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34
새벽그룹 회장 이윤희의 장남이자, 새벽엔터테인먼트의 주인 이병인.
그가 일으킨 테러는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었다.
사람들은 광화문 한복판으로 나가 새벽그룹의 직계들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고, 선녀정부가 들어선 이후 두 번째 사형선고를 받은 이병인에게 가장 잔혹한 죽음을 내려야 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모았다.
새벽그룹 브랜드 이미지에 대한 가치가 추락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누구도 전국적으로 일어난 불매운동을 막을 수 없었다.
새벽그룹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업체에서 피해가 속출했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영세업자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선녀정부에서는 새벽그룹의 직계들을 소환하는 한편, 새벽그룹 계열사에 대해 세무조사를 착수했다.
한 사람이 일으킨 몬스터 테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흘리게 했으며,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의 모가지를 자르는 일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사실 이 사태가 어느 선에서 마무리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한민국은 플레이어들과 손을 잡은, 재계서열 10위 내에 들어선 그룹의 경제력에 지탱하는 나라였다.
그룹이 하나라도 휘청거리는 순간, 대한민국은 이 일어났던 직후의 시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윗선에서는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 테러사건을 조망하고,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선에서 마무리 지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다르다.
실질적으로 몬스터의 위협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과연 이병인을 죽이는 선에서 잠잠해질 수 있을까.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움직여야 해.
그러니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모두 가정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내놓도록.”
신라 클랜로드 김유진은 다리를 바꿔 꼬며 말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 했다.
지금도 새벽그룹과 연관된 사업체는, 심지어 새벽이라는 이름만 들어가 있어도 무차별적인 피해를 받는 일이 속출했다.
한 번 터진 여론은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기세로 들끓고 있었다.
새벽그룹의 후원을 받는 신라클랜도 민중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다.
오히려 더했다.
춘천시 새벽호텔에 상주한 플레이어들이 신라클랜 소속이었으니까.
여론은 신라클랜의 늑장대처와 테러로 발생한 인명피해에 대한 규탄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각지에서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서브로드들을 불러들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하나 더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볼펜 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서브로드들을 둘러보았다.
“저는 신라클랜 역시 세무조사를 피해갈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전에 클랜 내에 세무조사에 대처하기 위한 매뉴얼을 준비하고, 드러낼 자료와 드러내지 않을 자료를 명확히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무조사는 완벽합니다. 뒤탈이 되는 부분은 없습니다.”
김유진의 오른팔, 서정훈이 침묵 속에서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답한 이는 클랜의 재정을 담당하는 여성이었다. 안경을 고쳐 올린 그녀가 떳떳한 자세로 어깨를 폈다.
고개를 끄덕인 김유진이 다른 서브로드들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려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 그녀는 회의실에 소리가 울릴 정도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10월. 나는 10월이 될 때까지 견디면 폭풍은 지나갈 거라 생각하네.”
서브로드들이 심기가 불편한 티를 드러낸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입을 연 이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인이었다.
을 겪은 산증인이자, 신라클랜에서 연장자에 해당하는 노인.
성인호. 대한민국에 살아있는 신화라 불리는 문준, 남궁성운의 전우로 알려진 그가 굵직한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 나라가 그래. 여느 나라야 안 그러겠냐마는. 몬스터가 나타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그거 하나는 바뀌지 않아.
사람들은 냄비야. 언제나 빠르게 달아오르고, 빠르게 식지.
이대로 버티고만 있으면, 사람들은 언젠가 일상으로 돌아갈 걸세.
물론 나는 테러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비하할 생각도, 잘못된 현실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 그래봤자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네.
다만 이거 하나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화제는 언젠가 또 다른 화제에 묻힐 거라는 걸.”
그가 지팡이로 바닥을 짚었다.
노인은 알고 있었다. 그가 살아온 세월이 말해주었다.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외치던 사람들이나, 흐름에 떠밀려 선동당한 사람들이나 결국 큰 변화를 남기지 못하고 또 다른 흐름에 떠밀려 사라진 것을.
사람들은 이 일어났을 때에도 무정부 상태가 된 시국을 비난하고, 파탄이 난 경제상황을 한탄했다.
그럼에도 잘못된 세계는 바뀌지 않았다.
목소리는 하나로 모이면 나라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되지만, 바람 따라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힘에 불과하다.
한 번 멸망한 세계에서 기득권이 된 정치가와 기업가, 마지막으로 플레이어는 갈대와 같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면서 다독이고 구슬렸다.
자신의 입
지를 안정시키고자 했던 그들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사람들의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 결과, 당시 사람들이 잘못되었노라고 부르짖었던 세계는 겉만 번지르르하게 바뀐 채 본질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라클랜 역시 을 기회로 기득권이 된 부류 중 하나였다.
그래서 성인호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것은 잘못되었노라고 부르짖었던 그조차 결국 그 기회를 이용해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이니까.
“…저, 그런데…. 왜 하필 10월인 겁니까?”
시류를 한탄하는 노인을 향해 손을 든 이는 그 동안 눈치를 보고 있던 이선호 서브로드였다.
김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저거는 눈치를 보지 않는 점은 좋은데, 머리는 영 꽝이야.
저걸 진짜 내쳐야 하나 원.
눈치를 보는 이들보다는 나았다.
다만 흐름을 읽는 눈썰미는 길렀으면 좋겠다.
김유진은 눈짓으로 서정훈을 가리켰다.
눈이 마주친 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10월에 의정부 탈환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가을 선녀님은 올해 안으로 의정부를 탈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새벽그룹이 국내 사정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정부를 탈환해야 한다는 여론을 몇 년째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선녀정부 측에서도 바라고 있을지 모르지.”
성인호가 말을 보탰다.
이번 테러는 새벽그룹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재계가 현재 숨을 죽이고 사태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는 이유가 그거다.
새벽그룹에 붙은 불은 정재계에도 옮겨 붙을 수 있었다.
그러니 불이 다른 곳에 옮겨 붙기 전에, 최대한 빨리 불을 꺼트려야 했다.
어쩌면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의정부 탈환전에 대한 입장을 근시일 내에 발표할지 몰랐다.
“문제는 신라클랜도 지금 정부에 밉보인 상황이라는 말이지.”
김유정이 볼펜을 뒤로 던졌다.
볼펜이 떨어진 소리를 무시한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의정부 탈환전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면서도, 눈치를 보며 이권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어물쩍 참가할 생각은 없어. 이번 테러로 실추된 신용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전력을 다해야 할 거야.”
그녀가 체내 마나를 발현했다.
손가락 끝에서 스멀스멀 올라온 마나가 테이블에 앉은 이들을 둘러쌌다.
“그러니─.”
그녀가 손바닥을 뒤집었다.
폭발적으로 솟구친 마나에 살기가 섞여 서브로드들을 압박했다.
“─배신자를 전장에 들일 생각은 없어.”
서브로드들을 둘러싼 마나.
어떤 이를 휘감은 마나는 푸른빛을 띄우고, 어떤 이를 휘감은 마나는 붉은색으로 변했다.
붉은색으로 변한 마나에 휩싸인 서브로드들이 눈을 부릅떴다.
도망쳐야 해!
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옆에서 날아든 칼날이 그들의 목을 베어냈다.
푸른빛의 마나에 휩싸인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서정훈과 성인호도 있었다.
“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지, 지금 살인이라뇨! 아무리 클랜로드라도, 이래도 되는 겁니까!”
칼날을 피해간 플레이어가 한 명 있었다.
클랜 내에서 손꼽히는 가디언이었다.
이제는 배신자에 불과했지만.
“내가 사람 보는 눈을 잘못 봤어. 설마 너까지 길성준 그 자식과 이어져 있었을 줄이야.”
김유진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녀는 처럼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배신자는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우리가 당신들의 움직임을 모를 줄 알았습니까?”
배신자에게 칼을 겨눈 이는 서정훈이었다.
성인호 역시 바로 옆에서 지팡이에서 빼든 검으로 가디언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아닙니다. 이건…, 오해입니다! 모두 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설명할 기회를─.”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설명할 여지를 남겨뒀다고 생각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김유진이 푸른 마나에 감싸인 서브로드들에게 물었다.
그들 모두 살기를 발하고 있었다.
특히 클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딜러이자, 배신자와 숱한 전선을 넘나들었던 서브로드는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희가 길성준과 결탁한 이유는 알고 싶지도 않아.
모두 내 잘못이겠지. 그리고 내 잘못은, 내가 끝내야 하는 거고.”
자리에서 일어난 김유진.
구두소리를 울리며 걸어간 그녀가 배신자를 향해 손을 펼쳐들었다.
“안….”
그녀가 손을 쥐어서는 안 된다.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배신자가 입을 열었지만,
“잘 가라.”
그녀가 손을 쥔 것이 더 빨랐다.
배신자를 감쌌던 붉은 마나가 남자의 목을 죄어, 몸통에서 분리시켰다.
“서정훈.”
“네, 클랜로드.” “여기서 죽은 놈들은 적색던전에서 사망한 걸로 처리하고.”
“네, 알겠습니다.” “서브로드들은 길성준의 손길이 닿은 클랜원들을 모조리 잡아들인 뒤, 경질을 가리지 말고 죽여라.”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길성준과 용병들의 관계를 파악하도록.
도 그렇고, 도 그렇고…. 지하시장에서 이름난 용병들이 녀석을 따르는 행동을 보인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래, 이상했다.
창해 클랜로드 길성준과 네임드 용병들과의 관계가 신경 쓰였다.
창해클랜이 이병인과 용병들을 잇는 중개를 맡은 것 같으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나 변덕이 심한 가 그의 명령대로 움직인 정황이 꺼림칙했다.
창해클랜에게, 길성준에게 무언가 있다.
과 를 부릴 수 있었던 무언가가.
녀석들의 약점을, 잡은 건가.
지금 당장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길성준의 과거를 들춰보아도, 그들과의 접점을 유추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그가 정체를 숨기고 음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약점을 어떻게 잡았는가.
머릿속에서 여러 가정이 맴도는 가운데, 그녀가 불현듯 떠올린 가정은 길성준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이었다.
창해 클랜로드 길성준에게는 마음을 읽는 힘이 있다.
플레이어의 세계에서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 라는 기프트를 통해 미래를 읽을 수 있다는 마당이니.
현재까지 길성준의 기프트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프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도록.”
☆
“어째서! 왜!”
집무실은 난장판이었다.
창해 클랜로드 길성준은 씩씩거리며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모조리 집어던졌다.
어디에서부터 틀렸는지 모르겠다.
이병인을 이용해, 새벽그룹의 후원을 등에 업는 계획은 완벽했다.
그런데 실패했다.
실패한 이유도 모른 채.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사전에 꼬리를 잡힐 여지를 처리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병인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을 수도 있었다.
“후우….”
창해클랜은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클랜이었다.
강산이 변하도록 바뀌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제니스클랜을 넘어서고 싶었다.
이 나라에서 불세출의 권력을 쥐고 싶었다.
그런데 상황은 반대였다.
해가 갈수록 창해클랜에 입단하는 플레이어들의 실력은 떨어지는 추세인 데다, 신라클랜이 이도진을 영입하면서 빠른 추세로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번 테러로 신라클랜의 클랜등급이 하락하기는 하겠지만, 잠깐에 지나지 않을 일일 뿐이다.
새로운 피를, 또 다른 자금줄을 만들지 않고서는 2위의 자리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니─,
“─의정부 탈환전이 기대되는군.”
신라클랜이 잠시나마 약해진 틈을 이용해, 의정부 탈환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두 얻어야 했다.
시리우스그룹의 후원을 받는 창해클랜에게는 제니스클랜을 제외한 클랜들에게 강한 발언권을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책상에 두 손을 짚은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거렸다.
☆
새벽그룹은 새벽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기타 자회사를 매각하기로 했다.
이제 새벽그룹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새벽그룹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호텔과 백화점, 그리고 새벽그룹이 지금 이 자리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원동력이 되어준 식품유통부문이었다.
하지만 여론이 잠잠해지더라도 호텔과 백화점 부문은 당분간 실적악화를 면하지 못하리라.
그때까지는 식품유통부문에서 자금을 모아야 했다.
“후우.”
동생으로부터 식품유통부문에 대한 조언을 얻은 이정인은 한숨을 쉬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어머니는 이 일을 책임지기 위해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그룹에 대한 지분을 일부 정부에 넘겨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오늘부로 새벽그룹의 2대회장이 되었다.
이제 새벽그룹이 아니지만.
새벽그룹의 브랜드 이미지는 쉬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 가리고 아웅인 셈에 지나지 않았지만, 차라리 이름을 바꾸는 게 나았다.
“루미너스(Luminous).”
어둠 속에서 빛난다는 의미였다.
상징은 밤에 피는 달맞이꽃.
그는 아무리 힘들고 모진 앞날이 펼쳐질지라도, 역경에 굴하지 않고 나아가겠다는 의미에서 그룹의 이름을 개명할 생각이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동생이 도와준다고 하니 망정이지, 혼자였더라면 주구장창 노가다만 해댔으리라.
“…도움을 준 사람도 있었고, 이 기회를 이용하려던 사람도 있었지.”
소파에 등을 기댄 이정인은 그룹의 지분과 사업부문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정재계의 인사들은 작금의 사태를 꼴좋다고 비웃으며, 새벽그룹을 통째로 삼킬 계획을 품기까지 했다.
시리우스그룹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주지 않았다면, 새벽그룹은 그대로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시리우스그룹에 진 빚은 언젠가 갚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하마터면 내가 죽었을지도 몰랐겠어.”
이정인은 지금 생각하더라도 간담이 서늘했다.
이병인에 의한 몬스터 테러였다는 점이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여론의 몰매를 맞았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라온 사람들과 가족들의 명예와 안위를 지키기 위해, 나아가 그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을지도 몰랐다.
그 뒤는 상상이 갔다.
이병인이 2대회장이 되어,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을 포섭하거나 내치거나 둘 중 하나였으리라.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 없었다.
형의 성격이라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러다 문득 그때 일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자신은 오연정의 기프트에 홀려, 함께 방에 들어갔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에는 침대 위에 자신밖에 없었고, 모든 사태가 끝나 있었다.
그날 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그때 방을 나간 것일까.
생각이 난 김에 그는 선녀정부에 제출했던 감시카메라 영상을 살폈다.
잡음만이 들리는 영상이었다.
몬스터가 들이닥친 충격으로 그날 녹화되었던 영상은 태반이 날아가 있었다.
그러다 테러가 일어나기 바로 전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최상층의 영상을 찾아냈다.
화면이 흐릿했다. 복도 끝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영상이었다.
자신과 오연정이 방에 들어가는 과정이 어렴풋하게나마나 비췄다.
잠시 후, 웬 소년 한 명이 걸어왔다.
흐릿해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모으더라도, 아이의 인상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이는 문 앞에서 망설이다, 어쩐 일인지 잠겨있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영상은 나오지 않았다. 잡음만 나올 뿐이었다.
“흠….”
입가에 손을 댄 이정인은 아이가 나온 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살펴보았다.
“이 아이는 대체 누구지?”
리라이프 플레이어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