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421
421화
* * *
추락한 천공요새.
지속형 브레스에 4분의 1이 날아가고, 옆으로 밀쳐지는 와중에도 이곳저곳이 떨어지고… 그 난리를 겪었음에도 천공요새는 여전히 거대했으며, 질량 또한 막대했다.
그만한 물체가 추락한 장소는 그야말로 세기말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처참한 광경을 자랑했다. 부서진 물건, 우그러진 쇳조각. 아직도 불이 군데군데에서 피어나고, 시커먼 연기가 올라온다.
수천 명이 넘는 시체는 산산조각이 나서 잿빛과 흙빛 세상을 검붉게 칠한다. 정체를 알 수 없고, 용도 또한 알 수 없는 쇳덩이가 곳곳에 널려있었다. 작은 건 나사보다 작고 큰 것은 대형 트럭도 감쌀 정도로 커다랗다.
쇳덩이가 널브러진 범위는 운동장 스물다섯 개를 5*5로 배치해도 부족했다. 일백 개를 10*10으로 배치해도 이 고철 쓰레기장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 수만 대를 분쇄기에 갈아서 넓게 흩뿌려도 이보다는 깨끗할 것이며, 쓰레기 수거함 수십만 대에 담긴 쓰레기를 몽땅 풀어헤쳐도 이보다는 정리가 잘 되어있을 것이다.
웬만한 중소 도시 하나보다도 넓은 땅덩어리. 수만 명이 살아갈 수 있을 만한 공간에 남은 것이라고는 재생 불가능한 쓰레기, 재활용 불가능한 유기물, 죽어버린 인간들뿐.
비명조차 없는 장소.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무엇인가가 타는 소리, 쌓인 쓰레기가 무너지는 소음뿐.
“으아!! 으아아!!!”
아니, 한 사람이 있었다. 시커먼 잿가루로 뒤덮인 세상에서 누군가가 파헤쳐진 흙과 원형을 알 수 없는 고철 더미를 빠져나오며 절규했다.
그자의 외형은 알기 힘들었다. 마네킹을 화염방사기로 골고루 태우고, 넝마조각을 시커먼 재로 정성스럽게 장식한 옷을 입은 이의 외모를 분간하기란 아무래도 힘들었다.
그저, 목소리로 보아 남성이라고만 짐작할 뿐.
“끄아악!”
남성이 비명을 지르며 질질질- 타버린 몸을 부러진 팔로 끌어서 쓰레기 더미를 빠져나온다!!
그렇다. 그는 걸을 수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는 이의 허리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싹둑! 잘린 듯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있었다.
“왜 이러는 거야 대체!! 내가 다 해줬잖아!”
허리의 절단부위에서 내장과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그의 외침은 줄어들 줄 몰랐다. 죽어가는 이의 가느다란 비명이 아닌, 합창단의 대표 성악가도 따라올 수 없는 막대한 성량을 자랑했다.
그가 그 엄청난 생명력과 성량을 오롯이 알 수 없는 분노를 토해내는 데 사용했다. 허리가 잘린 몸을 이끌며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내지르다가, 제 분을 못 이겨서 땅을 주먹으로 꽝꽝! 내리찍으며 울분을 토했다.
“먹여 달라 해서 먹여주고! 재워 달라 해서 재워주고! 도와 달라 해서 도와주고! 가르쳐달라 해서 가르쳐주고! 살려 달라 해서 살려주고!!”
꽝꽝꽝!
허리가 잘린 인간이 힘도 좋다. 힘이 어찌나 센지 주먹이 땅을 때릴 때마다 땅속에 묻힌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근처의 대지가 우르릉! 흔들렸다.
그러며 그가 빠져나온 쓰레기 산도 무너진다. 무너지는 쓰레기 산속. 쓰레기 산의 중심에는 본래 어디에 썼는지 알 수 없는 마름모꼴의 거대한 금속판이 콕! 박혀있었다
“부탁 다 들어줬잖아! 너희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잖아! 그래서 내가! 내가 큰 거 바란 것도 아니잖아! 근데 왜 그 간단한 거 하나 못 해서 이 지랄을 내놓는 거야!!”
그 판의 뒤에 아직도 부들거리며 근육을 달달 떠는 하체만 남은 살덩이가 있었다. 하체는 무선 인터넷으로 연결이라도 된 것처럼, 남자가 절절히 분노의 말을 토해낼 때마다 그에 맞추어 근육을 움찔! 움찔! 했다.
“대체 왜! 뭣 때문에!! 너희는 대체 뭐가 문제여서 그거 하나 못 해서 사람 기분을 이렇게 망쳐놓는 거냐고오오!!”
광인과도 같은 절규를 내뱉는, 타고 부러진 상체만 남은 고목나무. 또는 상체만 남은 타다 만 마네킹.
그것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여섯 명의 인영이 있었다. 그들 중, 지게에 실린 노인네가 상체만 남은 인간을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피오드가 말했다.
“맙소사. 정말 살아있었군.”
* * *
“끄아아아! 이 씨발 개새끼들아!”
상체만 남고도 기력이 죽지 않은 쟈기!
쉘리 반데스가 외눈을 번뜩였다.
“브레스를 저 새끼한테 쐈어야 했어.”
“대마법사 쉘리 반데스여. 그랬다가는 천공요새가 밑으로 추락하고 다 끝났을 것입니다.”
살저 하라한이 그리 말하며 화를 내는 쟈기를 탐색했다.
“그 지랄 좀 하지 말라고 말로 할 때 들으면 안 되겠냐! 지구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다 개 씨발 쌍것 새끼들만 줄줄이 사탕처럼 나오고 지랄이야!!”
여전히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하며 분노를 내비치는 쟈기. 카보머가 그가 하는 말을 듣다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이 턱을 긁적였다.
“근데 쟈기 공작은 왜 저리 맛이 간 거지?”
“어…….”
피오드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더니 태연하게 헛소리를 지껄였다.
“숨겨진 흑마법 삼대 지파, 살의 렉시놈이 빛의 수호자에 있었습니다.”
“뭐, 뭐라고?!”
카보머가 화들짝 놀라 피오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카보머만이 아니라 제 발 저리는 쉘리 반데스와 뮤온 보트라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피오드를 응시했다.
“!!”
“?!”
그 모든 시선을 받으며, 피오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서 자세한 건 모르겠다만, 빛의 수호자가 렉시놈의 저주 마법으로 저희 중 누군가를 저 꼴로 만들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쟈기 공작이 당해서… 저렇게 사이좋게 공멸했죠.”
“……저, 정말인가? 그게 정말이야? 레, 렉시놈이 빛의 수호자에……?”
카보머가 믿을 수 없는지 다른 이들에게 묻는다. 가장 먼저 시선을 받은 이는 살저 하라한이 고집스럽게 위대한 마법사, 대마법사라고 부르는 쉘리 반데스였다.
쉘리 반데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응. 맞아. 천공요새 습격할 때, 안에서 흑마법의 마법 회로로 보이는 인체실험실을 목격했어. 쟈기 공작이 그걸 보고는 눈이 뒤집혀서 다 때려 부수다가… 어떤 놈이 저주 마법을 걸더니 완전히 돌아버렸더군.”
“허! 그때 쟈기 공작이 맛이 간 거군!”
“어… 음. 그렇지. 딱 그때야. 그치? 다들?”
쉘리 반데스가 고개를 돌려 해피 등과 눈을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해피가 정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정확하오. 나는 검사라서 잘 모르겠는데, 내가 봐도 한눈에 이상한 실험을 하고 있더군.”
“이상한 실험… 혹시 악신의 살은 못 보았소? 흑마법 삼대 지파라면 그 저주받은 물건이 있을 텐데.”
“아! 악신의 살! 그거 있잖아, 액화 마나석. 그거 생산할 때 악신의 살이 쓰였어. 살의 신(身)은 액화 마나석 생산을 비롯한 강화병에게, 살의 기(氣)는 천공요새의 에너지 투여에, 살의 정(精)은 천공요새에 자리 잡은 고위직이 사이좋게 나눠 먹었어.”
“아하!”
“쟈기 공작은 맛이 가서 도와주질 않지, 신화검은 브레스에 휘말려서 다쳤지. 나하고 해피 알테어만 가지고 그들과 싸우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 뭔가.”
“힘들었겠군.”
“힘만 들었다마다? 막 변신에 수정 창에… 무슨 검붉은 폭발 마법까지… 처음 보는 공격마법을 마구잡이로 쓰더군.”
쉘리 반데스는 ‘어째선지 모르지만’ 과거 렉시놈이 썼을 법한 몇 개의 유명한 공격 마법과 수명을 담보로 한 인체 변이를 입에 담으며 악신의 정을 나눠 먹은 이들과의 전투를 그럴듯하게 묘사했다.
“마지막에 파이먼의 파괴 광선이라고 보랏빛 뭔가를 쐈는데 그거에 정말 죽을 뻔했어. 그렇지 않나? 해피 알테어?”
“어, 으음… 그, 그렇소. 내 상처도 그 파인…만?의 광선에 노출된 피오드 재상을 보호하려다가 입은 거지.”
살저 하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군! 저희가 수집한 렉시놈 일파의 고유한 고위 마법과 특성이 일치합니다! 정말… 빛의 수호자 이 악랄한 놈들이 정말로 천공요새에서 렉시놈과 손을 잡았어.”
“아, 아니. 손을 잡은 건 아닌 것 같아. 흑마력을 쓰는 놈들이 없었으니까. 아마 잡혀서 지식만 뽑히고 팽당하지 않았을까?”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한데, 다른 잡스러운 놈들은 신경 쓸 거 없지만, 렉시놈의 수장인 셜리반 델린저는 만만치 않은 이니 살아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혹시 그자를 천공요새에서 본 적이 없습니까?”
“어…….”
쉘리 반데스가 입을 오므렸다. 그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관자놀이를 긁었다.
“그, 그자의… 누구? 셜리반? 지금 살아있으면 몇 살인데? 아니, 아예 처음 듣는 이름이라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는데? 진짜로. 찍고, 진짜로 모르겠어.”
“그렇군요. 셜리반 델린저는 지금까지 살아있으면 백 예순이 넘었을 남성 흑마법사입니다. 외모는 대마법사 쉘리 반데스보다 눈꼬리가 조금 위로 올라갔고, 목의 흉터는 이렇고, 동공 색은…….”
정확하다. 어디서 이런 정확한 정보를 얻었는지 모르겠는 쉘리 반데스였다. 그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출정 전에 성형수술을 한 것을 백번 칭찬했다.
쉘리 반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뮤온 보트라가 대신 답했다.
“비슷한 머리색과 동공을 한 이는 본 적이 있다. 다만,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었고, 걸을 수 없는 대형 짐승만 한 살덩이 괴물이 되어 유리통 안에 갇혀있었다. 막 우리가 침입했을 때, 그곳에 갇혀서 연구원에게 피와 체액을 뽑히고 있었지.”
“호오… 더 자세한 건 보았소이까?”
“아니, 아니아니. 절대로 아니. 딱 그즈음에서 정신이 나간 쟈기 공작이 오러 블레이드로 실험실을 통째로 가루로 만드는 바람에 그 이상의 것은 보지 못했다. 다만, 몇 기의 특이한 마법 회로는 쉘리 반데스가 보았으니, 상황이 정리되면 그에게 마법 회로를 받도록. 어떤가, 쉘리 반데스 부왕. 가능하겠나?”
“아, 아아… 그, 그럼! 아주, 아주아주아주아주 특이하고 처음 보는, 완전히 초면인 마법 회로였어. 어찌나 신기한지 뇌리에 딱 잡히더군.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보여줄 수 있네. 일단 기억나는 대로 몇 개만 꺼내보자면…….”
쉘리 반데스가 ‘우연히’ 본 렉시놈 지파만의 고유한 마법 회로 몇 개를 바닥에 그렸다. 그것을 보고는 살저 하라한이 손뼉을 쳤다.
“정확해! 저희가 조사한 렉시놈 지파의 고유 마법 회로와 똑같습니다! 어째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의 수백 개가 넘는 마법 지파를 뒤졌는데도 보이질 않더라니!”
와. 그걸 또 일일이 뒤졌어? 수십 년 동안? 쉘리 반데스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겨우 한숨을 넘긴 그는 식은땀이 차갑게 흐르는 느낌에 눈동자를 슬쩍 옆으로 굴렸다. 그의 옆, 피오드가 가만히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
지그시……………. 피오드는 자신이 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완성하는 쉘리 반데스와 뮤온 보트라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두 노인네는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카보머는 이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눈치채지 못하고 혀를 찼다.
“역사를 장식한 흑마법 삼대 지파도 빛의 수호자에게 걸리면 한낮 실험체에 불과했군.”
역사. 흑마법. 쟈기가 게리소님에 있는 이유. 쉘리 반데스와 뮤온 보트라의 달변. 몇 개의 단서가 피오드의 머릿속에 혼잡하게 맴돌았다.
서서히, 단서를 정리하는 그의 눈동자가 의혹, 당혹, 의심, 확신의 순서로 변했다. 이윽고 단서를 조합하여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한 그가 탄성을 내질렀다.
“……!”
피오드의 입이 벌어졌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살며시 벌리고는 두 노괴물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바가 있는 쉘리 등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시선의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 기도는 헛된 것에 불과하다. 진실을 깨달은 피오드가 ‘아아……!’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경악하며 입을 가렸다.
그가 뮤온 보트라에게서 시선을 떼고 쉘리 반데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쉘리 반데스는 헛기침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돌연, 피오드가 허둥지둥 말했다.
“대강 다 끝난 듯한데, 볼일 들 보러 가시지요. 쟈기 공작의 마지막은 제가 보겠습니다.”
“음?”
피오드의 말을 듣자 살저 하라한이 의문을 표했다.
“무슨 소리인가. 재상, 쟈기 공작은 빛의 수호자의 술수에 죽기 일보 직전이다. 이종족 연합지역으로서 르암인의 역사를 뒤바꾼 전쟁 영웅을 이렇게 보내는 건…….”
“진정으로 그를 위한다면 더욱더 가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 국가의 병사들을 다루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유언을 듣겠다고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다가 더 큰 피해가 발생하면 쟈기 공작의 분전이 헛되이 됩니다.”
맞는 말이다. 그들은 한 국가의 또는 거대 연합체의 수장. 쟈기의 사정이 궁금하지만, 빛의 수호자의 멸망과 천공요새의 추락에 꼬리에 불이 난 것처럼 날뛰는 이천만의 사람들을 다루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해피 폐하. 폐하도 가시지요. 신화검도 데일리케를 정리하러 떠나셔야 합니다. 대신… 쉘리 반데스 부왕은 이스마일 반데스 폐하가 계시니 이곳에 남아 저 좀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피오드가 투명한 눈으로 쉘리 반데스에게 부탁했다. 쉘리 반데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몸이 성치 않아도 오고 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다들, 공사가 다망한데 여까지 와서 감사하오. 공작의 마지막은 제가 전해줄 터이니 각자 할 일을 하러 떠나길 바라오. 쟈기 공작은…….”
“아아아아! 썅! 씨발! 이 개 같은!!”
“저런, 아직도 힘이 넘치는군. 일을 다 처리하고 와도 쌩쌩하게 살아있을 듯하오니 신경 쓰지 말고 떠나시길 바라오.”
“…….” 카보머와 살저 하라한이 찜찜한 눈으로 욕설을 내뱉는 상반신 신인류를 보았지만, 이걸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쟈기는 게리소님 소속. 부왕인 쉘리 반데스가 남아있겠다는데 이 이상 사람들이 있을 필요는 없다. 왜 피오드까지 남아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들이 여기서 시간을 끌지 않고 떠나야 하는 것 또한 사실.
“…그럼.”
결국, 카보머 등은 짧은 인사를 나누곤 자리를 떠났다. 피오드는 근처의 돌에 등을 기대앉아 떠나가는 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뮤온 보트라는 못내 불안한지 떠나는 도중에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 그가 쉘리 반데스와 시선을 마주치며 연이어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발을 떼지 못하는 뮤온 보트라마저 저 멀리 사라지자 피오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 놀랍군! 아주 감쪽같았어!”
“…….”
“천국의 계단! 천국의 계단이라니!”
쉘리 반데스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천국의 계단이네. 피오드 재상.”
“그러시겠지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러실 겁니다.”
“믿는 건가?”
“아니오. 아, 믿긴 믿습니다만, 제가 믿는 건 당신이 아닙니다. 물론 그, ‘천국의 계단’에 속한 이들도 아니지요.”
“…그리하다면?”
“저는 당신이 아닌 다른 이를 믿습니다. 그자가 게리소님을 용납했다면, 제가 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게리소님이 엇나간다면… 백 년 후든 이백 년 후든 그자가 게리소님에 적절한 벌을 내릴 것입니다.”
“…협박하는 건가?”
“그렇게 들리셨다면, 예. 맞습니다. 쉘리 반데스 부왕이여. 조심하십시오. 당신들은 현재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에게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죽이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로지 게리소님과 그와의 문제입니다.”
“…….”
“명심하십시오. 부디. 명심하시고 또 명심하십시오. 알테어보다, 이종족 연합지역보다 무서운 인물이 당신들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정체를 숨긴 그를 대신해서, 당신들이 부디 그를 자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충고를 드리는 것뿐입니다.”
“오호라.”
여유를 회복한 쉘리 반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무시무시해서 도리어 믿을 수 없는 말이군. 그만한 인물이 누구인지 힌트라도 줄 수 없나?”
“얼마든지요. 그는…….”
“그는?”
피오드가 침을 삼키곤 말했다.
“그는 천족의 진정한 후손입니다.”
“…자네 농담하나?”
“그렇게 반응하니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 수 있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니. 아까부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아니오. 부왕, 알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알아야 할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여태까지 한 대로 당신은 그의 정체를 모르며 게리소님은 계속해서 게리소님으로 남아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할 말은 다 끝났으니 돌아가시든, 아니면 말대로 여기 남아 저 미친놈이 지랄 발광을 하다가 죽는 걸 구경하시든 마음대로 하시지요.”
“아, 잠깐…….”
피오드는 쉘리 반데스와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냈다. 그가 뮤온 보트라가 챙긴 짐을 뒤져 마법 무구를 꺼냈다.
천공요새에서 뮤온 보트라 등이 집히는 대로 챙긴 마법 무구. 그중에서 엑소 스켈레톤 계열의 강화외골격을 꺼내 착용한다.
촤르륵! 하고 새하얀 금속 뼈대가 피오드의 허리를 뒤덮고는 사지로 뻗어 나갔다. 그가 강화외골격의 도움으로 일어서서,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쟈기에게 다가갔다.
수백 미터를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 분통을 내지르는 쟈기의 앞에 온다. 피오드가 그를 내려다보며 고소를 지었다.
“이 미친놈아. 이제 화는 풀렸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