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691
한서현이 단단히 삐졌다.
은하도 그녀가 이다지 삐진 것은 처음 겪었다.
“서현아, 있잖아.”
“클랜로드, 클랜회관 내에선 제가 행정관으로 대해 달라 했을 텐데요. 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건가요? 만약 사적인 일로 온 거라면 그건 업무가 끝난 다음에….”
“업무가 언제 끝나는데?”
“클랜로드가 일을 너무 벌려놔서 며칠 동안 끝나지 않을 것 같네요.”
요약하면 며칠 동안 건드리지 마.
은하는 끙 소리를 내며 한서현의 집무실을 나가야 했다.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클랜원들도 반응이 워낙 싸늘해, 은하는 클랜회관에 있는 것이 어째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 은하의 도피처는 클랜회관 옆에 있는 벽해수의 공방이었다.
마침 벽해수에게 볼일도 있었다.
“─요새 살 좀 찐 것 같다?”
“요새 워낙에 잘 먹고 있거든….”
“하긴…. 그렇게 먹으면 그러겠지. 그래도 좀만 참아. 클랜원들도 그만 용서해주겠지.”
“클랜원들은 이제 괜찮아. 문제는 우리 행정관이지.”
“그러게 잘 좀 하지.” “끙….”
벽해수가 혀를 쯧쯧 찼다.
은하는 뭐라 답하지 못했다.
이내 은하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내꺼는 어떻게 됐어? 이제 슬슬 만들어질 때가 된 거 아니야?”
“야, 네꺼는 아직 멀었어. 클랜원들 아티펙트를 만드는 걸로도 바쁘다.”
벽해수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수건인지 헝겊인지 모르는 천으로 땀을 닦았다.
그러다 근처 선반으로 손을 뻗어, 은하 앞으로 상자를 내놓았다.
상자 안에는 장신구가 잔뜩 들어 있었다.
“자.”
“이게 뭔데?”
“네가 손에 넣은 을지 등급 유물. 거기에 있는 장신구 중에서 하나로 만들 생각이야. 원하는 색상이 있나 한 번 봐봐.”
“상원사 동종이 워낙에 큰데 그걸 반지나 목걸이로 만들겠다고? 그게 가능해?”
은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전 삶에서 온태양은 을지 등급 아티펙트 재료인 상원사 동종으로 환원의 갑주를 만들었다.
동종의 크기가 워낙에 크다 보니, 그 힘을 덮어씌우기 위해서 갑주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작은 목걸이로 아티펙트를 만들겠다니.
은하는 절로 의문이 들었다.
“너, 날 뭐로 보는 거냐?” “판도라클랜 전속 마에스트로지. 실력 하나는 알아주는.”
“그래, 실력 하나는 알아주는 내가 동종에 담긴 힘을 목걸이에다 담지 못할 것 같아?”
“…….”
“불순물을 제거하고 필요한 부분만 목걸이에 부여하면 되는 작업이야. 꽤나 손이 드는 일이지만 가능해. 네 전투 스타일을 생각했을 때에는 갑주보다는 목걸이가 나을 거잖아. 아니면 갑주가 더 좋은 거야?”
“아니, 이왕이면 목걸이가 좋지.”
벽해수가 가슴을 떵떵 쳤다.
은하는 그의 말을 듣고 납득했다.
무거운 갑주를 입고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작업은 얼마나 걸리는데?”
“클랜원들 아티펙트가 끝나면.”
“나는 클랜로드인데 먼저 해주면 안 되는 거야?”
“미확인 던전을 개척하느라 요새 새빠지게 고생하는 클랜원들을 먼저 챙겨야 하지 않겠냐?” “그건 그렇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요새 재건 작업이나 돕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아티펙트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반지도 있네….
이내 은하는 상자 속에 들어 있는 반지를 몇 개 꺼냈다.
은하는 반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고 보니 약혼반지는 했어도, 결혼반지는 만들지 않았었구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은하는 결혼식이 뒤로 밀릴 것을 전제로 하고 아무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것 때문에 한서현이 화가 나게 만든 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은하가 대뜸 입을 열었다.
“─형, 반지 하나만 만들어주라.” “뭐? 웬 반지? 아티펙트로?”
“아니, 선물용…, 프러포즈용으로. 상대가 딱 받았을 때 너무 예뻐서 감동할 정도로.” “너 설마 프러포즈도 안 했냐?”
“…….”
“첫째 제수씨가 화낼 만도 하네. 작업이 밀려 있기는 한데…. 그래, 동생이 궁지가 딱한데 이 형이 아주 발 벗고 도와야지.”
☆
재앙을 막는데 집중하느라.
한서현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가 5월에 결혼하자는 말을 꺼냈을 때에도─.
‘─5월? 음….’
‘왜? 싫니?’
‘아니야. 그럼 그렇게 하자.’
은하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재앙이 일어나게 되면서 5월에 결혼하지 못할 거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기에.
은하는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서현이 5월에 얼마나 큰 의미를 두고 있는지 생각지 않았고.
어차피 밀릴 결혼이라는 생각으로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그대로 기억 한편으로 치워버렸다.
그래, 내가 너무하기는 했지.
미래를 바꾸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현재를 둘러보지 못하고 있었어.
서현이가 내색은 하지 않았겠지만, 걔도 사람인데 속으로는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그럼에도 한서현은 군말하지 않고 행정관이라는 위치에서 자신을 힘껏 보좌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걸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 같게도 은하는 그녀가 결국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게 돼서야 깨닫고 말았다.
은하는 크게 후회했고.
늦게나마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은하는 그녀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주는 게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
회귀자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은하는 조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 왈─.
“─그러면 그렇지. 엄마가 뭐랬니. 서현이한테 배려도 해주고, 신경도 써주라고 했지?”
“서현이가 내색하지 않아서 그만 소홀해지고 만 것 같아….”
“서현이가 널 귀찮게 하지 않으려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거지. 그런데 은하 넌 어떻게 프러포즈도 제대로 하지 않을 수 있니…. 엄마는 이미 둘이 그런 건 끝난 줄 알았지.”
“결혼하자는 말을 주고받은 걸로 괜찮다고 생각했….”
“우리 아들은 대체 누굴 닮았길래 이런 데서는 꽉 막힌 걸까. 그래도 네 아빠는 이렇게까지 꽉 막히지는 않았었는데….”
“…….”
“은하야.”
“네, 엄마.”
“너는 결혼하자는 말 한마디만으로 배우자의 인생을 얻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겨우 말 한마디로 얻는 배우자의 인생이 그렇게 가볍니?”
“…….”
“서현이한테 가서, 똑바로 전하렴. 말 한마디로 때우려고 하지 말고, 성의껏 준비해서 서현이가 너한테 자기 인생을 맡기게 하고 싶을 만큼 호소하라고.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가슴으로 호소해봐.”
“…어떻게 하면 될까? 구체적으로.”
“은하야.”
“네, 엄마.”
“엄마가 갑자기 회의감이 들려 해. 내가 너를 이렇게 잘못 키웠는가, 회의감이 드네. 우리 아들, 그렇게 바보였니?”
“…….”
“후우…. 엄마가 아빠한테 어떻게 프러포즈를 받았는지 알려줄게.”
은하는 어머니의 한숨 섞인 조언을 깊이 받아들였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홀로 싸우며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인생을 살기만 했던 회귀자에게는 그야말로 낯설기만 한 조언이었다.
“─응, 고마워. 엄마.”
“서현이한테 잘해. 내가 언제까지 널 챙겨줄 수 있을 것 같니.”
“응…, 사랑해요.”
“…그래. 서현이하고 하양이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해줘야 해. 알았지?”
“응.”
사랑이란 감정은 잘 모르겠다.
다만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로는 가벼웠고.
감사하다는 말로는 아쉬웠고.
좋아한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고민 끝에 은하는 적절한 대답을 찾아낸 것이다.
스스로도 꺼내기 낯간지러운 말이 은하를 움직이게 했다.
☆
딱히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치솟던 화도 은하가 무사히 클랜회관으로 돌아오면서 풀렸다.
그럼에도 한서현 그녀가 이틀 내내 은하를 매몰차게 대한 것은─.
─생각해보면 너하고 나는 단순히 정략으로 맺어진 관계였을 뿐이지.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판도라클랜의 행정관이 되기 전에.
자신이 은하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자신은 은하에게 마음이 없으니, 그의 연애 사정에 최대한 간섭하지 않겠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아가 행정관으로 클랜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걔가 내가 바라는 대로 대해주니,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 욕심을 내고 있던 거야.
그러니 매몰차게 대한 게 아니라, 클랜로드와 행정관으로서 지켜야 할 선을 그었을 뿐이다.
그녀는 단순히 은하의 첫 번째로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 이상, 은하의 마음을 휘어잡을 생각이 없었다.
너무 큰 욕심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금 외롭기는 하네.
마음 어딘가가 외롭고, 쓸쓸했다.
사실은 이 관계가 적당한 데에도.
내심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무심결에 5월의 결혼식이란 것에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바보 같이 자신이 살아갈 인생 중 가장 화려한 순간이 될 것이란 꿈을 꾸고 말았다.
그런데 은하는 그런 것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과 다르게 은하는 정말 철저히 결혼을 정략 관계를 공인하는, 그저 마침표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물러졌네.
나도 은하처럼 그래야 했는데….
모두 다 봄의 기운 탓이다.
멸망 속에서도 피어난 꽃들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해진 것이다.
한서현은 그것을 잊기 위해 구태여 서류 작업에 몰두하기로 했다.
공식 업무시간은 이미 끝났는데도 집무실에 홀로 남아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한 일상이 언젠가부터 지금껏 계속되고 있었다.
“─응?”
그러던 그때였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똑똑
누군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
창가에서 들려온 소리에 한서현은 시선을 향했다.
이내 그녀가 발견한 것은─.
“─불닭이?”
“삐삐삐 빠빠빠 뿌뿌뿌!”
노은하의 환수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서현은 창가를 두드리는 불닭이에게 걸어갔다.
“빠빠!”
“…….”
어서 문을 열어달라는 듯.
불닭이가 보챘다.
한서현은 불닭이의 귀여움에 끌려 무심결에 창문을 열어주었다.
“빠빠!”
“이리 오렴.”
그러자 안으로 들어온 불닭이.
한서현이 손을 내밀었다.
불닭이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톡 앉았다.
한서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주인은 어디 가고 여기에 있는 거니? 응?”
마침 쓸쓸하던 차였다.
누군가와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불닭이를 반겼다.
이내 그녀는 불닭이가 목에 카드를 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빠빠!”
“…….”
손바닥 사이즈의 카드.
불닭이는 목에 여러 장의 카드를 걸고 있었다.
한서현은 카드 뒷면을 돌렸다.
메시지
가 적혀 있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하….”
누가 썼는지는 뻔했다.
보아하니 노은하의 작전인 듯했다.
불닭이로 자신의 경계심을 무너뜨려 용서를 구하는 작전.
한서현은 코웃음을 쳤다.
안타깝지만 그녀는 진즉 용서했다.
잠시 은하를 대하는 선을 찾으러 시간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
그러니 노은하는 지금 괜한 수고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막상 카드를 보고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노은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녀는 의문을 느꼈고.
어딘가 후끈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계속해서 카드를 넘겼다.
「걱정만 끼쳐서 미안해요.」
「그리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
「옆에 있어줘서 안심이 돼요.」
「그래서 믿고 맡길 수 있어.」
참 노은하답지 않은 짓.
그러면서도 한서현의 입가는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카드를 넘길 때마다 마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그래서 내가 말했잖니. 나한테 잘하라고….”
킥 하고.
한서현은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카드를 넘겼다.
그리고 멈칫했다.
「지금 문 밖에 있어요.」
콩닥콩닥.
한서현은 고개를 홱 돌렸다.
집무실 문 밖에 있다.
아니─.
─똑똑
비밀문 너머에 있다.
다시 고개를 돌린 한서현은 자신과 노은하만 알고 있는 문을 보았다.
“─들어가도 될까?”
“…….”
만들어놓고.
워낙에 일을 하느라 바빠서 지금껏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문.
그녀는 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내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입을 뗐다.
“─그래,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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