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ad Demon RAW novel - Chapter 421
421화. 사기꾼들.
“내일은 내가 교주에게 일생일대의 선물을 줘야겠어. 여태 지켜본 바로는 이기든 지든 간에 강자와 싸우는 것만이 삶의 위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이 선물이겠지.”
내 말을 끝까지 들은 백의서생이 누운 자세에서도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다.
“붙어보니 알겠다. 확실히 그런 느낌이었지.”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백의서생에게 물었다.
“별이 가득하냐?”
“가득하구나.”
나도 근처에 드러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백의서생 말대로 밤하늘에 별이 빼곡했다.
천악이 내게 물었다.
“역시 너답게 어떻게 싸울 것인지는 계획이 없겠지?”
“어떻게 아셨소.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안 그렇소. 마부 선배?”
질문을 받은 마부 선배가 당황스러워하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교주 모시느라 고생이 많소.”
이 말에는 마부 선배가 슬쩍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고생하지 않으셨소?”
“천하에서 가장 강하신 분을 수행하는데 어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길이 막힌 적이 없고. 뚫리지 않은 장소가 없고. 머물고 싶으신 장소가 곧 숙소였습니다. 제가 한 일은 그저 따라다닌 것밖에 없습니다. 혹여나 제 실수로 길을 잘못 들었을 때도 보고를 드리면 그저 그러냐, 한마디만 하시고 방향을 틀라고 하셨습니다. 바깥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느끼는 것은 이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부의 언변에 넘어간 나는 이 사내가 천하제일 마부처럼 보였다.
모용백이 내게 말했다.
“문주님, 아무래도 무제 선배가 바로 일어나는 것은 좋지 않아 보입니다. 차라리 제가 이곳에 모닥불을 지필 테니 먼저 들어가서 눈을 붙이십시오. 내일 교주님이 언제 싸우자고 하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맏형이 색마와 함께 다가오면서 말했다.
“모닥불이라……. 그렇게 하자. 몽랑아.”
“예, 사부님.”
“장원이라 땔감은 이미 비축해뒀을 것이다. 시끄러워서 시비들도 못 자고 있을 테니 물어보고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맏형이 근처에 털썩 주저앉자, 공손심도 다가와서 근처에 앉았다. 둘러보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전부 장원을 교주에게 내주고 야영을 할 기세였다. 물론 방이 여러 개라서 전부 들어가서 자도 문제가 없을 테지만 이것은 일종의 배려였다.
나는 일어나서 앉은 다음에 사람들을 둘러봤다.
“이번 비무에 모용백이 없으면 큰일 날 뻔했네.”
다들 서로를 둘러봤다.
“그러게 말이야.”
나는 마부 선배에게도 휴식을 권했다.
“선배도 장원에 들어가서 눈 좀 붙이시오. 마차와 병기는 우리가 지킬 테니.”
“저는 괜찮습니다.”
마부 선배는 마부석으로 가서 자리를 치우더니 그곳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자려는 것인지 눈만 감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느새 색마가 땔감을 한가득 짊어지고 와서 바닥에 내려놓더니 모용백과 함께 금세 모닥불을 만들어서 불을 지폈다.
우리는 둘러앉아서 모닥불을 바라보고, 모용백은 봇짐에서 잡다한 도구와 약을 꺼내더니 백의서생의 몸에 잔뜩 묻은 피부터 닦았다. 사람을 치료할 때 펼쳐지는 모용백의 손놀림은 우리가 무공을 펼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빨랐다.
백의서생은 누워서 모용백의 치료를 받자, 서서히 몸에 들러붙은 피가 사라지면서 사람다운 몰골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떠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대체로 언제 싸웠냐는 것처럼 고요한 밤이었다.
임시로 일차적인 치료가 끝났을 때, 백의서생이 가라앉은 어조로 모용백에게 말했다.
“고맙네.”
모용백이 대답했다.
“실례지만 그 고맙다는 말씀, 정말 오랜만에 하신 거 아닙니까?”
“어떻게 알았나.”
“어조가 너무 어색해서 그렇습니다.”
“별걸 다 아는군. 이화접목신공(移花接木神功)은 어디까지 익혔나?”
“근래는 삼 단계를 수련 중입니다.”
백의서생이 슬쩍 웃었다.
“그런가? 그 정도만 익혀도 웬만한 자들에겐 패배하지 않을 것인데.”
“저도 궁금하긴 한데 사실 이때까지 한 번도 싸워보지 않았습니다.”
모용백의 말에 다들 모용백을 쳐다봤다.
천악도 황당한 모양인지 이렇게 물었다.
“신공이라는 이름이 붙은 무공을 익혀놓고 한 번도 싸워보지 않았다고?”
“예, 제가 만나는 사람이 전부 환자들인데 누구와 싸우겠습니까. 더군다나 제 의원이 있는 일대는 이미 문주님 덕분에 사고를 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충 문주님 이름을 팔면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사람들밖에 없었지요. 깝죽대다가 맞아 죽은 자들이 한둘이어야지요.”
다들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낄낄대면서 웃었다.
맏형도 웃으면서 말했다.
“대체로 셋째가 강호인들에겐 무섭긴 하지.”
나는 모용백에게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수련해. 의술만 가지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모닥불이 묘하게 성화(聖火)처럼 보이네.”
나는 맹수들과 둘러앉아서 성화의 온기를 나눠 받았다. 모용백도 근처에 편하게 앉아서 나를 쳐다봤다.
“제가 알기로 불꽃이 문주님의 광증과 심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추측했는데 지금은 불꽃을 봐도 아무렇지 않으십니까?”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모용백이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서책에 적혀 있어서 배운 내용은 아닙니다. 공부하다 보면 알지 못했던 것들을 유추하게 됩니다. 광증은 가장 마음에 큰 상처를 줬던 사건에서 출발하는 성향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렇군.”
나는 일렁이는 불꽃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공손심이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네. 문주의 생각에 따라서 비무를 하게 되었으나 결국엔 교주가 바라는 대로 된 것 같기도 하네. 어쨌든 간에 교주가 문주에게 질 것 같지가 않은데 일대일을 하게 됐으니 말이야.”
내가 말을 이어받았다.
“이상하게 나는 승패에 대한 걱정이나 초조함이 없소. 그저 화산에서 싸우게 됐다. 그런 감정만이 남았소.”
맏형이 내게 말했다.
“잠을 잘 테냐. 운기조식을 할 테냐. 무엇을 하든 우리가 호법을 서마.”
나는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나 하자고. 밤새 떠들다가 졸리면 각자 자는 거야. 여기까지 잘 왔는데 운기조식이라니, 당분간 수련은 하지 않을 거야. 내일도 중요하지만 나는 지금도 중요해.”
힘겹게 모인 강호 고수들이다.
둘러앉아서 모닥불이나 쳐다보면서 대체로 두서없는 헛소리를 주고받고 있었으나 나는 내일 비무만큼이나 지금의 시간도 소중했다.
여기에 있는 자들의 역량이 전부 뛰어나서…….
다들 뛰어난 제자 한 명쯤은 잘 키워낼 수 있는 고수들이라서 그렇다.
백의서생이 모용백의 부축을 받아서 몸을 일으키더니 앉은 자세에서 우리를 둘러봤다.
“……가끔 내 정체를 모르는 제자를 받는 상상을 했었다.”
“…….”
“내 과거를 모르는 제자 말이야. 나는 도인 행세를 해야겠지. 마치 세상사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세상사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예전에 은퇴한 고수처럼 말이야. 은거기인이 되는 셈이지. 제자는 나를 깊이 이해하진 못하겠지. 내 과거를 모를 테니 말이야. 상관없다. 어느 순간 제자에게 너는 무공을 익혀서 협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건네는 나를 상상하면 웃음이 나곤 했다. 이런 사기꾼이 다 있을까. 협객이라니…….”
백의서생의 말에 다들 웃었다.
천악도 웃긴다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협객이라니……미친놈.”
백의서생이 말했다.
“끝내, 제자만 모르면 되는 거 아니냐. 우리의 진짜 정체를 말이다. 문주야, 안 그러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제자들이 우리의 과거를 알 필요는 없지.”
색마가 맏형에게 물었다.
“사부님, 요란이는 그런데 사부들이 대충 악인인 것을 알지 않나요? 눈치가 빨라서 말입니다.”
맏형이 대답했다.
“요란이는 우리가 악인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가 갑자기 멀리 도망가지만 않으면 돼.”
맏형의 말에 색마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색마가 우리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언젠가 선배들과 우리들의 제자가 화산에서 맞붙었으면 좋겠소. 생사결이 아닌 비무로 말이오. 천하제일도 탄생하고, 무학도 교류하고, 크게 어긋나는 강호의 세력이 있으면 제자들끼리 뭉쳐서 때려 부수기도 하는…….”
모용백이 대답했다.
“먼일이긴 하지만 제 제자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체로 내가 바라보고 있는 불꽃이 성화가 맞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맹약이나 다름이 없는 말을 나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각자의 바람이자 희망이고 그 어떤 불온한 감정이 담기지 않는 속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이 틀 무렵까지 대화를 나누고, 잡담도 하고,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았다. 아무도 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걸어온 길이 달랐으나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나누는 대화에는 적개심이나 증오,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모두 불꽃에 휩싸여서 어디론가 날아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새벽의 어스름이 하늘에 차오를 무렵에…….
교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주야.”
“말씀하시오.”
“가자. 화산으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산책인가?”
나는 일어나서 밤새 이야기를 나눴던 사내들의 표정을 보다가 이것이 산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쨌든 짤막하게나마 작별의 말을 나눴다.
“다녀올게. 비무를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존중해야지.”
마부석에서 마부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물었다.
“문주님, 일살은?”
“괜찮소.”
맏형이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다녀와라.”
다들 다녀오라는 말 이상의 작별은 내게 건네지 못했다. 장원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교주는 밤을 지새운 사람처럼 탁자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교주 옆에 가서 말했다.
“갑시다.”
우리는 별말 없이 화산으로 향했다. 교주와 둘이서 산책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것을 지금 하고 있다. 한참 후에야 교주가 말했다.
“한적한 곳으로 가자.”
“화산은 대체로 한가롭소. 인적도 드물고.”
어느 순간부터는 교주가 경공을 펼쳤기 때문에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딱히 길을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절벽도 아무렇지 않게 올라갔기 때문이다. 사실 제운종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교주에게 뒤처져서 비무도 하지 못할 뻔했다. 이상하게도 비무의 전초전은 경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는 빠르게 화산을 올라서 한적한 장소를 계속 물색했다.
사람은 없고, 장소는 넓고, 조용한 곳을 찾고 싶은 것이라 추측했다.
나도 화산을 속속 아는 것은 아닌지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 우리가 찾아낸 장소는 산 중턱의 어딘가였는데, 평평한 곳이 밑으로 조금 들어가 있는 너른 분지 형태여서 비무를 하기엔 가장 적합해 보이는 장소였다.
내가 먼저 권했다.
“여기가 좋겠소.”
교주는 이런저런 말 없이 먼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교주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교주가 잠시 후에 내게 물었다.
“……유언이 있느냐?”
나는 이마를 긁으면서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딱히 없소. 할 말은 다 하고 살았던 터라.”
실은 어젯밤에 동지들에게 충분히 내 뜻을 전했다.
교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휴식을 취하려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도 가부좌를 튼 다음에 교주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유언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교주가 대답했다.
“내가 패배할 경우, 후임 교주로 검마를 임명하겠다. 네가 전달해라.”
“맏형이 거절할 텐데?”
“거절과 무관하게 내 뜻이다. 거절하면 검마가 직접 차기 교주를 임명하라고 전해라. 그 정도는 하겠지.”
“알겠소.”
교주가 내게 말했다.
“회복할 시간을 주겠다. 마치면 말해라.”
“그럽시다.”
나는 교주를 눈앞에 둔 채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