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23)
나의 악당들 223화
47. 악몽(5)
탈의실 한쪽에 걸린 거울에 내 모 습이 비쳤다.
“……골 때리는구만.”
가죽옷과 흠집 가득한 갑주, 상체 절반을 덮은 검은색 반망토, 뱀의 비늘무늬가 새겨진 장갑과 허리띠, 길이가 1.2미터도 넘는 길쭉한 검. 주변에 놓인 물건들-곱게 접힌 수 건, 플라스틱 빗, 스킨•로션이 담긴 유리병, 드라이어-과는 어울리지 않 는 차림새였다.
이질감이야 어쨌든, 장비를 다시 갖춘 덕에 마음은 썩 편하다. 특히 허리에 찬 흐룬팅의 퍼멀에 손을 얹 으니, 뭐랄까, 아늑함에 가까운 든든 함이 느껴진다.
1번 캐비닛에 내 장비들이 들어 있었다면 2번 캐비닛엔 어두운 황색 의 합성궁을 포함한 콜의 장비들이 놓여있었다.
“ 흐음••••••
다른 동료들의 물건은 왜 없는 거 지?
의문을 품은 와중에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든다.
엘렌, 우테콰이, 뭉치, 헤일라는 이 저택이 아닌 전혀 다른 어딘가에 있 는 건 아닐까?
일이 어찌 되었든 가만히 앉아서 해결될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무장을 갖춘 채 탈의실을 나선 뒤 2층을 재차 둘러보았다.
여기도 3층과 마찬가지로 바닥은 푹신한 편이었지만, 가죽장화의 징 박힌 밑창 탓인지 저벅대는 발걸음 소리가 꽤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 소리를 줄여보겠다고 발 걸음을 늦추진 않았다.
도둑놈처럼 몰래 돌아다니다가 또 아까처럼 검은 괴인들과 마주치기라 도 하면……. 아, 상상만 해도 끔찍 하다. 이번엔 진짜 심장이 내려앉을 지도 몰라.
차라리 억지로라도 긴장을 풀고 당 당히 돌아다니는 게 정신건강에 이 로울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2층을 다시금 뒤져보아도 여전히 인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사무실의 컴퓨터들을 하나하나 건드려 봤는데 아예 켜지 지도 않는다.
형광등이 켜지는 걸 보면 전원은 들어오는 것 같은데, 왜 컴퓨터는 안 켜지는 거야?
의문을 품기도 잠시. 이 괴상한 세 상에서 상식을 바라는 것 자체가 어 리석은 짓임을 깨달았다.
컴퓨터는 그렇다 치고, 이제 어떻 게 해야 하지?
“……끄”
O •
……사실, 내가 가야 할 곳은 처음 부터 정해져 있었다.
내려가야 한다. 1층으로 내려가서, 동료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동료 들이 있건 없건 수색이 끝나면 이곳 을 떠나야 한다.
이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난 계단 으로 통하는 방화문 근처를 서성거 릴 뿐 좀처럼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 다.
굉음을 내며 돌아다니던 육중한 기 척의 괴물, ‘허실장’에 대한 꺼림칙 함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 니었다. 설명하기 힘든 불길함이 가 슴 속에서 싹을 틔우는 것 같다.
가슴이 답답한 와중에도 내 이성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테라스를 통해 내려갈까?
아니, 너무 위험해. 이미 경험해 봤잖아.
탈출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쪽으로 내려가 정문으로 내달리면 되겠지 만, 어쨌건 난 지금 1층도 뒤져봐야 하는 상황이다. 테라스로 내려가서 유리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방식은 허실장이라는 괴물을 자극할 가능성 이 아주 높았다.
그럼 이번에도 답은 하나군.
끼이-
흐룬팅을 뽑아 쥔 채로 조심스레 방화문을 열고 계단에 들어섰다.
“ O 99
난자한 피를 보니 헛구역질이 치솟 는다. 간호사 괴물의 끔찍한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그나마 그 시체가 없어서 천만다행 이다. 시체까지 있었으면 내 망설임 이 두어 배는 더 길어졌겠지.
“••••••후우.”
한숨으로 욕지기를 털어낸 뒤 1층 으로 내려갔다.
1 층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좌우로 늘어선 스피드게이트 였다.
회사나 빌딩 입구에 흔히 설치하는 물건이 웬 교외의 저택에 있으니 어 색할 법도 한데 인테리어 때문인지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넘어가야 하나, 싶어 다가가니 아 크릴판이 쌩하고 열린다.
“……아이씨, 깜짝이야.”
뭐, 게이트 안쪽에 서 있으니 출입 증 없이도 문이 열리는 게 당연한 가.
천천히 스피드게이트를 나서며 주
변을 둘러보았다.
층고가 높아서인지 아니면 인테리 어 때문인지 1층은 백화점 로비 같 은 인상을 풍겼다. 정면에는 블라인 드가 쳐진 전면창이 시야 가득 들어 왔고, 한쪽에는 프런트데스크가, 반 대편에는 카페가 있었다.
동료들이 갇혀있을 만한 방을 뒤져 보았지만, 1층은 그 넓은 공간이 온 통 탁 트여있는 곳이라 방이라고 할 만한 장소 자체가 별로 없었다.
공용 화장실과 카페의 부엌 안쪽, 그리고 데스크 뒤쪽의 탕비실까지 살펴본 뒤에야 이 저택인지 뭔지 모 를 건물이 텅 비어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수색은 끝났으니 이젠 여길 벗어나 야겠다. 일단 3층으로 돌아가 콜을 깨워야-
“어?”
어떤 남자의 새된 목소리가 들린 건 내가 막 계단 쪽으로 움직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뭐야, 승수냐?”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1층의 출입 구 쪽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웬 장한이 히죽 미소를 지 어 보인다.
“승수 맞네. 왜 혼자 나와 있어?”
“……누구시죠?”
“••••••으응?”
짧게 자른 머리를 포마드를 발라 정리하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호방한 인상의 사내였다.
“뭐야, 뭐 하는 건데? 장난치는 거 야?”
“참나.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장난도 치고, 너 그냥 얌전한 캐릭 터는 아니구나?” 정장 사내는 피부도 희어서 언뜻 보면 평범한 회사원 같았지만, 키가 나만큼이나 크고 어깨도 무척 넓어 서 어쩐지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훈련받은 전사와도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근데 왜 혼자 있어? 간호사는 어 디 가고?”
“아가씨 왔어? 오늘이, 수요일인 데. 아가씨 학교 가는 날 아닌가?”
정장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 가왔다.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흐룬팅을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냐니까? 몰래카메라야?”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덤비기 나 해.”
“뭐?”
정장 사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요놈 좀 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실장님이 보자기로 보이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사내는 내 쪽으로 훅 팔을 뻗어왔다.
마치 친한 동생에게 헤드록을 거는 듯한 몸동작이었지만, 난 얼른 뒷걸 음을 치며 흐룬팅을 휘둘렀다.
서걱!
분명 꽤 힘이 실린 칼날이 팔뚝에 닿았는데, 소매 끝자락이 조금 잘렸 을 뿐 사내는 멀쩡했다.
“아, X발-!”
사내는 커프스에 달려 있던 금색 단추가 떨어진 것을 보고 인상을 와 락 찌푸렸다.
“이 미친 새끼가,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그가 무어라 지껄이든, 난 흐룬팅 을 이마 높이에서 쥔 채 칼끝으로 놈의 미간을 겨누었다. 낯선 듯 익 숙한 자세가 조금 오묘하지만 안정 감을 준다.
내가 대답 대신 칼을 겨누자 정장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 뜨리며 욕을 지껄여댔다.
“하, 이 새끼가 위아래도 몰라보고. 내가 우스워? 아가씨가 놀아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
깔끔하고 희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이 모자란 새끼야, 넌 애완용 햄 스터야. 아가씨가 너한테 질리면 그 순간부터는 그냥 쥐새끼로 살아야 된다고. 알아들어?”
말을 쏟아내던 사내의 얼굴은 검붉 은 색으로, 이어서 검은빛으로 물들 어갔다.
“근데, 그런 새끼가-”
사내가 몸을 뒤틀며 덩치를 불렸 다. 나와 비슷하던 체격이 순식간에 두세 배로 커졌다. 내 이성은 지금 이 기회이니 당장 공격하라 명령했 지만,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 다.
“감히 나한테 마빡을 들이대-!”
사내는 온몸을 검게 물들인 거인으 로 변했다.
그 모습은 언뜻 2층에서 보았던 검은 괴인들과 흡사했지만, 결정적 인 차이가 있었다. 로비의 높은 천 장에 어깨가 닿을 만큼 거대한 거인 은 인체 비율이 기괴하게 비틀려 있 었던 것이다.
다리는 전체 키의 X도 되지 않을 만큼 짧았고, 어깨는 기괴하리만치 넓었다. 팔은 머리통보다도 큰 주먹 을 매달고 있었는데, 팔 자체도 길 게 늘어나서 똑바로 선 채 손끝이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트롤을 좌우로 서너 배쯤 늘려 놓 은 것 같은 형상의 거인은 얼어붙어 있는 내게 단숨에 덤벼들었다.
“으우어어!”
거대한 손바닥에 짓이겨지기 전에 몸을 움직인 건,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고함 덕분이었다.
“허윽,”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난 발밑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에 이를 악물고 옆으로 몸을 굴렀다.
꽈앙-!
대리석 바닥이 단숨에 박살이 나 사방으로 반짝이는 파편을 흩뿌려 대었다.
난 몸을 일으키자마자 재빨리 앞으 로 달려 나갔다. 바로 뒤쪽에서 꽝 하는 굉음과 진동이 터졌고, 날아든 돌조각이 뒤통수와 등을 연거푸 두 드려 댔다.
“X팔,”
저게 허실장이구만.
난 욕설을 뱉으며 출입구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문을 열 여유도 없어서 완갑으로 얼굴을 가린 채 두꺼운 유리에 몸을 날렸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나기도 잠시. 뒤이은 괴물이 전면창을 모조 리 산산조각 내며 모든 소음을 덮어 버렸다.
“이, 쥐새끼-!”
허실장은 공기가 떨리는 것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날 전력으로 추격 해왔다.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쿵 쿵거림에 모골이 송연해졌고, 난 공 포를 연료 삼아 놀라운 속도로 쏘아 져 나갔다.
놈은 나보다 느렸지만 키가 6미터 쯤 되는 괴물이 전력으로 내달리니 만만찮은 속도가 났다.
아니, 그 거구에 가속이 붙기 시작 하니 금세 나를 따라잡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부웅!
거인의 손끝이 머리칼을 스쳤다. 대문이 코앞이었지만 거기 닿기 전 에 거인의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이를 깨닫고 절망하던 그 순간.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콰각, 하고 철판이 찢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 려 퍼졌다.
“우우억,”
얼른 옆으로 몸을 날리며 돌아보 니, 검은 거인이 앞으로 자빠지기 직전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놈 의 왼쪽 오금엔 두꺼운 화살 한 발 이 꽤 깊이 박혀 있었다.
“포이닉스 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궁수 콜이었다. 그는 2층의 어느 방-아마 골프 연 습실인 것 같다-창가에 선 채 시위 를 당기고 있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내 흔적을 쫓다가 장비를 되찾은 모양 이다.
“좋아, 계속 쏴-!”
빽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흐룬팅을 고쳐 쥐었다.
전사다운 포악함, 잔혹함, 투쟁심을 잃고 겁쟁이만 남은 육신이 숨을 몰 아쉬었다.
“후, 그래. 좋아, 해보자고.”
지금은 도망칠 때가 아니라 싸워야 할 때였다.
비록 저 괴물이 엄청 무섭게 생기 긴 했지만 기는 용, 아니, 지하군주 만큼 강하진 않을 터였다. 게다가 흐룬팅을 비롯한 장비들도 모두 갖 춘 채였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이성의 장구하고 간절한 설득에 육 신이 답을 내놓았다.
“그하아악!”
등신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거인을 향해 달려갔다.
등허리에 두 번째 화살을 맞은 허 실장은 콜이 있는 저택 쪽을 돌아보 고 있었는데,
요 o o
내 고함을 듣곤 도로 나를 돌아보 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상 황은 오히려 더 좋아졌다.
높이뛰기를 하듯 전력으로 도움닫 기를 한 뒤 땅을 박찼다. 갑옷을 두 른 채였지만 몸이 놀라울 만큼 가볍 게 느껴졌고, 도약 순간 넘치는 힘 으로 땅을 밀어내자 마치 뭔가 나를 끌어올리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 다.
후웅!
그렇게 새처럼 뛰어올라서, 거인의 목에 흐룬팅을 박아넣었다.
까가각-!
“크읍,”
칼날이 놈의 검은 피부에 부딪친 순간 용접을 하는 것처럼 마구 불똥 이 튀었다. 쇳덩어리를 두드린 것처 럼 손목이 아릿하다.
허실장의 목에 커다란 상흔이 남았 지만, 놈은 여전히 멀쩡히 몸을 움 직였다.
“우워어어-!”
아니, 분노하여 날뛰고 있었다.
흐룬팅을 회수하여 착지한 직후, 난 칼날의 예리함이 부족함을 깨닫 고 손을 들었다.
아니, 이럴 필요 없지.
평소라면 칼날로 살갗을 그어야 했 겠지만, 난 지금 ‘사왕의 비늘수갑’ 을 끼고 있었다.
“후우.”
혈기를 끌어올리며 정신을 집중하 니, 손바닥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 졌다.
장갑을 통해 피가 배어 나왔다.
피는 마치 원래 그렇게 흘러야 한 다는 듯 흐룬팅의 손잡이를 휘감으 며 타고 오르더니 칼날을 감싸 안았 다.
흐룬팅이 번쩍! 하고 영롱한 붉은 빛을 뽐내자,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검은 거인을 향해 마주 뛰어올랐다.
부우웅!
좌우로 거인의 검지와 중지가 스쳐 지나가고, 한순간에 코앞에 닥친 거 인의 얼굴에 피로 물든 흐룬팅을 박 아넣었다.
푸우욱!
젓가락으로 단단한 두부를 찌르는 감각과 함께, 흐룬팅의 칼날이 거인 의 안구 속으로 사라졌다. 십자막이 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내 손목까지 들어갔을 기세였다.
“끄.”
거인은 나지막한 단말마와 함께 땅 에 쓰러지고 말았다.
거구가 쓰러지며 쿵! 소리를 냄과 동시에 어디선가 광풍이 불어닥치며 대문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검게 물 들어 있던 저택의 대문은 바람에 씻 겨 내려가듯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끼이익-
철제 펜스와 같은 모양의 대문이 열리고, 여인이 들어섰다.
하얀 셔츠에 파란 치마를 입은 아 름다운 여인.
“……정, 소하?”
여인의 조용히 지어 보인 미소에 머릿속에서 무언가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