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esperson Kim Yubin RAW novel - Chapter 7
7화 – 재도전(2)
놀란 마음에 정신이 살짝 나간 유빈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스승님을 빤히 쳐다봤다.
“그럼 스승님도 전생에서…….”
“허허, 나도 5개국어 정도는 한다. 나는 전생에 중국의 중의사였다. 그전에는 조선 시대의 심마니였지. 심마니 전에는 스페인의 뱃사람이었다.”
당연할 것을 뭘 묻느냐는 듯이 스승님은 유빈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줄줄이 대답해 주었다.
“헉! 5개 국어요?”
“외국어는 보통 덤으로 딸려 오더구나.”
“아! 그래서 스승님께서 치료도 할 줄 아시고 약초에 대해서도 잘 아셨던 거군요?”
“허허, 벌써 받아들였느냐? 나보다 받아들이는 속도가 훨씬 빠르구나. 나는 처음에 스승님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일주일 동안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던 거지.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든 게 딱딱 들어맞더구나.”
유빈도 쉽게 받아들이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수련자로서 마음을 항상 평온하게 유지해야 하지만 아직도 새로운 능력이 생길 때마다 흥분되는 것은 어쩔 수 없구나. 허허. 이제는 제자인 너도 경지를 개척했으니 내 삶의 낙이 두 배가 되었구나.”
“하아, 호심법이라는 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수련법이었군요.”
즐거워하는 스승님에 비해 유빈의 심장은 아직도 쿵쾅거렸다.
“괜히 호흡법에 호심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전생의 너는 범죄자는 아니었지만, 다단계 영업으로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줬지? 지금으로 치면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유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없이 많은 삶을 보다 보면 별별 인생을 만나게 된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살인마였을 수도 있고, 그것보다 심한 경우에는 수천 명을 죽인 전범자였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런 삶을 직접 보게 되면 심적으로 매우 큰 충격을 받게 되지. 그때 호심법이 네 마음을 지켜 줄 것이다. 전생에서의 업은 어떻게든 다시 나타날 것이니 후회도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번 생을 충실하게 잘 살아라.”
“명심하겠습니다.”
*
유빈은 스승님과의 대화를 곱씹어 볼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마치 스승님이 바로 옆에서 도와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끔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머리도 마음도 깨달음을 거의 받아들인 상태였다.
토익 성적표를 들고 잠시 회상에 빠졌던 유빈이 마음속으로 스승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며 옆에 있는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취업 포탈에는 수많은 일자리가 지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반기 공채시즌이었다.
‘이렇게 일자리가 많은데, 한 군데에도 합격이 안 된다면 얼마나 슬플까.’
스승님을 만나기 전의 암울한 과거가 생각난 유빈은 검색창에 ‘제약영업’을 쳤다.
역시나 수많은 제약회사가 경력직, 신입사원을 뽑고 있었다. 그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회사가 있었다.
제네스코리아.
유빈이 처음부터 입사하고 싶었던 회사.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지원서를 냈지만, 서류조차 받아 주지 않은 회사. 바로 그 회사였다.
유빈은 제네스코리아의 홈페이지에 입사지원서와 자기소개서를 입력했다.
과거에는 거절을 당했지만, 유빈은 떨리지 않았다.
자신감은 단지 토익점수 만점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광주에서 수련했던 일 년간의 시간이 만들어 준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회사의 서류 심사자는 수많은 입사지원서를 읽는다.
숙련된 심사자라면 지원자가 어떤 마음으로 지원서를 썼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자신감 있는 사람의 글은 표가 난다예전에는 ‘제발 나를 뽑아 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입사 지원서를 냈다면, 지금은 ‘내가 당신네 회사에 입사하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결과를 낼 수 있고 그런 나를 안 뽑는다면 회사만 손해다.’라는 마음으로 자기소개서를 써 내려갔다.
전생의 경험 또한 자소서를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생의 그가 수많은 회사를 오가면서 쓴 레쥬메만 수십 개였다.
사는 나라와 시대는 다르지만,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가 없다.
유빈이 전생의 경험을 녹여 쓴 자소서를 읽는다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입사지원 완료버튼을 누른 유빈은 다른 몇 개의 외국계 회사에도 지원서를 내고 노트북을 닫았다.
결과 발표까지는 아직 일주일의 기간이 남았다.
유빈이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어머니? 저 오늘 저녁에 내려갈게요.”
*
“어떻게 된 거예요?”
대전 유성에 있는 어머니 집에 도착한 유빈은 선뜻 문 안으로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생전에 외할아버지가 사셨던 죽동의 작은 주택은 얼핏 봐도 50마리가 넘는 각양각색의 강아지로 가득 차 있었다.
마당에 조잡하게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 녀석들은 낯선 사람이 들어오자 목청 높여 합창해 댔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와라. 얘들아, 짖지 마!”
유빈은 마당을 가로질러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어머! 유빈아, 너 키 컸니? 살도 좀 쪘구나! 안경 안 쓰니까 인물이 훨씬 사는구나. 그래, 요즘 렌즈를 끼지 누가 안경 쓰고 다니니. 잘했다. 잘했어.”
수련으로 외모의 변화가 일어난 이후로 유빈의 예전 모습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은 어머니가 처음이었다.
유빈은 잠시 고민을 했다.
어머니에게 굳이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 요즘 운동을 열심히 했더니 살이 붙었나 봐요.”
“어머머, 팔뚝 단단해진 거 봐라. 아휴, 잘했다. 난 외지서 혼자 살아서 밥도 못 먹고 다니는가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다행이야.”
어머니가 환하게 웃었지만, 유빈은 웃음보다 깊어진 눈주름만 눈에 들어왔다.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너무 내버려 둔 것 같아 한쪽 가슴이 아려왔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만남의 회포를 풀자 유빈은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키우는 유기견은 열 마리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의 상황은 유기견 보호소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한 마리 두 마리씩 집 앞에 놓고 가서…… 어쩔 수 없잖니. 다 불쌍한 애들인데…….”
“그래도 이건 좀…… 힘들지는 않으세요?”
유빈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자기들끼리 놀고 있는 강아지를 심란하게 바라봤다.
어머니 혼자서 이 모든 강아지를 돌보기에는 벅차 보였다.
쿵쿵쿵쿵. 끼이이익.
어머니의 대답이 밖에서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집 안쪽에서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녹슨 철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양씨 아줌마! 개새끼들 좀 안 짖게 하라고 했잖아!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고!”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녹색의 새마을운동 모자를 쓴 전형적인 시골 할아버지였다.
“아, 이장님. 죄송해요. 아들이 와서 애들이 흥분했나 봐요. 제가 조용히 시킬게요.”
이런 일이 전에도 자주 있었는지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사과하기에 바빴다.
이장은 건장한 사내가 같이 있자 잠시 움찔했지만, 분노를 꺼뜨리지는 않았다. 얼굴이 불그스름한 게 낮술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머니한테 함부로 말하는 이장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유빈은 일단 호흡으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이장님이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유빈이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평소에 이장님에게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 어…… 안녕하슈?”
화라는 것은 맞불을 놔야 더 커지는 법, 유빈이 물처럼 부드럽게 다가가자 성을 내던 이장도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개가 짖어서 많이 시끄러우셨죠? 저도 누가 옆에서 시끄럽게 하면 신경이 쓰이고 화가 나더라고요.”
“뭐, 아니 그렇게 시끄러운 건 아니고…….”
유빈은 이장의 아미그달라에 들어온 빨간 불이 꺼지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전생의 지식이 빠르게 떠올랐다.
아미그달라. 뇌 속이 편도체로 변연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유쾌, 불쾌의 분류장치로 위험이 닥치거나 불안하거나 나를 무시하고 남이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불쾌의 빨간 불이 들어온다.
불쾌해진 아미그달라를 다루는 방법은 간단하다. 반박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상대의 감정을 인정해 주고 받아들이면 빨간 불은 힘없이 꺼진다.
“어머니, 감사의 의미로 이장님에게 술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으, 응 그러려무나.”
어머니는 유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져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장님, 가시죠. 제가 처음 뵀는데 막걸리 한 잔 대접해도 될까요?”
“어…… 그럴까?”
유빈이 예의 바르게 모시자 이장은 순순히 밖으로 따라 나왔다. 처음에 고함치는 악귀 같던 표정이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