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617
그때 내가 본 것은 뭐였을까.
문화제가 폐막하고.
영입 전쟁이 벌어졌다.
그동안 아카데미의 눈치를 보면서 학생들에게 스리슬쩍 접근하기만 한 업계 관계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당연 그들은 은하와 친구들에게도 영입 제안을 하기도 했다.
“잠깐이었지만 아주 짧게, 미래가 보였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은하는 그들의 영입 제안을 거의 무시했다.
그에게 영입을 제안할 대형 클랜은 이미 영입 전쟁이 벌어지기 이전에 제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최근 그의 관심은 계속 강현철과 겨룬 대련에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래를 본 건가?
이날도 그랬다.
주말을 맞아 집으로 돌아간 날.
은하는 한서현을 만나 집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생각은 다른 데 빠져 있었다.
미래를 본 게 맞는 것 같아.
5초도 안 됐던 것 같지만….
그날, 그는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강현철에게 대항하던 중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자신이 바라보는 시야를 기점으로 기존 세계와 또 다른 세계가 나뉘며 미래를 보게 된 경험.
기프트의 효과였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가슴으로는 기프트의 효과인 것을 자각했었다.
은 단순히 신체능력만을 상승시키는 능력이 아니었던 건가.
미래를 보게 할 줄이야…. 그러면 왜 지금까지 기프트를 발동하더라도 미래를 보지 못했던 거지?
이전에는 기프트를 발동하더라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경험.
처음으로 기프트의 숨겨진 효과를 체험하게 된 은하는 그날부로 연신 미래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신서영의 도움을 받아서는 가까스로 기프트를 발동해도 은하는 미래를 볼 수가 없었다.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 같은데….
대체 그 조건이 뭐지?
이래서 알려지지도 않은 기프트를 다루는 것은 참 어려운 것이다.
직접 하나하나 시행착오를 거치며 검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은하는 최근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더는 못 참겠는지 한서현이 입을 열기를─.
“─네가 만나자고 불러서 왔는데 나한테는 그리 관심이 없나 보구나. 나하고 있는 게 그리 재미가 없으면 이것만 먹고 헤어지자.”
“……!”
피식 냉소를 지으며.
그녀가 은하를 흘겨보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은하는 재빨리 테이블 위에 올라온 한서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왜.”
“먹고 나서 이제 뭐 할지 생각하던 중이었지. 너하고 있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봐줄게.”
은하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고.
다행히 그녀의 심기를 가라앉히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내 그가 말을 꺼냈다.
“─아는 카페 봐둔 데가 있으니까 거기 가서 이야기하자. 클랜 창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
클랜을 창설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은하는 결심을 하고 나서도 이렇다 할 만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 수업에서 배우기는 했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복잡한걸….
파티를 만들고 나서 근처에 위치한 마나관리기구 지부에 신고만 하고 하루 만에 끝나는 방식이 아니었다.
클랜 창설은 마나관리기구 본부의 허가를 받고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때, 클랜의 창설자는 자기자본과 클랜 서브로드와 행정관, 고문 등등 적임자를 둔 상태여야 했으며.
또한 거점으로 활동하게 될 지역에 클랜회관을 세울 수가 있는 토지를 마련해야 했다.
더욱 복잡하게는 관할구청에 미리 토지를 어느 목적으로 사용할 건지 허가까지 받아야 했다.
이외에도 처리해야만 하는 업무가 워낙에 많았다.
“대략 내년 3월부터 활동할 거면, 적어도 올해가 지나기 전에는 모두 끝내놔야겠네.”
“…그냥 제출해야 할 것들만 내면 끝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일을 처리할 시간은 고려하지 않는 거니.”
“그렇다고 몇 개월이나….”
“그 사람들이 네 일만 하지 않고, 다른 일들도 처리하면서 해야 하니 그만큼 시간이 걸리는 거지. 지금이 12월 초니까, 적어도 한 달 안에는 모두 끝내야 하겠네.”
“…시리우스그룹의 힘으로 어떻게 절차나 절차에 걸리는 시간을 조금 간소하게 할 수 없을까?”
“아버지한테 부탁하면 1달 아니면 2주 안으로 처리하게 할 수 있겠지. 그래도 혹시 모를 경우도 있으니까 한 달 안으로 끝내놔야지.”
“끙….”
점심을 먹고 카페로 이동한 은하는 서현에게 클랜을 창설하는데 필요한 서류를 보여주었다.
대부분 공란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서류를 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네.”
“…….”
이내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에게 사형선고 같은 말을 내리는 한서현.
은하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녀 왈─.
“─왜 죽상을 하고 그러니? 일은 네가 아니라 내가 다 할 텐데.”
“부탁할게. 정말 고마워.”
한서현이 다리를 꼬았다.
그녀가 구두 앞코로 은하의 무릎을 톡톡 건드렸다.
은하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런데 있잖니.”
“응, 왜?”
“어느 정도 자본이 있어야 클랜을 창설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이건 뭐 그렇다고 치고…, 클랜회관을 세우는데 필요한 토지랑 건물은 어떻게 할 생각이니?”
“…….”
“생각 안 해둔 건 아니지?”
“당연히 생각하기는 했지.”
대단히 현실적인 질문.
그녀의 질문을 받은 은하는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눈알을 굴렸다.
“내가 그동안 모아둔 돈도 있고.”
“얼마나?”
은하는 그동안 야금야금 챙겨놓은 마석으로 돈을 모아두고 있었다.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었다.
다만 클랜의 초기 자본으로 삼는데 문제는 없었다.
애초 초기 자본은 100만원 이상만 보유하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클랜회관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부탁을 해서 좀 빌려달라 할까 하고.”
“불효자식이네.”
“…….”
아버지가 돈이 꽤나 많다.
은하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 걸 어색하게 여기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대끔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굳이 네 돈이나 아버님의 돈으로 클랜을 창설해야 할 필요가 있니?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도 되는 거고, 재계그룹의 후원을 받아도 되는 거 아니니?”
“그것도 생각하기는 했는데….”
한서현의 지적은 옳았다.
은하는 끙 소리를 내며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돈을 빌려준 쪽에 목줄을 내주게 되는 일이잖아.”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지. 지분을 매입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대출해주는 거라면, 아니면 사전에 조건을 걸고 후원을 받으면 해결되는 일 아니니.”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인 거잖아. 처음에는 간섭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중에라도 간섭할 수가 있는 거고. 남의 돈으로 내 클랜을 만든다는 게 영 불편하기도 해서.”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클랜.
은하는 어디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는 클랜을 만들기로 다짐했다.
그렇기에 빚을 지고 클랜을 만든다 생각을 하니 어딘가 마음이 켕겼다.
한서현은 그의 마음을 알겠다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보통 자기 돈을 모두 써서 사업을 하는 경우는 없어.”
“그건 나도 아는데….”
“그리고 클랜만 만들고 끝나는 건 아니잖니. 클랜을 마케팅하는 것도 신경을 써야 할 테고, 포션을 싸게 살 수 있기 위해 기업체랑 계약을 맺어야 할 테고, 디바이스나 아티펙트를 만들 때 전속 공방을 알아둬야 하는 거 아니니?”
“…….”
한서현이 구체적으로 꼬집었다.
은하는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는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클랜을 만드는 것이 일이 아니라, 클랜을 만든 뒤도 일이었다.
“그건 행정관이 잘….”
“클랜에 돈이 많지도 않을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끙….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아빠한테 돈 좀 더 달라고 할까? 아니면 도준이한테 뺏어올까?” “그렇다고 돈이 많아봤자 뭐하니. 포션이나 디바이스나 아티펙트들을 어디 제 값에 주고 살 거니? 싸게 살 수 있도록 유도해야지. 이왕이면 클랜원들 복지혜택까지 제공해주면 더 좋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래서 나는 클랜을 창설한다면 그룹의 후원을 받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해.”
“그룹의 후원을 받는다라….”
은하는 생각에 잠겼다.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재계그룹의 후원을 받게 된다면, 굳이 실적을 쌓지 않더라도 클랜이 할 수 있는 선택폭이 늘어나리라.
문제는─.
─기회만 되면 돈을 빌미로 목줄을 채우려 하는 놈들이니까 그렇지.
잘못했다가는 후원을 받는 그룹의 개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룹과 클랜이 공생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기는 했다.
서로가 양보를 한다면야.
하지만 은하는 양보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때였다.
“아쉽지만 재계 10위 이내 그룹의 후원을 받기는 힘들 거야. 제각기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클랜이 있어서 선녀정부의 눈에 드는 수도 있고, 만약 받게 된다고 해도 기존 클랜과 동등한 대우는 받지 못할 거야.”
“그것도 그러네. 대부분의 그룹은 이미 전속 클랜이 있으니….”
“그런데 신기하게도─.”
때마침 정말 신기하다는 듯이.
아니, 이때를 기다려왔다는 듯이.
한서현이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연인지 시리우스그룹은 아직 전폭적인 후원을 하는 클랜이 없다 할 수 있는 상태거든.” “…….”
“예전에는 창해클랜이 있었다지만, 너도 알다시피 창해클랜은 의정부 탈환전을 이후로 해체됐잖니.”
한서현이 포크로 케이크를 자른다.
그녀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생각에 빠진 은하의 입에 케이크를 넣어주었다.
은하는 그녀가 준 케이크를 먹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서현의 말대로, 시리우스그룹은 현재 전속 클랜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재계 2위인 시리우스그룹의 눈에 창해클랜을 대신할, 다른 그룹에게 후원을 받지 않는 S급 클랜이 계속 부재했기 때문이다.
“전속 클랜이 없던 것은 지금까지 시리우스그룹의 고질적인 문제가 된 부분이야. 그래서 아버지는 KK나 동해그룹처럼 그룹 차원에서 클랜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보셨어.” “…….”
“그런데 성과는 그리 좋지 않아서, 결국 A급 클랜들에게 후원하면서 질보다 양을 늘리는 전략을 꾀하고 있던 거지.”
“…….”
“그런데도 시리우스가 재계 1위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전속 클랜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거든. 당연히 다른 그룹들에게 밀리지 않을 만한, S급의 클랜이.”
참, 운이 좋다고.
은하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한서현을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이리도 절묘하게.
마침 시리우스그룹에 전속 클랜이 없다는 말인가.
“나는 네가 만들 클랜이 S급으로 승격할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그렇게 확신해.” “…….”
“내가 시리우스그룹의 사람이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맞지만, 너하고 시리우스그룹이랑 정말 안성맞춤인 파트너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니?”
시리우스그룹의 후원을 받는다.
은하는 한서현의 제안에 수긍했다.
재계그룹의 후원을 받게 된다면, 시리우스그룹만한 재계그룹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문제는 여전했다.
“시리우스그룹의 후원을 받는 건 좋아. 그런데 너희 아버지랑 누나가 간섭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잖아.”
“일어나지 않을 걱정을 하는구나. 너희 아버님이 있는데 과연 그룹이 간섭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내 클랜의 지분에 시리우스그룹의 지분이 상당수 들어가게 되는데도 너희 그룹이 간섭을 안 할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시리우스그룹의 후원을 받게 되면 클랜 지분의 절반가량이 그룹에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됐다가는 은하가 손에 쥔 권한은 반쪽짜리가 될 뿐이었다.
그가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핸드백에서 펜과 종이를 꺼냈다.
“은하 네가 걱정하는 이유는 결국 클랜의 지분구조가 너와 시리우스, 둘로 나뉘게 되기 때문이야. 그러니 네 입장에서는 지금이야 좋을지라도 언젠가 네 입지를 위협할 수 있는 시리우스그룹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느껴지는 거겠지.”
“네 말이 맞아. 후원을 받으면서도 마음 놓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외부의 적들을 상대하는 한편으로 내부의 적까지 신경 써야 하는 만큼 너한테는 피곤한 일이겠지.”
은하는 한서현이 원을 그린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절반은 자신의 이름이, 절반에는 시리우스그룹의 이름이 써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가 아래에 하나 더 원을 그렸다.
“그렇다면 판을 더 크게 벌여서, 다른 그룹들을 끌어들이면 어떠니?”
“뭐?”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어, 너한테 간섭할 기회를 없애는 거지. 네가 피곤하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저희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도록.”
“다른 그룹들의 후원까지 받는데, 그게 전속 클랜 맞아?”
“이미 전속 클랜이 있는 그룹들이 전속 클랜을 더 두지 못하는 거지, 아예 후원하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전속 클랜은 시리우스그룹이 다른 그룹들보다도 더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고.”
“음….”
“다른 그룹들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네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두 개야. 하나는 후원을 받는 그룹과 연관된 기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원을 잘게 나누었다.
조각 하나에는 노은하를 적고는 40%라는 숫자를 적었다.
그리고 다른 조각에는 시리우스와 30%라는 숫자를 적었다.
뒤이어 그녀는 세 개의 조각에다 각각 앨리스, 루미너스, 영원을 적고 각기 10%라는 숫자를 적었다.
“─다른 그룹들이 시리우스그룹을 견제할 수 있게 된다는 거지. 아마 시리우스그룹은 네가 반드시 자기들 후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흠….”
“그러니 다른 그룹들을 끌어들여, 우리가 딱히 시리우스그룹의 후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꼭 빚을 지는 사람이 을의 위치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니? 어찌 보면 네가 만들 클랜에 투자를 하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맞는 말이지.”
“그것도 고수익이 보장된 투자지. 오히려 시리우스그룹이 제발 너한테 돈을 줄 테니까 지분을 사게 해달라 말해야 하는 상황인 거야.”
“음….”
“너와 시리우스그룹이 있을 때는 단순 채무관계로 전락할지 모르지만 다른 그룹들을 끌어들이는 순간부터 서로 투자관계가 되는 거지.”
어려운 이야기였다.
은하는 한서현의 언변에 휘말려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 누나가 시리우스그룹이 아닌 내가 만들 클랜에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네.
그만큼 시리우스그룹 사람이 아닌 행정관으로서 자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 건가.
은하는 한서현이 자신이 만들게 될 클랜에 애착을 가지는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의심을 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의 설명을 모두 들은 그가 손가락으로 원을 가리켰다.
“그런데 있잖아.”
“말해보렴.”
“지분을 이렇게 쪼개는 것은 좋아. 근데 이러다 다른 그룹들이 뭉쳐서 시리우스 편에 가세하면 어쩌려고? 그랬다가는 입은 네 개로 늘어나고, 나는 60%의 지분을 상대하게 되지 않을까?” “좋은 질문이야.”
“…뭐지?”
“왜?”
“아니, 어째 느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착각이란다.”
“착각이 아닌 것 같은데….”
“착각이야.”
마치 걸려들었다는 듯이.
한서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은하는 그녀의 미소를 보고는 마치 자신이 그녀에게 걸려든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기시감을 느꼈다.
뭐지?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던 기분인데….
어째 묘하다.
은하는 찜찜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에게 답했다.
“아주 간단해.”
한서현이 다음에 말하기를─.
“─나랑 결혼하는 거야.”
“……!!”
한서현은 키득거렸고.
노은하는 뜨악했다.
☆
“─내가 아버지의 뒤를 잇는 일은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시리우스그룹의 지분이 없는 것은 아니거든.”
한서현의 충격적인 해결법.
그녀는 이내 뜨악해하는 은하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시리우스그룹이 그가 만들 클랜에 간섭을 하려 한다면.
그렇다면 한서현은 자신이 보유한 그룹의 지분으로 시리우스그룹을 흔들어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아주 적은 지분이라고 해도, 필시 시리우스그룹을 성가시게 만들 만큼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녀가 첨언했다.
“그래서 결혼을 하자고?”
“내가 시리우스그룹의 사람이라면,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할 거 아니니? 그러니 아예 부부가 된다면 너도 날 믿을 수 있을 테지. 나아가 부부가 된다면 네가 시리우스그룹의 사람이 돼서, 시리우스의 경영에도 간섭할 수 있게 된다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결혼을 하자고 할 수 있어?”
“결혼은 어느 계약보다도 확실한 계약이고 거래야. 너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나랑 결혼하는 거고, 나 역시 너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 결혼을 제의하는 것뿐인데?”
“원하는 거? 그게 뭔데?”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
그럼에도 그는 선뜻 그녀의 제의에 응할 수가 없었다.
마치 한서현이 자신의 몸을 담보로 일을 진행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서현 왈─.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지만 시리우스그룹의 사람으로 있는 한, 나한테 주어진 자유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
“그래서 나하고 결혼해서 제약에서 벗어나겠다고? 그게 무슨 말이 되는 소리야? 결혼은 속박 아니야?”
“결혼은 또 하나의 속박이지. 근데 너는 날 좋아하지 않는 거 아니니?”
“…….”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럼 우리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으로 결혼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게 속박일까?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없을 테고, 서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약혼의 연장선일 뿐이야. 뭘 그리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그러니?”
이게 어디 약혼의 연장선인가.
은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매력적인 거래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 누나하고 약혼을 할 때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기는 했어도, 날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니야?
그러다 내가 마음이라도 생기면, 아니야, 그게 아니라….
결혼을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니냐 이 말인 거지.
혼란의 도가니였다.
은하는 그녀가 저리도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생각이 나서 주저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닌데….”
은하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그가 기어들어가듯 말했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럼 된 거 아니니? 거절해야 할 명분도 없는 거잖니.”
“그건 그런데…. 아, 이걸 뭐라고 말하면 되는 거지? 혹시라도 만약에 너한테 사….”
“혹시라도 만약에 나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거든.” “끙….”
“아니면 너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를 걱정하는 거니? 그때는 이미 결혼한 상태이니 그 사람하고 결혼할 수도 없으니까.” “…….”
“그걸 생각하고 있다면 걱정 마. 시리우스그룹에 돌아가기는 싫어서 이혼은 절대로 해주지 않을 거지만, 내 평판에 문제를 주지 않는 선에서 네가 하렘을 차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게.” “허, 참….”
마치 준비한 듯한 대사다.
한서현의 말을 듣고.
은하는 혀를 내둘렀다.
뭐지? 대체 뭐지?
왜 점점 말려드는 느낌이지?
한서현이 참 당당하게 결혼을 제의하고 있다.
은하는 예측치 못한 상황에 그만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어찌 보면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진짜 골 때리네.
쌍둥이들의 장난에도 이렇게까지 골 때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참 당당하고.
또 자신감이 넘쳐서.
그녀의 말을 들으면 은하는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은하는 눈치 챘다.
얘도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네?
이제 보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
면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자신의 근처에 향해 있었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하고 있지만, 눈동자가 여실히 흔들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망설이니? 십이좌조차 상대했다는 애가 참 우유부단해선. 그래 가지고 클랜이나 제대로 이끌 수 있겠니?”
“…….”
그녀는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목소리도 떨리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떨리고 있다.
은하는 확신했다.
가끔 보면, 이 누나 참 위험해.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지 않으면서, 나한테는 이런 얼굴도 보여주고.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은하는 그녀의 변화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기하게 망설임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이리도 줏대 없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게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은하는 한서현의 도발 아닌 도발에 응해주기로 했다.
“─그래, 좋아. 하자, 결혼.”
“…잘 생각했어, 정말.”
네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겠다면.
나 역시 그렇게 하겠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다는 척.
또한 어디까지나 거래라는 듯.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하는 한서현의 덫에 걸려들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