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00
신필천하(神筆天下) 100화
“사부님, 저는 정말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곁에 앉아 있던 유설이 넌지시 말했다.
“제 생각에는 양 소협이 사부님의 의발을 전수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이대로 학립관이 없어진다면 더욱 슬픈 일이 아니겠어요? 흑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가 흑표를 돌아보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때 지루한 표정으로 차만 마시고 있던 서요평이 불쑥 끼어들었다. 서운지가 부상을 입은 관계로 그 혼자만 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그딴 귀찮은 것을 왜 해? 안 하는 게 낫지!”
그 말에 단지겸은 내심 발끈했지만, 어제 진양으로부터 서요평에 대해 미리 들은 말이 있어 ‘끙’ 소리만 내며 참았다.
대신 그가 진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가 정말 귀찮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받아들이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다만 내가…….”
“지금 자네가 학립관의 관주가 된다고 해서 누구도 자네를 흉보지 않을 것이네. 또한 자네가 자만에 차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네. 그러니 복잡한 생각일랑 일절 거두고 학립관을 위해 나서주게나.”
진양은 단지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그로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갑자기 나타나서 학립관의 관주가 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모양새가 썩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고처먹었다.
‘이는 천상련의 창천당주와는 다른 문제다. 내가 망설일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세간의 이목이 두려운 것이라면 앞으로 내가 무엇을 과감히 시도할 수 있겠는가? 실로 중요한 것은 내 내면의 진실성이 아니겠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양은 결론이 분명하게 났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부님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성조영과 단지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았다.
성조영이 진양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잘 생각했다, 양아!”
“부족한 것이 많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하하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곳 아이들이 너만큼 성장한다면 나는 바랄 것이 없겠구나.”
“과찬입니다, 사부님.”
진양이 부끄럽게 웃었다.
하지만 성조영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학립관의 모든 아이들이 진양만큼만 성장한다면 천하의 무림고수가 모조리 학립관에서 나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날 밤 성조영은 곧바로 술상을 열어 조촐하게나마 잔치를 벌였다. 학립관의 전통대로 관주 임명식을 거창하게 치르지는 않았지만, 대별산의 작은 학관으로서는 큰 변화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진양은 다음 날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아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부족했기에 그는 유설과 흑표에게 사부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두 사람 모두 처음부터 학당을 차리게 되면 그럴 생각이었기에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다음으로 진양은 사상이괴를 찾아갔다.
서요평은 예상했던 대로 쌀쌀맞은 태도로 진양을 맞이했다.
그는 방문을 턱 가로막은 채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두 분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흥! 네놈 부탁을 내가 들어줄 것 같으냐?”
진양이 웃으며 대꾸했다.
“죄송하지만 서요평 선배님께서는 결정권이 없으십니다. 지난번에 약속하셨지요? 제 부탁의 모든 결정은 서운지 선배님이 하시는 것으로요.”
“쳇!”
말문이 막힌 서요평이 혀를 차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지야, 진양이 부탁을 한다는구나! 너는 절대 들어주면 안 된다!”
“하하!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아야지요.”
서운지가 사람 좋게 웃으며 진양을 맞이했다. 그는 며칠 몸을 쉬어서인지 전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진 얼굴이었다.
“어서 오시오, 양 소협. 정말 이렇게 편한 곳을 마련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오. 그래, 부탁이라면 무엇인지……?”
“자리가 편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부탁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학립관의 아이들에게 두 분이 내공심법을 가르쳐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진양은 자신이 어쩌다가 학립관 관주가 되었는지,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부족하다는 실정 등을 설명했다. 끝으로 어떤 방식으로 학립관을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물론 아이들을 무조건 무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몸이 튼튼해진다면 그만큼 정신도 맑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주된 공부는 제가 가르치는 서예가 될 것입니다.”
진양이 이야기를 마치자, 서요평이 제일 먼저 반기를 들며 거절하겠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는 충분히 예상한 바였기에 진양은 신경도 쓰지 않고 서운지의 대답만 기다렸다.
서운지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물론 양 소협의 부탁이니 마땅히 들어드려야지요. 더구나 우리의 내공심법은 천하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자부할 수 있소. 분명히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런데 그 전에 또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서운지가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물었다.
서요평은 그것 보라며 부탁을 들어주면 버릇이 된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진양은 이번에도 개의치 않고 서운지만 보고 말했다.
“두 분은 앞으로 한 달간 무공을 서로에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에게 가르치라면……?”
“말씀드린 대로 본인의 무공을 상대에게 가르치라는 뜻이지요. 서운지 선배님은 서요평 선배님에게, 반대로 서요평 선배님은 서운지 선배님에게.”
이번에도 역시 서요평이 먼저 발끈했다.
“그게 무슨 개방귀 뀌는 소리냐? 우리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해야 한단 말이냐?”
“그냥 제 요구 사항일 뿐입니다.”
그러자 역시나 매사에 긍정적인 서운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알겠소이다. 양 소협이 바란다면 그리하지요. 형님, 양 소협은 우리를 이처럼 배려하니 우리도 그의 말을 따르도록 합시다.”
서요평은 내심 불만이 가득했지만 차마 더는 떠들지 못했다. 매사에 부정적인 그는 자칫 더 이야기했다간 진양이 당장 자신들을 내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서요평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진양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사상이괴의 방을 나왔다.
‘저 두 사람은 심법이 너무 극양과 극음으로 치우쳐 있어 올바른 수련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저들의 심법을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다.’
진양은 이제 본당의 대청 앞마당으로 걸어갔다.
너른 마당 중앙에 홀로 우뚝 멈춰 선 진양이 허공에 대고 불렀다.
“귀영대주.”
“부르셨습니까, 은공?”
진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곁으로 검은 그림자가 내려섰다. 귀영대주 비연리였다.
진양이 그를 보고 물었다.
“풍 련주님께서 얼마 동안이나 나를 호위하라고 하셨소?”
“십 년입니다.”
진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풍천익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 기간이 꽤나 길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십 년이나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십 년 동안이나 나를 호위하라 지시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은공.”
“하면 내가 그대에게 부탁을 한다면…….”
“은공의 명령은 무엇이든 따르라 하셨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진양은 비연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좋소, 그럼 앞으로 비 대주에게 서슴없이 부탁하겠소.”
“영광입니다.”
“비 대주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학립관의 관주가 됐소. 비 대주를 비롯해 귀영대원들은 나를 ‘관주’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소.”
“명심하겠습니다, 관주님.”
“앞으로 그대들은 학립관의 무인이오. 적어도 십 년 동안은 천상련보다 학립관을 우선에 둬야 할 것이오. 괜찮겠소?”
이번에는 비연리도 흠칫거리더니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양이 그 낌새를 눈치채고 곧바로 말했다.
“싫다면 지금이라도 천상련으로 돌아가시오. 나는 비 대주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을 것이오. 약속하겠소.”
그러자 비연리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련주님은 십 년간 무슨 일이 있어도 관주님을 목숨 걸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관주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관주님께 어떤 변화가 생길 때마다 천상련에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문제가 걸립니다.”
“그럼 그건 비 대주가 선택하시오.”
“관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말씀하시오.”
“허락만 해주신다면 이번의 보고를 마지막으로 결정해도 괜찮겠습니까?”
진양 역시 비연리를 곤욕스럽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소. 천상련의 대답을 듣고 나서 결정하시오. 단, 내가 말한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다시 오지 않아도 좋소. 귀영대가 이곳에 남겠다면 앞으로 십 년간은 무조건 학립관 소속이 되어야 하오. 천상련은 머릿속에서 지워야 하오. 이 부분을 확실히 보고해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하실 말씀은?”
“만약 날 위해 남게 된다면, 귀영대는 정예 몇 명만이 내 호위를 맡을 것이고, 나머지 인원은 학립관을 지키는 것이 주된 임무가 될 것이오. 지금처럼 은신보다는 좀 더 드러난 조직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전할 말은 다 전했소. 련주님께 안부나 전해주시길 바라오.”
“예, 관주님. 그럼!”
대답을 마친 비연리는 이번에도 허공으로 솟구치며 지붕 너머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진양은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으로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들은 끝난 셈인가? 이제 남은 건 조만간 찾아올 무적관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문제군. 여동추의 성격과 장 관주의 성격을 유추해 볼 때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철혈문을 앞세워 찾아올지도 모르지.’
진양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느 쪽이 됐든 학립관을 위협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의 두 눈에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10. 파자공(破字功)
진양은 한동안 학립관을 재정비하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에 열중했다. 그를 비롯해서 유설과 흑표, 그리고 단지겸까지 열과 성을 다하니 학립관의 분위기는 점점 고양되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성조영도 아이들을 가르치곤 했는데, 그는 예전과 달리 아이들이 지식과 학문보다는 주로 인격을 수양하도록 유도했다.
보름 정도가 지났을 때, 천상련으로 떠났던 귀영대가 돌아왔다.
비연리는 곧장 진양을 찾아와 말했다.
“련주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앞으로 귀영대는 십 년 동안 학립관에 소속될 것입니다.”
“고맙소, 비 대주. 천상련의 분위기는 좀 어떻소? 련주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시오?”
“장례식은 무사히 끝났으며, 련주님께서도 잘 계십니다.”
“창천당주도 지금쯤 정해졌겠군.”
“예, 내부의 인사 문제는 모두 해결됐고, 천상무운신공을 가져간 곽연을 팔방으로 수색 중입니다만 아직 가닥이 잡히지 않은 듯합니다.”
“흠. 곽연이 어디로 달아났을까? 혹시…… 천의교로 투신한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