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093)
제 1093화
256화. 모르가니엘(2)
모르가니엘의 영역이다, 그 담담한 목소리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흑해 원정의 모든 고통이 담겨 있었다.
시론, 그리고 그 가장 충직한 기사들조차 한없이 혹독하다고만 느낀 모진 세월이 마침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모르가니엘, 마지막 남은 흑해의 왕만을 남긴 채로.
그렇기에 시론은 장성한 자식들이 이끌고 온 병력과 함대를 보고도 기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투 중이다, 1기수. 자세를 가다듬고 적에게 집중하라.”
마치 마성화를 겪던 때처럼 차갑고 서늘한 말투에 루나는 곧바로 태도를 고쳤다.
그 말대로 이곳은 전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인들이 거의 다 모였다고 한들, 결코 긴장을 늦춰선 안 되는 땅이 흑해였다. 당연히 시론은 지금 아버지가 아니라 ‘가주’였다.
“죄송합니다, 가주. 시정하겠습니다.”
“원정대 외 병력은 소가주 진 룬칸델의 지휘를 유지한다. 이 영역에 쏟아지는 것은 모르가니엘의 기운이다. 체내로, 내면으로 스며드는 걸 유의하도록. 창성을 제외한 인원은 눈이 그칠 때까지 함선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진과 반, 무라칸이 각 함선에서 내려 시론을 마주했다.
‘누님이 아니었다면 나도 한소리 들을 뻔했군.’
진은 시론에게 검례만 올리고 말없이 감각을 끌어올렸다. 루나를 뒤따라 나온 창성들은 마치 어제도 당장 시론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고 전투를 했다는 듯이 자연스레 위치를 잡았다.
회포는 모르가니엘을 끝장낸 다음에도 얼마든지 풀 수 있었다.
다른 원정대원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창성들은 그들이 흩어져서 모르가니엘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오는 걸 인지하고 도주를 시작한 거다, 모르가니엘은. 원정대원들의 움직임을 읽으니 얼마 되지 않았군…….’
미약하다.
모르가니엘의 영역을 나아가기 시작한 창성들은, 그의 기운이 몹시 미약하고 희미한 걸 알아보았다.
공기와 같았다. 인지해야만 존재하는 걸 알 수 있는. 눈처럼 내리는 모르가니엘의 기운은, 그렇기에 매 순간 의식해서 밀어내야 했다.
모르가니엘은 연합과 원정대가 이전까지 상대한 다른 흑해 5왕들과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거대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어둡지도 않은.
그러나 그래서 더 꺼림칙한.
“이 모르가니엘이라는 놈이 가진 기운…… 왠지 꼬마의 영원화를 닮은 것 같은데.”
무라칸의 평가에 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잔하게 내리는 새하얀 기운은, 녹는 건지 스미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몸에 닿으면 조용히 사라졌다.
연합의 함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시론이 정좌하고 있던 건, 몸과 정신으로 스며든 모르가니엘의 기운을 정리해내기 위해서였다.
“함대는 라프라로사를 필두로 전진하되, 창성들을 앞서지 않도록 유의하라. 공격보다 포위와 퇴로 차단에 초점을 맞추도록. 또한 내 명령이 있기 전에 포격은 절대로 금한다.”
진의 명령에 함대가 진형을 바꿨다.
한동안 놀랍도록 고요한 진군이 이어졌다. 이동하고, 모르가니엘의 눈을 털어내고, 다시 이동하고.
시간이 갈수록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모르가니엘의 새하얀 설원은 어느 순간부터 잿빛으로 변했고, 짙은 안개가 깔린 것처럼 시야는 극단적으로 좁아졌다.
창성들조차 다섯 걸음 앞에 있는 사람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기운을 읽는 것도, 보폭과 숨소리를 통해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감각 교란, 이런 능력을 사용하는 적이 처음은 아니나 보다 치밀하고 자연스러운 게 특징이었다.
그러나 창성들에게 위협적일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선 뻔한 수작이기도 했다. 창성들의 신경이 교란된 감각 때문에 분산되면, 그만큼 모르가니엘의 기운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니까.
“모르가니엘. 어차피 이제는 너밖에 남지 않았다. 차라리 어서 칼을 받고 편해지는 게 어떤가.”
후우웅……!
처음으로 시론이 검으로 천천히 잿빛 눈바람을 갈랐다. 그러자 일순 안개 사이에 감춰져 있던 모르가니엘의 모습이 드러났다.
석고로 빚어진 사람 같은 모습, 그리고 그 얼굴과 몸 곳곳엔 상한 조각상처럼 균열이 번져 있다.
앞서 시론의 검에 당해 생긴 흔적이었다.
정확히는, 시론이 그간 ‘흑해’에 타격을 줄 때마다 모르가니엘은 육신에 타격을 입어왔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모르가니엘을 보는 건 시론도 처음이었다.
모르가니엘은 다시 안개 속으로 몸을 숨길 수 없었다.
이미 그녀의 사방에 연합의 창성들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칸을 비롯한 원정대원들도 창성들이 새로이 안개를 걷어낸 위치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모두 앙상하고 야윈 상태였다. 모르가니엘의 기운이 계속 스며든 결과였다.
‘이게…… 마지막 남은 흑해의 왕인가.’
근원석의 가장 큰 파편.
진은 마침내 마주한 시론의 숙적으로부터, 여러 초월적 존재의 속성이 그 안에 깃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겉모습은 마치 말루기아와 형제라도 되는 듯이 닮았고, 사방에 퍼진 신령한 기운은 영원화와 유사한 특성을 보인다.
손에 쥔 검에선 왠지 모르게 반이, 깊고 무감한 눈동자에선 마성화 이전의 시론이, 온통 회색인 와중 유일하게 검게 번들거리는 손톱에선 흉신이 보였다.
심지어 파엘리토, 시마트, 지토 같은 지난날의 강적들이나 루나, 무라칸의 느낌 또한 모르가니엘의 어딘가에선가 조금씩 묻어나는 것 같았다.
‘환상인가? 아니다. 이건…… 대체 뭐지?’
진만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시론을 제외한 모두가 거북한 느낌 앞에 흠칫하고 있었다.
오직 시론만이 그녀의 육신에 난 상처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껏 평생, 흑해를 베어내며 새긴 상처. 그건, 시론의 삶 전체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너를 베고자 이 세상에 나타났다.”
시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환희였다. 적의 목숨을 거두기 전에, 이토록 충만한 기분을 느끼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르가니엘은 대답하지 않고 시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창성들은 모르가니엘을 완벽하게 포위했음에도 검을 밀어 넣지 않고 있었다.
눈이 그쳤기 때문이었다. 계속 의식하며 왔는데도, 몸과 정신 전반에 무겁게 쌓인 모르가니엘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모르가니엘을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려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라 할 수 있었다. 창성은,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이었다.
‘걸려들 수밖에 없는 덫이로군.’
원거리 전투는 추적에 문제가 생기니 진행이 불가능하고, 근거리 전투는 모르가니엘에게 침식된 상태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르가니엘은 이미 자신을 찾아온 이들의 무기 하나를 무용하게 만들고 있었다. 공중요새 라프라로사를 비롯한 황금함대는, 지금 같은 상황에 모르가니엘을 포격할 수 없었다.
침식된 창성들은 평소와 같은 힘을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러, 마력, 뇌기, 영기. 창성들을 파고든 모르가니엘의 기운은 그 모든 힘을 대부분 차단하고 있었다.
단련된 육신과 의지.
모르가니엘을 공격하기 위해 창성들이 쓸 수 있는 능력은 오직 그 두 가지뿐이었다. 다섯 창성의 기운을 모조리 막은 것이다.
산과 대지,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무지막지한 힘.
애초에 그런 힘은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싸워야 했다. 창성들도, 모르가니엘 자신도.
만약 이 상태로 함대가 포격을 쏟아부으면, 창성들도 마치 평범한 인간처럼 무력하게 터져나갈 것이다.
씨익, 시론은 미소를 지으며 모르가니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 그 순간, 모르가니엘의 칼날이 먼저 시론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시론은 그 칼날을 쳐내며 역으로 모르가니엘의 허리를 베려 했고, 그녀의 후방을 잡고 있던 창성들도 거의 동시에 검을 뻗었다.
모르가니엘은 그 칼날을 다 피할 수 없었다. 바리사다와 잿빛 검이 엮인 사이, 진과 루나, 반의 칼날이 그녀의 등을 찌르고 스쳤다.
돌 같은 몸에 새 균열이 생겼고, 그 틈에선 마치 사람처럼 시뻘건 선혈이 튀었다.
채 10초가 지나기도 전에 모르가니엘은 마치 피로 물든 석상처럼 변해 움직일 때마다 질척한 혈흔을 남겼다. 그녀의 육신이 창성들처럼 평범한 인간처럼 변했다면, 이미 이 시점에 싸움은 끝났을 것이다.
처엉, 키기기긱!
창성들의 검, 그리고 무라칸의 손톱이 닿을 때마다 모르가니엘로부터 피와 돌이 튀었다. 계속 정면을 맡고 있는 시론이 가장 많은 피와 파편을 뒤집어썼다.
[죽음은 어차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이다, 시론 룬칸델.]모르가니엘의 검이 시론의 어깨를 찔렀다. 그러나 상처는 아주 깊지 않았고, 시론은 모르가니엘이 칼날을 회수하려는 순간 그녀의 팔목을 베었다.
타각, 쩔그렁……!
검이 아니라 둔기에 맞은 듯 모르가니엘의 팔목이 부서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쥐고 있던 검은 유리처럼 부서지며 바닥에 날카로운 조각을 남겼다.
전투가 끝난 순간이었다. 시론은 얼굴에 묻은 모르가니엘의 피와 파편을 닦아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창성들은 호흡을 고르며 그녀를 무릎 꿇렸다.
“남길 말은 그것이 전부인가, 모르가니엘.”
별안간 진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껏 시론이 흑해를 벨 때마다 모르가니엘에게 상처가 생겼듯, 이번엔 모르가니엘의 죽음에 흑해 전체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가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론과 눈을 맞췄다. 죽음이 다가왔음에도 창성들은 여전히 그녀로부터 여러 초월적 존재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처음보다도 더 진하게, 마치 악몽처럼 도드라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내가 지금 네 손에 죽기로 결정한 것은, 단지 그 진리를 위배하지 않기 위함일 뿐이지. 부디 네 앞에 승리가 있기를 바라마, 내 오랜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