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429)
429화 얼음처럼 (4)
[정령화]가 사용된 즉시.「캐릭터의 육신에 바람의 정령이 깃듭니다.」
내 피부 위로 반투명한 바람이 감돌기 시작한다.
대화는 커녕, 눈짓도 주고 받을 수 없었으나 에르웬이 뭘 노리는 건지가 전해졌다.
「모든 피해에 회피 보정이 부여됩니다.」
확률으로 발동하는 회피 보정.
참고로 이 회피 보정은 마법 피해로 분류되는 공격에 한해 회피 확률이 최고치에 이른다.
그래서인지 모드 자체에 이런 조건이 붙었지만.
「받는 마법 피해가 2배 증가합니다.」
이것 때문에 마법사나 이능술사를 상대할 때 바람 모드를 켜지 않았다.
그야 리스크가 더 크다고 판단했으니까.
50%의 확률로 작동하는 회피 능력?
말은 좋지만, 맞았을 때 두 배의 딜이 들어오게 되면 게임 특성상 더 큰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휘이이익-!
이미 동전은 던져졌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두근-.
결과를 지켜보는 것뿐.
휘이이이익-!
어쩌면 모두의 명운이 걸렸을지 모르는 찰나 속.
질질 끌 것도 없이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캐릭터가 회피에 성공했습니다.」
내 몸을 관통할 기세로 날아들던 [땅끝가시]가 돌풍에 밀려나듯 피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궤적을 비튼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굉음을 터트리며 천장에 박힌 흑색의 가시.
“……!”
심장이 크게 내려앉는 듯한 탈력감과 함께 온몸을 휘감던 바람이 사그라든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의 자연력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정령화]가 해제됩니다.」
그래, 딱 이것 정도만 남아있던 거였구나.
‘…생각은 나중에.’
에르웬의 몸을 안은 자세 그대로 바닥을 한 바퀴 굴러 일어난다.
“비요른···.”
응? 웬일로 아저씨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가 낯설지만, 깊이 의문을 이어나가진 않는다.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이니까.
“힘들겠지만, 저쪽에 이능술사를 상대할 수 있나? 맡고만 있어도 된다.”
“…할 수 있어요.”
좋아, 그럼 바통터치는 끝났고.
“네놈······!”
자세를 잡고 몸을 돌리기 무섭게 방패 너머로 충격이 전해진다.
카칵-!
용살자, 리갈 바고스.
내게 처음으로 동료의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준 존재.
카칵-!
마구잡이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기세를 담고서 휘둘러지는 칼을 받아내며 생각한다.
‘눈물이 날 만큼 기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구나.
하긴, 그럴 수밖에 없으려나?
간절히 기다려온 순간이긴 했지만,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걸 잃어야 했으니까.
“네놈은, 네놈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질긴 거지?”
“나 잡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온 네 새끼가 할 말은 아닐 거 같은데.”
“매듭을 지어주마!”
놈의 칼에 힘이 실린다.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스스로를 태우며 휘둘러지는 칼.
그 원동력이야 빤하다.
나에 대한 원한도 원한이지만, 본인부터가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려면 나를 죽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
카칵-!
현재 구도는 간단하다.
죽다 살아난 에르웬이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저 멀리 있는 이능술사를 마크.
“에밀리! 그놈은 신경 안 써도 되겠지?”
“……당연한 소리를.”
아멜리아는 빡빡이 레펠레스와 접전을 벌이는 중이고.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 쓰러졌다.
물론 그중엔 아직 숨이 붙은 자들이 있겠지만, 이들도 그저 끈을 잡고서 버텨내고 있을 뿐.
당장 싸울 기력은 없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카칵-!
이 싸움에 길었던 승부의 승자가 정해질 터.
카칵-!
방패에 힘을 주며 칼을 밀어낸다.
반동으로 내성 수치가 작살이 났어도, 근력이 줄어든 건 아니니까.
“······!”
가뿐한 손짓에 세 걸음을 물러나는 놈.
몇 번이나 칼을 받으며 놈의 몸 상태는 대충 확인했으니, 이제 내 차례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조상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대시한다.
암만 소리를 질러봤자 액티브로 분류되는 [야성분출]은 활성화가 되지 않지만…….
‘이제는 이게 없으면 영 힘이 안 난단 말이지.’
후우우우웅-!
조상신의 힘을 담아 망치를 내려친다.
타닷.
놈이 두 걸음 더 물러나며 피하더니, 망치를 휘두르며 살짝 보인 빈틈을 향해 검을 뻗어온다.
확실히 실전을 많이 겪은 놈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판단이 빤하단 말이지.’
이내 놈의 칼이 내 옆구리에 깊이 박힌다.
반동으로 하락된 내성 수치가 여실하게 느껴지는 부상.
푸욱-!
사실 정 피하거나 막지 못할 일격은 아니었다.
다만, 그랬다간 승부가 더 길어졌겠지.
휘익.
검이 옆구리에 박힌 즉시, 기다렸다는 듯 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목표지는 놈의 모가지.
근력 차가 명확한 만큼, 한 번 잡기만 하면 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한데 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타닷.
놈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어찌나 급했는지 챙길 것도 챙겨가지 못한 채.
“이건 두고 가는 거냐?”
나는 이를 악 문채 옆구리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피가 덕지덕지 묻은 채 굳어 있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검 선물은 됐는데.”
“······.”
“거, 검사라는 놈이 왜 자꾸만 검을 잃어버리는 건지.”
한심하다는 듯 혀까지 차주자 놈의 얼굴이 굳었다.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해 레이저라도 나올 거 같다.
하지만, 행동은 눈빛과 다르다.
검을 잃었단 사실 때문인지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르는 놈.
탓.
이내 놈이 대시했다.
내가 아니라 옆쪽으로.
이번에도 심리가 훤히 읽혔다.
‘바닥에 있는 검이라도 쓰겠다는 건가?’
그러고 보면 그때 미로에서도 이랬다.
검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니 미샤한테 달려들어 검을 뺏어갔었지.
이건 우리 물건이라며, 로트밀러가 직접 몸으로 검을 받아내고 [보물창고] 안에 검을 집어넣기 전까지 나는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최악과 차악.
그때는 놈이 선택지를 제시하면, 우리가 그것들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상황이 뒤바뀌었다.
고르는 건 내가 아닌, 바로 이놈.
타닷.
놈이 발을 뗀 즉시, 나 역시 앞으로 대시한다.
“······!”
초 단위로 좁혀지는 거리에 흔들리는 놈의 동공.
이대로 검을 챙기는 게 옳은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인데…….
후우우웅-!
머리 위에서 휘둘러지는 망치를 보며 놈이 내린 선택은 너무도 한심했다.
타닷.
녀석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포기하고 땅 위를 구른다.
‘페이크 걱정은 괜히 했나?’
나였으면 검을 줍는 척하다가 몸을 틀어서 허를 찔러왔을 텐데.
뭐, 쟤는 검사니까 어쩔 수 없나?
음, 그래도 그렇게 검이 중요하면 어깨 하나 정도는 포기하고 검을 챙긴다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뭔가 따로 노리는 게 있는 걸지도.’
놈의 판단이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따면 거짓말일 터이나, 방심보다는 경계심으로 마음을 무장한다.
그야 이러는 쪽이 훨씬 나을 테니까.
적을 업신 여기다 변을 당하는 것보다는.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
후우우우웅-!
너무 가까이 붙지 않도록 신중하게 망치를 휘두른다.
타닷-!
놈이 또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과정이 수어번 반복됐을 때.
툭.
마침내 놈의 등이 벽에 닿았다.
이와 동시에 놈의 용눈깔이 길게 확장됐다.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새끼···. 벽은 생각도 안 했던 건가?’
이 새끼가 노리고 있던 비장의 수?
그 따위 것은 없다.
단지 순간순간 급하게 망치를 피하다가 이곳까지 내몰린 것.
그게 이번 일의 전부다.
콰직-!
이를 증명하듯 위에서 내려친 망치가 놈의 왼쪽 어깨에 명중한다.
“으윽···!!”
핏발 선 눈으로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도망치는 놈.
왠지 기분이 묘했다.
정확히는 허탈하다고 해야 하나?
“어깨를 줬으면, 뭐라도 챙겨가야지.”
아니, 이딴 식으로 어깨를 줄 거면 아까 무기라도 챙겼으면 됐잖아?
적의 오판에 기쁘긴커녕 분노가 치민다.
그렇기에······.
꽈악.
미꾸라지처럼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놈의 뒷덜미를 잡아당겨 벽으로 내던진다.
콰앙!
놈이 입을 크게 벌리며 피를 토했다.
“커헉···!”
나는 망치를 한 번 더 휘둘렀다.
타격지는 정수리였으나, 놈은 그 와중에 몸을 옆으로 내던져 피했다.
콰직-!
그 덕분에 완전히 짓이겨진 왼쪽 다리.
“아아아아악···!”
놈이 비명을 내지른다.
전혀 후련하지 않았다.
아까 죽인 식스 그 여자는 머리가 아작나는 그 순간에도 평정심을 지키고 있었건만.
이거야 원, 애새끼도 아니고.
“고작··· 너 같은 놈 때문에.”
그래도 놈의 생존 욕구 하나는 대단했다.
질질.
아작난 다리를 끌고 바닥을 기며 내게서 멀어지려는 놈.
방향이 어디인가 하니, 아멜리아와 열심히 격전을 벌이고 있는 빡빡이가 있는 곳이다.
저놈한테라도 의지할 생각인가?
꾸욱.
등을 짓밟아 놈을 멈춰세운다.
그러자 놈도 슬슬 현실을 깨달았을까?
“······주, 죽여라.”
이내 놈이 이를 악물며 부르짖듯 말했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말을 조금 더듬긴 했지만, 구차하게 목숨 구걸은 하지 않는구나.
그랬다면 정말 기분이 나빠졌을 텐데.
콰아앙-!
이 순간에도 열심히 전투 중인 아멜리아 쪽을 한 번 확인한 나는 빠르게 고민을 끝마쳤다.
길게 끌 것 없이 그 말만 해주고 슬슬 끝내자.
“리올 워브 드왈키를 기억하나?”
“크큭, 크흐흐흐흐······.”
죽음을 각오한 놈은 내 아킬레스건을 찾은 듯 조소를 흘렸다.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설마 그때 그 반쪽짜리 마법사놈을 말하는 거냐?”
미궁에서 시체도 챙겨서 나오지 못하고.
유품 만을 몇 개 두고서 장례를 치렀던 그날.
그날 나는 결심했다.
언젠가 이 순간이 오면, 반드시 놈의 면전에 대고 말해주겠다고.
그러니까······.
“너는 듣기만 해.”
망치로 놈의 남은 어깨를 박살낸 뒤 말한다.
“리올 워브 드왈키는.”
거진 3년에 가까운 시간.
“그날 미로에서 우리 모두를 구해냈던 그 반쪽짜리 마법사는.”
오래 걸리기도 참 오래 걸렸지만.
“지지 않았어.”
놈에게 지지 않았다.
“이렇게 내가 널 죽이게 됐으니까.”
“······.”
“녀석이 이긴 거라고, 알겠어?”
놈은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 그런 건가?
나는 놈을 뒤집은 뒤 발끝으로 턱을 잡고는 강제로 고개를 끄덕이게끔 만들었다.
‘후,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
실감은 잘 나지 않지만, 그런 듯하다.
아무튼, 그럼 됐으니까······.
콰직-!
이제 죽어, 새끼야.
***
콰직-!
용살자에 이어, 아멜리아와 힘을 합쳐 빡빡이 권투사의 머리통을 망치로 짓이겼다.
「마누아 레펠레스를 처치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에르웬을 피하느라 온갖 난리를 치고 있던 이능술사 차례였고.
「케일 엘바드 제네거를 처치하였습니다.」
이로써 모든 적의 대가리가 부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머리가 인지한 즉시.
고된 전투의 열기가 몸에서 빠져나가며, 차가운 공기가 몸을 휘감는다.
솨아아아아아아-.
적이 사라진 주변은 폭풍이 그친 듯한 고요했다.
그래서일까?
비로소 실감이 났다.
“끝났구나······.”
마침내 전투가 종료됐다.
그러나 쉴 시간은 없었다.
“아멜리아, 너는 혹시 살아 있는 적이 있는지를 확인해라.”
“저, 저도 도울게요…!”
“돕기는. 너는 쉬는 게 돕는 거다.”
확인사살은 아멜리아에게 맡기고, 한계까지 기력을 소모한 에르웬은 강제로 휴식을 시켰다.
그리고 나는…….
까드득.
차디 찬 바닥에 쓰러져 있는 대원들을 수습했다.
숨이 붙어 있는 대원은 부상의 정도를 확인했고, 온기를 잃은 대원들은 감지 못한 눈을 직접 감겨주었다.
참담하단 단어로도 부족했다.
‘스벤 파라브, 멜란드 카이슬란, 리리스 마로네, 티타나 아쿠라바, 라비옌, 제임스 칼라, 베르실 고울랜드, 에르웬, 아멜리아.’
그리고 나까지.
“열 명······.”
이번 원정에서 생존한 대원의 숫자.
그 외에는 모두 죽었다.
“얀델··· 네 병의 포션을 찾았다.”
장미기사단과 노아르크 놈들의 시체를 뒤진 끝에 아멜리아가 포션을 찾아왔고, 포션은 부상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서 배분했다.
“포션이 더 있는지 찾아보겠다.”
“고맙다, 에밀리···.”
부상자 모두가 완치에 이르기까지엔 너무나도 부족한 양의 포션. 다만 급한 순서대로 포션을 나눠 복용시킨 덕에 생사를 넘나들던 대원들은 조금씩 회복되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우리만··· 정말 우리만 살아남은 거군요.”
정확한 원정대의 피해를 전해 받은 대원들의 눈 아래에 짙은 어둠이 깔린다.
간단한 이유다.
우리는 살아남았다는 기쁨을 먼저 느끼기에는, 너무 서로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으니까.
안도보다는 울분이 먼저 치솟는다.
“으아아아아아아앙!!”
마법사 마로네처럼 펑펑 울어재끼지는 않더라도, 양주먹을 꽉 쥐며 슬픔을 버텨낸다.
“애쉬드 님은··· 아내분이 기다리신댔어요. 에리아보스티 신관님은··· 자식이 있었고요.”
“벤티스 게로드는 언젠가 반드시 심연까지 가보겠다는 꿈이 있었지.”
“이리번 씨는 이번 원정이 끝나면 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모두··· 이런 곳에서 죽을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니었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왜······!”
슬픔이 분노로 변하기까지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얀델 님···, 말해주세요. 우리가···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왜 여기서 이렇게 다 죽어야 했던 거죠?”
길게 돌아와, 마침내 갖게 된 근본적인 의문.
“우리가··· 그 정도로 잘못을 했었던 건가요? 이렇게··· 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밖으로 나가면 클랜장놈부터 죽여버릴 겁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방법으로는 안 돼요. 이번 일은 제대로 공론화를 해서 항의를 해야 해요. 우리가 이곳에서 어떤 일을 겪어야만 했는지!”
“왕가가 껴 있는 만큼 힘들긴 하겠지만······. 가능하긴 하겠구려. 라비옌은 용인이고, 아쿠라바 당신도 드워프족 내에서 발언권이 제법 있을 터.”
“얀델 님도 부족장 후보였다면서요? 에르웬 님도 요정족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고······.”
“그래, 분명 네 종족이 전부 모여 힘을 합치면······!”
그들이 감정을 토해낼수록 머리도, 심장도 차갑게 식는다.
나 역시 저들처럼 마냥 분노를 토해내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될 테니까.
[역시··· 자네는··· 거인이··· 될 거야······.]디디 영감이 내게 바라던,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선······.
꽈아악-.
적어도 나만큼은 그래선 안 될 테니까.
“얀델 님! 얀델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연히 가만있지 않으실 거죠?”
뜨거운 감정에 몸을 떨어대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나는··· 아니, 우리는 가만히 있을 거다.”
“···네?”
“우리가 살 방법은 그것 뿐이니까.”
“······!”
“카이슬란, 기사인 너라면 알고 있을 테지? 네 종족이 모여서 왕궁에 처들어가봤자 전부 죽을 뿐이라는 걸.”
지금까지 늘 내 편에서 여론을 조성해왔던 카이슬란도 이번 만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대답하기 싫다 이거구나.
나는 그냥 마저 말을 이었다.
“애초에 네 종족이 힘을 합치는 것부터가 무리다. 정말로 우리가 도와달라고 청하면, 그들 전부가 목숨 걸고 함께 싸워줄 거 같나? 종족의 명운을 걸고?”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현실은 동화 속 이야기와 다르니까.
이곳을 살아가는 이들은 꽃밭이 아니라, 차가운 땅 위에서 무엇이든 계산을 하고서 결정을 내린다.
“그래도···! 그래도 뭔가 해야죠!”
“설령 그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마로네, 너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기껏 살아남은 목숨을 그딴 식으로 써버리면, 이미 죽은 녀석들이 기뻐해줄 거라고?”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던 이 마법사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낯설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듯, 가만히 있어야 한다.”
“······.”
“항의는커녕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
“······.”
“본대가 오지 않은 것은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야 하고.”
“······.”
“비밀병기처럼 8층에서 키우고 있던 노아르크의 병력을 죽인 것도 우리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들을 잡아 죽인 사실을 밝히면 굉장히 큰 전공으로 여겨질 테지만,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을 것이다.
“도시전설처럼 여겨지는 장미기사단?”
이또한 마찬가지다.
그들과 대적한 것은 평생 술자리에서 자랑할 만한 업적이 될 테지만.
“우리는 그들과 만나지도 못한 게 될 거다.”
그래야만 한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만 알고 있으니까.
변명을 할 것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한다면, 우리를 이곳에 보낸 사람들은 알아서 어긋난 조각을 맞출 것이다.
본인들에게 납득이 되는 방향으로.
뭔가 상황이 엇갈려 우리를 뒤쫓던 놈들과 장미 기사단이 맞부딪친 것은 아닐까 하고. 그래서 저놈들이 운 좋게 살아나온 게 아닐까 하고.
“그러면··· 그러면 죽은 사람들은요······.”
이내 마로네가 울먹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녀석들은······.”
나는 입술을 씹으며 토해냈다.
“그 녀석들은······. 빙하의 눈에서 빠져나온 뒤, 마물들에게 죽은 게 될 거다.”
“마물······ 들이요?”
“그래, 빙하의 눈을 빠져나오느라 무척 지쳤고, 장비도 버린 와중에 식량도 바닥이 났으니까. 그러니까······. 결코 납득 못할 이야기는 아닐—.”
“거짓말이잖아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죽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강했던 사람들이랑 싸웠잖아요. 너무 힘들어서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몇 번이나 생각할 상황이었는데······.”
“······.”
“그런데도 싸웠다고요··· 우리들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그 어느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서. 싸워서 이겼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마물? 마물한테 죽었다고···?”
“그만하시오··· 마로네 양···.”
“아아아아아악!!”
카이슬란이 마로네를 안아들며 진정을 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스벤 파라브가 나섰다.
“그럼···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폐쇄까지 겁쟁이처럼 숨어서 버티고 버틴 끝에 우리끼리만 살아나왔다. 그게 세상에 전해지게 될 우리 원정의 결말이 되겠지.”
“그렇군요. 확실히 그 방법이 살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내 녀석이 나를 보며 말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단 한 번도 녀석에게서 들어볼 수 없었던, 굳건한 목소리.
그러나 눈빛에 적대감은 존재치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지만,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어째서?”
“그 눈만 봐도 알겠으니까. 그 짓거리를 가장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게 당신이란 것쯤은. ”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히자, 이번엔 아쿠라바가 나섰다.
“당신,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은 아닌 거죠?”
“···물론이다.”
“그렇다면, 저는 기다릴게요.”
이내 아쿠라바가 물러섰고, 그다음은 제임스 칼라였다.
“저도··· 해보겠습니다. 클랜장 그놈과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을 마주 봐야겠지만···.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던, 오늘보다는 나을 테니까······.”
감긴 두 눈으로도 느껴지는 뜨거운 열의.
나는 다른 대원들에게도 다가가 한 명씩 의사를 묻고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모두 끝났을 때.
“리리스 마로네.”
마지막으로 주저앉은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언제까지······.”
“······.”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건데요?”
글쎄, 모르겠다.
다만 그래도 솔직하게 답해보자면.
“아주 오랜 시간.”
우리가 칼을 뽑아들 수 있게 되려면 몇 년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렇군요.”
원정 71일 차.
7층 아이스록의 얼음 동굴.
차가운 한기가 지면을 타고 올라오는 얼어붙은 빙판 위에서.
“기다리면···. 기다려서 되는 거라면……!”
스스로를 불사르는 뜨거운 분노는 아닐지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도 꺼지지 않을 차가운 분노를.
“저도… 기다릴래요.”
우리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