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141)
141화 각성 (4)
헥터 루드위그.
레아틀라스교의 존경받는 대신관이었으나, 말년에 용살자에게 납치당하며 강제로 악신의 종속이 되고 만 비운의 노인.
“황혼에 뜬 별이 저들을 인도할지니…….”
그가 습관처럼 성호를 그리다가 멈칫한다.
머릿속에 울려 퍼진 악신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위선자여, 아직도 헛된 희망을 품는가.]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헛된 희망이며, 위선에 불과하다는걸.
어떤 변명을 갖다 붙이던 이 모든 것은 그의 선택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만약, 그날…….’
악에 굴복하지 않았다면.
설화 속 나오는 위인들처럼 신념을 굽히지 않고 모든 희생을 짊어졌다면.
사내가 이곳에 도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많은 이가 절망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질 일도 없었을 것이며, 오늘 만난 탐험가들도 별일 없이 탐사를 끝마치고 도시로 돌아갔을 터였다.
하지만…….
꽈악.
루드위그는 주름으로 자글자글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의미 없는 가정이었으며 후회였다.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분명 자신은 똑같은 선택을 내릴 테니까.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후우우웅-!
그는 지금도 일렁이는 포탈 앞에 서 있다.
용살자가 내린 단 하나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정확히는,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손자를 지키기 위해.
혹여나 그들이 이곳으로 도망쳐 왔을 때를 대비해 이곳을 지키는 중이다.
속으론 고작 이런 생각이나 하며.
‘부디 그들이 이곳으로 오지 않기를.’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희망이었다.
소박하단 말도 부족할, 그야말로 부스러기와도 같은 희망.
다만 악신은 이조차 만족하지 못했다.
오랜 절망 속에서 웅지는 깎여 나갔고, 이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조차 잃어버렸다.
노예가 오늘 매질을 한 대밖에 맞지 않았다며 기뻐하듯, 비참한 현실에 체념했다.
차악을 택하며 그게 최선이었다 자위했고.
자신에게 이 모든 걸 끝낼 수단이 있음을 애써 외면했다.
한데 아직 부족하다는 듯, 악신은 말한다.
[위선자여, 지켜보아라. 너로 인한 절망이며, 너로 인한 고통일지니.]뇌에 새겨지듯 울려 퍼지는 하나의 음성.
머지않아 굳게 감긴 그의 눈꺼풀 너머로 하나의 광경이 드리웠다.
한 명의 바바리안과 그의 동료들이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 누가 봐도 승산이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
[베헬—라아아아아!!]운명에 순응한 자신과는 다르게.
***
“그래, 도망치지 않는 건가.”
놈이 날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기세 싸움에서부터 밀릴 생각은 없기에 나도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거, 도망치면 곱게 보내 줄 것도 아니면서.
현 상황은 지극히 간결하다.
[영혼 탈진 상태가 끝날 때까지 마법사를 이용해 살아남으십시오.]만약 친절한 게임이라면, 이런 식의 메시지가 떴겠지.
영혼 탈진의 지속 시간은 약 20분.
그때까지 악착같이 버텨야 한다.
아, 참고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등을 보인 사냥감만큼 물어뜯기 좋은 건 없을 테니까.
“드왈키를 지켜라!!”
있는 힘껏 외침과 동시.
타닷!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놈이 지면을 박찬다.
순식간에 가속하는 신형.
손에는 미샤에게서 빼앗은 독사의 송곳니가 쥐어져 있다.
쩝, 뺏어가도 어떻게 그걸 뺏어가지?
쓰린 감정을 지워 내며 마지막까지 놈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콰앙-!
메이스로 검을 막아 내며 판단한다.
주르륵, 발이 뒤로 미끄러졌다.
이는 가장 자신 있던 힘에서 밀림을 의미한다.
휘익!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재차 휘둘러지는 검.
서둘러 뒤로 물러섰지만, 놈의 움직임을 따라가기에는 모자라다.
이는 민첩 역시 놈이 우위에 있음을 뜻한다.
서걱.
벌어진 살가죽에서 산성피가 튀었다.
역시 [무쇠가죽]도 안 통하는 거구나.
아크제 장검을 못 쓰는 거 같아서 혹시나 했는데. 그래, 물리 내성이 높을수록 효율이 상승하는 스킬이니까.
후웅-!
불평불만을 지우며 메이스를 휘두른다.
서걱.
놈에게 닿기는커녕 상처가 늘었다.
그러나 또다시 메이스를 휘두른다.
맞고 또 맞으면서 동료에게 시간을 주는 것.
그게 내 역할일 테니까.
“드왈키, 마법은 언제냐!”
“준비됐소. 하지만, 둘이 너무 가깝—”
“됐으니 쏴라!”
마침내 기다렸던 얼음창이 쏘아진다.
예상대로 놈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나와 같이 처맞으면 손해라고 판단했겠지.
참 고맙게도.
타닷.
나 역시 뒤로 물러서며 얼음창의 반경에서 벗어났다.
다만 숨 돌릴 틈 없이 얼른 등 뒤로 손만 뻗어 배낭에서 방패를 꺼냈다.
어차피 [거대화]도 쓰지 못하는 마당 아닌가.
아크제 장검만 아니면 방패가 있는 쪽이 훨씬 전투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맘 같아선 흉갑도 입고 싶지만…….
‘그럴 시간까지는 주지 않겠지.’
애써 가질 수 없는 것에 미련을 지운다.
체념이 아니라, 더욱 절실한 것에 모든 걸 집중하기 위해.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것만을 취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정보 하나.
“미샤는 어떻게 됐지?”
“뼈가 부러지면서 내장을 찌른 모양일세. 포션을 먹였으니 금방 괜찮아질 거네.”
그래, 그때까지는 1:4로 싸워야 한다 이거지.
냉정한 말이지만, 빠진 한 사람이 드왈키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만약 당한게 드왈키였다면 승산조차 없었을 테—
“조심하게!”
또다시 놈이 달려든다.
느긋하게 기다려줄 시간은 없다는 거겠지.
일단은 긍정적인 요소다.
‘그래, 급한 건 너도 마찬가지인 거구나.’
내심 예상은 했지만 이로써 확신에 이르렀다.
놈은 단기적인 상태 이상에 걸린 게 아니다.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이 달려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카칵!
영혼 탈진이 끝나기 전에, 승부를 보기 위해 놈도 무리를 하고 있다. 쉽게 말해, 20분만 버티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는 뜻.
하지만…….
‘20분이나 버텨야 한다니 돌겠군.’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놈이야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에게 포션은 네 병밖에 남지 않았다.
‘최상급을 제외하면, 중급 하나 상급 하나.’
지금 구도로 간다면 몇 분도 채 되기 전에 전부 소모될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베헬—라아아아아!!”
있는 힘껏 함성을 내지르며 방패를 밀친다.
그리고 재빠르게 대쉬해 메이스를 휘두른다.
드러눕는 플레이로는 절대 20분을 버텨내지 못하리라는 판단.
물론, 처음의 몇 분 동안만.
타닷.
놈이 거리를 벌리면 즉시 따라붙는다.
그리고 방어보다는 공격에 치중한다.
로트밀러의 화살 지원이 날아오든 말든.
드왈키가 마법을 쏘아내든 말든.
“……같이 죽겠다는 거냐.”
동귀어진을 노리는 사람처럼 바짝 달라붙어 메이스를 휘두른다.
이름하여 바바리안 물귀신 모드.
모순적이지만 이 전술을 오히려 부상을 줄여주었으며, 감히 놈이 드왈키에게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걸 증명하듯이.
“칫.”
놈이 내게 검을 내찌르다 말고 얼음창을 피해 몸을 비틀었다. 애석하게도 석궁이 쏘아진 지점을 향해.
푸욱!
기념비적인 첫 명중.
물리 내성 때문에 깊이 박히진 않았지만, 일단 허벅지이니 기동성에 조금은 제약이 생겼을 터.
다만, 놈도 슬슬 뭔가 깨달았을까?
‘날먹은 여기까지겠군.’
이를 기점으로 눈에 담긴 기세가 변한다.
따라서 나도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포기하는 법을 배운 놈은 그 어떤 분야든 위험한 법이니까.
“끈질긴 것들……!”
휘둘러진 검에서 진득한 살기가 묻어난다.
마치 족쇄를 풀어낸 것만 같다.
수비를 위해 공격로를 제한했던 녀석의 검이 한 가지 목적만으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린다.
뭐,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겠지만.
휘익-!
화살이 어깨를 스쳤음에도 놈은 끄떡도 않으며 나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 결과.
푸욱!
몇 차례의 공방 끝에 놈의 칼날이 내 복부를 깊숙이 관통했다.
자연 재생이 사라진 덕에 가만히 내버려 두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을 부상.
「회복(중) 효과로 인해 신체가 재생됩니다.」
로트밀러의 판단 아래 포션 한 병이 더 사용됐다.
이제 남은 건 상급 하나와 최상급 둘.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타닷.
놈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무슨 곡예라도 부리듯, 휘둘러진 메이스를 즈려밟고 나를 뛰어넘는 놈.
‘니미럴.’
재빨리 뒤돌아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었다.
한 번 더 지면을 박찬 놈이 순식간에 뒷진영을 향해 거리를 좁힌다.
“뒤로 가게!”
난쟁이놈이 드왈키 앞을 막아섰지만, 크게 의미는 없었다.
저 괴물을 정면에서 어떻게 막겠는가.
핵심 스킬인 [균형추]도 없는 상황에서.
콰앙!
발길질 한 방에 방패를 쥔 채 축구공처럼 날아가는 난쟁이놈.
로트밀러가 석궁을 버리고서 검을 휘둘렀다.
물론, 통할 리가 만무했다.
푸욱!
놈은 너무도 쉽게 로트밀러의 검을 쳐내며 복부에 초록빛 칼날을 쑤셔 박았다.
하나 놈이 검을 빼내려는 찰나.
“이건, 우리 물건이오.”
로트밀러가 놈의 손을 잡으며 이를 저지한다.
피슈우우웃-!
다행히 제때 얼음창이 쏘아지며 놈이 검을 놓고서 뒤로 물러났다.
털썩.
이내 지지대를 잃은 로트밀러가 힘 없이 바닥에 너브러졌다. 다만 복부에 꽂혀 있던 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영혼력 소모가 없는 미믹의 스킬 [보물창고].
저놈이 사용할 수 없도록.
조금이라도 이 팀에 도움이 되도록.
‘포션만 제때 먹이면 살릴 수 있어.’
동료의 부상에도 나는 냉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너, 로트밀러를……!!”
벽에 기대 회복 중이던 미샤가 거동조차 불편한 몸으로 놈에게 검을 휘두른다.
닿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드왈키한텐 못 간…… 끅!”
놈의 발에 채인 미샤의 신형이 다시 한번 벽에 처박혔다. 하나 놈은 드왈키에게 직행하지 않고 기절한 미샤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하려는 짓이야 뻔했다.
결정타를 꽂아넣고 하나 남은 검마저 훔쳐갈 생각이겠지.
이 빌어먹을 도둑놈의 새끼가.
“말했지 않나. 우리 물건이라고.”
날파리를 쫓아내듯 휘두른 메이스질에 놈이 미련없이 미샤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바바리안, 설마 아직도 해볼 생각인 거냐?”
뭐래, 병신 새끼가.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나는 대답 대신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웅-!
놈은 가뿐히 뒤로 물러나 피하며 말했다.
“설마 저딴 쓰레기를 믿고 있는 거냐? 저주 몇 개를 빼면 얼음창에 냉기분출이 끝인 놈을?”
물론이다.
하위 공격 주문인 게 어떻단 말인가.
대가리에 꽂히면 뒈지는 건 똑같을진대.
딱 한 번, 럭키펀치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 놈에게 맞힐 수 있으면 된다.
그때까지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 테니.
“드왈키!!”
슬슬 마법이 날아올 타이밍이란 생각에 있는 힘껏 소리쳤다.
한데 이건 또 뭘까.
‘니미럴.’
마법이 날아오지 않는다.
***
왕가 공인 마법사, 리올 워브 드왈키.
그가 굳이 전사 두 명뿐인 팀에 입단 신청서를 제출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제일 만만한 곳을 골랐다.
전사가 둘이라면 마법사가 더 귀중해 보이리라 여겼다. 그러나, 본질이 들통나는 데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쓰레기.
같은 마법사에게 마법사 취급도 받지 못하는 존재.
[하하핫! 그럼 우리 팀은 모두 반푼이가 모인 셈인가? 차라리 잘됐네, 우리는 앞으로 서로를 보며 괜히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그럼에도 이들은 괜찮다 말해 주었다.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이해해 주었다.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25년간의 삶은 전부 이들과 만나기 위해서 존재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도 들었다.
하지만…….
[설마 저딴 쓰레기를 믿고 있는 거냐? 저주 몇 개를 빼면 얼음창에 냉기분출이 끝인 놈을?]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활약해야 할 순간이 왔음에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였다.
마력이 아무리 고강해져도.
자신은 반푼이 마법사였다.
소중한 동료들의 기대에조차 부응하지 못하는 반푼이 마법사.
한데, 그런 주제에.
[뒤로 가게!]친우에게 지켜졌다.
[이건, 우리 물건이오.]검이 박힌 채 웃는 동료를 구해내지 못했다.
[드왈키한텐 못 간…… 끅!]연모하던 여인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 사실에 머리가 하얘졌다.
더없는 무력감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혹한 현실 앞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놈은 이미 포기한 모양이군.”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 혼자만 남았다면 모를까.
아직 소중한 동료가 싸우고 있지 않은가.
홀로,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서.
“바바리안,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미 모두 끝났다는걸.”
놈의 조소에도 묵묵히 메이스를 휘두르고, 입에 머금은 피를 놈의 얼굴에 뿜어내며.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응전하고 있지 않은가.
[자네, 얼굴이 밝아졌군. 그렇게 동료들이 마음에 드는가?]영창을 시작하며 어느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트롤전을 겪고난 직후, 마탑 교습소의 사범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뭐? 트롤을 잡을 수 있는 마법을 알려달라고? 음, 뭐…… 없는 건 아니네마는.]그날 드왈키는 사범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한 가지 마법을 배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 조합’을 익혔다.
사범은 일단 알려는 주되, 절대 쓰지 말라고 몇 번이고 그에게 당부했지만…….
‘사고가속.’
인지력이 비약적으로 개선되며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마력증폭.’
심장이 내재된 마력을 자극하여, 일시적으로 출력을 높인다.
‘심장촉진.’
심장 박동수를 강제로 높이며 마력이 전신으로 퍼지게 만들며, 그 외에도 부작용이 막심하기로 유명한 정신 감각계 마법들을 중첩시킨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며 전신에 마력을 회전시킨다. 반면 정신은 어느 때보다 개운하며 눈앞은 선명하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이름이 뭐냐고? 정확한 명칭은 없네. 다들 알음알음 알고 있는 조합이라 말이지. 다만, 굳이 붙여나 보자면…….] [음, 글쎄. 희생은 뭔가 어감이 좀 그렇고.]드왈키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고작 그랬을 뿐인데.
[그래, 각성 정도면 적당하겠군.]기초 공격 마법 마력시.
수십 개의 화살이 빛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