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Youngest Son Is a Player RAW novel - Chapter 124
제124화
배도현의 결승전 상대는 중국 플레이어인 왕천명으로 정해졌다.
왕천명은 C조 최후 생존자로 리진청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 레벨 랭커였다.
현실에서도 10년 넘게 검을 수련해온 검도의 고수로 배도현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실력의 격차를 보여주며 토너먼트를 격파해왔다.
‘왕천명. 오랜만이네.’
배도현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는 인물 중 하나.
그도 그럴 것이 중국 플레이어 중 최후까지 솔로 플레이를 지향했던 랭커였기 때문이다.
랭킹도 게임 초반부터 100위권 내를 항상 유지했고, 배도현이 사망했던 시기에도 최상위 랭커로 남아 있었던 이였다.
어떻게 보면 커넥트에 접속하고 교류하던 플레이어 중 가장 친하게 지냈던 부류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결승까지 올라올 줄 알았어.’
처음 대진표를 봤을 때부터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였다.
다른 플레이어들 중에도 나중에 최상위 랭커에 자리 잡을 이들이 많았지만, 현실에서 무술을 수련하고 고수라 불릴 만한 이는 몇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특성은 현시점엔 거의 최고라 부를 수 있는 [기검술(S-)]이었다.
검도의 고수가 기검술이란 특성까지 가지고 있으니 배도현이 없었다면 단연 우승을 차지했을 것이다.
실제로 왕천명은 전생의 커넥트 초반에는 1위 자리를 차지한 적도 있었던 정도의 실력자였다.
‘뭐, 칭찬은 여기까지 해두고.’
과거의 인연이 맞기는 했지만, 그건 십 년 넘게 부대끼며 쌓은 정으로 만들어진 것. 현재는 생판 남에 불과했다.
그리고 전생에도 그와의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결승전에 앞서 플레이어 대기실.
꾸욱.
악수한 손에서 악력이 느껴진다. 힘 싸움을 해보겠다는 건가?
“배도현 씨. 예선전은 아주 잘 봤습니다. 굉장히 뛰어난 실력이시더군요.”
꾸드득.
“네. 저도 왕천명 씨 시합은 재밌게 봤습니다. 검 솜씨가 상당하시던데요?”
꾸득.
맞잡은 두 손이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변해버렸다.
‘이 녀석은 뭐가 그리 맘에 안 들어서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걸까?’
배도현은 좀 더 힘을 줘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본 게임에 앞서서 너무 기를 죽이는 것도 재미없을 테니까.
“흡. 당신의 실력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품격을 느낄 수가 없더군요. 무릇 강자라면 스스로의 힘을 과시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배려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한 법.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건 또 무슨 참신한 소리란 말인가?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왕천명은 무협 소설의 애독자로서, 무림의 협의와 낭만을 커넥트에 전하겠다며 굉장히 낯간지러운 말을 팍팍 뱉어내기로 유명했다.
실력이라도 없으면 모르겠는데 하이랭커쯤 되니까 다들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받아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엔 아주 협객처럼 행동하고 다녔다.
그래서 딱히 가식적인 행동이나 말투를 좋아하지 않던 배도현과는 가끔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글쎄요. 저는 제가 강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요.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만.”
“그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억울하게 예선에서 떨어진 플레이어들을 대신해서 당신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러면서 악수한 손을 탁 쳐냈다. 보아하니 손이 좀 아팠던 모양이었다.
‘하여튼 오지랖은.’
속으로 혀를 찬 배도현이 왕천명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왕천명 씨 C조 합격자지요? C조에선 중국 플레이어들이 팀을 짜서 타국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고 합격 자리를 독차지했던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봤을 땐 그것도 그리 품격 있는 행동은 아닌 듯싶은데…?”
“그, 그건 순전히 전략에 따른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당신처럼 아무 생각 없이 플레이어들을 학살한 것이….”
“아, 당신 말처럼 약자를 배려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서 몇 배나 되는 머릿수로 밀어버린 겁니까?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떨어진 플레이어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왕천명 씨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왕천명은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억지로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큿.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플레이 방식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그만. 말싸움은 그만두지요. 무슨 책임을 어떻게 묻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으면 해보세요. 입 말고 실력으로 말이죠.”
배도현은 왕천명의 입을 막아버리고는 바로 결승전 무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근본이 나쁜 녀석은 아닌데, 시야가 너무 좁아. 이번에는 조금 빨리 그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야겠어.’
그렇게 된다면 꽤 쓸 만한 동료가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일단 좀 맞자.’
배도현이 짓궂은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결승전 중계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승승장구해온 배도현이 우승할 가능성이 높다는 건 대부분 인정하면서도, 어쩌면 하고 예상외의 결과를 기대하기도 했다.
[퍼스트 길드 아카데미 특별 입학시험 ‘쟁투’. 결승전 생중계 – CNT 스포츠]커넥트 자체 방송 채널엔 오늘도 수많은 이들이 방송을 시청 중이었다. 그리고 채팅창을 여러 개 운용 중임에도 터져나갈 정도로 많은 이들이 채팅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 우. 배. 어차피 우승은 배도현! 가자가자!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다. 왕천명 경기 못 봤냐? 솔직히 배도현 예선전 양민 학살 한 거 말곤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잖아.
└웃기는 소리. 실력 발휘할 필요도 없었던 거겠지. 1 대 1로 상대 자체가 안 되니까.
└한국 놈들 정신 승리 지리네. 16강부터 배도현 밑천 바닥났다는 거 딱 보면 모르냐? 고수들이랑 붙으니까 어찌저찌 버티다가 겨우 올라왔잖아.
└대진운이 좋았던 거지. 어떻게 실력자들만 쏙쏙 피해서 결승까지 올 수 있었을까? 솔직히 한국 놈들이 대진표 조작한 거 아닌지 조사해야 함.
└그러게. 우리 중국 플레이어들 중 아무나 만났으면 광탈했을 텐데. ㅋㅋㅋ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중국 놈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한국은 예전부터 지들끼리 정신 승리하기로 유명하지. 두고 보라고, 왕천명 님이 배도현을 개작살 내버릴 테니까. 애초에 소국이 대국을 이기려 드는 게 문제라니까.
└윗분 선 넘었습니다. 21세기에 대국 소국이라니.
└틀린 말도 아닌데 왜 그러심? 중국이 큰 나라지 그럼 한국이 큰 나라임?
└(신고된 글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신고된 글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채팅창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지나친 욕설이나 인신공격은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CNT 스포츠 채널은 방송 심의 규정 및 채팅창 악성 댓글에 관한 규정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제재로 인해 접속을 차단당할 수 있다는 점, 미리 양해의 말씀 드립니다. 그럼 계속해서 분석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위원님, 그러면 이번 결승전에서 배도현 선수는 어떤 전략을 들고 나오리라 생각하십니까?”
“네, 우리 배도현 선수는 워낙 다양한 병기를 수준 이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의 폭이 넓습니다. 그래서 예상하기가 참 어렵긴 한데요. 왕천명 선수가 장검술이 장점이기 때문에 그보다 리치가 긴 창 종류의 무기나 원거리 무기류를 선택하면 보다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승산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시는지…?”
“전문가들 중에는 반반, 혹은 6:4 정도로 배도현 선수가 유리하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론 9:1 이상으로 배도현 선수의 승리를 예상합니다.”
“혹시 이유를 물어도 괜찮을까요?”
해설위원이 머리를 살짝 긁적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음. 딱 봐도 포스가 다르지 않습니까? 배도현 선수는 굉장히 여유로운 반면, 왕천명 선수는 이를 악물고 눈에서 불똥이 튈 것 같습니다. 결승전이라고 하지만 챔피언과 도전자라는 느낌이 가득하지요.”
“네, 그렇긴 합니다. 그럼 혹시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
“격투기 인생을 걸어온 제 감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배도현이 무조건 이겼다. 이런 강렬한 직감이 딱 오고 있단 얘기죠.”
“아… 네. 그렇군요. 그럼 다음으로….”
박진환 캐스터는 아무래도 다음 방송에는 이 해설자를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 * *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왕천명은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가죽갑옷 위에 중국 무협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전통 복장을 겹쳐 입고 있었다.
‘콘셉이 참 한결같네.’
사실 콘셉이라고 하기도 뭐한 게, 현실에서도 화산파에서 검을 수련했단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 복장은 약간 어설프긴 해도 현실 화산파의 수련 복장이었으니.
겉멋만 들었다고 하기엔 실력도 뛰어나서 중국인들 사이에선 이미 굉장한 팬덤이 생겨났단 소문도 돌고 있었다.
일단 장검을 뽑아 들고 화산파 복장을 갖춘 왕천명의 모습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였다.
“오늘 여기서 당신을 꺾고, 화산의 검이 세계제일임을 증명하겠습니다!”
‘아, XX.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아.’
무협지나 영화를 볼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직접 눈앞에서 저런 소리를 해버리니 항마력이 떨어졌다.
배도현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인벤토리에서 왕천명의 것과 비슷한 장검을 꺼내 들었다.
‘나도 질 수 없지. 이런 싸움은 기세에서 밀리는 쪽이 지는 거니까.’
왕천명을 보통의 방식으로 꺾어서는 녀석에게 충격을 줄 수 없었다. 콘셉충에겐 콘셉으로 대항하는 수밖에.
“미안하지만 왕천명 씨, 당신과 평범하게 대결하기엔 서로간의 실력 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촤악.
배도현이 장검을 대련장 바닥에 박아 넣고 자신을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그러니까, 저는 이번 결승전 동안 이 원을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만약 이곳에서 한 발이라도 벗어난다면 패배를 인정하도록 하지요.”
마치 무림에서 고수가 하수를 상대로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처럼, 배도현은 스스로 페널티를 걸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왕천명뿐만 아니라 이 경기를 시청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을 자극했다.
-미친. 진짜 자기가 절대 고수라도 된다고 착각하는 거야 뭐야!
-저런 건방진 XX. 이건 중국 플레이어 전체에 대한 모독이야!
└아니 그건 좀. 갑자기 왜 중국 전체로 이야기가….
└닥쳐, 건방진 한국 놈들. 고작 게임 레벨 좀 앞선다고 저런 꼬락서니라니! 이건 선 넘었다.
-차라리 잘됐네. 왕천명 저 건방진 놈 박살 내고 다음 커넥트 TO는 우리 중국에서 가져오자!
중국인들은 광분했고, 한국 측도 그리 고운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 왜 굳이? 그냥 이기면 안 됨? 저렇게 방심하다가 우리 TO 뺏기면 어쩌려고?
└진짜. 국가를 대표해서 나갔으면 아무리 사소한 경기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진짜 인성 X같네.
└저도 좀 불만이긴 한데, 그렇다고 국가대표는 아니지 않나요? 이거 아카데미 입학시험인데….
└몰라. 저러고 지면 나 진짜 배도현 찾아가서 멱살 잡는다! 왜 우리 추첨권 가지고 자기가 XX이야.
└진짜 가려고? 현실에서 배도현 만나면 엿 될 거 같은데. 미리 명복을 빌어줄게.
└같은 한국인이지만 좀 그렇네요. 배도현 씨가 우승하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무슨 권리로 그를 욕하는 건가요? 진짜 국가가 뭘 해준 것도 아니고, 혼자 힘으로 결승까지 간 건데요.
└윗님 말 동감. 우리는 반사 이익을 받을 뿐임. 배도현한테 추첨권 맡겨 놓은 것도 아니고 왜 이리 난리들임?
채팅창뿐만 아니라 각국의 중계진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저런 퍼포먼스를 해야 할 이유가 있냐는 말들이 많았다.
외부의 반응도 이런데 당사자인 왕천명은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래도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리석었군. 진심으로 박살내주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치는 왕천명은 제대로 열 받은 모양이었다.
‘음. 해달라는 대로 해줬는데 왜 화를 낼까? 약자에 대한 배려, 상대방에 대한 존중. 뭐가 문제지?’
배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마침내 결승전 시합이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