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수십 년 전 황제는 아직 왕국이었던 땅을 구석구석 돌아다녔고,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두 개의 강이 교차해서 흐르는 대지는 비옥하기 그지없었고, 제법 커다란 분지가 조성되어진 대지는 일국의 수도라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황제는 아무런 곳도 없는 허허벌판에 깃발을 꽂고 정복 전쟁을 선언했다.
깃발 주위로 막사가 쳐지고, 군대가 소집되었으며, 전쟁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황궁이 세워지고, 제국의 강역이 늘어날수록 건물도 같이 늘어나기를 수십 년.
어느덧 허허벌판이었던 대지는 수백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륙 제일의 도시가 되었으니 그곳이 카일룸 제국의 수도, 통징 제도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황제의 재능은 건축과 도시 조성에도 탁월했으니, 제도는 철저하게 계획도시로 구성되었다.
황궁을 중심으로 군부와 행정부가 설치되었고, 귀족회의와 각 관청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다.
이후의 확장에도 이 기조는 변함이 없어서 황궁을 중심으로 증축과 확장을 거듭했고, 높디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제도를 중심으로 위성도시가 생겨났다.
각각의 위성도시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었고, 그 자체가 하나의 방벽이 되었으니, 제도는 대륙에서 가장 번성하고 단단한 도시가 되었다.
“……화려하군요. 헤르메스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곳은 그야말로 격이 다르네요.”
거대하기 그지없는 도시의 모습에 감탄을 감추지 못하는 다렌의 모습에 드웨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부분도 고려해서 조성된 도시입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당하게 만들어서 저절로 제국에 대한 무력감을 심어 주는 거죠.”
“……진짜요?”
눈을 동그랗게 뜬 다렌의 표정을 본 드웨인이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시지 말고, 항상 그 이면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군요.”
감탄의 표정이 사라지고 눈에 경각심을 띄기 시작한 다렌을 보면서 드웨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보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렌을 비롯한 그라인드의 일행들에게는 생에 어느 때보다 값진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제는 자신의 두 손을 피로 물들어서 신앙을 증명했고, 마법사는 실험실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한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실전을 겪은 기사는 정예로 변모했으며 소드마스터는 자신의 검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고히 했다.
무엇보다 이 일행에서 가장 큰 성장을 이룬 것은 다렌.
일련의 일로 인해서 복잡하기 그지없었던 소년의 마음은 피와 고난을 겪어서 성숙해졌고, 아직은 이른 나이에 유년기와 작별을 고하게 된 것이다.
알코르의 아렌에 대한 원망이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제는 그 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으니 괄목할 만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약점 없는 적은 없지. 약점을 찾지 못해서 공략하지 못하는 것일 뿐. 항상 상대를 폭넓게 보는 법을 중시해야 해.”
불현 듯 귓가를 파고드는 투박한 말투에 흠칫 놀랐지만, 이내 다렌은 자세를 바로하고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조언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야.”
다렌의 정중한 태도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 꼬리를 씰룩거린 중년인이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가득한 흉터와 커다란 덩치, 마수의 가죽을 망토로 걸친 중년인의 모습은 기사보다는 용병에 가까웠고,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다렌은 중년인이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한 모습에 드웨인이 기꺼운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군. 제자로라도 삼으려는가?”
“……흥.”
그윽하기 그지없는 미성에 중년인, 푸른늑대 용병단을 이끌고 있는 알렉세이는 콧김을 내뿜었지만, 딱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평번하다면 평범한 말이었지만, 알렉세이의 한 마디에는 그가 지금까지 수련하고 정립해 온 모든 것이 들어있었으니, 언젠가 다렌이 경지에 이른다면 알렉세이의 이 말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는 네 녀석은? 이전의 고용주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 거 같은데?”
“글쎄? 슬슬 정착을 해 볼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미성에 어울리는 조각 같은 외모의 중년인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고, 그 순간 주변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시 곳곳에서 중년인을 몰래 주시하고 있는 처녀들의 가슴에 불이 난 것이다.
그런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물점이 인상적인 중년인, 붉은가지 용병단을 이끌고 있는 디워미드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았고 처녀들의 신음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사내들을 본다면 주먹부터 뻗고 보는 알렉세이였지만, 눈앞의 디워미드에게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소드마스터.
알렉세이 자신이 소드마스터라면 디워미드 역시 소드마스터였고, 둘의 무력은 그야말로 호각이었으니 싸워 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알코르가 제시한 파격적인 금액도 그렇지만, 두 용병단은 끝없는 전쟁에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제 아무리 전쟁을 업으로 삼는 용병이라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쉴 때 쉬어야 하는 법이고, 마침 그 시기에 알코르의 제안이 건네 온 것.
그렇게 전쟁터를 벗어난 두 용병단이 다렌의 일행에 합류했고, 몇 번의 전투 끝에 제도에 도착했다.
“푸른늑대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붉은가지는 원래 망국의 기사들이다. 나라와 영지를 잃은 분노를 전쟁터에서 풀 수밖에 없었지만 슬슬 그것도 한계야.”
씁쓸한 표정에도 숨넘어가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지만, 알렉세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적으로 만난 두 소드마스터는 적아를 넘어선 우정을 가지고 있었고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해 알고 있었다.
“충성심은 희미해지고, 분노는 희석되었으니 새로운 충성의 대상을 찾아야겠지. 기사는 지킬 것이 있을 때 가장 강한 법이니까.”
흉악하기 그지없는 알렉세이의 표정에 안타까운 감정이 떠올랐다.
사연 없는 용병은 없고, 알렉세이와 푸른늑대들도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기에 디어뮈드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라인드는 여러분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줄 수 있소이다.”
“드웨인 경.”
때를 기다리고 있던 드웨인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기사만 되어도 인간의 감각을 벗어나는데, 소드마스터는 그 이상의 존재인 자들이다.
딱히 목소리를 죽이지도 않았으니 디어뮈드는 드웨인에게 붉은가지 용병단의 의사를 전달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드웨인은 이런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땅도 충분하고 작위도 가지고 있소이다. 거기에 그라인드는 황금이 넘쳐나는 곳이지. 붉은가지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만한 곳을 찾기 힘들 것이오.”
자신만만한 드웨인의 말에 두 소드마스터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을 쫓아다니는 용병에게 고용주의 재력을 파악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일이다.
황금이 부족하지 않은 그라인드에 고용되는 것은 많은 용병들이 선호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이름 높은 두 용병단도 다르지 않았다.
“도련님을 보면 백작님과 그 가족분들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지요. 참으로 훌륭하실 것이라고 감히 생각됩니다만.”
다렌을 슬쩍 본 디어뮈드가 눈가를 좁혔다.
“저런 훌륭하신 도련님도 후계자가 아니라고 하시니 다른 분들은 어떨까하는 생각에 망설여지는군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다렌의 자질은 훌륭하다.
눈 높은 소드마스터인 알렉세이가 진지하게 자신의 제자로 들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그 재능을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가지 일을 겪어 마음이 단련된 소년은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나무랄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다렌이 삼남이라는 이유로 후계자가 아니라고 하니, 혹여라도 복잡한 정치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넌지시 물은 것이고, 드웨인은 디어뮈드의 의문을 놓치지 않았다.
“말 돌리는 것 하고는.”
알렉세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디어뮈드는 물론이고 드웨인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이 조금 있었기는 했지만 잘 정리됐지요. 그라인드의 후계는 일절의 흔들림도 없습니다.”
단언하는 드웨인의 말에 디어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마스터쯤 되면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심기 시작하게 되니 행동과 말에 조심할 수밖에 없다.
경지에 오른 소드마스터인 드웨인의 말에 실려있는 힘을 디어뮈드는 느낄 수 있었고, 자연히 고개가 끄덕여진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충분히 생각해 보시오. 그라인드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
디어뮈드의 말에 드웨인이 반색했다.
높은 확률로 영지에 소드마스터와 그를 보조하는 전투 집단이 영입될 수 있는 상황이니 그라인드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드웨인으로서는 기꺼운 상황인 것이다.
오로지 가문과 영지만 생각하는 노기사의 모습에 디어뮈드도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기사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디어뮈드의 눈에는 드웨인의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다 좋은데 일단 의뢰부터 완수하고 생각해라.”
“맞는 말이군.”
퉁명스러운 알렉세이의 말에 디어뮈드가 미소를 지우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모습에 여기저기서 처녀들의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덧 일행이 당도한 거대한 문.
제국을 상징하는 드래곤의 문장이 화려하게 양각되어진 거대한 문과 그것을 지키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기사들의 모습에 모두들 마음을 가다듬었다.
위성도시를 지나쳐 진정한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입구.
그 입구에 도달한 다렌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순환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머리를 감쌌다.
들뜬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정신이 명료해졌다.
소년에게 맞지 않는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한 다렌의 뒤로 드웨인과 두 소드마스터가 섰다.
“가시죠. 도련님.”
“그래요.”
드웨인의 말에 다렌이 힘차게 발을 뻗었다.
당당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지켜보던 시민들과 귀족들이 소리 없는 탄성을 발했고, 제도의 문을 지키는 기사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라인드 백작가의 다렌이다. 숙조부의 시신을 모시러 왔다.”
낭랑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가 제도에 울렸다.
* * *
“손님이 왔다고?”
“예. 도련님.”
유나가 소환한 운디네를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엘렌을 지켜보고 있던 아렌에게 에드워드가 다가와 말했고, 아렌은 보기 드물게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저희 선에서 대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엘렌과 보내는 시간을 꽤나 중요시여기는 아렌을 방해하는 것은 에드워드로서도 꽤나 가슴 떨리는 일이지만, 집사는 때로 주인을 위해 불구덩이에도 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비장한 각오를 가슴에 품은 에드워드가 공손히 내미는 봉투를 받아든 아렌이 내용물을 꺼냈다.
“그렇군. 너희 선에서 대할 사람이 아니긴 하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이에 쓰인 방문자의 이름을 확인한 아렌이 고개를 끄덕였고, 에드워드는 목숨의 위기를 넘겼다.
“뭐야아?”
어느덧 다가온 엘렌이 아렌의 다리를 붙잡으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은 다섯 살의 어린아이인 엘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해 보였고, 그중에서도 아렌이 제일 신기했던 것이다.
아렌의 행동 하나하나에 귀엽게 반응하는 엘렌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아렌이 종이를 엘렌에게 건넸다.
“……뭐라고 읽는지 모르겠어어.”
희희낙락하던 엘렌이 글자를 읽지 못해 시무룩해지자 아렌이 웃었다.
“그럼 같이 가 보겠느냐? 엘렌. 손님이 왔다는구나.”
“좋아아.”
시무룩해진 것도 잠시 환하게 웃는 엘렌을 안아들은 아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꽤나 빨리 만나는군.”
“뭐가아?”
“아무것도 아니다.”
“뭐야아!”
볼을 마구 잡아당기는 엘렌을 안고서 아렌은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