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98
연록흔 – 98화
타악!
문이 바숴지듯 열렸다. 검은 멱리가 그 너머로 날렵하게 지났다.
“예서 물러서라.”
월한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리문 입술이 피가 배나올 만큼 짙붉어 애먼 궁녀들만 목이 쑥 들어갔다. 모두들 슬금슬금 피해 가니 소현의 방에는 모화만 오롯이 남았다.
‘참으시오.’
침 끝이 은빛으로 빛났다.
푹.
투명한 살갗 아래, 뾰족한 것이 깊게 숨었다.
“아아!”
소현이 꿈틀대더니 모화의 팔을 잡았다. 희게 바랜 입술 끝에 핏기가 밴 듯, 그녀는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의원으로 숱하게 겪은 바 유산 또한 산고와 다를 바 없었다.
“아아악!”
침놓는 자리마다, 핏줄이 올올이 섰다.
“아아…….”
“흐억!”
문밖에서 월한은 서성거리기만 했다. 어찌 되든 기쁘지 않고 어찌 되든 만족스럽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터지는 신음이 그녀의 심장을 죄었다. 그나저나 처음 보던 것과 겪을수록 달라지니, 모화라는 저 아이는 태의령들보다 의술이 나은지도 몰랐다. 그녀는 파르란 눈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닫힌 문을 응시했다.
“아아악!”
마치 단말마 같았다. 은사군이 떠올라 월한은 눈귀를 잔뜩 좁혔다. 제 딸이 잘못되면 가만있지 않을 터. 그녀는 문을 세게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찌…….”
말문이 그저 막혔다. 모화가 천으로 싸든 것은 핏덩이였다. 그러나 머리도 팔다리도 몸통도 사람의 생김을 그럴싸하게 갖춰, 뾰족하게 돋은 성기 또한 지녔다.
“사내애였군.”
월한은 벽에 기대섰다. 저도 모를 탄식이 입술 새로 흘렀다.
“선자님, 단지를 하나 구해 주십시오. 묻어 드려야겠습니다.”
모화는 두 손이 피범벅이었다. 앞치마 역시 붉게 젖은 채, 두 눈은 몹시 불투명했다.
“월한, 모화야…….”
꺼질 듯한 목소리가 갑작스레 돋아, 모화도 월한도 칼바람을 일으키며 뒤돌아섰다. 약에 취해 자는 듯했는데 소현이 눈을 반쯤 뜨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황자는……? 왜 이리 아린…….”
밑이 빠지는 듯, 소현은 몹시 아팠다.
“내가 잠시 정신을 놓았…… 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 그게…….”
모화가 깁으로 둘둘 싼 것, 짙붉고 질척한 핏덩이가 소현의 눈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아니, 아니야!”
“마마!”
월한이 소현을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몸부림치는 걸, 바투 잡았다.
“쌍태셨습니다. 아직 한 분 남아 계시니, 너무 상심 마십시오.”
모화가 차분하게 하는 말에 소현이 눈을 번쩍 들었다.
“쌍…… 둥이?”
소현이 더듬대자, 월한이 얼른 말을 돌렸다.
“치명적인 장애가 있어, 이리된 것이니 너무 슬퍼 마소서. 아직 남은 아기씨는 건강하다 하옵고. 저분 황자님이셨으니, 남아 계신 분 또한…….”
“아들……?”
“예, 마마.”
소현은 맥이 탁 풀렸다. 그녀는 납빛으로 바랜 얼굴로 모화를 쳐다보았다.
“네가 날 살렸구나.”
쌍태면 둘 다 위험했을 터, 소현은 모화를 다시 봤다. 태의감이나 가한 것, 의녀도 아닌 일개 여해가 해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는 희게 바랜 입술을 달싹댔다.
“폐하께는…….”
“예, 발설치 않겠나이다.”
월한이 머리를 조아렸다.
“…….”
모화는 그 뒤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각림에 부는 바람이 제법 셌다. 청라 휘장이 뒤집혀 누렇게 덧댄 속이 뵈고, 저 위에서는 구름 내몰리는 속도가 몹시 빨랐다. 하늘도 푸름보다 검음이 더 많아 태호위의 갑주가 묵적에 가까웠다.
“폐하, 관천하는 이가 날을 그르게 잡았잖습니까?”
운환이 오늬를 매만지며 씩 웃었다.
“아니, 곧 걷힌다 했다. 좀 기다려 보자.”
가륜 역시 태강궁을 손에 들었다. 각궁이 서느런 바람에 드릉드릉 우는 참, 그래도 그의 손아귀 안에서는 바람 없는 호면(호수의 수면)인 양 순했다.
“그런데 황후 폐하께선 아니 오셨습니까? 뵙기를 몹시 고대하던 참인데요.”
“몸이 좋잖다. 좀 쉬라고 두었지.”
“아이고, 국예에 내려가면 심마니들을 불러야겠습니다. 황후 폐하께 드릴 것을 좀 찾으라…….”
운환이 눈을 가늘이며 걱정을 보탰다. 그러나 그 곁에서 범산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폐하!”
사내들 천지인 사냥터에 어울리지 않게 높다란 소리가 들렸다. 운환이 돌아보니 송은라가 있었다. 벅수 같은 진문은 그 뒤를 따르는 중, 어깨에 멘 활이 몹시 커다랬다.
“또 얼마나 걷으려고…….”
“뉘보단 우월하겠지.”
운환은 얼굴이 굳었는데, 범산은 서늘한 눈매에 웃음이 많았다. 지금은 야들야들 는실난실 송은라지만, 소싯적에는 겉보기와 다르게 손속 무섭기로 악명이 드높았었다. 녹림패 중 가장 컸던 태오문의 외동딸로, 그녀는 아장아장 걸을 무렵부터 활을 가지고 놀았다. 작기론 새에서 크기론 곰까지, 뭐든 쏘는 족족 맞히니 운환 역시 전에 큰코 한번 되게 다친 적이 있었다.
“늦어 죄송합니다.”
진문과 가륜이 스스럼없을 때는 그들 아닌 이들이 없을 때였다. 은라 역시 같아, 벗에 앞서 황제로 대했다. 운환도 범산도 그들만큼 가깝지는 않았다.
“은평이 어머님께선 몇이나 잡으실 겐지?”
운환이 대놓고 물으니, 은라가 상크랗게 웃었다.
“국예후께옵서 한 마리를 잡으면 두 마리를, 두 마리를 잡으면 네 마리를, 곱절씩 생각하시면 되지 싶네요.”
은라답게 딱 부러지는 대답이었다. 말해 놓고 본전도 못 찾았으니, 장사치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다. 그예 운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적어도 살면서 속 좁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으니, 지금 또한 그와 같았다.
“진문, 현합(남의 아내를 공경하여 이르는 말)께선 여전하시군.”
“은라야, 세월이 비켜가거든. 아니 늙을 걸세.”
“됐다. 참으로 작작유여한 팔불출 아니냐?”
“이런 내자면 그리 안 되는 게 이상스럽지.”
진문이 담담히 하는 소리 또한 자랑, 운환이 상그레 웃어 받아쳤다. 어느 결에 바람이 잦았다. 하늘도 이젠 썩 푸르러 깃발이 순하게 날렸다.
“폐하, 울을 둘렀습니다.”
진과가 보고 올리자, 태호위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모두 몰이 준비가 끝난 참, 둘러 입은 갑주마다 불빨강이었다.
“무진은?”
“서편 목으로 갔습니다. 게서 지킨다 했습니다.”
“음.”
가륜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 말에 올랐다. 오늘 잡으려 하는 것은 그 머리마다 돈이 걸린 놈들이었다. 대형 돈점박이 떼로 각림 아래 인가에 출몰하여 사람들을 숱하게 해쳤다. 네 자가 조금 넘는 보통 것들은 잘해야 소나 사슴을 덮치는데, 놈들은 어린애부터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노렸다. 신출귀몰하니 현상금만 높아질 뿐 속수무책이었다.
“진문, 은라도 알고 따른 건가?”
“예, 폐하. 흔한 멧돼지를 잡는 거면 남아서 은약이나 보련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사내들끼리 모이기로 했었다. 가륜은 진문 아래로 은라를 보았다. 그녀는 기세등등하여 눈빛 또한 꼿꼿했다.
“녹림이 그리워 어찌 견뎠나?”
“어마! 폐하께서 그리 으르시더니 잊으신 거예요? 사람 도리가 아니라 하셔 놓고는.”
은라가 입을 빼물고 눈귀를 샐쭉 틀었다.
“그래서 게가 좋았다?”
“아니요, 뭐……. 어서 잡으러 가야지요. 여섯 놈이라면서요.”
“이봐, 은라. 내 곁에 있기로 했잖나! 폐하, 저희 먼저…….”
진문이 부랴사랴 따라잡아도 은라가 내빼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 내외 지나는 대로 수풀이 짙푸르게 갈렸다. 가륜은 잠시 보다 월영에 박차를 가했다. 산 게 죽어 재미로운 마음은 예 없었다. 호중설 이후론 굳혀진 것이 록흔이 흐린 눈으로 한 말에 더 단단해졌다. 그는 고삐를 바투 잡았다.
[폐하, 무리 마셔요. 나름 다 소중한 것들이니…….]각림에 잡으러 가는 게 무언지 알렸으면 걱정이 더 짙었을 터. 가륜은 그 눈빛 떠올리고 그 연함을 되새겼다.
“폐하, 매화가 비친다 합니다.”
서편 숲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녀석들의 흔적이 잡힌 듯, 진과가 그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조심들 해라.”
“예, 폐하.”
가륜이 엄중히 하는 말에 더 이상 운환은 유들거리지 않았다. 범산 역시 눈이 섰다. 매화문 지닌 짐승이 숲을 노니니, 안검(眼瞼) 아래 안검(眼劍)이 맵차게 빛났다.
***
여월루는 매양 같았다. 낮이고 밤이고 살이 치덕거리니 어둡고 탁했다. 진파루는 아까부터 계속 한곳을 보고 있었다. 사내 하나가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그 생김이 해사하고 아름다웠다. 닳고 단 마음에도 설렘은 있어, 그녀는 번히 바라보았다.
“원화야.”
“예, 진파루님.”
“저기…….”
기녀는 제 주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진정 사내답잖으냐?”
“어머, 정말. 굉장한 미남자신걸요.”
“가서 몇 마디라도 나눠 봐야겠다. 저런 분은 처음이라, 가슴이 뛰지 뭐냐?”
진파루는 가슴에 느슨히 매진 매듭을 단정하게 묶었다. 그리고 걷어 올린 소매를 길게 늘어뜨렸다. 옆선이 길게 터진 치마도 일일이 잡아 붙여 흐트러진 매무새를 바로 잡았다.
“술이라도 올릴까요?”
“아니, 옥설을. 찻상을 근사하게 꾸며 가져오렴.”
“예, 그럴게요.”
기녀가 물러가고, 진파루는 구석진 자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햇발이라도 든 양 사내가 앉은 곳이 유달리 훤했다. 바라보매 열여섯 앳된 날만 같았다. 그녀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그 곁에 가 섰다.
“무슨 일입니까?”
예바른 말 하나도 사내다움으로 다가왔다. 울툭불툭 억센 것이 다가 아니니, 진파루에게는 저런 정중함이 더 깊이 닿았다.
“공자님께서 적적하신 듯해서요. 잠시 앉아도 되올지요?”
“저야 괜찮습니다만, 아가씨께 누가 되지는 않을는지요.”
열다섯에 아비에게 물려받아 기루를 꾸려온 지 벌써 칠 년,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것이란 야합에 농탕질이 전부였다. 진파루에게 사내들이란 가지고 노는 것이라 연정일랑 일절 몰랐다. 사내가 부드럽게 묻는 말에 그녀는 저도 몰래 다소곳해졌다.
“아니어요. 저야 영광인걸요.”
진파루가 앉자, 사내가 맑진 눈을 반긋하게 들었다. 곱다시 보얀 얼굴이나 유약해 뵈지는 않았다.
“공자께선 이런 데 드나드실 분이 아닌 듯한데…….”
“그렇습니까?”
상긋 웃는 입매가 준미했다. 얼결에 진파루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곁을 데워주는 사내들, 지금은 알 바 아니었다. 몸은 달았을지언정, 마음은 항시 찼었는데……. 지금은 가슴께가 홧홧했다.
“따로 근심하시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진파루가 슬슬 운을 떼는데 원화가 차를 가지고 왔다. 술내 속이라 옥설의 향이 더욱 맑게 퍼졌다. 다기는 흙이 아닌 옥설(옥가루)로 빚어 찻물이 더욱 드맑게 보였다.
“공자님, 한 잔 받으시고…….”
사내가 옥수로 옥잔을 휘어잡으니 그 운치가 잘 그린 그림보다 훨씬 나았다. 진파루가 애염 가득한 눈으로 좇아도 아랑곳없어, 그는 지닌 눈빛이 옥설보다 더 깨끗했다.
“미천한 제게라도 수심을 털어 내시면 어떨지요?”
“아닙니다. 보드라운 마음에 금만 가지요.”
사내가 바로 말하지 않아, 진파루는 더 속이 탔다. 그녀가 수줍은 양 속눈썹을 내리깔고 몇 번을 조르듯 청한 끝에 그가 내키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 나직이 풀어내는 것이 꼭 시를 읊는 듯해 새치름한 눈귀가 연연히 풀렸다.
“……하여,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겠습니다. 예 있기보다 곁에서 살펴 드려야 옳건만, 가슴이 너무 아파 뵙기가 괴롭습니다.”
“대부인께서 춘추가 어찌 되시는지요?”
“일흔하나 되십니다. 쉰이 넘어, 절 낳으셨지요.”
“저…….”
진파루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가 손짓하매, 사내가 그쪽으로 고개를 갸울었다. 입에서 귓전으로 은밀히 닿는 소리 끝에 사내가 몸을 곧게 세웠다.
“그럴 수도 있습니까?”
“예. 그러니, 찾아가 보셔요. 제 얘길 하면……. 공자님, 여월루의 진파루가 소개해 주었다고 하셔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금방이라도 일어설 기세라, 진파루는 옷소매를 잡았다. 제가 생각해도 놀랄 일이었다.
“공자님, 성함을 알 수 있을는지요?”
“연…… 무영입니다.”
대답 떨어지자마자, 어느 탁자가 되게 깨졌다. 희게 벗어 춤추던 무희도 술에 절어 흥청거리던 사내들도 자지러지게 놀라 하던 것을 모두 멈췄다. 진파루의 눈귀가 파르랗게 찢어진 것도 순간, 커다란 칼이 그녀 앞을 베고 찻주전자를 두 동강 냈다.
“무슨 짓이오!”
여월루의 경호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내, 좀 거슬리는 소리를 들었거든.”
우뚝 일어선 자는 산처럼 컸다. 팔뚝 하나가 장정의 허벅지만 하고, 그 거죽에 올올이 선 핏줄은 등나무 가지만큼 두껍다랬다. 개가죽을 둘러 입고, 사람만치 큰 칼을 들고……. 왁살스레 생긴 얼굴에 술로 번진 홍조가 진했다. 지옥의 옥졸이래도 저것보다는 준수할 터였다.
“내가 ‘무영’이란 말을 들으면 손이 먼저 나가서 말이야.”
“손이 그렇게 크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사내가 일어서자, 야차처럼 생긴 거한이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왔다. 솥뚜껑만치 큰 손이라 한번 휙 날리면 서생 같은 이는 그저 날아갈 듯싶었다. 그러면 안 되겠기에 진파루가 둘 새를 비집고 섰다. 주인의 행동이 의외로워 검 들고 온 자들이 바짝 긴장했다.
“여월루에서 난폭한 행동을 하려거든, 나가 주시죠.”
“하하하! 진파루, 아까부터 보았다만.”
거한이 진파루의 얼굴 바로 앞에서 이죽거렸다.
“요 흰 쥐같이 생긴 놈한테 반한 거로군, 안 그래? 술 한 잔 따르라 할 때는 그런 일은 안 한다 뻐세게 굴더니 말이야.”
“잡칼 들고 다니니 뵈는 게 없으신가?”
“이년이!”
“생김만큼 입이 걸군.”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리가 살천스러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는 이도 있으니, 곧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더구나 저 탐족의 야차는 이 바닥에서는 악명이 제법 높은 바, 괜한 곳에 있다가 비명에 갈 수도 있었다.
차락.
사내가 빈 잔에 옥설을 따랐다. 저만은 다른 곳에 있는 듯 손가짐이 한아해 수많은 시선이 그 끝을 따라다녔다. 차를 식히려는 듯 단아한 입술이 동그랗게 말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잔 끝에서 허연 김이 돋았다.
“너 무슨 잔재주……!”
거한의 입이 딱 얼었다. 사내가 찻잔 위에 어린 것을 훅 불었을 때였다. 눈 뒤집고 오들오들 떠는 양이 갑작스럽게 얼음물에라도 잠긴 듯싶었다.
“아무래도 몸피가 크니.”
사내가 빙긋 웃더니 다관을 들었다. 그리고 잔도 받치지 않은 채로 기울였다. 옥설이 흐르면서 희게 바래, 그 입김이 새는 대로 얼음알갱이가 됐다. 그리고 거한을 향해 날파랍게 날아 그 주위를 효한하게 에워쌌다.
“이…….”
덕장에 널린 동태인 양, 거한이 빳빳하게 굳었다. 눈썹에 머리칼에 언 이슬이 조롱조롱 맺혔다.
다각.
옥빛 다관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탁자 위에 놓였다. 거한만 언 것은 아닌 모양, 진파루 또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바탕 칼바람이 부려나 생각했던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내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 때, 문이 커다랗게 열리고 햇살이 희부옇게 들이쳤다.
“사형!”
“왔나?”
제일 어린 이가 사형이라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자는 뭡니까?”
“별거 아니다. 소란케 하기에.”
“저희가 좀 늦었습니다.”
“아니다, 내가 일찍 왔지.”
진파루는 사내를 번히 보았다. 저런 용맹함, 저런 빛접음……. 가슴이 마구 뛰었다.
“아가씨, 옥설 잘 마셨습니다. 이자는 양지에 한 시진 정도 두면 사지가 풀릴 겁니다. 그만, 가자.”
경호인들이 거한을 들고 나갔다. 그리고 사내 또한 돌아섰다. 옆으로 뵈는 수려한 모습에 진파루는 가슴이 무너졌다.
“공자님, 또 오시어요.”
“기회가 되면요. 그럼.”
사내가 사제들과 떠다는 걸, 진파루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았다. 처음으로 여월루가 버거웠다. 돈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
높다란 나무 위, 아 자로 갈린 가지 새로 놈이 먹다 둔 것이 걸려 있었다. 머리통으로 보건대 사내, 그것도 장정인 듯했다. 덮쳐잡은 걸 여기까지 끌고 와 걸어둔 모양, 살점 남은 것을 보니 반드시 되돌아올 터였다. 표범이라는 놈 속성이 본디 그러했다.
“잡으러 왔다 잡혔군.”
가륜이 건조하게 하는 말에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편을 훑다 발견한 것으로 사체 주위에 엽수(사냥꾼)임을 말해 주는 활이며 무기들이 제법 많았었다.
“먹이가 이리 넘쳐나는데, 어찌 인명을 해칠까요?”
운환의 말처럼 각림에는 순한 동물들이 꽤 많았다. 숲을 가로질러 오는 동안에도 토끼며 사슴 따위를 숱하게 보았고, 둥지에 깃든 날짐승도 심심찮게 마주쳤다.
“유희겠지.”
가륜이 칼빛으로 보아, 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놈이면 사람 수보다 하나가 적은데, 어쩌지요?”
벌겋게 벌어진 시체를 본 후로 은라는 예전 녹림에 있을 때와 같았다. 여야차라 불렸던 것처럼 눈이 매서웠다.
“못 잡은 이가 한판 거하게 내면 될 터. 아니 그렇습니까, 폐하?”
운환이 넉살좋게 받아쳤다.
“다 좋다만, 엽취가 업인 자들도 당했으니 각별히 조심하도록.”
“존명!”
“폐하께옵서도 조심하셔요.”
“폐하, 후에 저 아래서 뵙겠습니다.”
가륜과 범산이, 운환과 진문 내외가, 무진과 진과는 전후를 따라, 각각 갈렸다. 태호위들은 근접으로 집금위들은 원거리에서 제 할 바를 챙기니 각림은 곳곳이 삼엄했다.
부우우우!
동편에서 각적이 울었다. 무리 중 하나가 나타난 듯, 저마다 말에 박차를 가했다.
두두두두!
삭삭!
지축이 울려 수목이 다르르 떨었다. 검은 매화무늬가 찬란한 놈을 찾아, 가륜은 월영을 좨쳤다. 그 곁에서 범산이 준마를 몰아 달렸다. 모두 날파랍고 효한해 수풀 새에 숨은 새들이 되게 놀라 도망쳤다.
“폐하, 황후 폐하께선 새에 대해 아십니까?”
바위가 뾰족뾰족 들어찬 계간에 이르러, 범산이 무겁게 다물었던 입을 뗐다. 단둘이 되기를 기다렸던 모양, 무진은 서너 걸음 뒤처져 있었다. 가륜은 눈을 조프렸다. 록흔에게 직접 묻지 않았으나, 연관이 큰 것을 알았다.
“비원 말인가?”
“예. 이미 알고 계신 듯합니다만.”
“어찌 그리 생각하나?”
“전에 우연하게 객잔에서 뵈었을 때, 새와 새장에 대해서 말씀 나눈 적이 있습니다. 중화원에서 잔 받잡을 때 폐하께서 하신 말씀과 몹시 비듬했지요.”
“글쎄, 그 사람은 거친 일이 많았던지라 그리 보드랍게 굴었을지는 모르겠군.”
가륜이 실긋이 웃자, 범산은 시선이 맵차졌다. 호분중랑장이었을 때는 직접 묻는 게 가했으나, 이제는 황후였다. 신분의 존귀를 떠나 벗이 소중히 여기는 안해이니 더 어려웠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넌지시 물어는 보겠다.”
“예, 폐하.”
범산이 대답하자마자, 계곡에 드리워진 그늘 하나가 움직였다. 표표히 머리를 쳐들고 앉아 이쪽을 보는데 그 눈에 겁은 없고 잔독함만이 배여 마치 올 테면 와 봐라 하는 듯했다.
“폐하, 지금껏 본 돈점박이 중에 가장 큰 것 같습니다.”
무진은 녹안을 지릅뜨고 목소리를 낮췄다. 지나온 세월 동안 범이고 곰이고 두루 잡은 바, 이번 놈은 예사롭지 않았다. 표범의 수컷이 보통 몸피가 넉 자에 예순 근이 조금 넘는 것에 비해, 물 건너에 앉은 놈은 일 간(여섯 자와 같음)이 훨씬 넘고, 이백 근은 너끈히 될 듯싶었다. 그 곁에서 태강궁이 드륵드륵 울었다. 찰나에 가륜이 쏜 살이 계류(산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를 향해 곧게 나아갔다.
차아앙!
물이 크게 울었다.
투두두두!
물방울 튄 자국마다 나무는 헐벗었다.
크르르, 캬오, 캬오옥!
놈이 앙칼지게 포효했다. 그리고 단숨에 물을 뛰어 건넜다. 지상은 물론 수상에서도 날렵히 움직이며 나무 위의 새까지 유연히 잡아채는 놈답게, 그 움직임이 흡사 뇌편과도 같았다. 그러나 셋 중 그 뉘도 동요하지 않았다. 각자의 활을 매겨, 돈점박이의 급소를 노려 겨눌 뿐. 시위가 동시에 지르르 울었다.
유곽은 유곽답지 않았다. 그래서 꼬리가 채이지 않았던 듯. 록흔은 부신 햇살에 눈을 가늘였다. 와가는 아담하여 여러 집인 양 벌여 섰으나, 실은 한 울 안에 있었다. 담이 이리저리 갈렸어도 조붓하게나마 통로가 뚫려 있어, 그 길로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붉은 옷 입은 이들은 고용된 이, 나머지는 제각각 옷차림이 달랐다.
“폐하, 이리 나오셔도 되는지요? 저희는 걱정이 되어서…….”
유장이 머뭇대며 걱정을 보탰다.
“이미 나와 놓고, 불안한가?”
“황제 폐하께서 진노하시는 것도 그렇지만, 접…… 폐하 보체라도 상하실까 봐…….”
창해가 또 눈이 벌게서 몇 마디 우물우물 주워 삼켰다.
“전렵 가셨으니 사흘간은 무리 없다. 문건을 안 봤으면 모르되, 그리고 따로 부탁 많은 게 있기도 하고. 너희들, 내가 부담스러운가?”
“아닙니다. 이리 불러 주셔서 기쁩니다.”
하균이 드레 있게 대답하자, 다섯 역시 눈이 말랑해졌다. 여월루에서 보자는 전언 받고 얼마나 우둔거렸는지 이분은 모르실 터. 어느 정도는 잃었거니 생각한 분이라 두 뺨이 홧홧해질 지경이었다.
“그럼, 봄을 사러 가볼까? 모두, 척은 제대로 해라.”
“종명.”
록흔이 먼저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부접들도 뒤이어 땅으로 내려섰다.
‘……!’
몇 걸음 앞서 걷다 록흔은 급하게 입을 막았다. 신물 넘어오듯 몹시 찬 물이 목구멍 안에서 꿀렁꿀렁 맴을 돌았다. 그 한기에 손끝까지 저려왔다. 그녀는 부러 삼키려 입귀에 힘을 가득 실었다. 엄동에 언 물도 이리 차갑지는 않을 터. 그 물이 내려가니 식도가 서느렇게 오그라지는 듯했다.
“폐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사강이 눈치 빠르게 물었다. 손가락 새로 푸릇하게 뵈는 뺨이 심상찮아, 은안이 무디게 번쩍였다.
“아니, 예서는.”
록흔은 손을 치우고 어깨를 바로 폈다. 심호흡 몇 번 끝에 파르랗던 입술에 다시 붉음이 돌아왔다.
“그 호칭은 거두자. 너희들 말로 언제든지 접두라 했잖았나?”
“예, 접두. 아무튼, 무리 마십시오.”
“아, 그래. 쉬엄쉬엄 하지.”
록흔이 그리 말하고 볼우물을 잡으며 웃자, 사강은 고개만 내저었다. 그가 아는 한 상관은 결코 대강 하실 분이 아니었으므로. 기리단이 앞서서 유곽의 문을 두드렸다. 그저 여염집이라 홍등도 없고, 문을 지키는 거한들도 없었다.
“뉘십니까?”
문 너머에서 얌전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림집인 듯 그럴듯하게 잘도 꾸며 놓았다.
“바깥어른께선 계십니까?”
모두가 진파루가 일러준 그대로였다.
“어디서 오셨는지요?”
“춘강 너머에서 왔습니다.”
“함자가 어찌 되십니까?”
“연무영입니다. 달 같은 분이 부인께 안부 여쭙더군요.”
대답 떨어지자마자, 나무대문이 비긋이 열렸다. 그리고 음전하게 생긴 아낙이 다소곳이 얼굴을 내밀었다.
“들어오시지요.”
록흔을 위시해 부접들은 문 하나를 넘었다. 위에서 보던 것과 다를 바는 없어 안 역시 평범했다. 아낙이 말없이 앞서가고 그들은 쫓아가니 좁다란 문을 서너 번은 지났다. 드디어 본채 앞, 또 다른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어찌 오셨습니까?”
살집 좋은 사내였다. 기름진 얼굴에는 표정이 별로 없었다. 그는 속이 뵐 듯 말 듯한 눈으로 록흔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봄을 구할 수 있는지요?”
“뉘를 위해 쓰시려는지요?”
물음에 물음으로 떨어졌다.
“내가 필요합니다.”
“손께선 아직 봄이신데요.”
“그럴 리가요.”
록흔이 빙긋 웃자,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아니 그런지요?’ 하고 되묻는 빛이었다.
“이래봬도 겉 나이와 속 나이가 많이 차이 납니다.”
사내가 두 겹으로 잡힌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참을 갸웃대다 조그만 입술을 가살스럽게 벌렸다.
“비용이 높은 건 알고 오셨지요?”
“돈 걱정은 마시오.”
“예, 대인. 같이 오신 분들은……?”
“내 벗들입니다. 봄 즐기는 건, 모두 같지요.”
“알아 모시겠습니다.”
사내가 머리 높이로 달린 금줄을 잡아당겼다. 맑은 소리 깨지고 없던 사람이 일곱 나타났다.
“대인, 이쪽으로.”
록흔 바로 곁에서 소리가 돋았다. 그녀는 고개를 까닥이고 따라 나섰다. 부접들도 각각 갈려 가는 길이 전부 달랐다.
황갈색 몸피에 화려하게 돋은 매화들이 점점이 번졌다. 놈이 이쪽으로 나대고 저쪽으로 나대니 눈이 어지러운 참, 운환은 활 겨누는 방향을 예서제로 급하게 틀었다. 셋이 동시에 발호해 태호위 몇이 크게 다친 터라 사위는 몹시 소요했다.
“만만찮군.”
은라가 성을 내며 말했다. 근수도 많이 나가고 몸피도 커다래 일단 깔리면 살 방도가 없을 듯싶었다.
“은라, 너무 나서지 마.”
“진문, 내가 알아서 해요.”
살이 놈에게 맞긴 맞았으되, 타격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염통께를 분명 맞췄는데 나자빠지기는커녕 더욱 날뛰었다. 한 놈은 거의 고슴도치가 되었는데도 나무에 오를 만큼 높이 뛰어, 이리 훌떡 저리 훌떡 몹시 날렵했다.
“은라, 살살해, 살살!”
“은평이한테 부끄러운 어미가 되란 말이에욧!”
“아이고, 저놈 때문에 금실에 금 가겠군.”
“국예후께선 입으로 활을 쏘시나 보지요?”
돈점박이 한 놈이 은라를 향해 입을 그악스레 찢었다. 그리고 발톱을 빼 내밀어 허공을 크게 발겼다. 금방이라도 덤빌 듯 도사린 양이 간담이 서늘하게 표독스러웠다.
“고양이 주제에 감히 어딜!”
은라가 눈귀를 파르랗게 찢었다. 그리고 오늬를 한번 가다듬었다.
그릉그릉.
약 올리는 것처럼 놈이 목을 울렸다. 하나가 그러자 나머지 두 마리도 따라 했다.
카오오!
카아아앙!
카옷!
세 마리가 동시에 뛰어올랐다. 뉘 염통을 딸 듯, 한껏 돋은 송곳니가 뾰족했다.
징!
지잉!
지이잉!
활 세 대가 발시됐다.
두우우우우…….
숲 너머에서 소뿔이 울었다. 검은 매화가 분분이 날려,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지상은 여염집, 지하는 매음굴이었다. 두더지래도 이렇게 굴을 잘 파지는 못했을 터. 록흔이 짐작하기에 아래로 서너 층은 되는 듯했다. 붉은 문마다 걸린 것은 여인의 이름, 그 아래 적힌 나이들을 보니 다 열다섯 아래였다. 닫힌 공간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간간이 신음 소리가 들리나, 유곽치고는 이상스러울 정도였다.
잃었다 돌아온 딸이 노파였다 함. 등에 있는 어릴 적 흉터를 보고 어미가 겨우 알아봄. 채화의 나이, 열넷. 수한성 도위의 보고에 의하면 일흔은 되어 보였다 함.
하균이 종이쪽에 짧게 적어 둔 것이었다. 록흔은 눈을 잔뜩 일그러뜨리다 앞서가는 이를 불렀다. 그러자 두 손 맞잡고 가던 이가 해죽 웃으며 돌아섰다.
“대인, 무슨 일이시온지……?”
“여긴 꽃밖에 없소?”
“예에?”
“우리 안사람도 봄을 얻고 싶어 하기에 하는 말이지.”
“아, 그 말씀이면.”
사내가 가즈랍게 웃었다.
“꽃도 있고 나비도 있습지요. 모두 야들야들 애어린 것들이니 봄을 빨기에는 좋습니다.”
“사내애는 몇이나 있나?”
“예, 대인. 무한정 많습니다. 소모되는 것이니, 공급이 빨리빨리 잘되는 참입니다.”
“재주도 좋군.”
록흔이 상긋 웃으며 하는 말에 사내가 고개를 거듭 끄덕였다.
“내게 올 건 어떤가?”
“저희 어르신께서 특별하게 몇 번 물 빠지지 않은 것으로 올리라 하셨습니다.”
“흠, 처음은 아니로군.”
“대인, 그것은…….”
록흔이 다소 불쾌하게 말하자, 사내가 바로 굽실거렸다. 다음에는 단단히 봉오리 맺힌 것으로 대드리련다 하기에, 그녀는 역한 속을 이 자그시 물어 참았다. 그러는 새, 그들은 계단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어둡고 침침하나 상량하기만 했다. 붉은 주단이 깔린 복도를 지나, 어느 문 앞에서 그들은 멈춰 섰다. 소선이라는 이름이 눈에 박힐 듯 가까웠다.
“대인, 필요한 건 천장에 달린 끈을 당겨 주시면 됩니다.”
“알았으니, 거치적거리지나 마라.”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내가 복도 끝만치 멀어지자, 록흔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닿은 건 부유스름한 빛, 어느 곳으로 통하는지 모르나 분명 햇발의 한 조각이었다. 그녀는 곳곳을 둘러보았다. 화려하게 조각된 나무 침상 위로 포단이 두텁게 깔렸고, 붉은 꽃잎이 여기저기 가득 흩뿌려졌다. 두동베개 또한 높다래 마치 초야를 위한 것 같았다.
달각.
록흔은 문부터 잠갔다. 걸쇠 소리가 작으나 섬뜩하게 차, 그에 구석진 자리에 있던 것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흐윽…….”
몹시 잠겨 우는 소리였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록흔은 온유하게 말하며 한 걸음 가깝게 다가섰다.
“흐으윽…….”
울음소리는 잦지 않았다.
“예서 꺼내 줄 터니, 그만 울어요.”
“……?”
잗다랗게 떨던 어깨가 멈추더니, 조그만 얼굴이 쳐들렸다. 눈은 움푹 패고, 거듭 울었는지 눈물 자국이 몹시 짙었다. 분명 열셋이라 하였건만, 서른은 넘어 보였다. 소녀는 그 어미라 해도 좋을 만큼 노숙했다.
“소선이 본명인가요?”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홍…… 소홍이에요. 정말 저를 구하러…….”
“예. 그러니까 그만 울고 얘기를 좀 했으면 싶은데. 소홍, 이리 와서 앉아요.”
록흔이 다습게 말을 건네자, 소녀의 눈에 물기가 더 많아졌다.
“저는 주루, 은호에서…….”
소녀는 머뭇머뭇 말은 하나, 바닥에서 일어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록흔이 손을 내밀어도 어깨만 흠칫 떨었다. 모진 일을 겪어 사람이 무서운 듯했다.
“괜찮아요.”
록흔이 거듭 하는 말에 소녀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부은 눈귀에 대롱대롱 달렸던 것이 주룩 흘러내렸다.
“은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래요?”
다독다독 보듬는 말투라,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미 품을 떠난 후 처음으로 느끼는 다사함이었다. 록흔이 어깨를 감싸 안아 주자, 소녀가 입술을 가만 벌렸다.
“동무 선화하고 함께, 어머니 심부름을 가다가…….”
소녀가 거기까지 말하고 입술을 물었다. 록흔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흑흑 흐느껴 울더니 그예 오열을 터뜨렸다.
“선화는, 선화는…….”
록흔은 조붓한 어깨를 다독이고 또 다독였다. 엉엉 우는 게 안쓰러우나 지금으로써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