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2
11화. 가두어진 봄 (2)
속전속결. 이 말이 아주 잘 어울릴 정도로 순식간에 일이 진행됐다.
신여월은 내 대답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도통 모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만족스러워했고, 진예신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줄줄 고등 감응자가 할 일과 내 향후 거취에 대해 말했다.
그 옆에서 간혹 한두 마디 거드는 신여월을 보고 있자니 조금 신기했다.
‘협회장이랑 부협회장이라고 했으면서, 이런 일에 익숙하네. 보통 안내 같은 건 다른 직원이 할 줄 알았는데.’
질리도록 게임을 했기에 감응자의 안내서는 이미 외우고도 남았지만, 신입의 자세로 열심히 들어줬다.
신여월이 바람직한 자세라며 몹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선 자연스럽게 협회원들이 기본적으로 받는 장비 상자와 포상으로 주는 민들레 세트 상자까지 떠넘겼다.
그 위로 뭔가를 더 주려고 하는 눈초리여서 대뜸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보겠다고 끊어냈다.
아쉽게 입맛을 다시는 신여월에게 재빨리 인사를 건네고 협회장실을 나오자 진예신이 은근슬쩍 따라붙었다.
늦지 않게 협회의 차량으로 박호승의 집에 데려다줄 테니, 앞으로 지내게 될 기숙사 건물 위치를 미리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협회장님을 포함해서 모든 A등급 이상의 감응자는 협회 내부의 기숙사에서 살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방은 1인실이고, 가구나 가전제품 등은 평범하게 갖춰져 있지만,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건 다르니까요. 방에 두고 싶은 게 생기면 언제든지 본부 지원과로 연락하면 돼요.”
“협회장님께서도 기숙 생활하십니까?”
“아, 가족 구성원 절반 이상이 감응자라면, 독채를 따로 내주거든요. 협회장님은 거기에서 살고 계세요. 본래 협회장님 자택이기도 하고요. 그 외에 팀이 구성됐을 때, 원한다면 독채로 팀원끼리 따로 지낼 수 있게 하기도 해요. 최이안 군의 팀이 그렇게 살고 있죠.”
분명 게임에서 신여월은 가족과 함께 저택에 살았기에 이상해서 곧장 묻자 진예신이 순순히 대답해줬다.
협회에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그냥 그 근처에 자리를 잡은 줄 알았었는데, 그 반대였을 줄이야.
손꼽히는 자본가라는 건 알았는데, 아파트 형식의 기숙사만이 아니라 독채 단지도 따로 운영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는 건, 협회 터가 제법 크다는 건데. 그 주변을 전부 결계로 감싸고, 그 내부를 온실처럼 유지한다고? 엄청난 동력원이 있어야 할 텐데. 아직 이 정도의 결계를 유지할 만한 방법은 내가 아는 한, 아직 등장할 때도 아니고….’
협회장실이 존재하는 본부 건물을 나와서 기숙사가 위치한 쪽으로 걸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한겨울인데도 훈훈한 온도와 짙은 농도의 아이온이 피부를 두드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화원을 쳐다보고 있자, 진예신이 부드럽게 길을 이끌며 설명을 이었다.
“화원에 관심이 있나요? 아니면 결계? 모처럼 아는 체하면서 설명해주고 싶은데, 어느 쪽도 제 전공은 아니라서 슬픔을 감출 길이 없네요. 그쪽은 개발부에서 전부 담당하고 있거든요. 나중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개발부 부장은 관심이 있다고 하면 정말 좋아하면서 강의까지 해줄 사람이거든요.”
“오….”
“물론 지금 당장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다면, 제가 연락을 넣어줄 수 있답니다. 이런 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생각보다 아주 적은 터라, 개발부에는 늘 사람이 부족하거든요. 전투원과 개발부를 병행할 수 있다고 설득하려고 날아올 거 같은데. 흠. 연락해줄까요?”
“아닙니다.”
“그래요?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줘요. 인재는 어디에나 환영하니까요. 저야 요한 군이 전투에 집중해주면 좋지만, 아마 많은 부서에서도 간청이 올 거예요. 그중 하나에 들어가게 될 거고요. 부담은 느끼지 말고 협회에서 지내면서 천천히 생각해봐요.”
“그러겠습니다.”
게임을 진행할 때는 너무 과묵해서 선택지를 고를 때마다 단답형밖에 없었는데, 어른이 된 진예신은 종일 말만 하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유창하게 말을 많이 했다.
그게 놀라서 감탄사를 한 번 뱉었을 뿐인데 난데없이 개발부에 대학원생처럼 끌려갈 뻔한 위기가 닥쳐서 다소 급하게 거절했다.
진예신은 시종일관 부드럽게 내 짧은 말을 받으며 줄줄 말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우선 이것부터 받아요, 요한 군.”
“열쇠, 입니까?”
“비슷하지만 다른 거예요. 앞으로 요한 군이 감응자 등록증은 잃어버려도 이건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될 정도로 자주 쓰게 될 거고요.”
진예신이 건네는 작은 목함을 받아들었다.
손바닥에 쏙 잡힐 크기의 상자는 꽤 고급스러웠다. 뚜껑에 협회의 로고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여는 경칩 부분도 섬세한 나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이름 석 자 정도가 여유 있게 들어갈 법한 새카만 명패가 새카만 수실 장식과 함께 들어있었다.
“명패를 왼손으로 쥐고 아이온을 불어넣으면 돼요.”
“어디에 쓰는 겁니까?”
“여러 가지 용도죠. 일단은 열쇠라고 알고 있어도 괜찮아요. 마석과 계약을 마친 감응자는 그게 없으면 기숙사도, 협회에도 드나들 수 없으니까요.”
그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명패를 꺼냈다.
이곳은 진예신의 존재로 인해 영락없이 게임 속 세계인 줄만 알았는데, 소설에서만 나오는 물품이 등장해서 약간 당황스럽다.
출입증 같은 류가 여러 개로 나뉘면 게임만 복잡해진다면서 명패의 기능을 전부 감응자 등록증에 옮겼다고 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설마 두 세계가 섞인 것인가?
반들반들한 명패를 엄지로 슬쩍 문질러보고는 곧장 아이온을 불어 넣었다.
왼쪽 손등 부근이 초록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명패로 흡수됐다. 빛이 잠잠해지고 손을 펴자 명패에 초록색으로 내 이름이 새겨졌다.
“음, 좋아요. 이름은 잘 새겨졌죠?”
“네.”
“그럼 이제 협회와 기숙사에 들어올 때 어떻게 하는지 보여줄게요.”
진예신이 기숙사 건물 입구로 다가갔다. 그 옆으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채 쫓았다.
멀리서 봤을 때 협회 본관과 똑같아 보였던 기숙사 건물은 가까이서 보니 약간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방마다 창문과 발코니가 다 있는데도 어쩐지 거대한 상자를 가져다 놓은 느낌이었다. 현관이 그저 새카만 네모 문짝이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한동안 지내야 하는 곳의 첫인상이 영 심란해서 물끄러미 기숙사를 올려다보다가 진예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붉은 수실이 달린 명패를 꺼낸 그가 아이온으로 새긴 이름이 있는 쪽을 내게 보여주면서 말을 붙였다.
“우선 왼손으로 문을 한 번 두드리고, 명패의 이 부분을 문에 딱 붙이는 거예요.”
진예신이 곧장 시범을 보였다. 왼쪽 손등으로 기숙사 현관을 한 번 두드렸다.
똑. 간결한 소리가 나면서 문짝에 물결처럼 파문이 일었다. 그 중심부에 명패를 가져다 대자 일렁거리던 문이 한순간에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여기까지가 신원 확인 단계에요. 그다음은 들어가는 인원을 명시하는 건데, 간단해요. 숫자만큼 왼손으로 노크를 하면 되거든요. 다만 감응자는 손님으로 초대할 수 없어요. 가능한 건 마석과 계약하지 않은 일반인만! 보안 때문에 그런 거니까 반드시 기억해둬요.”
진예신은 명패를 대고 있는 상태로 다시 한번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번에도 똑하고 맑은소리가 났고, 온통 주황색이던 문이 다시 까맣게 물들면서 활짝 열렸다.
진예신이 명패를 도로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방긋 웃었다.
“문은 인증한 사람과 그 손님이 전부 들어가면 자동으로 닫혀요. 별로 어렵지 않죠? 순서만 잘 지키면 되거든요. 요한 군이 직접 해봐요. 들어오면 바로 앞으로 지낼 방으로 안내할게요.”
그에게 ‘네’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진예신은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보다가 현관 앞에 섰다.
이미 비현실적인 것들을 충분히 겪었는데도 아직 적응되지는 않아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왼손으로 노크했다.
똑. 매가리 하나 없이 두드렸는데도 문에서는 명쾌한 소리가 나고 파문이 확 일었다.
그에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서 재빨리 명패를 가져다 대자 문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연이어 노크 한 번을 더 하자 문이 열렸다.
“쉽죠? 사람마다 지닌 아이온은 고유하지만, 다른 이의 것을 갈취할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해서 만든 보안 시스템이에요. 개발부의 자랑이기도 하죠. 나중에 심심하면 문의 색이 바뀌는 거 구경해 봐요. 제법 볼만하답니다.”
“그렇습니까?”
“하늘 아래 같은 색은 없거든요. 아이온은 지문이랑 비슷한 거라 모든 감응자가 또 달라요. 보기만 해도 심심하지는 않을 거예요.”
내부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진예신이 말을 걸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적당히 대꾸하고 주변을 살펴봤다.
기숙사라고 하더니 무슨 호텔처럼 오른쪽에 프런트가 있었고, 그 뒤쪽으로 거대한 유리 벽이 보였다. 유리 벽 안쪽은 소파와 테이블이 주된 가구인 편안한 분위기의 라운지처럼 보였다.
독특한 게 있다면 프런트에도, 라운지에도 벽면에 협회장실처럼 대형 지도가 걸려 있다는 점이다. 지도 군데군데 들어와 있는 색색의 불빛을 보면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저거 GPS랑 비슷한 거잖아. 감응자가 숨만 붙어 있으면 실시간으로 어디에 있는지 표시가 되는. 그런 걸 잘도 이런 공개적인 곳에다 전부 걸어놨네. 위치 추적 한 번 기가 막히는군.’
소설에서 나온 설명으로는 균열이 발생했을 때 효율적으로 감응자를 파견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라고 했었다.
불빛을 누르면 현재 그 불빛에 해당하는 감응자의 상태까지도 나오는데, 그건 추후 본부로 복귀했을 때 치료를 위한 자료로 사용된다.
‘이렇게까지 감응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다 죽어 나가는 현실이 미친 거지.’
작가와 게임 제작팀의 피는 푸른색인 게 틀림없다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지도에서 시선을 뗐다.
그러자 앞서 걸으며 복도 끝에 먼저 다다른 진예신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물었다.
“저 지도가 신경 쓰이나요?”
“아, 불이 들어와 있길래 한 번 봤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의 자세를 다시금 되새기며 아무렇게나 말을 뱉었다.
진예신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바뀌는 것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지도는 제법 걸려 있어요. 협회장실, 기숙사 프런트와 라운지, 개인실, 독채 거실, 그리고 본관 5층의 상황실과 1층의 의료실까지 똑같은 지도가 비치되어 있죠. 그 외에도 몇몇 부서에도 있는데 그건 간략화된 지도라 조금 달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다. 세상 모든 것들을 처음 보는 어수룩한 아이처럼 반응하면 된다.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나는 지금 초짜다!’를 때려 박으며 대화를 이었다.
“단지 위치가 표시되는지도 아니었습니까?”
“그 외에 부가 기능이 있죠. 간략화된 지도는 그게 전부인데, 방금 말했던 곳의 정식 지도는 특별한 기능이 하나 더 있거든요. 황담복 회장님께서 고생을 조금 하셔서 만들어 낸 비장의 한 수라고 해야 하나.”
띠링. 경쾌한 울림이 나면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스르륵 열린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진예신이 버석한 어투로 말했다.
반사적으로 진예신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이 사람을 직접 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와 만나고 처음으로 그의 무표정을 봤다.
“요한 군도 느끼게 될 테지만, 저걸 보고 있으면 감시하는 기분이 좀 들어요. 특히 균열 안에 들어가면 더 그렇다고 해야 하나….”
얼핏 그의 눈동자에 주홍빛이 스민 것 같았다.
하지만 마치 내 착각이라는 것처럼 금방 사라지고 본래의 온화한 갈색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졌다.
“원래 백번 설명하는 것보단 한번 경험하는 게 더 나은 법이잖아요? 제가 하는 말은 그냥 먼저 이쪽 일을 시작한 선배의 투정이겠거니 하고 넘겨버려요.”
선배로서 알려주겠답시고 주저리주저리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으면서 흘려 넘기라니.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차려다가 간신히 막았다. 게다가 진예신의 말을 그저 투정이라고 일축하기엔 내용이 가볍지 않았다.
‘행운의 봄이랑은 내가 계약했지만, 진예신의 아이온 감지 능력은 주인공 보정으로 엄청났단 말이지.’
그런 그가 아이온으로 가득한 균열 내부에서 이 시스템으로 인한 것이든, 다른 원인이든 감시하는 느낌을 받았다는 건 쉬이 넘길 문제가 아닌 거다.
진예신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빠르게 가설 몇 가지를 점검해봤다.
‘첫 번째는 진예신 예상대로 지도에 연동된 명패 때문에 그렇다는 건데, 확실히 가능성이 크긴 해. 생체 정보까지 빼가는 거니까 예민한 사람은 눈 하나 붙은 거 같겠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 이 지도를 만든다고 갈려 나간 인력 중 하나로 신유하가 있다.
게임 주인공 진예신에게 보정이 있는 것처럼 원작 소설 주인공인 신유하에게도 당연히 있다.
주인공이면서도 S급이 아닌 신유하는 그 대신에 마석과 관계없는 특수한 능력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그 능력이 바로 ‘기록’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능력은 문자 그대로 ‘본 것을 기록’하는 능력이라 그다지 쓸모없어 보이지만, 신유하의 특별한 눈동자 덕분에 사기적인 성능을 자랑한다.
‘진실만 보는 눈. 거기에 기록 장치와 기록 대상을 원거리에서도 지정할 수 있었어. 아이온을 사용하지 않는 능력이라 은신은 패시브였고. 다시 생각해도 개사기네, 진짜.’
처음 플레이할 때는 제대로 써먹어 보지 못했지만, 그 후에 환각 계열 균열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쏠쏠하게 뽑아 먹었던 기억이 솔솔 났다.
장점만 있는 능력이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기록에도 한계가 있기는 한데, 어쨌든 중요한 점은 균열 안에서 제아무리 진예신이라 하더라도 신유하가 손을 댄 부분에서 감시하는 눈길을 느낄 리가 없다는 점이다.
‘그럼 두 번째 가능성을 점쳐봐야 하는데.’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이쪽이 좀 더 확률이 높다. 간섭 구슬이 벌써 나왔으니 그에 맞춰 그쪽 상황도 바뀌었을 것 아닌가.
‘최종 보스가 벌써 균열마다 눈을 싹 깔아놨군.’
순식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최종 보스의 능력이라면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어서 더 그랬다.
‘인간적으로 균열의 생성 지점을 미리 알고, 원할 때 균열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능력은 양심이 없지 않냐고.’
심지어 동시에 균열이 2개 이상 열릴 경우, 그걸 다리 삼아서 건너다니기까지 했다.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특수 능력을 주인공 보정이 아닌 악당 보정으로 가졌다는 거다.
이미 알고 있던 정보지만 배알이 꼴리는 건 어쩔 수 없다.
팍 일그러졌을 게 분명한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으려니까 진예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엘리베이터가 불편한가요? 아니면 몸 상태가 나빠졌다거나?”
“아닙니다. 생각을 좀 하던 중이라 그렇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혹시라도 아프면 기숙사 내에 치료실도 있고, 본부에 응급실도 있으니까 가도록 해요.”
띠링. 채 대답하기도 전에 경쾌한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21층. 제법 멍하게 있었는데도 도착을 안 해서 엘리베이터가 느린 편인 줄 알았는데 내 방이 높이 있는 거였다.
“20층에는 요한 군과 같은 S급인 이시영 씨가 살고 있어요. 그 아래쪽은 A급인 감응자 분들이고요. 아마 금방 만나서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 균열이 생기지 않는 이상 대개는 1층 라운지에서 노닥거리거든요.”
가끔은 수련실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며 웃은 진예신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설명했다.
전투에 포함된 부분이 아니면 지극히 설명이 불충분했던 게임이었던 터라 자세한 기숙사 사정은 처음 알게 되었기에 귀담아들어 뒀다.
오른쪽으로 모퉁이를 돌자마자 멈추는 그의 걸음에 나도 멈추어 섰다. 진예신이 방긋 웃으며 문을 가리켰다.
“자, 여기가 요한 군의 방이에요.”
20층 별실이라는 문패가 떡하니 걸린 문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현관처럼 손잡이조차 없는 시커먼 문짝을 보다가 진예신을 올려다봤다.
“들어가는 방법은 알겠죠?”
“네. 그런데 별실은 뭡니까?”
“아, 그거요.”
진예신이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20층부터 꼭대기인 25층까지는 전부 한 층당 방이 하나만 있어요. S급만의 특혜인 셈이죠. 원래는 최이안 군하고 협회장님도 위층에서 살았는데, 독채로 나가서 비어있게 됐지만요.”
“1인실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침대는 하나니까 1인실 맞죠. 아무튼, 이거 받고, 들어가 봐요.”
가공할만한 논리를 펼치며 내게 명함을 쥐여준 진예신이 한발 물러섰다.
협회 로고가 있고, 부협회장이라는 직위가 찍힌 명함은 총 3개의 번호가 쓰여 있었다.
“가장 빨리 받는 건 중간 번호에요. 이따가 친구들 집으로 돌아갈 때 연락해주면 제가 바로 차를 준비해줄게요.”
“감사합니다.”
“막무가내로 끌고 온 건 이쪽이니까요. 당연한 일을 하는 거죠.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진예신이 훌쩍 자리를 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진 그의 뒷모습에 한 번 시선을 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걸 방이라고 해야 할지, 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
삑. 짧은 전자음이 나더니 머리 위로 등이 켜졌다.
오른쪽 벽엔 평범하게 신발장, 왼쪽 벽엔 대형 지도가 문 가까이에, 전신 거울이 방 가까이에 반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살던 곳보다 몇 배는 큰 거냐, 여기.’
조금 심란한 마음으로 신발을 벗어두고 방에 발을 디뎠다.
방은 거실 딸린 레지던스 호텔 객실과 비슷했다.
소파와 낮은 테이블, 텔레비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뒤쪽은 싱크대, 세탁기, 냉장고, 인덕션 등 풀옵션 원룸에 있을 법한 가전 기구가 모여 있는 부엌 같은 공간이었다.
대충 훑어보고 소파 바로 옆에 딸린 문을 열자 침실이 나왔다.
둘이 누워도 넉넉한 크기의 침대, 붙박이장, 텅 빈 책장과 책상이 있는 단출한 구성이었다.
침대 바로 옆에 미니 냉장고까지 떡하니 있고, 그 안에 생수도 채워져 있는 것이 정말 호텔 객실 같았다.
‘그래픽으로 봤을 땐, 딱 이 방만 봐서 몰랐는데 확실히 넓네.’
책상 옆 빈 곳에 컴퓨터 놓을 전용 책상 하나를 더 집어넣으면 더 바랄 게 없는 최고의 거주지다.
눈짐작으로 크기를 재어보고 외투를 벗어 옷장에 넣고, 왼손을 문질러 반강제로 받은 상자 2개도 일단 챙겨 넣었다. 그리고 나니까 갑작스럽게 피로가 싹 밀려왔다.
‘죽겠다, 진짜.’
침대에 누워서 팔로 눈가를 누르고 크게 한숨 쉬었다. 오랜만에 숙면도 취했고, 딱히 엄청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몸이 묵직하다.
고등학생 몸뚱어리가 가진 체력이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한 것 아닐까.
쓸데없이 체력 탓을 하다가 지금쯤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연락 없는 나를 욕하고 있을 두 친구를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
문자를 하기도 귀찮아서 이세환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한 번 끝나기도 전에 받았다.
걱정했다며 폭풍처럼 잔소리를 늘어놓는 둘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두 사람이 협회로 오겠다며 성화를 부렸다.
무거운 머리로 미쳤냐고 욕을 한 바가지 날린 다음, 그냥 내일 만나서 밥 먹고 얘기를 더 하자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피곤해. 일단 좀 자야겠어.’
숙면 여부와는 관계없이 일단 누우면 금방 잠드는 몸이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번에도 악몽 꾸려나.’
익숙한 생각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