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806)
제 888화
200화. 비먼트 황실의 비밀(2)
비먼트 황가가 은신 중인 무인도의 아래엔 지하세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존재했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한 지하를 뜻하는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는 아니고, 세상이 반으로 나뉜 이후 아메리스 같은 존재가 기거한 ‘중간층’으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그 통로는 황실이 만든 것도, 섬의 현재 주인인 루테로 연방이 만든 것도 아니다. ‘태양 전쟁’이 한창이던 고대에 청명족이 만든 길이었다. 그 시절 패권을 쥔 각 세력이 만든 통로는 현재도 세상 곳곳에 남아 있었다.
지상 세력 중엔 오직 황실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아메리스는 봉인으로 생긴 기억 오류로 인해 통로들의 존재를 잊은 상태였다.
“내가 큰 뱀이 깨어난 걸 느낀 이후, 다행히 우리가 우려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큰 뱀의 기억과 권능이 멀쩡한 상황이었다면 중간층에 봉인된 종족들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비볼이 떠나자 아이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란은 적명족이 인세에서 함부로 날뛰는 걸 근거로 아메리스의 상태를 확신했다. 힘도, 권능도, 기억도 모두 온전하지 않다고 말이다.
적명족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의 무력이 인세의 정점에 가장 근접한 건 사실이나, 전성기의 라키만과 붉은 함대라면 싸움이 그렇게까지 일방적으로 흘렀을 리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그럭저럭 저항다운 저항은 해볼 수 있는 조합이었다.
“맞습니다, 폐하. 적명족이 깨어나자마자 수세에 몰린 것도 우리에겐 큰 행운입니다. 그 오만하고 포악한 놈들도 우리가 내미는 손을 뿌리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적명족과의 거래를 통해 그 기술력을 잘 전수받기만 하면, 그를 복제하는 것도 더는 꿈이 아닐 겁니다. 게다가 지금부터 청명족 매몰자들을 찾으면 엘티엇도 깨울 수 있을 테니…… 제국은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우뚝 서서 누구도 부수지 못할 영원한 제국이 될 것입니다!”
황족들은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부터 지금껏 생존을 위해, 기회를 잡기 위해 영원과도 같은 굴욕을 견뎌왔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들은 단 한 번도 압도적인 강자로 군림한 적이 없었다.
고대엔 적명족과 청명족 같은 강자들에게 벌레 취급을 받았고, ‘대봉인’ 이후 지상에 몇 번이나 문명의 탄생과 멸망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들은 늘 절멸의 위기를 간신히 견뎠었다.
그러다 마침내 비먼트를 건국했으나, 현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 비먼트는 단 한 번도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절대적인 위상을 획득한 적이 없다.
룬칸델과 지플이라는 괴물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플은 등장과 동시에 제국의 존립을 위협했고, 더는 버틸 수 없을 때쯤 룬칸델이 나타났다.
그때부터 또 천 년 동안.
제국은 양가의 눈치를 살피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고, 이제는 황가의 오래된 존재들만 겨우 몸을 숨긴 신세였다.
그렇기에 비먼트의 황족들이 원하는 바는 단 하나.
완전하고 안전한 생존.
세상에 홀로 군림할 수 있는 힘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황족들은 태양신의 부활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반드시 저지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태양신이 부활하면 자신들은 부여된 운명대로 또다시 벌레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테니까.
“비볼이 돌아오는 대로 청명족 매몰자들을 찾기 시작하겠다. 각 지역 통로들을 점검하도록. 적들, 특히 룬칸델은 아메리스와 기록 마법사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니 조만간 청명족 매몰자들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들보다 먼저 확보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폐하!”
“적명과 우리의 거래가 성사되면 지상의 정세는 아주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적명이 미친 듯 날뛸 테니…… 그 성급한 변화 속에서,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는 건 우리가 될 거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 또한, 언제나 그래왔듯이 우리뿐일 것이야.”
황족들이 흩어지자 아이란은 홀로 회의실에 남아 창밖을 지켜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 *
1803년 10월 8일.
진이 킨젤로 3지부를 습격한 적명족들을 몰아내고 딱 일주일이 흘렀다. 그날 이후 적명족이 인세에 나타난 적은 없었다. 적어도 바멀 연합과 지플, 킨젤로가 알기로는 그랬다.
사실 적명족은 지상에서 사냥을 하지만 않았을 뿐, 이미 라키만과 시마트가 직접 아이란을 만나 거래를 끝낸 상태였다.
그리고 적명족과 황가는 벌써 서로에게 많은 이득을 주었다. 적명족은 아이란이 보낸 인간과 옛 매몰자들의 피를 취해 순식간에 두 번째 성채를 개방했고, 황가는 그들의 기술을 받아 병기를 육성하고 있었다.
모든 일은 거대 세력들의 감시망을 피해 벌어졌다. 중간층 사용을 선점한 자들의 특권인 것이다.
“베라딘이 가주에 오르자마자 꽤 거친 행보를 이어가고 있군요.”
진이 소식지들을 살피며 말했다.
매일 특종이 쏟아지고 있었다. 베라딘이 가주에 오른 일, 그 배경에 있는 켈리악의 반역, 지하세계, 아메리스와 적명족의 등장, 그들을 깨운 진.
그 모든 이야기가 일반에 공개되고 있었다.
“지플 측 기자들은 꾸준히 공자가 지하세계의 존재들을 깨워 세상을 위협하고 있다는 논조를 펼치고 있습니다.”
카시미르의 말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명분을 만들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내가 먼저 세상을 위협했으니, 지플이 룬칸델과 바멀 연합을 치는 건 정당방위라는 식의.”
“흉신전에서 공자와 투신의 무력, 우리 연합의 저력을 보고도 이런 짓을 하는 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겠죠. 마신석, 혹은 지플의 성지와 관련된 권능일 테고요.”
당연하게도.
진은 전쟁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황금함대를 완성하고, 형제들을 라프라로사에서 꺼내고, 무라칸이 복귀하고.
또 가능하다면, 자신 역시 창성에 오른 후에 전쟁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 모든 조건이 갖춰진 채 치르는 전쟁은 피와 광기, 상처가 난무하는 전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압도일 테니까.
적들을 완전히 압도할 수만 있다면 필요 없는 죽음과 파괴를 배제한 채 세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즉,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최대한 지켜주면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그걸 넘어 지극히 불리한 싸움을 해야만 했다. 지상과 지하 전부를 통틀어도 민간인들을 생각하는 세력은 오로지 바멀 연합뿐이었다.
“베라딘은 내가 가장 염려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동료, 그리고 죄 없는 사람들의 죽음. 만약 전쟁이 빠르게 시작되면 나는 많은 것을 잃게 될 겁니다. 승리를 거둔다 할지라도.”
이미 흉신전에서 직접 겪은 악몽들이다.
오히려 거대 세력들 간의 전쟁에선 그보다도 더 많은 희생이 있을 터였다. 온 세상이 전장이 될 것이며, 싸움이 끝난 후 결국 승자가 마주하는 건 세상에 다시 없을 황폐한 풍경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진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회귀자이기 때문에 가져야만 하는 부채감.
진은 과거 창성에 오른 론이 죽기 직전 단테를 통해 자신에게 남긴 전언을 떠올렸다.
-네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렇게 일러주셨소. 나와 그대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오.
‘그래…… 이 모든 일들이 내 잘못이 아닐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내가 외면해도 되는 일은 아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내 할 일을 하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어. 내가, 이 세상의 최선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최선이 되기 위한 노력.
그것만이 진이 가진 회귀자의 난통을 밀어내고 있었다. 심마를 막 떨친 사람처럼, 진이 표정을 고치며 동료들과 눈을 맞췄다.
“조만간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전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국지적인 전투는 분명 벌어질 겁니다. 베라딘이 아니더라도, 적명족이 피해를 회복한 후 인세에서 보다 과격한 활동을 시작할 가능성이 아주 높죠. 놈들을 물리친 이후 발레리아가 킨젤로 3지부를 조사한바, 지플뿐만이 아니라 황족 잔당들도 그곳에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지플이 줄곧 황족 잔당들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첩보도 있었지.”
퀴칸텔이 보고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플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가짜 요나 사건 이후 계속 놈들을 추적했어. 발레리아의 기록 마법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수를 동원해서 말이지. 그런데도 지금껏 단 한 번도 꼬리를 잡힌 적이 없으니, 놈들이 지상이 아닌 곳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배제할 수 없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퀴칸텔 님. 그 신비주의자 놈들이 숨기고 있는 능력이 있을 겁니다. 그게 지하와 관련된 거라면 지금이 놈들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겠죠.”
“일단 제가 아는 바로는 황실에 그런 비밀이 존재치 않으나…… 흠. 아미르 사후 아이란 비먼트가 갑자기 권력을 이어받은 걸 보면, 애초에 전 황제는 허수아비였을지도 모릅니다.”
지플과 황족에 더해 킨젤로도 문제였다.
[제피린, 그 악마룡이 이 몸의 머리 중 하나인 건 거의 확실하다. 아마 추후 제피린이 깨어나면, 그 시절의 기억과 힘을 일부 되찾을 것이다. 사라졌던 자아가 돌아오는 것인 만큼 온전치는 않겠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분명 태양신의 부활을 막으려는 머리는 아닐 테지.]“부디 그 시절의 힘과 권능을 정말 일부만 되찾기를 바라야겠군요. 혹은 제피린의 의식 불명이 아메리스 님과 관련이 없기를 기대하거나.”
[후자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제피린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회의실에 설치된 통신기가 푸른 빛을 내며 공명음을 울렸다.
{소가주! 급보입니다.}
통신을 받자마자 르엣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씀하십시오, 집사장.”
{적명족이 지플을 공격했습니다.}
“……뭐라고요? 킨젤로가 아니라, 지플을?”
{여섯 시간 전 라마탄에 위치한 지플의 2급 마탑이 적명족 함대의 폭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플은 현재 전시 태세에 들어선 상태입니다.}
룬칸델과 바멀 연합은 적명족이 지상 활동을 재개하면 당연히 킨젤로를 노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과감하게도 지플을 건드렸고, 황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이렇게까지 놈들이 빠르게 활동을 재개했다는 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모양이군.”
진은 그렇게 답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플의 자작극이 아니라면, 황족 잔당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