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50
149화. 고장 난 나침반 (4)
찬 기운이 근처에 없는데 갑자기 손발의 끝이 차갑게 식으며 곱아들었다. 그리고 왼쪽 손바닥 중앙부터 손목까지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몹시 오랜만에 느끼는 통증에 왼손을 강하게 움켜쥐며 의식적으로 숨을 천천히 쉬었다. 쿵쿵 맥박치는 소리가 사위스럽게 들릴 정도로 불안이 몸 전체를 날름날름 타고 올랐다.
이건 악운을 예감하는 신호였다.
‘불길해. 뭐지? 저 검붉은 문 때문이 아닌데, 이거.’
문이 나타났을 때 꺼림칙한 느낌이 든 건 맞다. 척 봐도 불길하게 생겼고, 풍월주가 보내는 초대장이 좋은 기분이 들 리 만무하지 않나.
하지만 내가 징크스에 가까운 수준으로 ‘환상통’이 느껴지는 징조가 나타나는 건 궤가 다른 얘기다.
이럴 땐 ‘반드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쁜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내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불운으로 휩싸인 일이.
‘지금쯤이면 협회에 도착했을 류지하, 이시영, 임로진은 괜찮을 거야. 오늘 협회에 남은 인원이라고는 균열을 상대하기 위한 대기조뿐이니까. 바닷가로 향한 주오가 다칠 일도 없어. 거긴 용왕의 품 안이라 다치고 싶어도 못 다쳐. 신여월과 윤혜아는 이곳에 있으니 남은 건….’
홀로 세림의 뒤를 캐러 간 진예신뿐이다. 당장이라도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손끝을 움칫거리는 신여월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귀걸이를 눌러 진예신에게만 전해지도록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연달아 신호를 보내도 반응이 없었다.
전파가 잘 통하지 않는 곳인가 싶어서 끈질기게 연락을 요청하는 신호를 보내는데, 흐릿하게 지지직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반사적으로 귓가에 손을 얹고 빠르게 진예신을 불렀다.
“부협회장님, 들리십니까?”
-치직-, 연, 치익, 칙-. 안, 지짓, 모르, 치지직, 삐익-.
매끄럽지 못한 통신 사이로 띄엄띄엄 목소리가 섞였다. 하지만 너무 잡음이 심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없었다.
게다가 아주 짧게 끊겨 들어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진예신이 아닌 것만 같아서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진예신의 무력은 협회에서 손꼽힐 정도이며, 그걸 믿고 이번 작전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을 넘긴 것이었는데….
내가 뭐라고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진예신을 보냈지? 차라리 내가 그곳에 갔어야….
부정적으로 치닫는 생각을 애써 끊어내고 입술을 짓씹으며 조금이라도 더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강하게 눌렀다.
-넘, 치직, 다음, 지지직, 삑, 끼이익-!
기계 불량처럼 섞이던 잡음의 끝은 고막이 찢어질 듯한 마찰음이었다. 양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진예신 부협회장님!”
그렇게 소리치면 귀가 아프다며 너스레를 떨어야 할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도, 거슬리는 잡음도 순식간에 뚝 끊겨서 잠잠해졌다. 귀를 누르던 손을 툭, 떨궜다.
진예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요한아.”
“…예, 협회장님.”
가면을 벗은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얼굴로 문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신여월이 나를 불렀다.
차분하게 답한다고 했는데, 절절 열이 끓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 나가서 속으로 혀를 찼다.
신여월은 쏟아지는 달빛을 한 번, 핏기가 가신 윤혜아의 드러난 하관을 한 번, 그리고 내 가면을 한 번 보더니 나긋나긋이 말했다.
“네가 세운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구나, 그렇지?”
“부협회장님과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저 문도 그대로이고, 리조트는 무너졌습니다. 반도 성공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후후, 자신에게 엄하구나. 제법 좋아하는 태도지만, 지금은 스스로 관용을 베풀어보는 게 어떠냐.”
신여월의 손이 내 얼굴로 뻗어졌다. 달가닥. 협회장의 파트너, 영원의 눈물이 변한 호갑투가 가면의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가 그대로 가면을 벗겨냈다.
밤의 공기가 볼에 닿으며 서늘한 온도가 열기에 달아올랐던 뺨을 식혀줬다.
“처음부터 이 작전은 불법 야시장의 뒷배를 찾고, 이후 창궐하지 않도록 부수는 것이 목적이지 않았니. 뒷배는 이리 나타났고, 상품으로 올라왔던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며, 참가자는 격리실에 박히게 되었단다. 이것이 성공이 아니면 어떤 것이 또 성공이겠느냐.”
“하지만 온전히 해결된 것은 아직….”
“완벽함에 매달리지 말렴. 그래서는 되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단다. 그렇지 않으냐, 혜아야?”
불현듯 튄 신여월의 지목에 침묵하고 있던 윤혜아가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낭랑한 음성에 불안이나 걱정 같은 감정은 일절 실리지 않아서 평소 시답잖은 일로 시시덕거리던 때를 연상시켰다.
“그럼요, 완벽함을 추구한답시고 시작조차 안 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죠. 저도 그랬고, 제 밑의 부하들도 그랬고, 이제는 요한이가 그러고 있네요.”
“저는 딱히 그런 게 아닙니다, 선배님.”
“그래? 그럼 지시를 내려봐. 작전의 연장선상이라 생각하고, 내가 지금 무얼 하면 되겠어?”
“그건….”
머릿속이 진예신의 안위로 꽉 차 있던 탓에 아무런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생각이 제대로 돌지를 못했다.
내가 윤혜아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자 윤혜아가 부서진 가면을 벗으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작전을 짤 때는 그렇게 능숙하더니 이럴 땐 영락없이 신입이네. 이거, 선배로서 네게 할 조언은 없는 거 아닐까 상심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어.”
“윤혜아 선배님.”
“그래, 선배야. 그런데 요한이는 그렇게 불러주면서도 자꾸 잊어버리는 거 같아서 말해둘게. 우리는 쉽게 죽지 않아, 요한아. 은퇴하지 않고 후배를 맞이한 선배란 그런 거야. 그만큼 단단한 거지.”
김휘율과 박차군이 들었다면 이제 자기들은 선배도 아닌 거냐며 슬퍼할 것이라고 신여월이 숨죽여 웃었고, 윤혜아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후학 양성에 손을 거들어 주면 다시 선배라 불러줄 의향이 있다는 대꾸를 했다.
그러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파랑새의 깃을 주워 마석 보관함에 넣은 윤혜아가 멍하게 서 있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마를 검지로 쿡 찍었다.
“임무를 하다가 연락이 끊기는 일은 흔해. 고등급 감응자는 한 명이 아쉬울 지경이라 그럴 때면 보통 지원하러 가기는 하지. 그런데 다들 크게 걱정하진 않아. 멀쩡히 살아있을 거라고 믿거든.”
“부협회장님의 실력은 익히 압니다. 그래서 맡긴 것이고….”
“응, 그거면 됐다는 거야, 요한아. 능력을 믿고 일을 맡겼다. 그러면 거기서 설령 다쳐서 온다고 한들 네 잘못이 아니야. 작게는 방심했을 예신이의 잘못일 거고, 크게는 불가피한 상황을 만들어낸 풍월주 쪽의 잘못이지.”
그야 나도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의 절반은 풍월주 탓이니 내 잘못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긴 하는데, 이번 일에 적용할 수는 없지 않나?
작전을 세운 것은 나고, 사람을 배치한 것도 나인데, 여기서 누가 다쳤다면 배정을 잘못한 내 탓인 게 당연한….
“윽.”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 다 보여, 요한아.”
윤혜아가 가벼운 딱밤을 날렸다. 눈가를 찡그리며 이마를 문질렀더니 이번엔 신여월이 사뿐사뿐 다가와서는 내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였다.
안 그래도 곱슬머리라 차분함과는 거리가 먼데,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불만스럽게 신여월을 올려다보자 그녀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쳤다.
“예신이가 호락호락하게 당할 것 같으냐?”
“…아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이보다 어려운 일도 척척 해내고, 무사히 돌아온 아이거든, 예신이는. 그러니 우리는 그 아이를 믿고, 할 일을 하는 편이 좋겠지….”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렸는지 잠시 그리운 표정을 지었던 신여월은 금방 여상스럽게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이다, 요한아. 네가 짠 계획은 우선 끝났으니, 이제 내가 지휘권을 받아 가고 싶구나.”
“예? 그런 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획 도중이었어도 협회장님께 지휘 우선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작전 수립자의 지휘를 뺏을 정도로 내가 그리 권위적인 사람은 아니란다. 여하간 지금부터는 내 뜻을 따라주겠다고 생각해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면서 부하직원을 다뤄본 게 전부였던 내가 이런 작전을 짜고 실행한 것부터가 내 실력에 어울리지 않은 짓을 한 셈이다.
현실은 게임과 달라서 어디에나 변수가 있고, 싸움의 승패도 예측에서 빗나가기 일쑤인데, 난 그런 부분을 고려하는 데에 아직 서툰 점이 많았다. 이번에 알게 된 뼈아픈 교훈이다.
더군다나 윤혜아의 말대로 혹시라도 내 지시로 인해 그들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까 봐 위험한 일에는 스스로를 먼저 투입하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냉큼 경험이 풍부하고, 협회를 책임지고 있는 신여월에게 몽땅 권한을 넘겨버렸다.
적어도 내가 조금 더 노련하게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아니, 지금처럼 연락이 안 된다고 다음 계획을 짤 정신머리를 챙기지 못하는 짓은 하지 않을 때까지는 잠시 물러날 생각이다.
“고맙구나. 그러면 혜아야. 난 네가 잠시 네 스승을 보고 왔으면 좋겠는데. 어찌, 할 수 있겠느냐?”
“스승님께서 조금 투덜거리시겠지만, 못 할 건 없죠. 그다음엔 용궁을 거쳐서 협회로 돌아가면 되겠죠?”
“역시 내 마음을 잘 읽는구나.”
“전서구 역할을 한두 번 하는 게 아닌걸요. 게다가 스승님과 용왕님, 두 분 모두 시야가 넓으시니까 분명 저희가 보지 못한 걸 보고 계실 거고요.”
한쪽 눈을 찡긋거린 윤혜아가 은근슬쩍 예신이가 있는 곳도 물어보고, 풍월주 동향도 떠보겠다고 말하며 툭툭 신발코로 바닥을 두드렸다.
신여월이 잘 부탁한다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윤혜아의 발끝에 아이온이 휘몰아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축지법에 버금가는 윤혜아만의 보법이었다.
“혜아는 일을 잘 해줄 터이니 협회에서 얼굴을 보면 되겠구나. 겸사겸사 예신이도 혜아가 데려와 주면 좋겠다만, 어쩐지 그건 우리가 할 것 같으니…. 그러면 이제 슬슬 움직여보자꾸나.”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곳에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남은 것은 하나뿐이지….”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신여월의 손이 내 왼쪽 팔뚝을 강하게 붙들었다. 새삼 겉보기와 다른 신여월의 힘에 놀라는 것은 잠시였다.
신여월이 이끄는 대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검붉은 문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일반적인 균열에 입장하는 것과는 달리 젤리 같은 감촉이 몸 전체를 뒤덮는 느낌이 들어서 눈을 질끈 감으며 진저리를 쳤다.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불쾌한 감각이다.
내가 신음하며 몸을 부르르 떨자 신여월이 작게 팔을 토닥여줬고, 덕분에 빠르게 제정신을 차리고 반듯하게 몸을 세웠다.
“여기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로구나. 누가 구현한 것인지 영 취미가 나빠. 그렇지 않니?”
조심스럽게 둘러본 주위는 새하얀 테이블과 의자 서너 개를 빼면 아무것도 없는 검붉은 방이었다. 상자 안에 갇힌 것처럼 아주 협소한 방은 문 한 짝조차도 없어서 갑갑했다.
신여월의 말대로 이 공간의 주인에게는 미적 감각이란 터럭도 없는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여월에게 동의하는데, 퍼드득 날개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휙 돌아간 고개가 테이블 위에 앉은 파랑새로 향했다가 곧 소리 없이 나타난 베일을 뒤집어쓴 인영에게 고정됐다.
“대화에는 적격인 곳이지 않니, 신여월 협회장. 그리고 김요한 군.”
자그만 파랑새가 지지배배 울다가 애교스럽게 인영의 장갑 낀 손에 부리를 비볐다. 퍽 평화로운 광경이었지만,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신여월의 눈매가 단단하게 굳었고, 나도 긴장감에 주먹을 쥐었다 펴며 인영을 응시했다.
“만나서 반갑다네, 그대들. 내 초대를 흔쾌히 받아 주어 어찌나 기쁜지 몰라.”
별 무리로 만든 듯한 흰 베일,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영롱한 목소리, 그리고 신여월과 비슷한 예스러운 말씨와 심상치 않은 기세.
‘진짜’ 풍월주, 본신(本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