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61)
제 999화
236화. 멸망의 불, 잔인한 과거(5)
* * *
“큭, 카아아……! 아아!”
엘로나는 머리 위에 뜬 월계관을 붙잡으며 괴성을 질렀다.
겨우 십여 초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2500년 전부터 시작된 기억들은, 전부 못처럼 그녀의 뇌리에 박혔다.
1559회, 레지날드에게 사로잡힌 후부터 엘로나가 지플에서 겪은 실험의 횟수.
본래 레지날드의 목적은 복수였다.
그러나 그는 실험 도중 엘로나를 죽이려 할 때마다 비첼린과 닮은 모습에 주저했다. 동생에 대한 뒤틀린 그리움과 분노는 레지날드를 점점 미치게 만들었다.
결국 말년의 레지날드는 엘로나를 비첼린을 대신할 ‘인간’으로 만들자는 결정을 내렸다. 실험체에게 비첼린의 가명 중 하나인 엘로나라는 이름까지 부여해주면서 말이다.
“실험은 천 년이 넘도록 진행되었습니다. 레지날드 지플, 4대 가주가 사망한 뒤에도 후계자들은 계속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려는 그의 유지를 이어갔지요…….”
세월이 흐르며 후계들이 엘로나를 대하는 태도는 계속 변해갔다.
누군가는 레지날드를 기리며 그의 염원을 이루고자 노력했고, 누군가는 실험 중 발생한 폭주가 두려워 엘로나를 방치했다. 또 누군가는 엘로나가 가진 무한한 힘을 사용하고 싶었다.
그 모든 맹종과 공포, 욕망이 합쳐져 마침내 탄생한 게 지금의 엘로나 지플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한 실험으로 얻은 정보와 기술은, 현재 지플이 가진 정신 조작술의 근간이기도 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선조님. 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파괴와 학살의 화신이었습니다. 선조께선 단 한 번도 인간인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당신은 세상을 없애기 위해 태어난 신적인 존재였으나, 결국엔 우리 지플에 의해 인간을 닮은 전쟁병기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월계관으로부터 전해지는 압박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엘로나는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걸 느꼈다.
방금까지 ‘사람’으로서 인식한 모든 사고와 감정이, 베라딘을 향한 애정과 걱정이, 진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의미가 모두 지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월계관을 벗을 수도, 파괴할 수도 없었다.
“지금 당신이 쓴 월계관은, 그때 성지에 있던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것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최후의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지요. 병기가 주제넘는 자아를 가지게 될 때를 대비한.”
“아니야…… 아니라고! 아아악!”
“천 년 전 내 무능한 선조들은 모종의 이유로 그 월계관을 잃어버려 당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제 곧 편해질 테니.”
월계관을 붙잡은 두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켈리악의 말대로, 엘로나는 내면을 통째로 불사를 듯 치솟던 격정이 빠르게 잦아들고 있음을 느꼈다.
성수관을 통해 실험의 기록들이 엘로나의 뇌리로 흘러들었다.
이내 엘로나는 시야가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멸망의 불에서 번지는 폭음과 켈리악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토록 보고 싶던 베라딘의 얼굴도, 방금까지 함께 싸운 진과 무라칸의 얼굴도 의식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 사실에 엘로나는 깊은 슬픔과 무력감을 느꼈으나, 켈리악의 말대로 잠시뿐이었다.
“자아 복구를 시작합니다. 예상 완료 시간 30초. 성수관 수여자는 그 기간 동안 저를 보호해주십시오. 자아 복구를 시작합니다. 예상 완료 시간 23초. 성수관 수여자는 그 기간 동안 저를 보호해주십시오. 자아 복구를 시작…….”
켈리악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20초 남짓한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 또 변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엘로나는 다시 충성스러운 지플의 병기가 될 터였다.
지옥 전체를 잠식하고도 남을 이 거대한 화마를 뚫고 진과 무라칸이 엘로나를 구하러 오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은 이미 멸망의 불이 번지는 걸 막느라 독마성 저 멀리까지 밀려난 상태였다.
불안한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켈리악은 이런 결정적인 순간마다 이해할 수 없는 변수를 만들어낸 ‘존재의 힘’을 떠올렸다.
15, 14, 13, 12…….
초가 흐를 때마다 켈리악은 감각을 일으켜 진과 무라칸의 대략적인 위치를 읽어냈다. 그 짧은 시간이 무척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30초가 모두 지났다.
켈리악은 그렇게 말하며 자아 복구가 끝난 엘로나 지플과 눈을 맞췄다. 엘로나의 은하수 같은 눈이 아까보다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머리칼에서도 더 진한 광휘가 흘러내렸다.
엘로나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자신과 켈리악을 함께 감싸는 보호막을 펼쳤다. 그러고는 켈리악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창성에 오르고, 세계가 너를 돕고 있으나…… 이번엔 나의 승리로구나, 진 룬칸델.”
“그대가 나를 깨운 지플이로군. 내 목숨은 이제 그대의 것이고, 나는 그대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 내게 이름을 말해다오.”
엘로나는 비궁에서 깨어나 얻은 모든 생각과 기억,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녀는 이제 성수관에 입력된 설정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지토에게 세뇌된 마족들이 그랬듯이.
“켈리악 지플. 현 지플의 가주다, 무능한 선조들의 유일한 결실이여.”
“이곳은 위험하다. 멸망의 불은 그대가 펼친 것으로 보이지만, 강력한 적이 둘이나 존재하는군. 적들은 멸망의 불이 번지는 걸 막고 있는데…… 저들을 죽이고 싶은 건가?”
“그래, 가능하겠나.”
엘로나는 잠시 두 사람의 기운을 읽고는 고개를 저었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성수관에 남은 기록을 보니 이것이 내게 마지막으로 사용된 건 천 년 전이군. 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조정 기간이 필요해. 적이 하나였다면 모를까.”
“역시 그렇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탈출을 권유하고 싶다, 켈리악 지플. 적들이 멸망의 불이 번지는 걸 내버려두고 너를 노린다면 피해를 받는 건 불가피하다. 내 조정이 끝나지 않았으니. 물론 너의 전투력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나, 너나 나나 다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경우에 따라선 사망할 수도 있고.”
엘로나의 평가에 켈리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수관을 쓴 그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냉정한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엘로나에겐 이제 약점이 없다. 성수관을 쓴 그녀는 그야말로 완벽한 전쟁병기였다.
“알겠다.”
“어느 쪽으로 탈출하면 되겠는가? 이 공간은 성수관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대가 방향을 알려다오.”
켈리악이 손가락으로 화염 너머를 가리켰다.
“아, 그럴 테지. 여긴 지하세계다. 일단 저쪽으로 가서 벗을 챙기는 게 좋겠군.”
“벗?”
“라갈이라는 마족이다. 유용한 벗이지. 그리고 라갈이 추격 중인 사람들이 있다. 그중 머리가 붉은 여자는 생포해라.”
“라갈…… 왠지 나를 짜증나게 만드는 이름이군. 알겠다, 즉시 이동하지.”
엘로나와 켈리악을 감싼 보호막이 부유하기 시작했다. 보호막은 마치 비행함처럼 움직이며 순식간에 불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어떤 용과 함선도 흉내 낼 수 없는 폭발적인 가속이었다. 켈리악은 멸망의 불을 조정해 라갈 쪽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진과 무라칸은 그때쯤 불길한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건…… 엘로나 경의 기운?’
그러나 함께 싸우며 친숙했던 그 기운은 어둡게 물든 채 발레리아 쪽을 향하고 있었다.
[꼬마! 일단 내가 네 몫까지 막아보고 있을 테니 무불멸이 쪽으로 가봐!]무라칸이 숨결을 퍼뜨리며 소리쳤다. 진은 이미 무라칸을 믿고 발레리아 쪽으로 길을 여는 중이었다.
끈덕지게 붙는 화염을 밀어내며 발레리아를 찾았다. 다행히 진은 엘로나보다 먼저 그쪽에 닿을 수 있었다.
“발레리아, 베일!”
“진!”
베일은 멸망의 불과 라갈의 독기를 막아내며 동료들을 지키고 있었다. 발레리아와 베라딘, 그리고 베티가 베일의 금빛 기운 안에서 진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진이 도착하지 못했다면, 베일은 막 날아든 엘로나의 마법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치이잉-!
날카로운 한 줄기 빛이 라갈을 지나 베일을 덮치고 있었다. 엘로나의 공격이 보호막을 관통하려는 찰나, 직선으로 떨어진 시커먼 검기가 빛을 쳐냈다.
“엘로나 경을 어떻게 한 거냐, 켈리악.”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었지.”
엘로나는 진과 더 거리를 좁히지 않고 켈리악을 쳐다보았다.
“어억! 케, 켁!”
엘로나가 라갈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라갈은 우악스러운 손길에 목이 끊어질 것 같았다.
“켈리악 친구, 이, 켁, 이게, 무슨. 사, 살살 좀. 컥. 모양, 빠진다악.”
바동거리는 라갈을 무시하며 엘로나는 적들과 눈을 맞췄다.
“켈리악, 실패다. 생포는 불가능하고 전투도 위험해. 이것을 데리고 탈출하겠다.”
“엘로나 경……!”
베라딘의 목소리였다. 낯설고 적대적인 엘로나의 태도가 그와 진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엘로나는 베라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순혈 지플로 보이는 그가 왜 적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지가 의아할 뿐이었다.
켈리악은 엘로나의 판단을 수긍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알겠다. 이만 돌아가지, 가문으로.”
진은 물러나려는 켈리악과 엘로나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들과 전투를 시작하는 순간 동료들의 목숨과 진마계는 모두 끝장이었다.
“엘로나 경! 잊지 마십시오, 제가, 경을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베라딘은 소리쳤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것뿐이었다.
엘로나는 진 일행을 휘감은 멸망의 불에 자신의 마력을 더하며 퇴로를 열었다.
“잊지 마십시오! 잊지 마……!”
불길 속에, 베라딘의 목소리가 잠겨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