터. 그녀는 엉덩이를 직직 끄셔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완전히 젖은 얼굴에 불길이 주홍으로 비쳤다.
“균아는 이미 죽었어.”
방화한 이, 다름 아닌 아비였다. 그 눈에 색 없으매, 록흔은 한눈에 알았다.
“아니야, 저리 우는데……. 우리 균아, 죽지 않았어요. 균아, 아가아!”
투둑투둑!
들보가 내려앉았다.
토독!
불티가 사방으로 튀었다.
“으아아앙!”
불길 너머에서 아기가 까무러치게 울어, 그 어미는 핏발 선 눈으로 화염을 좇았다. 있으나 마나 한 다리를 질질 끌어 앉은걸음 얼마간, 그러나 곧 억세게 잡혔다.
“저런 자식, 죽게 놔둬.”
“설마, 당신……!”
“그래, 나야.”
일순, 여인이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뻑뻑이 마른 저 눈에 비친 마음, 록흔은 그저 알았다. 이 꿈이 오롯이 저이의 것은 아니었으므로.
“개만도 못한!”
화탕지옥이래도 못 갈까? 불길이 화락화락 치솟는 집을 향해 여인은 미친 듯이 제 몸을 굴렸다. 아들의 울음소리만 선연해 다른 것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저 앞에서 어린것이 깔딱깔딱하는데, 커다란 몸이 그녀를 덮쳐눌렀다.
“이거 놔, 균아한테 가야 해!”
“미쳤어, 당신 죽는다고!”
“균아 없이 살 생각…….”
“그럼 난? 당신 없이 난 어쩌란 건가?”
여인에게 지아비 또한 큰 사랑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꼭 그랬다. 그녀는 붉은 눈으로 줄기줄기 울었다. 찰나, 섧게 부푼 시선이 록흔에게로 떨어졌다.
“도와주세요, 제 아들이 저 안에 있어요.”
살갗을 태울 듯한 열기도, 다리를 붙드는 안간힘도, 꿈이라 하기에 그악스레 생생했다.
“으아아아앙!”
화염 또 화염, 록흔은 불길을 헤치고 들어갔다. 애어미와 눈 마주친 순간부터 오롯이 제 꿈이었다. 연기가 짙어 숨이 턱턱 막히고, 사위가 용암인 양 뜨거워 살이 녹는 듯했다. 울음소리는 아스라하고, 아기는 좀처럼 뵈지 않았다.
“으애앵!”
일순, 소리가 가까웠다.
화르륵 툭!
겉더께인 양 불을 두텁게 입은 기둥 하나가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화마는 예서 날름대고 제서 이글대, 금방이라도 록흔을 돌돌 말아 삼킬 성싶었다. 실내는 희부예 한치 앞도 분간키 어려워, 그녀는 더듬대며 소리를 좇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