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41)
아스트레앙 가문의 두 여식은 제각기 다른 길을 택했다.
장녀는 아버지이자 검성, 제랄드 아스트레앙의 뜻을 이어 기사의 길을.
차녀는 어머니이자 천재 마법사, 히스토리아 아스트레앙을 동경해 마법사의 길을.
그러나 서로의 길은 달랐어도, 자매에게 강요되던 제랄드 아스트레앙의 철칙만큼은 동일했다.
‘어디에 있든지 최고가 돼라’. 검사로서의 재능도, 마법사로서의 재능도 함께 물려받았다면 최고가 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면서.
결과적으로 자매는 대륙 최고의 명문 아카데미인 메르헨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됐고.
장녀는 기사학부에서 수석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며 황실 기사단 입단 시험에 통과했다.
그리고 차녀는 올해 마법학부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수석이 아니었다.
최고가 아니었다.
하지만 차녀는 자신에겐 재능이 있으니 ‘노력하면 되겠지’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마법 훈련과 공부에 매진했다. 피와 땀의 결실이 기필코 자신을 수석으로 만들어 주리라 믿으면서.
그리, 그리도 노력했는데.
수석과의 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푸른 장미가 가득한 화원에서 루체와 카야는 한동안 점수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들이 소중히 여기고 있는 존재가 최상위권 학생들을 제치고 단번에 1위를 쟁취한 상황.
카야는 ‘역시 아이작 님!’하고 눈을 반짝였고, 루체는 떡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작, 그가 펠 카드 5장을 얻으며 단번에 1위로 등극했고.
시엘 카르네다스, 그녀가 펠 카드 5장을 잃으며 2위로 내려갔다.
그렇다고 시엘이 탈락한 것도 아니었다. 탈락했으면 순위권에서 이름이 사라졌을 테니까.
그 의미는 명확했다. 아이작과 시엘 카르네다스가 함께 움직였다는 것.
루체는 그리 판단한 후, 한밤중의 달빛처럼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이작,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두 사람은 흐뭇한 감정을 느끼면서 고개를 내렸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
“후우.”
아이작 덕분에 기분이 환기되었다. 카야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추스르고, 냉철한 눈매로 루체를 노려보았다.
지금부터 카야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아주 잠깐 아이작 문제로 호승심이 들끓긴 했으나, 강적을 앞에 두고 흥분해선 안 그래도 어려운 싸움이 더욱 어려워질 터다.
그녀는 차분하게 전의를 적절한 수준으로 가다듬었다.
“루체 엘타니아, 언젠간 당신과 꼭 한 번 붙어보고 싶었습니다.”
2등. 메르헨 아카데미에 온 이후로 카야는 단 한 번도 차석의 자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수석을 따라잡고 싶었다. 그러나 수석과의 격차는 너무도 큰 나머지, 찬장을 제 집 삼은 쥐 새끼처럼 카야의 자존감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왔고, 열등감에 살을 붙여 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수석과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마치 끝없이 광활한 바닷속을 헤엄치는 기분.
카야는 눈을 내리깔고, 진득한 진심을 또렷하게 읊조렸다.
“처음부터, 차석으로서 수석인 당신을 뛰어넘겠다고 결심했었어요.”
남들이 차석이라며 대단하다고 떠받들어줄지 몰라도, 카야의 시야에 내비쳤던 건 오로지 루체의 뒤통수뿐이었다.
“전 당신을 뛰어넘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노력해왔으니까. 그러니까, 이 싸움은 제게…!”
“……?”
카야의 각오가 담긴 목소리가 맥없이 흩어졌다. 루체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시야에 담긴 순간부터였다.
루체는 담담하게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카야의 뇌리를 스치고.
루체가 관심 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내뱉은 대답은 카야를 집어삼켰다.
“몰랐어, 네가 차석이었구나….”
차석 카야 아스트레앙에게 수석 루체 엘타니아란 반드시 따라잡고 싶은 존재. 언제나 제 앞에 굳건히 자리를 수호하고 있던 존재.
카야는 그런 수석의 뒷모습만 시야에 담으며 부지런히 달려왔으나.
수석인 루체에게는, 차석이든 뭐든 조막만 한 관심거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력량 측정 시간 때도 페르난도 교수가 마력량을 발표했던 걸 조금도 듣지 않았다. 오르핀관에 게시되는 성적표도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어차피 자신은 가장 강할 테고, 가장 성적이 높을 테니. 조금도 신경 쓸 게 없었다.
지금도 루체는 단지 카야를 쓰러뜨리고 아이작에게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카야는 완드를 꽉 쥐고 마력을 쏟아부었다. 입은 꾹 다문 채였다.
……
때아닌 소나기라도 쏟아졌던 것처럼 푸른 장미 화원엔 물기가 가득했다.
석양의 장엄한 빛이 시들해 보였다. 가만히 화단에 앉아서 구경하려니, 목구멍이 메어온다.
물에 흠뻑 젖은 담녹색 머리칼과 교복이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사실은 단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푸른 장미 화단에 기댄 채 늘어져 있는 카야에겐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졌다.
루체의 물 마법은 무척이나 무거워서, 카야의 바람 마법으로 밀어내기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몇 번의 합을 주고받은 후, 루체는 카야가 전투 불능 상태가 된 줄 알고 벌레나 밟았다는 듯이 무덤덤하게 떠나버렸고.
카야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저 아득한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탈락은 면한 것 같았다. 만약 탈락된 걸로 처리됐다면 팔찌에 신호가 나타나고, 시험 감독관들이 데리러 와 줬을 것이다.
“으….”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내장에서 아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어딘가 파열된 듯했다.
“…흑.”
카야는 푹 젖어 있는 옷깃으로 눈가를 닦았다. 수석이 물 속성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 * *
어서 학기말 평가를 통과하고 뇌신조 토벌전에 대비해야 한다.
나와 시엘은 내가 가야 할 제출처로 향하고 있었다.
시엘은 내가 준 베개를 양팔로 껴안은 채 잰걸음으로 걸었다. 기왕이면 나는 뛰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달리기는 쥐약이나 다름없었기에 잰걸음도 감사히 여겨야 할 판이었다.
내가 1위가 된 까닭인지 아까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습격해 오는 학생들이 많아졌으나.
죄다 시엘의 손짓 한번, 마법 한 방에 손쉽게 나가떨어졌다.
“확실히 D 클래스 애가 1등 먹으니까 뭣 모르고 덤벼오는 잡것들이 많아졌네.”
전부 나한텐 위협적인 적들이었으나 시엘 앞에선 어중이떠중이나 다름없는 듯했다.
“…멈춰.”
「불기둥 (불 속성, ★4)」
화르르르륵──!!
돌연 우리 앞에 화염 기둥이 위협적으로 솟아올랐다.
시엘이 팔을 뻗어서 안 막아줬으면 직화구이가 될 뻔했다.
[불기둥]은 금세 붉은빛을 흩뿌리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우리를 해치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 마법 같았다.시엘은 그 마법의 출처를 눈으로 쫓았다. 나도 시엘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 서서히 선명한 노을빛이 드리우고 있는 때였다. 주변에 있는 높은 폐건물 옥상에, 한 여학생이 난간에 위험하게 걸터앉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보다 좀 더 내려오는 분홍빛 단발머리는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고.
교복 스커트 아래로는 뽀얀 피부의 각선미가 쭉 뻗어 있었다.
우리를 향해 뻗은 오른손 앞엔 언제든지 마법을 쏠 수 있도록 연붉은빛 마법진을 전개해 둔 채였다.
A 클래스의 최상위권 우등생 중 한 명, 케리드나 화이트클락이었다.
[ 케리드나 화이트클락 ]Lv : 90
종족 : 인간
속성 : 불, 바람
위험도 : 하
심리 : [ 자신의 매도로 당신이 기가 죽길 바라고 있습니다. ]
케리드나 화이트클락은 [원소 효율]이 몹시 뛰어나다.
[원소 효율]이 높을수록 마법 한번 쓰는 데 들이는 마력 소모량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마법의 사정거리가 늘어나며, 합동 공격의 성공률까지도 올라간다. 마법학부 1학년 중 [원소 효율]로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는 자는 없다.
결과적으로 케리드나는 전투에 있어서는 1학년 그 누구보다도 많은 변수를 창출할 수 있어서, 싸우기 가장 꺼려지는 상대 중 한 명이었다.
케리드나는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이제 넌 끝이다’라고 말하는 악역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악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기 시작했다.
“────!”
…들리지 않았다.
뭐라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것 같은데, 자꾸만 저녁 바람에 묻혀 버린다.
“뭐라 하는지 들려?”
나는 시엘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케리드나는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화려한 제스처까지 취해가면서 정성스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뭐라 반응해주는 게 예의일 것 같은데.
아쉽게도 진짜 뭐라고 입을 나불대고 있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무의미한 시간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와 시엘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기자, 케리드나 화이트클락은 당황한 얼굴로 버럭버럭 소리쳐 대기 시작했다. 물론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 순간.
「돌개바람 (바람 속성, ★4)」
“……!!”
머리 위에서 위협적인 회오리바람이 쏟아졌다.
기척을 감지한 나는 재빨리 땅을 박차고 시엘을 안으면서 옆으로 몸을 날렸다.
휘우우우우──!!
회오리가 지면에 맞닿자 살벌한 바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나는 아담한 크기의 시엘을 껴안은 채로 바닥을 뒹굴었다.
“괜찮아?”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 반쯤 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시엘.
“…비켜.”
시엘은 내가 거슬린다는 듯이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전 공격당한 상황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나는 시엘을 일으키면서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허영심 많은 금발 귀족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주변에 있는 간이창고 지붕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거만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 트리스탄 험프레이 ]Lv : 77
종족 : 인간
속성 : 바람
위험도 : 하
심리 : [ 당신을 처참하게 탈락시키고 싶어 합니다. ]
“하! E급 평민이 그럼 그렇지! A 클래스 녀석한테 빌붙고 있었나? 남한테 기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처지라니! 우스꽝스럽구나!”
트리스탄 험프레이는 ‘크하하학─!’ 하고 호탕하게 비웃다가 사레들려 콜록콜록 헛기침했다.
저놈한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나는 얼른 시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곧이어 지축이 흔들리고, 또 다른 마법이 나와 시엘을 덮쳤다.
「암벽 (바위 속성, ★4)」
견고한 바위의 벽이 지면에서부터 박력 있게 솟아올라 나와 시엘을 가두려 했다.
바위벽은 하늘을 향해 드높이 뻗어나갔다. 묵직한 마력이 느껴지는 두꺼운 벽이었다.
“시엘.”
“알고 있어.”
나는 양 손가락을 맞대고, 양손 틈으로 얼음 마나를 흘려보내 응축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엘도 바위벽을 향해 세 개의 푸른빛 마법진을 구현했다.
── 「빙결 폭발 (얼음 속성, ★5)」
── 「수압포 (물 속성, ★5)」
콰아아아아───!!
펑펑펑펑펑펑───!!
내가 일으킨 얼음 폭발은 바위벽에 균열을 일으켰고.
그 틈에 시엘의 마법진은 대포 발사하듯 위력적으로 물을 쏘아 댔다.
콰다다다당──!
[암벽]이 무너진다. 바위 조각과 얼음 조각이 허공에 풍비박산했다.수분기를 머금은 먼지바람이 몰아치며, 그 속에서 나와 시엘은 전투 태세를 취했다.
이윽고 먼지가 서서히 걷혀나가고.
내 눈에 비친 풍경은 꽤 가망 없어 보이는 전세였다.
트리스탄뿐만 아니라 트리스탄의 부하로 추정되는 학생들 열댓 명가량도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쌍둥이 여학생이나, 음습한 기운을 뿜어대며 키득키득 웃고 있는 장발의 남학생이나, 왜소한 체격의 마법 영재까지 있었다. 전부 B 클래스에서 한 가닥 하는 우등생들이었다.
여전히 건물 옥상에서 뭐라 지껄이고 있는지 모를 A 클래스의 여학생, 케리드나 화이트클락도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전투를 좋아한다.”
서서히 걷혀가는 먼지 속. 앞에서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황옥빛 마석이 박혀 있는 나무 방망이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케리드나 화이트클락까진 시엘이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자’까지 가세해 버리면 진짜로 승산이 없어져 버린다.
먼지가 완전히 걷히고.
바로 ‘그 여자’가, 우리 앞길을 가로막고 선 모습이 내 시야에 또렷이 들어왔다.
“그래서 이 전장이 무르익길 기다리고 있다가, 전부 다 박살 낼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나무 방망이를 쥐고 있는 오렌지색 머리칼의 미소녀.
넓은 골반과 다리 라인이 드러나는 교복 바지 차림. 방망이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은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였다. 건들건들한 태도는 불량해 보였다.
뒷머리는 올려 묶어 말총처럼 내려앉아 있었고.
하얀 셔츠는 단추를 전부 풀어헤쳐, 그 안에 입고 있는 탱크탑처럼 생긴 검은 속옷과 매끄러운 복근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최대한 이렇게 되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전황은 내가 예상했던 상황 중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루체의 대학살극이 없는 본래의 >메르헨의 마법 기사> 학기말 평가 시나리오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을 뽑으라면 단연 저 오렌지색 머리칼의 여학생이었다.
미리 준비해온 고기와 음료를 즐기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학기말 평가 후반부부터 참전.
중후반부 때 시엘의 난입으로 증가했던 난이도는 더욱 미친 수준으로 치솟아 버린다. 저 오렌지색 머리의 여자가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처치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전투가 즐거워서’라는 게 그 이유다.
“뭐냐, 너언? 완전 재밌어지지 않았냐고! 아앙?!”
씨익 웃으며 소리치는 오렌지색 머리칼의 여학생. A 클래스의 불량아, 리제타 라이온하트.
그녀가 최후의 벽으로 자리 잡았다.
[ 리제타 라이온하트 ]Lv : 94
종족 : 인간
속성 : 바위
위험도 : 하
심리 : [ 당신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합니다. ]
이름 높은 기사 가문, 라이온하트 가문으로서 예절과 품위를 중시한 교육을 받아왔으나.
아카데미에 들어오면서 그 답답했던 가문 풍조에서 벗어나, 제 성격대로 살아가고 있는 막무가내 소녀.
리제타 라이온하트.
식은땀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A 클래스의 케리드나 화이트클락과 리제타 라이온하트, B 클래스 상위권인 트리스탄 험프레이와 그의 부하 열댓 명, B 클래스에서 한 가닥하는 녀석들이 일제히 우리를 노리고 있는 상황.
이 녀석들은 지금 자기들이 하는 행위가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을 터다.
“우릴 쓰러뜨리면 여기 있는 녀석들이 전부 다 적이 될 텐데, 어쩌려고?”
“바라던 바다. 전부 다 박살 낼 뿐이지.”
“…좀 봐줘라. 너무 불리하잖아, 이건.”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날 굴복시키고 싶다면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라, 얼간이.”
아무 기대 없이 리제타 라이온하트를 한번 떠봤는데 예상대로의 반응이 나왔다. 턱은 일부러 치켜드는 걸까.
“그러면 옷 벗고 춤추라 하던, 사귀어달라고 하던, 밤 시중을 들라 하던, 뭐든 다 해 주마.”
대뜸 주위에 있는 남학생들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자극적인 언행이 그들의 남심을 불 지른 듯했다.
리제타의 이상형은 확고하다. 자기보다 강한 또래의 남자. 그런 남자를 만나면 몸도 마음도 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을 터다. 사실상 지 바람을 말하는 셈이었다.
“애초에 시엘 카르네다스, 넌 누구랑 팀 먹고 행동하는 부류가 아닐 텐데?”
리제타는 금안으로 시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남자가 대체 뭐길래 도와주고 있는 거냐?”
시엘은 내 앞으로 한 발짝 나서고는, 내가 준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 리제타를 향해 오른팔을 뻗었다.
주황빛 마법진이 그녀의 오른손 앞에 구현되었다.
“시끄러워. 덤비기나 해.”
시엘의 전의가 공기를 가라앉혔다.
리제타는 피식 웃고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나무 방망이를 내리고, 양손으로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저건 평범한 방망이가 아니다. 바위 속성 마법의 위력을 증대시켜 주는 마도구를 개량한 것. 카야의 완드 같은 리제타만의 전용 무기라고 보면 된다.
“그래, 그 반응! 마음에 든다, 시엘 카르네다스!”
리제타는 흰자위가 더욱 큰 면적을 차지할 만큼 눈을 부릅뜨며 전투적으로 소리쳤다. 전투욕을 용암 분출하듯 쏟아 내는 한 명의 검투사처럼.
트리스탄 험프레이도, 그의 부하들도, B 클래스의 우등생들도 마법진을 전개해 전투 태세를 갖췄다. 건물 옥상에서 우릴 노리고 있던 케리드나 화이트클락도 마찬가지였다.
온통 나보다 강한 녀석들뿐이지만, 잠자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가세하기 위해 시엘 옆에 나란히 서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팔을 뻗어 나를 가로막았다.
“넌 끼지 마. 좀 전에 [암벽] 부술 때도 그런 조잡한 마법이나 썼던 걸 보면 전혀 도움 안 될 것 같으니까.”
조잡한 마법이라뇨…?
내 [빙결 폭발] 한 대 맞아보면 그런 소리 안 나올 텐데.
“…솔직히 아직 확신이 안 서. 너, 이런 상황에 와서까지 약한 척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마나 감지력이 뛰어날 뿐인 별종인 거야?”
놀랍게도 전부 정답이 아니었다.
나는 약할 뿐인 게 맞고, 마나 감지력은 너보다 안 좋은걸 떠나서 형편없는 수준이다. 아이작 자체가 원래 그런 몸이다.
“…내가 뭘 하든 내 마음이지.”
아무튼, 넌 도망치려 하지 않고 거래 내용 따라서 꿋꿋하게 날 지켜 주려는데.
내가 도움이 안 돼서야 쓰겠냐.
“바보야.”
“바보, 뭐…?”
“…로 3행시 해 보겠습니다.”
말이 헛나와서 황급히 수습했다.
시엘이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그래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 날 공격할 겨를이 없다는 게 천만다행일까. ‘바’로 운을 안 띄워주는 건 조금 뻘쭘했지만.
…어차피 싸워야 한다. 나를 노리고 있는 저 녀석들을 지켜 주기 위해서, 나도 살기 위해서, 저 녀석들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솔직히, 솔직히 실패할까 봐 무섭다. 저 녀석들을 쓰러뜨리는 건 시엘이라고 해도 버겁고, 나는 아직 약하니까.
그러나 애써 심호흡으로 감정을 갈무리하며 두려움을 털어냈다. 겁먹고 있어 봤자 되는 일도 안 된다. 나는 그간 싸워왔던 경험들을 떠올리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교복 재킷 안에서 낡은 단검 하나를 꺼내고, 검집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엔 재해의 검집을, 왼손엔 평범한 날붙이를 쥐었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장애물을 뛰어넘고, 마족을 처치하기 위해 나아갈 뿐.
“……?”
…뭐지? 기껏 비장하게 각오를 다졌건만, 어째 분위기가 묘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의를 불태우고 있던 리제타의 얼굴엔 경계심이 차올랐고.
건물 위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던 케리드나는 곤란해하고 있었고.
트리스탄과 그의 부하들, B 클래스 우등생들까지도 몹시 긴장한 상태였다.
그들의 시선은 나와 시엘 쪽에 머무르고 있지 않았다.
“아이작…?”
달빛처럼 은은한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시엘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우리와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단아한 여학생 한 명이 눈에 비쳤다.
그녀의 로즈골드색 머리칼과 머리 양옆에 달려 있는 몰포나비 색감의 머리 끈은 노을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평소에 나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 주던 그녀의 얼굴엔 역광 탓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여학생은 헛숨을 집어삼켰다.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그녀의 푸른 대양을 담은 듯한 눈동자가 내 모습을 자세히 훑고 있다는 사실은, 느낌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 상태가 겉보기에 매우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서 심하게 구르다 온 모양새다. 전부 시엘 때문이었다.
루체에게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마나는 묵직하게 공기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윽한 살기는 절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누가 널 그렇게…?”
싸늘한 음성이 공기를 가라앉혔다.
그러자 내 옆에 서 있던 시엘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리제타 쪽을 가리켰다. 놀라울 정도의 뻔뻔함이었다.
이내, 루체의 냉소적인 눈빛이 나와 시엘 너머에 있는 적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나로선 미처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