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371
371화
‘혼란은 줄 만큼 줬으니까 슬슬 빠져도 되겠지.’
혼란만 줬냐? 테헤반 공작령의 현 가주와 전대 가주까지 죽였다. 익스퍼트도 죽였고, 병사들은 천명 이상 사살했다. 댐을 무너뜨리지 못한 아쉬움을 이런 데서 달랬다.
댐은 꼭대기에만 작은 구멍을 뚫어놓았기에 수리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다. 구멍에서 쏟아지는 물도 대부분 댐 안쪽에 지어진 기지로 흘러 들어갔다. 여기서 추가로 이득을 보았다.
기지에도 비상시를 대비한 배수로가 있겠지만 초당 톤 단위로 쏟아지는 물을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 물을 빼고, 구멍을 막을 마법사도 내가 무력화시켰다. 아마 댐 안쪽 기지에 거주하는 이들은 전부 익사할 것이다.
정예 병력과 댐 관리에 필요한 전문 지식인을 떼 몰살 시켰으니 테헤반 공작령은 댐 복구 및 관리에 피똥을 싸겠지.
유일한 불안점을 꼽으라면 익스퍼트와 투닥거리다가 오러 파동에 댐 상층부 구조물이 약화된 거다. 하지만 이것도 머지않아 금방 해결될 것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콘크리트에 금이 가면 건물로서의 가치를 잃는 구세대 지구 건축기술과 달리 이세계에는 마법이 있다. 금이 간 돌덩어리도 마법으로 이을 수 있으니 댐은 곧 원상복구 될 것이다.
‘그 마법사가 언제 오느냐가 문제지. 내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현재 나는 베이터 댐을 벗어나 공작령으로 향하는 중이다. 영주성에 가서 뮤온 보트라의 일을 돕고, 겸사겸사 한 자락 하는 마법사들을 모조리 죽일 예정이다.
물론 내가 눈에 띄는 대로 다 죽여도 마법사야 언젠가, 어디에서 오긴 오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가슴 좀 졸여야 할 거다.
쿵! 쿠왕!
올 때 힘내라는 의미로 산길에 오러 탄을 갈겨 길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는다. 아니, 굳이 산길에 직격하지 않아도 된다.
내리막길 근처, 돌덩이가 쌓인 절벽을 타격하면 그것만으로도 산사태의 원흉이 된다.
쿠르르릉! 꾸과광!
오러 탄이 경사로의 취약점을 타격하자 수백, 수천 톤이 넘는 토사와 돌덩이가 쏟아져 내려 산길을 통째로 휩쓸었다. 민둥산의 단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러길래 미리미리 나무 좀 심지 그랬어.
또 추가로 할 게 뭐가 있을까? 나쁜 짓만 생각하면 머리가 이렇게 쌩쌩 잘도 굴러간다. 대량살상만 안 일으킬 뿐이지, 할 수 있는 악독한 수단은 모조리 써서 공작령을 뒤흔드는 나였다.
“아! 독도 쓸까?”
아니야. 나는 독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악독하게 가면 초능력으로 식물독과 혈액독, 광물독을 혼합 및 개량해서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원(病原)을 저수지에 풀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갔다.
아쉽지만, 베이터 댐은 이쯤에서 끝낼 시점이었다. 나는 적에게 입힌 피해 계산을 그만두고, 이번에 얻은 이득을 정리했다.
첫 번째 이득은 유물의 구조를 일부 알아낸 것.
승천자의 유물을 과부화시켜서 작동시킨 덕분에 어떤 식으로 마나가 흐르고, 어떻게 변환되는지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베이터 댐을 감싼 초거대 마법진의 구조식과 수룡 소환 마법을 본 것이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다.
유물과 수룡 소환 마법 지식 둘 다 완전하지 않고 군데군데 뚫린 구멍이 많지만, 이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당장 지금만 해도 멸망을 부르는 화살과 수룡 소환 마법을 합친 고위 공격 마법이 하나 떠올랐다. 이것들을 잘 정리하면 마법 실력이 한 단계 더 늘어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득. 전대 가주를 죽이고 얻은 마갑. 하지만… 마갑은 처음 내가 뺐었을 때와 다르게 넝마처럼 곳곳이 찢어져 있었다.
아무리 승천자의 유물이라도 오러 블레이드와 수룡의 브레스가 충돌하는 걸 버티기는 힘들겠지. 마나를 불어넣어 강화하지 않았으니 손상 정도도 더 할 테고.
마지막에 와서 손해를 보네.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아쉬움을 털어 넘겼다.
“그나마 승천자의 유물이라서 갑옷의 형태라도 보존된 거지, 평범한 마법무구였으면 구겨진 금속 쪼가리만 손아귀에 남아있었을 거야.”
그래. 이거라도 남아있는 게 어디냐. 망가져서 원본 마법 회로는 얻을 수 없지만, 비늘만 이용해도 쓸 곳은 무궁무진하다.
쩔그럭!
나는 마갑에 덜렁거리는 비늘을 조심스레 회수한 뒤, 공작령을 향해 날았다.
* * *
지익-!
공작령 한가운데, 영주성에 가까이 다가간 나를 반긴 것은 어둠을 찢는 굵직한 회색빛 광선이었다. 벨벳의 무자비한 광선, 마냐툴이 쓴 마법이다.
회색의 파괴가 영주성 중간층부터 지하까지 일거에 휩쓴다. 지하에서 쿵! 하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영주성을 보호하는 마법진이 제 기능을 잃어가는 것이 내 감각에 잡혔다.
‘벨벳의 무자비한 광선이 마법진의 핵심축을 관통했군.’
내가 도착했는데도 투닥거리는 걸 보니 정보 수집이 다 끝나지 않은 것 같다. 다행히 내가 도울 일이 남아있었다. 나는 충격파에 깨진 유리창을 통해 일행과 반대편 건물에 돌입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피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병사, 중년의 기사, 젊은 메이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고혼이 되어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사흔은 단검에 의한 급소 공격. 펙의 솜씨다. 쿵! 발을 굴러 초능력 파동을 흩뿌려서 건물을 탐색해보니 네 명이 개별행동을 하며 영주성을 헤집는 게 느껴졌다.
펙은 내가 본 시체처럼, 영주성에 있는 이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는 데 열중하고 있다. 마냐툴은 건물에 남은 방어 마법진을 해체하고 있고, 뮤온 보트라는 비밀 방, 중요한 서류, 비밀문서 등이 담긴 공간을 찾아내고 있었다.
포테리오는? 그는 뮤온 보트라가 찾아낸 공간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중요한 문서와 서류 등을 쓸어 담는 중이다.
그럼 나도 그를 도와… 아, 잠깐. 뮤온 보트라가 검을 든다. 그가 대각선 밑으로 찌르기를 날려 오러를…….
꾸왕!
나는 급히 여의반검으로 내 심장을 노리는 오러를 튕겨냈다. 뮤온 보트라가 내 탐색을 감지하고 나를 적이라고 오해해서 다짜고짜 선공을 날린 것이다.
뚫린 구멍 사이로 뮤온 보트라의 당황한 얼굴이 보인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아저…… 이, 썅!”
퍼벙!
말을 끊고 급히 옆으로 구른다. 내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위치에 작고 강력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마냐툴이 영주성 마법진의 제어권을 빼앗아 내게 공격 마법을 날린 것.
퍼버벙!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는 누운 자세 그대로 공처럼 복도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런 내 뒤를 따라 금속 괴도 종잇장처럼 우그러뜨리고도 남을 강력한 공기 폭발이 뒤따른다.
“납니다! 저라고요! 마냐……!”
쿠왕! 쿠구궁!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폭발이 내 입을 막는다. 이 개 같은 노인네. 나인 거 알고 일부러 저러는 것 봐.
나는 드러누운 채, 팔굽혀펴기하듯이 땅을 강하게 밀쳤다. 공중에 3미터가량 떠올라서 팽이처럼 회전한다. 돈가스용 돼지고기 두들기듯이 전신을 때리는 폭발을 유수화접으로 흘리며 외쳤다.
“어르신! 아까 댐에서 일어난 폭발 봤죠! 그거 마법으로 재현한 브레습니다! 자꾸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면 이번에 훔친 빛의 수호자 마법 안 가르쳐 드립니다!”
뚝……!
거짓말처럼 폭발이 멎는다. 나는 엉망이 된 복도에 쓰러져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퉁! 때렸다. 초능력 파동이 다시 건물을 관통하고, 민망해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마냐툴이 감지된다.
나는 이를 갈며 벌떡 일어섰다. 한시가 바쁜데 이런 시답잖은 장난이나 치고 말이야.
“예전에 시즈믹스 노친네한테 한 거 보셨죠? 저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다들 마법으로 브레스 쏘는데 혼자서 불장난이나 하고 노십쇼.”
살랑~!
머릿결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허공에 모이더니 바람의 손을 만들어냈다. 바람의 손이 애교를 떨 듯이 내 양어깨를 주무른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파리 쫓듯이 바람의 손을 털었다. 그러곤 짜증을 담아 빽! 소리쳤다.
“펙! 이 새끼야! 너도 사람 그만 죽이고 포테리오 소장님 도와서 서류나 챙겨!”
여전히 눈이 시뻘게져서 영주성을 뒤지는 펙. 마냐툴이 영주성에 있는 이들을 전부 질식사시켜서 죽일 사람도 없는데 뭐 저리 흥분하고 지랄이야.
구오에서 살던 원한이 뼈에 사무친 건 알겠는데, 죽일 만큼 죽였으면 적당히 만족하고 업무로 돌아올 줄 알아야지. 다들 프로정신이 부족하다.
사부작! 이 난리가 나는 와중에도 포테리오는 열심히 뮤온 보트라가 찾아낸 여러 비밀 공간을 뒤지며 중요한 문서와 비싼 마법 도구 등을 챙기고 있었다.
가장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던 사람이 가장 도움이 되다니.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느낄 수 있는 한때였다.
“빨리 할 일 하고 나가자고.”
내 욕설에 펙도 단검을 집어넣고 포테리오를 돕는다. 드디어 일이 정리가 되었다.
나도 중요한 걸 챙길 시간이다. 나는 지상층을 뒤지는 일행에게서 빠져 지하로 향했다.
지하 2층. 금고 창고에서 환풍구를 타고 위로 올라가다가 옆으로 빠져서 지하 3층의 비밀 공간으로 돌입한다. 이곳은 영주성의 마법진과 독립되어있는 특별한 공간이기에 마냐툴이나 뮤온 보트라도 미처 찾지 못했다.
이 비밀 공간은 가는 길도 없다. 매번 갈 때마다 환풍구를 통해 마법으로 땅을 뚫고, 볼일을 다 보면 이동한 경로를 마법으로 메꿔서 출입도 철저하게 숨겼다.
파지직!
비밀 공간만 따로 보호하는 은신과 방어 마법을 뚫고 안으로 진입. 들어간 비밀 공간의 넓이는 소형 냉동창고와 비슷했다.
그 창고 안. 좌우에 선반이 걸려있는데 선반위에 나도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는 엄청난 것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게리소님에서도 흔치 않은 고급의 마나석, 최상급 몬스터를 사냥해야지만 낮은 확률로 나오는 원천 마력석, 고위 마법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법 무구, 주먹보다 커다란 색색깔의 보석 등이 선반에 널려있다.
촤르륵! 화려한 목걸이를 집어든다. 정령석, 마력석, 보석을 갈아 하나의 작은 마나석으로 응축한 보석이 알알이 박혀있는 목걸이. 보석에서 자동적으로 회복기능이 제공되는, 유물 급의 마법 무구다.
푸른색, 붉은색, 금색 세 종류의 금속이 나선을 그리는 반지, 작은 마나석이 알알이 박혀있는 팔찌,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티아라. 등등… 마법사에게 황금보다 귀중한 마법 시전 보조 도구가 선반에 그득했다.
심지어 구석에는 승천자의 유물로 보이는 물건까지 있었다. 수정을 깎아서 만든 것 같은 유리병에 오색의 신비로운 빛을 내는 액체가 담긴 포션이었다.
“와우……!”
착! 유리병을 잡자마자 손바닥을 통해 편안한 기운이 피부와 근육을 넘어 골수까지 스며든다. 전설에 나오는 엘릭서라도 되는 건가?
포션이 놓인 선반을 보니 고아한 금색 글씨로 ‘천상의 눈물’이라고 적혀있다. 딱 봐도 천고의 영약이나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기적의 회복약이다.
“으흐흐!” 이런 걸 두고 갈 순 없지.
빠직! 빠직!
나는 선반을 뜯어 간이 나무 박스를 만들었다. 그곳에 보석과 마나석, 마력석, 마법 무구를 있는 대로 쓸어담았다. 천상의 눈물은 내 품안에 넣는다.
그렇게 있는 대로 보물을 나무 박스에 넣는 와중, 선반 제일 꼭대기에 액자 끄트머리가 툭! 튀어나온 게 내 시선을 끌었다.
액자를 꺼내 확인해 보니 소니아 반데스나 가이노스보다 예쁘고 르데앙보다 못생긴 여자가 헐 거 벗은 복장으로 개울가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화가의 사심을 제외하고) 그림에서 묘사된 여성의 외모나 여러 피부, 머리카락, 동공 등의 색과 체형 등을 보면 이종족임이 분명하다.
“흐음…….”
200년 가까이 살아온 내 심미안으로 보았을 때, 이건 100퍼센트 춘화다. 공작가의 가장 중요한 보물이 잠들어있는 창고에 춘화를 보관하다니.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든지 똑같군.
이것도 들고 갈까? 그래도 승천자의 유물과 함께 보관하던 춘화인데 염료 값은 나오겠지.
덜커덕!
어이쿠! 그림이 너무 커서 이거 하나를 가져가면 보석이나 마나석을 왕창 빼야 되잖아? 차라리 나무 박스 크기를 키울까? 아니야 이대로 될 거야. 나는 끙끙대며 액자를 상자에 집어넣었다.
꾸직!
이런! 억지로 쑤셔 넣다가 액자가 부서졌잖아? 종이까지 형편없이 구겨졌다.
상자에서 액자를 꺼내 보니 구겨진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 망가진 TV 화면처럼 지직-! 거렸다. 이것도 마법 무구다. 종이부터 액자까지, 섬세한 마법 회로가 빼곡히 그려져 있다.
세상에! 누가 춘화를 보관하려고 마법까지 쓴데? 예술이 밥 먹여주는 줄 알아? 이래서 부자들 생각은 알 수가 없다.
“돈도 안 되는 예술 따위에 내 소중한 보물 박스의 공간을 내줄 것 같아?”
이건 신포도야. 나는 부러진 액자를 대충 구석에 집어 던지곤 다른 값나가는 것을 챙기는 데 집중했다.
약 10여분 후. 비밀 창고를 액자를 빼고 든든하게 털었다. 텅 빈 비밀 창고를 벗어나 2층 금고로 나온다. 금고로 나온 나를 반겨준 것은 포테리오가 털어간 황량한 금고, 그리고 눈알을 베는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휭! 휘잉-!
작은 칼바람. 넓은 범위에, 커터칼로 죽죽-! 긋는 수준의 작고 날카로운 바람을 생성하는 마법이다. 그것들이 영주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방을 헤집어댔다.
작은 칼바람은 커터칼을 예시로 들었듯이 위력이 형편없다. 기껏해야 종이를 찢거나 벽지를 뜯고, 피부를 베는 게 전부. 초급의 방어막으로도 간단히 막을 수 있는 마법이다.
하지만 마법의 시전자가 7결 마법사인 마냐툴임을 명심해라. 그의 작은 칼바람은 (넓이만 따지면) 웬만한 25층 아파트보다도 넓은 영주성을 빈틈없이 채웠다.
부부북!
종이나 옷, 커튼, 이불 등이 세절기에 들어간 문서처럼 잘게 찢어진다. 나무는 표면이 북북! 긁혀서 톱밥이 온통 날아다닌다.
찢어진 종이, 면직물, 톱밥 등이 창고를 가득 채웠다. 날카로운 칼날은 벽돌마저 긴 상흔을 남겼다. 이런 일이 영주성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작은 칼바람이 영주성을 돌만 남기고 모든 것을 찢고, 갈았다.
이 영감이 대충 뭘 노리는 지 알 것 같다. 나는 재빨리 창고를 나가 1층 복도로 뛰었다. 그렇게 허겁지겁 가까운 창문으로 달리는 내 등 뒤에서, 내 코앞에서, 복도에서, 지나치는 옆방에서 주황색 무언가가 등장했다.
스파크다. 화염 마법을 배우기 전에 배우는 기초 중의 기초 마법, 스파크 생성. 하지만 말했듯이, 마냐툴은 이종족 연합지역에서도 흔치 않은 7결 마법사이고 그의 실력이라면 영주성 어디든 간에 원하는 곳에, 원하는 만큼 스파크를 만들 수 있다.
작은 칼바람에 의해 곱게 잘게 갈린 나무와 종이, 직물. 그리고 영주성 곳곳에서 발생하는 스파크. 이제 마냐툴이 뭘 노리는지 다들 알 것이다.
‘이 노인네가 진짜!’
나는 당장 보호막을 펼쳤다. 내가 아닌, 내가 든 보물 상자를 보호막으로 감싼다. 그런 뒤, 망설이지 않고 전력으로 달려서 깨진 유리창으로 튀어나왔다.
유리창을 뛰쳐 나온 그 순간, 영주성 곳곳에서 생긴 수천 개의 스파크가 종이를, 직물을, 톱밥을 태웠다. 불꽃은 순식간에 가까운 가연물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렸고, 커진 불꽃은 또 다른 가연물을 불태우며 계속해서 몸집을 키웠다.
연소-화염-전달-연소-화염… 의 수없는 반복. 즉, 분진폭발이다. 그것도 영주성 전체를 화약고로 삼은 분진폭발!
꾸과광!
“끄억?!”
내장이 뒤집어지는 충격파가 내 등을 덮쳤다. 등 뒤가 후끈! 달아오르고 사방이 불꽃에 휩싸였다.
급격한 팽창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영주성이 말 그대로 터졌다. 영주성을 이루는 돌덩이가 조각조각 해체되어 마치 화산탄처럼 사방으로 날아가고, 100미터도 넘는 높이까지 주황색 불길이 솟구쳤다.
퍼버벅!
크고 작은 돌덩이가 등을 때린다. 브레스에도 멀쩡하던 머리카락이 화염에 닿아 둘둘 말린다. 나는 그 와중에도 보물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영주성을 터트린 팽창압이 나와 보물 상자를 저 멀리 있는 산으로 날렸다.
파사삭! 콰드득! 꿍!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눈밭을 구르다가 뒤통수에 짱돌이 꽉!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일어섰다.
뒤통수가 얼얼하다. 뒷머리를 더듬거리니 손바닥이 축축하다. 익스퍼트 여덟 명과 6결 마법사하고 싸울 때도 나지 않았던 피가 아군의 트롤짓에 흘러나왔다. 뭐, 이딴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냐.
“씨발!” 잘 가다가 모양 깨지게 이게 뭔 짓거리야.
나는 투덜거리며 비밀 창고에서 챙긴 걸 확인했다. 다행히 품안에 있던 천상의 눈물인지 똥 구정물인지 뭔지 하는 건 안 깨졌다. 보물 상자에 담아놓은 보물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담겨있었다.
대충 획득물 확인이 다 끝났을 무렵, 네 명의 사람이 허둥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각자 산더미만 한 짐을 한 덩이씩 짊어진 뮤온 보트라, 펙, 포테리오. 그리고 만병의 근원인 마냐툴이었다.
“쟈기! 이런 미친! 저 안에 있었냐!”
마냐툴이 나를 보자마자 이딴 소리를 한다. 나는 화가 나서 보물 상자에 있는 보석을 하나 꺼내 그에게 집어 던졌다.
“그럼 있었지 없었겠습니까? 아니, 사람이 뻔히 남아있는데 그걸 터트려요? 너무한 거 아닙니까?!”
“나, 나, 나는 몰랐지! 네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모르긴요!”
“진짜다! 진짜로 몰랐어! 네 기운이 안 느껴져서 먼저 가서 도망칠 준비를 하는 줄 알았다!”
“……진짜?”
“진짜로! 그, 그렇지 않습니까? 신화검?”
마냐툴이 급히 뮤온 보트라의 동의를 구한다. 뮤온 보트라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진짜로요? 일부러 한 게 아니라고?”
“쟈기, 10년도 더 전의 네 은신술이 내 이목조차 속인 걸 기억해라. 지금의 네가 마음먹고 숨는다면 설사 나나 백색의 마냐툴 경이라도 너를 찾지 못한다.”
슬그머니 펙과 포테리오를 보니 둘의 얼굴에도 같은 기색이 떠오른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이 이상 화내기는 뭐 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보물 상자를 들쳐업었다.
“알겠어요. 어서 도망이나 칩시다.”
내가 절뚝거리며 마냐툴에게 다가갔다. 마냐툴이 뻘쭘한 얼굴로 그와 우리들을 안고 초장거리 비행 마법을 써서 공작령을 벗어났다.
뭉게뭉게!
멀어지는 공작령. 나는 연기를 잔뜩 피우는 영주성을 내려다보며 이번의 성과를 간략하게 요약했다.
테헤반 공작령의 베이터 댐 습격 작전 개요… 대성공.
아니, 여기에 한 줄을 더 추가한다.
부상자. 쟈기 1인. 아군 오폭에 의한 화상, 타박상, 골절상 그리고 두부외상을 비롯한 여러 내상.
완벽한 마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