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habilitating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17
외전 : 과로
“후우⋯.”
거친 숨을 내뱉으며 운동 기구를 내려놓았다. 일과가 제대로 시작하기 전,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하기 직전의 운동.
공작이 된 이후로는 워낙 바빴지만 이를 멈출 수는 없었다.
“아빠, 아즈벨가로 가고 싶어요!”
“그래, 오늘 가자.”
그래도 어느샌가 깨어난 샤엘과 루엘이 내게 다가온다면, 온몸의 피로는 깨끗이 사라진다.
“아, 엄마랑 아빠가 결혼한 곳도 가 보고 시퍼요!”
“성국에서 했으니 지금 당장 가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시무룩해진 루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안겼다. 어쩔 수 없었다. 성국을 가기에는 내가 너무나도 바쁜 시기였으니까.
그래도 아즈벨가만큼은 갈 수 있을 터였다.
“가 보고 싶은데⋯⋯.”
“그럼 일단 이야기로 대신해 줄게.”
“이야기요?”
루엘을 만족시킬 이야기는 많았다. 여신상의 앞에서 다시 고백을 했던 일이나, 커다란 나무에 소원을 붙였던 일.
새록새록 돋아나는 그 기억들을 루엘에게 전해 주었다.
루엘의 활기 가득한 대답 덕에 만족스러운 대화를 서로 나눌 수 있었다.
“나무에 붙인 소원에는 뭐가 적혀 있었어요?”
“함께 행복한 가족을 꾸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소원이었지.”
루엘이 반짝이는 시선을 보내며 감탄을 흘렸다. 그러자니 무언가가 떠올랐다.
나는 샤엘과 비슷한 내용의 소원을 한 장 붙였었고, 샤엘은 두 장의 소원을 붙였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장의 메모지에는 도대체 무슨 소원이 있었단 말인가.
그 해답이 궁금했다. 나는 강한 주장을 담아 샤엘을 보았고, 이윽고 샤엘은 이를 알아차려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답을 곧바로 들을 수는 없었다.
“너무 궁금합니다.”
“안 돼요.”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루엘 역시 호기심을 가득 키운 채로 샤엘에게 물었다.
“알려 주세요!”
대답은 말없는 샤엘의 거절이었다. 샤엘의 일에 있어서는 눈치 빠른 루엘이, 눈동자에 빛을 띠고는 울먹이며 말했다.
“구, 궁금한데⋯⋯.”
울먹이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나라면 곧바로 함락당한 채로 루엘에게 모든 것을 바쳤을 테다. 한데 샤엘의 성격은 드셌다.
루엘의 애교조차도 샤엘을 쓰러뜨리지는 못한 것이었다.
* * *
가족끼리 행복한 대화를 끝마치고 나면 저택을 나설 준비를 시작한다.
샤엘과 루엘에게 약간의 디저트를 주고 거대한 바슬렛가의 마차에 함께 오른다.
이제부터는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오늘의 첫 일과는 루엘이 원하던 아즈벨가의 방문.
머지않아 목적지가 보였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눈에 그려질 정도로 익숙한 아즈벨가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저택에 들어서기도 전에, 마중을 나온 제스펜 공작이 활짝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반겨 주고 있었다.
제스펜 공작은 루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할부지!”
“루엘, 못 본 새에 많이 컸구나.”
“일주일 전에 봤는데요?”
“그, 그렇군⋯. 하지만 내 세상 속에서는 몇 년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느끼한 발언을 내보이던 제스펜 공작이 루엘을 끌어안았다.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를 않았다.
동시에, 그는 대부분의 마력을 루엘에게 보호 마법진을 걸어주는 데에 사용했다.
제스펜 공작은 그토록이나 루엘을 아껴 주었다. 루엘은 항상 미소와 귀여움을 통해 이를 보답하고는 했다.
“루엘.”
에넬라 부인이 루엘을 나지막이 불렀다. 루엘은 제스펜 공작의 포옹을 냅다 나오고는 에넬라 부인께 안겼다.
“루, 루엘?”
제스펜 공작이 힘껏 간절함을 담아 루엘을 불러 보았음에도, 루엘은 이미 에넬라 부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큭⋯⋯.”
잠시 그가 들고 있던 것을 살펴 보면, 두터운 육아 서적이 위치해 있었다. 이전에 읽던 것과는 다른 책이었다.
그런 노력이 있었음에도 에넬라 부인께 루엘의 사랑을 빼앗겨 버린 제스펜 공작을 위해 작은 묵념을 올릴 뿐이었다.
“루, 루엘. 이게 뭔지 아느냐?”
책을 넣던 제스펜 공작이 뇌물을 꺼냈다. 그의 손에는 루엘이 좋아할 그림 도구들이 가득 담긴 통이 있었다.
“와, 크레파스가 들었어요!”
“그래, 선물이니 받도록 해라.”
제스펜 공작은 루엘의 행복한 표정을 기대하는 듯했다.
루엘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미소를 지어주기는 했으나, 제스펜 공작의 기대에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루엘이 이미 크레파스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루엘은 두 공작가들의 금지옥엽이었으니까.
제스펜 공작이 침울하던 사이에 루엘은 크레파스를 이리저리 끄적일 뿐이었다.
“돼써요!”
루엘의 귀여워진 말투가 의미하는 것은 루엘의 상기된 마음뿐이었다.
차오르는 기대감을 느끼며 나 역시도 루엘이 그린 도화지를 보았다.
“어, 음⋯ 완전 잘 그렸네.”
“네, 아빠!”
솔직히 말해서 잘 그리지는 못했다. 그림에 있어서는 샤엘의 재능을 물려받은 듯했다.
사람의 형태가 몇몇 보이기는 하는데,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샤엘을 닮아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구나. 특히 이 할아비가 잘 그려진 것 같아 기분이 좋군.”
“그건 엄마인데⋯⋯.”
제스펜 공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무룩하게 그림을 쳐다보고 있는 루엘. 이건 제스펜 공작에게 있어 중대사였다.
제스펜 공작이 서둘러 그림의 다른 쪽을 가리켰다.
“실수로 귀여운 딸에게 이끌려 버리고 말았구나. 그래, 이번에는 확실⋯⋯.”
하지만 루엘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힝, 이라며 귀여운 말을 내뱉고는 샤엘에게 안길 뿐이었다.
루엘의 이쁜 그림을 착각하다니.
샤엘은 제스펜 공작을 따끔하게 혼내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당연히 어머니를 그린 거잖아요.”
루엘이 더 시무룩해진 채로 샤엘의 품을 벗어났다. 그런 루엘이 이번에 도착한 곳은 나였다.
“아빠였는데⋯⋯.”
아무래도, 샤엘마저도 루엘의 그림을 올바르게 맞추지 못 한 것 같았다.
‘우리 가족, 좀 특이하네⋯⋯.’
그 뒤에는 내 디저트로 루엘의 기분을 달랬다. 샤엘과 함께 소풍을 나서기도 하고, 루엘에게 디저트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물론, 루엘에게 디저트를 가르쳐 줄 때에는 무척 조심했다.
내 비법만큼은 기필코 루엘에게 넘길 수 없었다.
그야, 루엘이 나 이상으로 디저트를 잘하게 되었다가는 샤엘의 디저트 조절이 힘들어질 테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하늘에 쭉 고정되어 있을 것만 같던 태양이 어느샌가 저물기 시작한다.
루엘은 눈을 끔뻑이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샤엘은 그런 루엘을 쓰다듬으며 껴안고 있었다.
“그럼, 잠시 가문으로 온 서신을 확인하러 가 보겠습니다.”
“적당히 하다가 오세요.”
뻐근한 몸을 쭉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조금 걸어가면 보이는 바슬렛가의 집무실은 웅장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아니, 집무실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했다. 책상은 귀해 보였고, 책장은 거대했으며, 의자는 고고해 보였다.
허나 내 신세만큼은 초라했다.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에 쌓여 있는 가문으로 온 서신들. 오늘 안에 끝내야만 할 영지의 일거리였다.
‘원래라면 지금 시간대에 루엘과 먹을 디저트를 미리 만들고 잠을 자고 있을 텐데.’
최근 부쩍 바빠진 바슬렛가의 상황 때문에 이 모양이었다. 중요한 것들이라서 누구한테 떠넘길 수도 없고.
그래도 루엘과의 시간을 줄일 수는 없었다. 아직 어린 루엘이 커서도 기억할 행복한 추억들을 만들어 주고 싶었으니까.
샤엘과 루엘을 머릿속에 그리며 일을 시작했다.
* * *
눈이 저절로 뜨였다. 몸에 익을 정도로 반복된 행동 덕분이었다.
‘서신을 보다가 잠에 빠진 건가.’
물론 일은 어느 정도 다 끝났기에 상관은 없었다.
그러니 이제 운동을 시작해야만 한다.
‘루엘과 놀려면 바로 시작해야겠지?’
몸이 피로에 사무쳐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한계점에 닿을 때가 오긴 했다. 매일 새벽에는 일을 했고, 아침에는 운동을 했으니까.
심지어 루엘이 깨어있을 시간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래도⋯⋯.’
몰려드는 피로는 쪽잠으로 풀었다. 빙의 전과는 달리 초인적인 몸 덕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니 괜찮을 터다.
이미 그 일과는 나날이 반복된 탓에 익숙했다. 힘들었지만 버틸 수 있다. 정신적인 행복이 피로보다도 더 컸으니까.
나는 마음을 다잡고 또다시 몸에 익은 것들을 시작했다. 운동을 했고, 그다음은 루엘과 샤엘을 볼 준비를 마쳤다.
“루엘이 드디어 치유 마법을⋯⋯.”
“아빠, 이거 보세요!”
오늘은 유독 몸이 피로했다.
‘하지만.’
루엘과 샤엘을 보기만 해도 힘들다는 생각은 싸악 사라지는 듯했다.
힘들어 느껴지던 화기가 모두 활기로 변해 버린 것만 같은 기분.
아래를 향하고 있던 입꼬리는 점차 위를 향했고, 어깨를 평소대로 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점차 쌓이는 육체의 피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에란?”
“아, 아빠?”
눈꺼풀이 무거웠고,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샤엘과 루엘에게 향하려던 고개는 이윽고 떨구어졌다.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대답할 수도 없었다.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으니까.
애써 감지 않으려던 눈꺼풀이 드디어 눈동자를 완벽히 가려 버렸다.
몰려드는 피로에 몸을 맡기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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