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381
381화
* * *
구오의 싸움이 끝난 지 7일 차.
국경과 대수림, 영지 보호를 위해 파견된 지휘관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 중요 인물이 초장거리 통신 마법진이 설치된 마탑 최상층에 모였다.
빛의 수호자가 보낸 얼토당토 않은 개소리를 분석하고, 대응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참석한 이들 중 고위 마법사는 북동쪽 국경, 슈라드 영지를 맡은 시즈믹스만이 빠르게 올 수 있었다.
“…그래서. 이상이 오늘 오전에 중앙 대륙이, 빛의 수호자가 보낸 통신의 전체 내용입니다.”
나는 그들이 모이자마자 통신 내용 전문을 공개했다. 동시에 이종족 연합지역, 알테어, 데일리케 등에서 온 메시지도 처리하며 답장을 보냈다.
“흐음…….”
이스마일 반데스가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통신 마법진을 노려보았다.
나는 이종족 연합지역에게 통신을 보낸 뒤, 뒤를 돌아보아 그에게 물었다.
“바로 반박문을 내놓으면 되지 않을까요?”
시즈믹스가 작게 쌍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어. 르암인이 이종족에게 가진 꺼림칙한 감정을 제대로 노린 성명서다.”
“예? 꺼림칙한 감정이라뇨?”
나는 시즈믹스의 발언에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르암인이 이종족한테 꺼림칙한 감정을 품을 게 있나?
내 표정을 읽은 소니아가 추가 설명을 해주었다.
“쟈기, 우리와 다르게 평민 중 절대다수는 죽을 때까지 순수 이종족을 구경해보지 못해. 그들에게 순수한 이종족은 신비로움과 관심, 그리고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야.”
“신비로움과 관심은 알겠는데 뭐가 부럽고 뭐가 질투가 나는 겁니까? 어차피 거기도 똑같은 사람 사는 세상인데.”
“왜 안 부럽겠어? 50살만 넘어도 반세기를 살았다고 마을에서 축제를 벌이는 르암인과 다르게 단명족도 300년은 사는 게 이종족이야. 똑같은 외형에 똑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반백 년도 못 살고, 누구는 삼세기는 거뜬히 살면 당연히 부럽고 질투 나지 않겠어?”
아, 옛날 지구하고 다르게 여기는 60살 축하가 아니라 50살 축하 잔치를 해? 세상 엄청나게 막장이다.
하긴 따지고 보면 우리와 다르게 마나를 익히지 못한 일반인은 살기 퍽퍽한 게 이세계다. 젊은이들도 마을 밖으로 잘못 나갔다가 몬스터한테 죽는 게 일상이나 다름없는 세상이었다.
그렇듯이, 마나 유저 이상과 마나 유저도 되지 못한 일반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수명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리고 당장 20년 전만 해도 현 인류의 99% 이상이 마나 유저는커녕 입문조차 못한 범인(凡人).
수명 차이가 극단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르암인들의 눈에 짧게 살아도 300년을 사는 이종족은 말 못한 부러움의 대상이리라.
내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자니, 이스마일이 조용히 흑마법 정신 조작의 기본 원리 중 하나를 입에 담았다.
“감정은 방향성이 있고, 각 방향성은 세기가 있다. 분노, 공포, 질투와 같은 음습한 감정은 다양한 방향성으로 갈라진 감정의 세기를 하나로 합칠 수 있다.”
그의 설명이 핵심을 관통했다. 그 이전까지는 이종족을 오지에 사는 신비로운 장생종 또는 서쪽 대륙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소문만 무성한 이종족의 천국으로만 알고 있던 르암인 대다수.
여기서 여론을 반전시킨다. 이종족에 대해 품고 있는 부러움과 동경, 질투, 신비로움 등의 여러 복잡한 감정의 방향성을 이번 한 번에 적개심으로 바꾸어버리는 것.
싫어, 싫어, 싫어가 엄청나게 좋아로 바뀌듯이. 좋아, 좋아, 좋아가 엄청나게 싫어로 변한다. 한 번 싫어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린 르암인은 더 이상 이종족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리라. 정확하게는 그런 식으로 빛의 수호자가 여론조작을 하겠지.
수백 년은 거뜬히 사는 수상쩍은 종족이 자기네 세상을 침략하러 왔다! 인류를 위해 일어나라 르암인이여! 대항해라 르암인이여!
뭐, 대충 이런 식으로 말이지.
말은 되는 것 같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아리쏭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습니까? 30년 전의 투쟁의 시대를 종식하는데 이종족 연합지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한순간에 이종족에 대한 평가를 반전시킨다고요?”
시즈믹스가 헹! 하고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길게 갈 거 있나? 어떠한 집단, 사물, 개념에 대해 공동체의 인식이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년은커녕 10년도 길다고.”
“에이. 노인네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거겠죠.”
“오, 그러신가? 다섯 개의 기초검술과 천공구투검을 전 영지에 풀어서 단 5년도 안 되는 사이에 마나 운용술과 검술에 대한 인식을 국가적으로 변화시킨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참 놀랍군.”
나보다 더 냉소적인 인간이 여기 있었군. 하지만 예시를 든 걸 보니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시즈믹스가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비웃듯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30년 전의 은혜 따위야. 온 권력자가 대대적으로 개새끼, 소 새끼, 씨발 새끼라고 욕하고 다니고, 그럴듯하게 조작한 정보를 눈과 귀에 쑤셔 넣으면 그거에 휘둘려서 한 달도 안 되어 평가를 반전시키는 게 집단이고, 대중이지.”
“험. 험. 시즈믹스 경.”
이스마일이 헛기침하며 시즈믹스의 적절치 못한 단어 선택을 지적했다. 시즈믹스는 고풍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본인이 한 말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
나는 시즈믹스가 한 발언을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납득했다.
‘그렇긴 하네. 지구에서도 비슷한 짓을 많이 했지.’
여론조작, 자극적인 정보에만 집중하는 인간 특유의 군중심리를 바탕으로 국가 단위의 초거대 집단을 자기 수족대로 부리는 정당을 창안. 그런 예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비유를 들 필요도 없다.
빛의 수호자 쯤 되면 사람들을 부려서 대대적인 흑색선전을 하기도 쉽겠지. 그걸 달성하면 다음으로는…….
“아으…!”
모르겠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이런 식의 복잡한 정치전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내가 잘하는 건 죽이고 부수는 거지, 쪼잔하게 펜대나 굴리는 게 아니라고.
나는 머리를 마사지하며 핵심을 물었다.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바로 말했네. 이게 핵심일세.”
이스마일 반데스가 통신 내용이 적힌 문자의 어느 한 부분, [범국가적인 르암인 연합]을 짚었다.
“중앙 대륙, 빛의 수호자로만 이종족 연합지역하고 싸우면 필패. 그러니까 중앙 대륙 대 이종족 연합지역이 아니라 르암인 대 이종족 연합지역으로 범위를 확대하겠지. 그걸 위해 이종족에 대한 악평을 퍼트린 거네.”
그러며 이스마일은 앞으로 며칠 안에 중앙 대륙 북단의 군소 왕국, 남서쪽의 소왕국 연합국, 게리소님은 물론이고 알테어까지 외교 사절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듯이 말했다.
사절이 제안할 내용은 아마 이럴 것이다. 현재 우리는 르암인의 인종적 말살 위기에 놓여있다 어쩌구 저쩌구… 우리와 함께 간악한 이종족의 침략을 몰아내서 이러쿵저러쿵…….
거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절하면 인류를 배반하고 이종족에 붙은 사악한 배신자 무리로 낙인찍히고, 전 대륙의 적이 된다.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인류 배반? 유전자는커녕 원소 기호도 다 발견하지 못한 미개한 이세계인 따위가 인종 같은 단어를 입에 담다니…….’
“잘났네요. 아니, 현시대에 순수한 르암인이 있기는 합니까? 특히나 왕족이나 귀족 가문은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종족의 피가 섞였잖아요.”
“다르지. 그분들은 고귀한 핏줄이고, 이종족은 께름칙한 먼 나라의 침략자야.”
소니아가 가만히 대화를 듣다가 손뼉을 쳤다.
“아! 그렇군요! 생각해보면 구오도 다름 노림수가 있었던 것 같네요.”
“구오도요? 그냥 이종족 연합지역과 관련이 있는 지 확인하고, 증거 숨기고, 다 때려 죽이고. 그거 말고 또 있다고요?”
“이기든 지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쟈기, 어차피 그들의 목숨은 이종족 연합지역에게 악평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기왕이면 이기는 게 좋지만(그래서 신무기도 준 거지만), 져도 나쁠 건 없다. 이기면 포로를 개처럼 끌고 다니면서 동네방네 떠들 수 있고, 지면 수만 명의 죽음을 입에 담음으로써 적개심을 더욱 키울 수 있지.
그리고 구오 침략은… 더할 나위 없는 대패(大敗)! 10만 중 절반 가까이가 구오에서 뼈를 묻었고, 나머지 절반도 반경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밀림을 빠져나와야 한다.
아무런 야생동물의 위협이 없다 할지라도 적절한 생존기술을 익히지 못했으면 밀림은 죽음의 땅이 된다. 더군다나 구오의 밀림은 몬스터까지 있다.
그다지 강한 녀석들은 아니고, 식량으로 쓰는 동물형 몬스터. 그러나 중요한 게 ‘강한 녀석들이 아니다.’라는 기준은 집단사냥, 전문 사냥꾼, 마나 유저 중급 이상의 능력자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동물형 몬스터는 아무리 약해도 야생 멧돼지는 우습게 잡아먹는다. 그런 괴물을 군사 훈련만 받은, 뿔뿔이 흩어진 일반병이 상대할 수 있길 바라는 건 오만이겠지. 아마 도망친 5만 중 대다수는 밀림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10만 명의 목숨을 미끼로 한… 악의적 선전이군요.”
“그럴 거네. 아마도, 확실히.” 이스마일이 말했다.
“저희가, 아니, 이종족 연합지역이 먼저 선수를 치면?”
“당연히 하겠지. 하지만 별 효과는 없을 거야. 중앙 대륙의 인간은, 르암인은 이미 이종족에게 적의를 가졌을 테니, 나쁘게 받아들일 거야.”
“후우……!”
통신 마법진에 있는 이들은 열 명이 넘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복잡한 한숨만 내쉬었다.
빼앗긴 선수. 십만 명의 목숨을 희생양 삼아 설치한,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함정. 앞날이 어떻게 될지 도저히 가늠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이스마일 반데스가 심각한 얼굴로 수신되었음을 알리는 통신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각오 단단히 하게.”
우리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단순히 중앙 대륙이, 빛의 수호자가 아니라 르암인 대다수를 적으로 돌릴 각오를.
그 다음날. ‘천운으로’ 또는 ‘우연으로’ 밀림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일반병의 증언을 통해 구오의 사정이 더욱 정확하게 알려졌다.
암습과 대량의 폭발로 후방을 혼란에 몰아넣는 사악한 수작. 수천 명이 넘는 이종족이 우람한 무기를 앞세워 르암인을 가축 도축하듯이 무참하게 썰어 죽인 것.
스무 명에 달하는 익스퍼트가 ‘같은 인간’에게 하는 짓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기계적으로 병사들을 죽이던 공포의 현장. 살기 위해 도망치는데도 용서 없이 추적해서 동료를 죽이던 천인공노할 전쟁범죄.
자기네들이 한 짓은 쏙 빼놓고, 구오를 마왕의 전진기지처럼 묘사한 글솜씨가 일품인 증언이었다. 심지어 이 증언도 전날의 성명서처럼 대륙 어디에서든 신호를 받을 수 있게 강력한 통신 파장으로 보냈다.
나는 빛의 수호자의 쪼잔한 짓거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선전 한 번 오지게 하네.’
아니, 먼저 습격한 건 그쪽이잖아. 거기에 시가전 안 치르겠다고 마법으로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리면서 전진까지 했으면서.
나중에 조사하니까 상급 마나석을 세 개나 써서 광범위한 지면 흔들기까지 썼다. 지면 흔들기는 진도 2~3수준으로 지표면만 살짝 흔드는, 들어가는 힘에 비해 효과는 크지 않아 사장되다시피 한 마법이다.
하지만 내진 설계를 모르는 구오의 건물 특성상 지진 흔들기에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지난 일주일 간, 매일 수십 채가 넘는 3층 이상의 건물이 쓰러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추가 피해를 보았다.
“중요한 건.”
메시지를 확인한 이스마일이 말했다.
“이제 곧 우리에게도 올 거다.”
북서쪽의 펜로스냐 북동족의 슈라드냐.
인류 연합국인지 범인류 연합인지 이름은 모르겠다만, 이종족에 대항하는 범국가적 단체로 들어오라는 제안이 둘 중 한곳을 통해 올 것이다.
절대로 그냥 오진 않겠지. 아마 구오 때보다도 배는 더 많은 병력을, 배는 더 질적으로 뛰어나고 배는 더 뛰어난 마법 무구로 위장한 이들이 무기를 앞세워서 올 것이다.
목에 칼을 들이밀곤, 합류냐 멸망이냐의 가혹한 이지선다를 걸겠지.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음은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 * *
3일 후.
우웅!
한 시간에도 열 번씩 작동하던 초장거리 통신 마법진이 다시 불을 내뿜었다. 마법 회로를 검사하던 나는 이번의 통신이 소형 오온의 눈을 통해 보내져 온 것임을 알았다.
소형 오온의 눈, 알테어 아니면 게리소님 내부의 고위 마법사. 소형 오온의 눈이 보낼 수 있는 거리를 고려하면 게리소님이겠지.
마법 회로를 해석해 메시지를 읽자 슈라드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아침, 저 멀리서 끝이 보이지 않는 무장병력이 다가온다고 시즈믹스가 통신을 한 것이다.
나는 바로 이스마일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익스퍼트의 절반과 이스마일은 다른 곳의 습격을 대비해 이곳에 남아있고, 소니아를 포함한 나머지 익스퍼트 절반은 나와 함께 슈라드로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나는 익스퍼트를 데리고 초장거리 이동 마법을 발동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쉘리 반데스는 뭐 하고 계십니까.”
“아버님은 지하에 계신다. 그리고 쟈기 공, 그분의 힘을 빌리는 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애초에 그분의 목적은 이런 게 아니야.”
게리소님은 이스마일의 꿈. 소드 마스터는 소니아의 꿈.
렉시놈이 렉시놈이 아니게 되는 것. 과거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양지로 나오는 것이 쉘리 반데스의 꿈이었다. 게리소님이라는 국가로 꿈을 이룬 이상, 그 이후의 일은 쉘리 반데스에겐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중간 목적을 이루었으니, 그가 셜리반이었을 적부터 꿈꿔왔던 최종 목표를 향해 쉴 새 없이 달려갈 뿐이었다.
그렇게 말한 이스마일이 절박한 어투로 나를 말렸다.
“그분의 도움을 바라지 마라. 아무리 변장을 하고 몰래 도움을 줘도 신화검처럼 그분의 정체를 알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설령 그렇지 않더라 할지라도 그분을 내보내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야.”
“어째서입니까.”
“쉘리 반데스는 인생의 3분의 2 이상을 흑마법사로 살았다. 지금은 흑마력도, 흑마법도 버렸다지만, 전쟁이 격화되고 무수한 시체가 쌓인다면 과거의 잔혹한 손버릇이 나올 수도 있다.”
흑마력을 버려도,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쉘리 반데스는 쉘리 반데스였다. 그가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적군의 완벽한 몰살을 의미했다.
“인간이 싸우는 일이다. 인간의 일에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가 간섭하면 다가올 것은 파멸이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스마일의 말이 맞았다. 승천자의 감각을 지닌 지금의 나조차도 쉘리 반데스가 어떠한 경지에 이르렀는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진지하게 파고든 무학과 다르게 이번 생에 막 집중한 마학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쉘리 반데스의 경지는 인류의 한계를 아득하게 벗어난 것이 확실했다.
그는 최소 8결. 아마도 분명하게, 8결을 넘어섰다. 그렇다면 그는 9결의 마법사일까? 아니다. 이종족 연합지역의 마법 체계는 8결을 뛰어넘는 이론을 쌓지 못했다.
이종족 연합지역을 포함하여, 내가 조사한 현시대 인류의 그 어떠한 마법 체계도 8결을 뛰어넘는 마법 이론을 확고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쉘리 반데스는 그 경지를 개인의 능력으로 뛰어넘고 있는 중이다.
[더욱 큰 파도가 올 것이야.]언제였나. 2년도 더 전, 뮤온 보트라가 게리소님을 떠난 것을 보고하러 왔을 때 쉘리 반데스가 내게 경고할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작은 연구실에서 예측했음에도 의도적으로 외부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걸 생각해보면 그 발언은 내게 하는 경고이자 본인에게 하는 경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약 그를 억지로 꺼낸다면?
홀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를 개척하는 광기의 전 흑마법사가 수십 만 단위의 사람들을 소재로 마법의 위력을 확인하고자 한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참 소름 끼치는 결말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알겠습니다.”
나는 더는 이스마일을 설득하지 않고 소니아와 익스퍼트, 내가 들고 갈 수 있을 만큼의 병력과 물자를 짊어진 채 초장거리 비행 마법진을 이용하여 슈라드로 날아갔다.
무게가 워낙 많아서 속도를 줄인 채, 한 시간 정도를 날아 도착한 슈라드의 성.
수천 명이 넘는 병사가 단단히 무장을 한 채 성벽에 자리를 잡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영주성에 내린 우리는 주변의 눈치도 신경 쓰지 않고 전력으로 북쪽 성벽을 향해 달렸다.
북쪽 성문, 성벽 위. 멀찌감치서 소니아의 접근을 확인한 펜 슈라드 백작이 성벽에서 뛰어내린 후, 무릎을 꿇었다.
척!
“오셨습니까. 공주님.”
“음.”
소니아는 짧은 말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마주 무릎을 꿇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보지도 않고 한걸음에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나도 마법으로 다른 이들을 보조해주며 그녀를 따라 성벽에 발을 디뎠다.
지난 2년간 증축에 증축을 거듭해서 높이 30미터가 넘게 솟아오른 높은 성벽. 성벽 너머로는 몰려오는 난민을 통제하고, 원활한 감시를 위해 인근 일대의 나무를 싹 밀었다.
그 덕분인지 우리쯤 되는 실력자라면 망원경이나 멀리보기 마법의 도움 없이도 수 킬로미터 너머의 평야에 자라란 들풀도 볼 수 있었다.
우직!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수를 세기도 힘든 막대한 물량을 자랑하는 적군 무리가 들풀을 짓밟아가며 슈라드로 다가오고 있다.
수는 나도 추측이 되지 않는다. 십만은 무조건 넘은 것 같은데… 밀집 대형으로 다가오니 정확한 숫자를 모르겠군. 밀림과 다르게 평지를 통해 와서 그런지 저만한 수가 주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엄청나군.”
수만 위협적이냐?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외형도 위협적이다 못해 끔찍, 아주 끔찍깜찍했다.
통일된 복장과 높게 솟은 예기, 황금색 수실로 화려하게 짜인 군기(軍旗). 그리고 황금색 털을 자랑하는 음… 말? 전체적으로 말하고 비슷한데 외형은 사자나 호랑이를 닮은, 체고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짐승 수백 마리가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긴다.
“황금 야수단까지 데려왔습니다. 작정했군요.”
황금 야수단이 뭔지 모르겠는데, 대충 옛날 기억으로 감을 잡으면 이종족 연합지역에서 본 돌격 대대하고 비슷한 이들 같았다.
그러니까. 아주 잘근잘근 밟아놓겠다는 의도가 훤히 드러나는 인선이었다. 나와 슈라드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듯이 소니아를 바라보았다.
소니아가 고민하지 않고 검을 빼 들었다. 그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전투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