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백작가의 위상에 걸맞은 고풍스런 응접실에 선남선녀가 마주앉아 있으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쳐야 하건만, 모두는 침을 삼키며 긴장을 숨기지 않았다.
예기를 꺾지 않은 채 응접실의 각 방향에서 아렌을 포위하고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었지만, 정작 아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자잘한 행동 하나에도 움찔거리는 가신들을 보면서 레티시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레티시아도 가신들의 행동이 과하지 않음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지금의 아렌의 명성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끝도 없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피테르라는 작은 무대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이후 아렌의 행보를 본다면 입이 벌어질 수준인 것이다.
단신으로 성을 무너트리는 것도 기함할 일인데, 최근에는 악마를 단독으로 토벌했다 해서 성인으로의 추존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성을 무너트리는 과정에 죽어나간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작금의 제국에서 아렌 이상의 살인마를 찾아보기 힘들었으니, 가신들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아렌을 겪어본 레티시아는 아렌이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른다거나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공포에 과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비록 상대가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가문의 명예와 안전을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서든 백작가의 사람들이었다.
“충직한 하인들을 뒀구나.”
“…… 그런가요?”
담담한 목소리에도 흠칫 거리는 가신들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레티시아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아렌 공자. 사실 시간은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들려온 소식들이 아렌 공자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이 느끼게 해줘요.”
“모두가 같은 시간 속을 사는 건 아니지.”
차를 들어 목을 축인 아렌이 말을 이었다.
“하인들이 나를 반기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 본론부터 이야기하겠다.”
탁.
찻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한 아렌의 모습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완전무장한 기사들이 슬며시 오러를 끌어올렸고, 마법사들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주문을 준비했으며 레티시아도 덩달아 긴장했다.
이들이 이렇게 아렌을 경계하는 이유는 하나.
서든 백작가는 아직 노선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대로 마법에만 열중하며 중립을 지킨 서든 백작가의 풍조는 당대에도 변하지 않았고, 귀족 회의에는 참가했었지만,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마르틴과 알코르는 딱히 서든 백작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고, 그 와중에 아렌이 거창한 존재감과 함께 방문했으니, 아렌의 악명과 합쳐져 강제로 합류하라고 협박하러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아렌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애초에 존재감을 드러낸 것도 다른 생각이 있어서였지만, 보이는 모습은 그래 보였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내려앉은 가운데 아렌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부르바스는 어디 있지?”
“…… 부르바스님 말인가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에 가신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레티시아는 얼굴을 굳혔다.
“여기 있는 건 맞나보군.”
그리고 아렌은 그런 레티시아의 표정을 보고 제대로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아렌의 말에 자신이 실수했음을 안 레티시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이내 표정을 가라앉혔다.
눈앞의 상대는 아렌 드 그라인드.
어떠한 짓을 한다고 해도 그를 속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원래는 조용히 찾아보려고 했다만.”
아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도무지 잡히지를 않더구나. 이 도시 전체를 훑었는데도 잡히지가 않았어. 마법으로 뭔가 조치를 취한 거겠지. 확실히 마법은 오묘한 맛이 있어.”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은 경지가 높은 몇몇과 레티시아뿐이었다.
“…… 도시 전체를 감각권 안에 놓고 있다는 건가요? 지금?”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아렌의 모습에 방안의 모두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서든 백작의 성이 있는 도시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지만 명색이 백작령의 주도다.
몇 만은 되는 사람이 오가는 도시 전체를 감각권 안에 놓고 있다는 아렌의 말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것이다.
“몇 군데 어색한 곳을 찾았다만 함부로 건드리기도 뭐하더군. 일단 나는 방문자이니 말이다.”
마법사들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의 명가답게 당연히 백작성은 마법적인 조치를 은밀히 취해놓은 곳이 제법 있었는데, 아렌의 말은 그것을 지적한 것이니, 기밀이 세어나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 그 점은 고맙군요.”
“아가씨!”
레티시아의 말에 몇몇의 가신들이 얼굴을 붉혔지만, 레티시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렌의 손속을 알고 있는 레티시아는 아렌이 자신과의 인연을 생각해 배려해 준 것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면 명예를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담담한 표정으로 아렌이 물었다.
“부르바스는 어디 있지?”
* * *
“…… 말해줄 수 없어요.”
“그런가?”
입술을 짓이기며 말하는 레티시아의 모습에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가문의 명예라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일대의 중재자로 명성이 자자한 서든 백작가가 보호하고 있는 손님을 내놓는 다는 것은 그동안 쌓아온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일.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귀족은 절대로 하지 않는 선택일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감을 과시하며 압박을 한 것도 혹시라도 쉽게 갈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찻잔을 들어 올린 아렌의 모습에 물러날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두의 안색이 조금은 펴지던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모두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럼 내가 알아서 뒤져보도록 하겠다. 이렇게 되어서 유감이군. 아. 부수적인 피해가 조금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미리 사과하지.”
“…… 아렌 공자!”
레티시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 아렌은 서든 백작가의 명예에 정면으로 먹칠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렌이 과격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경우가 바른 사람인 것을 아는 레티시아는 전혀 뜻밖의 반응에 순간 말을 잊었다.
“건방진!”
그리고 그 순간 아렌의 말에 부들거리던 중년의 기사가 빛살같이 검을 뽑아들었다.
넘실거리는 오러와 쾌속한 솜씨는 최상급 익스퍼트의 그것이었고, 아렌의 배후를 노리고 뽑아든 검은 모두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어서 아렌의 몸이 베이는 환영마저 보이는 듯 했다.
콰지직!
“끄아아악!”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사의 검과 팔 다리가 끔찍한 소리와 함께 꼬챙이처럼 꼬여들더니, 조각나 뼈가 살갗을 찢고 튀어나왔고, 선혈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쿵!
완전무장한 기사의 몸은 꽤나 무거운 것이어서 팔다리가 엉망으로 변해버린 기사의 몸이 바닥에 떨어진 소리는 응접실을 크게 울릴 정도였다.
“이런!”
“로이!”
차차차창!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아렌이었지만, 모두가 그의 짓임을 알아차렸고, 무기를 뽑아들었다.
웅!
마법사들이 반사적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마나가 요동치며 갖가지 형상의 공격마법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던 그때.
“멈춰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레티시아가 소리쳤고, 일순 모두의 움직임이 덜컥하고 멈췄다.
“운이 좋았군.”
“…… 아렌 공자도 멈춰줘요. 제발. 과거의 인연을 봐서라도.”
오른손을 까딱거리는 아렌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레티시아가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끄으으으 …….”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이 돌아간 기사가 고통에 못 이겨서 꿈틀거렸고, 레티시아가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다.
“응급처치를 하고 신전으로 옮겨요!”
“아. 알겠습니다!”
젊은 기사 둘이 상비하고 있는 포션을 꺼내 기사의 입에 물리고 조심히 몸을 들어올렸다.
“아아악!”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느껴지는지 처절한 비명이 울렸지만, 두 기사는 급한 걸음으로 응접실 밖으로 나섰고, 문 너머로 신음이 울렸다.
“이런 피해를 말하는 거다.”
“…… 체면을 살려줘서 고맙군요.”
“알아주니 나도 기쁘군.”
레티시아의 말에 화답하는 아렌을 모두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일순간에 최상급의 기사를 불구로 만들어버렸으니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건만 도리어 사의를 표하다니. 수족들은 레티시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레티시아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을 배려해서 나름 손속을 아껴줬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평소의 아렌을 생각하면 기사는 덤벼들기 무섭게 끔찍한 모양의 고깃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제가 아는 아렌 공자라면 이런 무리한 일을 하지는 않을 텐데요.”
아직까지도 비명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고, 그 사이에 뿜어진 선혈 덕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을 느끼며 레티시아가 지친 표정으로 물었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아렌을 보면서 레티시아도 표정을 굳혔다.
“협박인가요?”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다.”
하얗게 질린 레티시아의 얼굴을 보면서 아렌이 말을 이었다.
“제도로 향하는 군대의 수가 몇인지 알고 있나?”
“…… 그건.”
아렌이 자세를 바로하고 레티시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20만을 넘었지. 레티시아. 20만이다. 이 병력이 가볍게 일어날 수 있는 병력인가?”
아렌이 말하는 의미를 깨달은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그라인드와 메카니는 사활을 걸었어. 오로지 황제를 타도하기 위해서 말이야. 전쟁이 있을 거다. 수많은 인명이 사그라지겠지.”
담담한 말투였기에 더욱 더 소름이 끼쳤다.
“황제와 공안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 악마까지 소환할 정도면 선을 많이 넘었지. 그건 헬리오스에서도 보증하지 않았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니 또 어떤 기발한 방법으로 상대해올지 모르지. 당연히 수많은 희생이 일어날 거고. 일반적으로 생각해서는 그냥 황제한테 숙이고 사는 게 희생을 더 줄이는 일일지도 모르지. 한데 그렇게 사는 게 과연 사는 걸까?”
의자에 몸을 기댄 아렌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 혼자 몸을 빼는 것 정도야 상관없다. 알겠지만 나는 어디서도 잘 지낼 자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라인드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 거기에 황제는 그라인드의 혈족을 죽였어.”
아렌의 눈가에 붉은 빛이 넘실거렸다.
“거기에 악마소환으로 인해 희생된 영지민들도 있지. 복수는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다. 자. 그럼 물어보지.”
아렌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수단방법을 가릴 처지인가? 수십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황제에게로 가는 길을 열어주려는 판인데?”
모두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몇몇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절실히 깨달았고, 아렌이 어떤 각오로 이 자리에 와 있는지 확실히 확인한 것이다.
어떠한 인연도 수십만의 목숨과 견줄 수는 없으니, 자칫 잘못하면 오늘이 바로 서든 백작가가 멸망하는 날일지도 몰랐다.
“다시 한 번 물어보지. 레티시아.”
아렌의 몸에서 광폭한 기운이 스멀스멀 솟아올랐고, 그 강대한 기운에 모두가 몸을 떨었다.
“부르바스는 어디 있지?”
“……그만.”
“…….”
“그만하게.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말게나.”
응접실 너머에서 힘 빠진 목소리와 함께 부르바스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