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646)
646화 커밍아웃 (4)
옥단추 같은 눈.
비단처럼 매끈하며 하얀 피부.
붉은 명주실로 촘촘히 박아 넣은 듯한 입술.
“…….”
“…….”
장인이 땀과 시간을 쏟아부으며 만든 고급스러운 실사화 인형조차 아니다.
오른쪽 이마에 달린 리본만이 인형의 성별이 ‘여성’임을 의미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렸을 때나 갖고 놀았을 법한 싸구려 봉제 인형.
“그러니까… 얀델 남작은… 인형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뜻인가요?”
라그나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 온 순간, 수치심이 확 느껴지며 머리로 피가 쏠린다.
마치 실시간으로 머리털이 빠지는 듯한 느낌.
‘…죽고 싶다.’
참 이상한 일이다.
고블린숲에서도, 아이스록에서도. 그 어떤 역경이 닥친들 이런 생각까지는 한 적이 없었건만.
“그… 렇다.”
이내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또 다른 귀족 하나가 감탄을 터트리듯 혼잣말을 뱉었다.
“어쩐지! 주변에 그 많은 여인을 두고서도 별다른 얘기가 나오지 않더라니……!”
그는 내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게 진심으로 이 인형 때문이라고 믿는 듯했다.
뭐… 다행히(?) 그런 사람들은 소수이긴 했지만.
“조용히 하게.”
순진하게 그런 소리를 뱉던 이의 옆에 있던 귀족이 눈치 좀 챙기라는 식으로 핀잔을 준다.
내가 고급스러운 인형을 가져오지 않은 이유다.
진짜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걸 가져왔으면 저런 반응인 귀족들이 더 많이 나왔을 테니까.
아, 물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후작의 반응이었다.
“…….”
이내 자그마한 인형을 한 손으로 꼭 쥔 채 후작을 향해 시선을 보낸다.
처음에는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머리가 띵한 것처럼 보였던 후작도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상태였는데…….
“인형을 사랑한다라…….”
인형과 나를 번갈아 보던 후작이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린다.
“자네답다면… 자네답군.”
인형을 사랑한다는 게, 나답다는 뜻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단지 이런 식의 해결법을 꺼냈다는 것이 나답다고 생각한 거겠지.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후작이 내 말을 믿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아니, 애초에 믿을 거라 생각해서 한 것도 아니고.
아까 케알루너스 공작과 테르세리온 후작이 대본을 읽듯 말을 주고받았듯.
모든 발언에는 정치적인 계산이 뒤따른다.
그리고 조금 전의 내 발언 역시 그랬다.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단 의지를, 이런 방법으로 에둘러서 표현했다.
“흐음…….”
문제는 그 노력이 후작에게 통했느냐는 것인데…….
침묵 속에서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자, 이내 생각 정리를 끝마친 듯한 후작이 답변을 내주었다.
“인형을 사랑한다는 자네의 고백은 내게 있어 굉장히 충격적이었고 당황스러웠네. 하나 사랑에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자네의 선택을 존중하겠네.”
표면으로 나온 말들만 들었을 때는 일단 굉장히 긍정적인 답변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뼈가 실린 말들이 이어진다.
“나라의 앞날을 밝히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네가 허튼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고 말일세. 뱉은 말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 알 것이라 믿네.”
쉽게 말해, 만약에 내가 지금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책임을 물리겠다는 뜻.
“한데도 그만큼 진심을 보였으니, 응당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자네의 선택을 응원하는 게 올바를 터.”
다만 후작은 나를 너무 궁지에 몰아서는 좋지 않다 생각했는지 한 가지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왕국의 재상으로서 부탁하건대, 언젠가 때가 되면 자식은 낳게. 자네의 가문을 이을 후계도 그렇고, 자네 같은 인재가 씨를 남기지 않고 떠난다는 것도 이 나라의 크나큰 손실이니 말일세.”
언젠가 때가 되면.
“보아하니 참한 여전사들도 있는 듯하던데.”
동족과 결혼해 자식을 보는 것은 용인해 주겠다.
그런 후작의 제안에 나는 답했다.
“…생각해 보겠다.”
말은 그러했지만, 사실상 알겠다는 뜻이었다.
그도 그럴 게, 여기서 갑자기 OK를 하는 것도 웃기잖아?
“자, 그러면 이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고……. 다들 오래 기다리셨소. 지금부터 아홉 번째 안건을 마저 이어 가겠소이다.”
일단 이번에는 잘 넘긴 듯하다.
***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식의 독신 선언을 할 계획은 전혀 없었다.
다만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
이 선택만큼은 결코 후작과의 분쟁이 두려워서 내린 것이 아니다.
겸사겸사라고 해야 하나?
이미 용아저씨와 대화를 끝낸 순간 나는 결정을 내렸다.
‘내가 무슨 결혼이냐…….’
이 도시에서 구축해 낸 내 입지와 그런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 같은 결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는 내게 아직도 벗어 낼 현대인의 때가 한참 더 남았다고 말할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 있어 결혼은 굉장히 신성한 것이다.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언약을 내 마음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할 수는 없으며, 하물며 자식을 낳는다는 건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아,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감정적인 사유로만 지금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살아남는 데 집중하겠다는 것.
어쩌면 이 과정에서 ‘결혼’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터이나, 계산을 거듭한 나는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어차피 득만큼이나 실도 많아.’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상대와 닥치는 대로 결혼을 하면 언뜻 보기엔 좋아 보일지 몰라도, 결국 그만큼 적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반대로 내가 도울 일도 생긴다는 뜻과 같으니까.
“그럼 이것을 끝으로 금번 회의를 끝내겠소이다. 모두 귀한 걸음을 옮겨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홉 번째 안건도 금방 마무리되며 왕실 회의가 끝났다.
그리고…….
‘무슨 이번에는 또 역순이냐.’
한꺼번에 우르르 나가는 게 아니라, 상석에 가깝게 앉은 순서대로 한 명씩 회장을 빠져나간다.
그것도 2분 간격으로.
‘…진짜 별 이상한 거로 다 차별하네.’
정말로 이상한 게, 이런 차별을 받고 나니 별 관심도 없던 왕실 회의의 서열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음, 그런 의미에서 잘 만든 전통이려나?
나조차 서열을 올리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데, 저 권력 괴물들은 어떻겠어.
툭.
이내 모두 다 떠나고 텅 빈 회장.
나는 왠지 모를 설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을 나섰다.
그리고 이제 집에 가려는 차.
“…잠시만요.”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라그…….”
음, 누가 볼 수도 있으니 거리는 지키는 게 낫겠지?
“아직 안 갔나? 페프로크 여백작.”
“근처에 아무도 없으니 평소처럼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그래도 이런 건 조심하는 게 낫다, 여백작.”
“…….”
암, 나도 언제 어디서 실수할지 몰라서 아직까지도 아멜리아를 에밀리라고 부르고 사는데.
“근데 그래서… 계속 나를 기다린 거냐?”
“예, 아무래도 할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할 말이라면?”
“아까 그 인형.”
라그나가 어딘가 불쾌한 눈으로 그 인형을 언급하더니 이내 말을 잇는다.
“아, 물론 아까 한 말을 믿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처음엔 오해할 뻔했지만… 아버… 아니, 테르세리온 후작께 들었습니다. 제가 아무래도 아직 정치 관련으로는 부족한 게 많다 보니.”
“아무튼,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뭐냐?”
“그…….”
라그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한참이나 주저하더니, 내가 커밍아웃을 할 때처럼 눈을 꾹 감고서 입을 열었다.
“남작은… 제가 싫은 겁니까?”
“뭐……?”
“그런 치욕스러운 경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거절할 정도로 제가 싫은 거냐고 물었습니다.”
어…….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으니 조금 당황스럽다.
하지만 일단 솔직히 답해 보자면.
“뭔가 오해한 거 같은데, 네가 싫다거나 한 건 절대 아니다.”
물론 결혼을 할 만한 관계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작의 혼담을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다.”
“정치… 말입니까?”
“그래. 만약 우리가 결혼하면, 다른 귀족들은 가만있겠나?”
안 그래도 라프도니아 정계에서 혼자 우뚝 치고 나가는 중인 게 바로 후작파다.
한데 이 와중에 내가 합류한다?
케알루너스 공작의 세력이나 카이슬란 가문을 주축으로 한 귀족 연합, 중립을 표방하는 알미너스 백작가도 가만히 지켜보지는 않을 거다.
서로 동맹을 맺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 들겠지.
“그런 건… 저희가 막을 수 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이해관계에 껴서 머리 아프고 싶지가 않다.”
“그렇습니까…….”
“이해가 됐나 보군.”
“예. 이해했습니다. 제가 지금의 신분이 된 탓에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 아닙니까.”
어… 그게 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나?
뭔가 조금 뉘앙스가 이상한 거 같은데, 세세하게 짚어 봐도 딱히 틀린 말 같진 않고…….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비요른 얀델, 당신도 피곤할 텐데 어서 돌아가 쉬십시오.”
“그래, 만나서 반가웠다. 나중에 따로 보지.”
“예.”
이후로는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서 헤어졌다.
그리고 아예 궁에서 나와 마차 승강장으로 향하던 때.
“…응?”
불현듯 인기척이 나서 골목을 살펴보니, 어두운 그림자 속에 정체 모를 누군가가 가만히 서 있다.
170cm쯤 되어 보이는 신장.
호리호리한 체격.
다만 손에도 장갑을 꼈으며 두꺼운 로브를 눌러써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부가 드러나는 곳이 없다.
그 탓에 순간 누가 암살자라도 보냈나 싶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된다.
다른 곳도 아니라 황도 카르논에서.
그것도 고작 암살자 한 명을 보내서 나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정신 나간 놈이 있을 리 없으니.
‘뭐야, 이 야밤에.’
상당히 수상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마저 가던 길을 가려던 찰나.
또각.
정체불명의 괴인이 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대로를 밝히고 있는 조명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르륵.
얼굴 쪽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뒤로 넘겼고, 이에 따라 나 역시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특징이랄 게 없는 흑색 가면.
다만 그 형태나 굴곡, 그리고 사람이 뿜어내는 분위기가 완벽하게 내 머릿속의 무언가와 일치한다.
‘…흑가면.’
다만 현재 나는 커뮤니티의 수사자도, 이한수도 아닌 비요른 얀델이기에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지키며 눈살을 좁혔다.
“뭐냐, 너는? 암살자냐?”
찰나 동안 내가 생각해 낸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
하나 내 질문에 정체불명의 가면인은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그리고…….
“그럴 리가요.”
왠지 모르게 귀에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스윽.
가면이 벗겨지고 괴인의 얼굴이 육안으로 확인된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아시아인에 가까운 이목구비와 피부.
“하린 스에뷔.”
아니, 정확히는 하린 스에뷔의 몸을 강탈한 악령.
한국인 강현별.
그런 그녀가 나를 보며 말없이 싱긋 웃는다.
왠지 모르게 등줄기에 오한이 든 나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물었다.
“네가 왜 여기서 그러고 있던 거냐? 라그나가 보낸 건가?”
“아뇨?”
“그럼 대체 왜…….”
“저번에 말했잖아요. 저도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그러니까 밖에서 보자고.”
물론 현별이가 마지막에 그런 쪽지를 보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일단 습관처럼.
“대체 그게 무슨 뜻—”
—이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순간.
“아, 그때는 이렇게까지 오래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예요.”
현별이가 내 말을 끊으며 갑갑하다는 듯 온몸을 가리던 두꺼운 로브를 벗었다.
그리고…….
“그래도 봤으면 됐어요.”
긴 다리를 이용해 한 걸음 더 다가온다.
‘어쩐지 예전에 봤을 때보다 키가 큰 거 같더라니.’
또각.
“비요른 얀델.”
또각.
“아니, 한수 오빠.”
얘는 대체 어떻게 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