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40
40화 늦은 저녁
안으로 들어가자 높은 천장과 정교한 장식들이 보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경건함과 기품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바닥에 깔려있는 융단을 따라 걸었다.
길 끝에 제단이 보였다. 저 제단 위에 내가 찾으러 온 물건이 있었다.
[대인! 같이 가잣!]통통한 눈눈이가 나를 따라왔다. 뒤를 돌아보자, 다른 눈눈이들은 전부 눈눈몬 곁에 남아 있었다.
“쟤들은?”
[무섭다고 안 온닷!]“······.”
그러고 보면 아까 혼자서 싸움에 끼어든 것도 그렇고, 이 통통한 녀석은 눈눈이 치고는 꽤 용감하다.
통통한 눈눈이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봤다.
[여긴 처음 보는 방이닷! 신기하닷!]나는 방 안의 장식을 만져보려는 통통한 눈눈이에게 경고했다.
“신기하다고 아무거나 만지지 마라. 보통 이런데서 마지막 함정이 발동하거든.”
[히익! 알았닷!]겁먹은 통통한 눈눈이가 내 등 뒤에 바짝 붙었다. 용감해봤자 눈눈이는 결국 눈눈이었다.
제단까지 가는 길은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는 금세 그 끝에 도착했고, 제단 위에 놓인 물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알처럼 생긴 타원형의 유리병이 제단 위 허공에 떠 있었다. 크기는 타조알만 했고, 그 안에는 황금빛 액체가 출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병 아래, 제단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잔이 놓여 있었다.
내 등에 매달려 어깨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민 통통한 눈눈이가 소리쳤다.
[이게 뭐냣! 세상엣!]“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
나는 손을 뻗어 황금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잡았다. 유리병을 제단 위에 내려놓자, 병 밑이 타원형인데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안착했다.
유리병의 위쪽 부분을 돌리자 부드럽게 분리되면서 열렸다. 한 순간에 달콤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헉···!]“일단 한잔 마셔볼까.”
나는 유리병을 기울여 제단 위에 놓여 있던 은잔에 따랐다. 잔 안에 황금빛 술이 가득 차오르자, 그 향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허억!]통통한 눈눈이는 이제 눈알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느긋하게 즐기며 잔을 들어 술을 넘겼다.
꿀꺽꿀꺽.
몸 안에 달콤하면서도 깊은 맛이 퍼져나갔다. 동시에 눈눈몬과 싸우느라 생긴 자잘한 상처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술의 정식 명칭은
음주문화가 존재하는 일곱 차원의 전문가들이 인정한 최고의 술이자, 최상급 포션 뺨치는 치유능력을 가진 보물이었다.
무엇보다 이 술의 장점은 계속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르르륵.
유리병 안의 황금빛 술이 파도처럼 출렁이면서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즉, 방금 나는 무한히 생성되는 최상급 포션병을 손에 넣은 것이다.
포션 같은 건 개발되지도 않은 시대에서 말이다.
씨익. 내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게다가 포션이랑 다르게 맛도 끝내주지. 이거 한잔에 얼마나 팔면 되려나···.”
[대인! 나도, 나도 조금만 주랏!]통통한 눈눈이가 내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 표정이 무척 간절해 보였다.
“맛만 봐라.”
나는 잔 안에 남아있던 술 몇 방울을 통통한 눈눈이의 입안에 흘려 넣어 주었다.
톡톡 떨어진 술 몇 방울이 통통한 눈눈이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흐이이이이잇!]통통한 눈눈이가 눈을 감고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몸에서 새파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앗-!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갑자기 얘가 왜 이래?”
하고 생각해보니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너 물의 요정이었지.”
은 사람에게는 최상급 술이자 포션이지만, 이 녀석에겐 효과가 좀 다른 모양이다.
-파아아아앗!
[흐이이이잇!]통통한 눈눈이가 신기한 변화를 겪는 동안, 나는 제단 아래에서 금속 케이스를 찾아내 술병과 술잔을 잘 챙겨 넣었다.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물건이라 그런지 더 뿌듯했다.
“일단 이걸로 문제 하나는 해결됐고.”
첫 번째 재앙 을 디펜스 게임이라고 가정해보자.
한날 동시에 열리는 수많은 게이트. 그곳에서 무수히 쏟아져 나올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 빠른 시간 안에 몬스터를 토벌할 화력
* 도시의 피해를 최소화할 대책
* 초인들의 체력 회복과 부상자 관리
* 코어게이트 파괴를 담당할 특수팀
* 기타 등등
은 그 중 ‘부상자 관리와 체력’ 회복에 쓰일 물건이었다.
물론 이 작은 술병 하나로는 그 많은 부상자를 감당할 수 없겠지만, 다행히 물에 희석해서도 쓸 수 있었다.
맛도 효과는 줄어들지만 물과 100:1로만 섞어도 하급 포션 정도의 효과는 낼 수 있다.
빠르게 상처를 치료하고, 체력을 회복하고, 초인의 경우엔 마나회복을 도울 수 있다.
“···앞으로 미래가 엄청나게 바뀌겠지.”
원래 포션이 등장하는 것은 지구와 가이아 대륙이 연결된 이후, 가이아 대륙의 물건들이 지구로 넘어오면서 부터다.
그 전까지 초인들은 다치면 현대 의학에 의존하거나, 정말 극소수의 개성을 가진 초인들을 찾아가야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조만간 WH(white house) 상표를 단 포션이 판매될 테니까.
이제 초인들은 훨씬 더 적극적으로 사냥에 임할 거고, 사회는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재앙까지 무난히 막아낸다면 문명이 발전하는 속도도 더 빨라지겠지.
전설의 무기나 갑옷도 아닌, 포션 하나가 만들어올 변화였다.
물론 포션의 특허권은 내 거고 말이다.
[흐이이이잇!]내가 앞으로 계획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통통한 눈눈이의 몸에서는 계속 파란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아아아아앗!
한 순간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잠시 후 통통한 눈눈이가 정신을 차렸다.
생명의 술을 통해 변화를 겪은 녀석의 몸은···.
절반 사이즈로 작아져 있었다.
[기분 최고닷-!]통통한 눈눈이가 짧은 팔로 기지개를 켜더니, 천장까지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게로 날아왔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보통 영약 같은 거 먹으면 커져야 되는 거 아냐?”
신기하게도 팔다리가 따로따로 줄어든 게 아니라, 정확히 2분의 1사이즈의 미니어처처럼 작아져 있었다. 따라서 통통한 몸도 그대로였다.
그 통통한 몸으로, 눈눈이는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대인! 고맙닷! 네 덕분에 나 엄청 빨라졌닷!]통통한 눈눈이의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과장을 좀 보태면, 얼마 전에 던전에서 만났던 거울마귀에 맞먹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어지러우니까 그만 좀 돌아.”
[알았닷!]휘익!
급정거까지 자유자재였다. 이 정도면 내가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앞으로 몬스터에게 잡아먹힐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아니지. 이런 속도면 몬스터가 문제가 아니라···.
써먹을 곳이 상당히 많겠는데?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통통한 눈눈이를 불렀다.
“우리 친구 맞지?”
통통한 눈눈이가 짧은 팔다리를 두 배 속도로 파닥거리며 대답했다.
[당연하닷! 대인은 내 친구닷!]“친구는 서로 도와주고 그러는 거 맞지?”
[당연하닷! 대인이 우릴 도와줬으니깐! 우리도 돕는닷!]나는 씩 웃으며 통통한 눈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이 우정 영원히 변치 말자.”
[알았닷!!]나는 작아진 통통한 눈눈이와 함께 왔던 길을 돌아갔다.
우리가 밖으로 나오자, 눈눈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통통한 눈눈이를 바라봤다.
[[작아졌닷-!!]]통통한 눈눈이는 신이 나서 저 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눈눈이가 나를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했다.
나는 상자에서 생명의 술을 꺼내며 말했다.
“친구들. 우정주라고 들어봤어?”
잠시 후, 나는 눈눈이 터보엔진을 달고 호수 위로 올라갔다.
*
*
*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느낀 것은 생각보다 밝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별로 안 지난 줄 알았다.
[헉! 대인! 위를 봐랏!]통통한 눈눈이의 말에 위를 올려보자, 내 생각이 완전히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밤하늘의 호수 위에 태양이 떠 있었다.
아니, 그것은 태양처럼 보이는 거대한 불꽃이었다.
저런 걸 누가 만들었는지는 뻔했다.
“이 꼬맹이가 자다가 오줌쌀라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호수 밖으로 나왔다. 내 뒤로 눈눈이들이 눈눈몬을 들고 나왔다.
“다들 어디 간 거야?”
일행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니 아무도 없었다. 짐 같은 게 그대로 있는 걸 보니 돌아간 건 아닌 것 같은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외쳤다.
“누구 없어요? 다들 어디 갔어요?”
잠시 후 호수 한편에서 어마어마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임팀-장―!!”
괴성과 함께 호수 저편에서 백창수가 나타났다. 그가 호수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로지르며 달려왔다.
···저거 설마 등평도수는 아니겠지?
“임팀장-!!”
피할 새도 없었다. 벼락 같이 달려든 백창수가 내 목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건가! 저녁 먹을 때까지 돌아온다더니! 자네는 저녁을 새벽 2시에 먹나-!!”
나는 숨이 막혀서 말했다.
“컥! 대표님. 이것 좀 놓고···.”
백창수의 외침을 들었는지, 잠시 후 다른 사람들도 한 명씩 나타났다.
“형님!” “팀장님!”
시루떡과 왕구호가 함께 헐레벌떡 달려왔고,
“팀장니임-!”
백영희가 꼬맹이와 함께 날아왔다.
잠깐. 날아온다고?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의 발아래에는 꼬맹이가 만든 실드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봐도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꼬맹이는 실드를 이용해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여튼 저 재능충···.
“팀장니임!”
백영희가 달려와서 날 껴안고-이번엔 백창수한테 잡혀 있어서 못 피했다-, 왕구호가 걱정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물에 빠지신 줄 알고···.”
어느새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좀 늦었다고 왜 이렇게들 유난떠나 싶기도 했는데, 그 분위기에 휩쓸려 모두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늦어서 미안.”
그렇다고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좀 낯간지럽달까.
그 와중에 이상하게 꼬맹이만 계속 말이 없었다.
그러다 겨우 한 마디를 했다.
“비켜.”
모두가 꼬맹이 눈치를 보며 옆으로 비켜섰다.
꼬맹이는 뒤로 열 걸음정도 물러나더니, 나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왔다.
“짜식.”
나는 두 팔을 벌렸다. 꼬맹이가 하는 짓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너도 내 걱정 많이 했구나?
···내가 꼬맹이를 너무 얕봤다.
꼬맹이의 전력을 다한 박치기가 내 배에 작렬했다.
퍼억!
하나도 아프진 않았지만,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꼬맹이를 내려 봤다.
“이게 뭔···.”
꼬맹이의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조그마한 두 주먹으로 내 가슴과 배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어디 갔었어! 밥 먹을 시간인데! 안 오고! 배고픈데 안 오니까 걱정했잖아! 바보 아저씨야!”
“···배고프던지 걱정하던지 둘 중 하나만 해라.”
나는 한숨을 쉬고 꼬맹이의 두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녀석의 눈을 바라봤다.
“너 혹시 울었냐?”
“아니! 안 울었어!”
한 번 속아주기로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꼬맹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밥은 먹었어?”
“배 안고파!”
“거짓말하고 있네.”
나는 시루떡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루떡. 좀 늦었지만 밥 먹자. 나 때문에 다들 안 먹은 거 같은데.”
“예 형님!”
시루떡이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뒤편의 수풀을 바라보며 노스탤 어로 말했다.
“친구들. 이제 나와.”
잠시 후, 백창수가 달려올 때부터 수풀 뒤에 숨어있던 눈눈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풀 사이로 누워있는 눈눈몬도 살짝 보였다.
“뭐지?”
“몬스터인가!”
나는 놀라는 사람들을-특히 주먹을 움켜쥐는 백창수를-진정시키며 설명했다.
“설명하면 좀 긴데, 제 친구들이에요.”
그 긴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눈눈이들은 우리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모두 친구닷-!!]]하여튼 붙임성은 기가 막히게 좋은 녀석들이라니까.
잠시 후,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다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미리 사온 고기와 채소, 내가 호수 바닥에서부터 건져온 신선한 해산물, 그리고 크라켄 다리구이였다.
하늘에 떠 있던 가짜 태양을 없애버리자, 하늘을 수놓은 별무리와 재앙을 상징하는 무지개가 보였다.
“히야. 둘이 어우러지니까 경치 죽이네.”
잠시 그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울···.”
꼬맹이는 저녁을 얼마 먹지도 않고 내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그 와중에 손으로 내 소매를 꼭 붙들었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꼬맹이의 손을 내 옷에서 떼어내려고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우웅···. 가지 마···.”
그때마다 꼬맹이는 잠결에 칭얼대며 내 소매를 더 꽉 붙잡았다.
“어휴.”
화장실은 나중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